로맨스 판타지의 정석, 정원사는 힐링캐
녹색 머리카락.
금빛 눈동자.
뭐랄까.
숲 위에 떠 있는 태양 같은 이미지였다.
선이 가늘고 묘하게 야리야리해 보인다.
햇빛에 약하게 그을린 피부가 체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딱 봐도 정원사, 라고 쓰여 있는 것 같은 차림새.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소개해주신다는 분이···.”
“음.”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생글생글 웃는 눈동자로 카이델을 바라보았다.
“왜 부르십니까, 폐하.”
오우.
엄청 불경한 말투다.
최소한 이 성안에서 카이델에게 저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대에게 아샤에 대한 것을 조금 부탁하고 싶다.”
“아샤?”
남자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웃고 있는 눈동자는 보드라운 꽃잎과도 같았다.
태양처럼 강렬한 색인데도.
나는 경계하는 것도 잊고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아샤님.”
“아, 안녕···하세요.”
나는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카이델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뭘 부탁한다는 건가요?”
“슈피···, 아니, 슈펠리에.
아샤는 지금 여러모로 마음이 좋지 않은 상황이네.
그대의 정원이 아샤를 치유해줄 수 있도록 아샤에게 자주 정원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슈피.
건가요.
아무래도 두 사람은 굉장히 가까운 사이인 모양이다.
하지만 왕과 일개 정원사가 가까운 사이일 수가 있나?
나는 남자의 얼굴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묘한 따스함과 온화함이 느껴지는 얼굴 생김새긴 하지만,
귀족의 자제로 보이지는 않는다.
애초에 귀족의 자제라면 여기서 정원사를 하고 있을 리도 없지만.
“아샤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정원을 찾아주세요.
제 오두막은 본궁과 정원 사이에 있는 작은 집입니다.”
슈피가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다소 허름한 오두막 하나가 있었다.
응.
절대 아니야.
혹시라도 이 세계에서는 귀족의 자제가 정원사를 맡는 건가 따위의 생각을 했지만,
절대 아니다.
귀족의 자제가 저런 데서 생활할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아마 카이델과 다른 연결고리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가일처럼.
생각을 정리한 나는 슬쩍 몸을 뒤로 뺐다.
얼굴에 희미한 두려움을 새긴 채.
처음 만난 상대를 덥석 신용해서야 지금까지의 캐릭터가 붕괴한다.
물론 치유계 캐릭터의 경우 처음 만나자마자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줘서
묘한 친밀감을 품게 하는 경우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캐릭터마다 다른 성격으로 대하기 귀찮다.
나는 두려움을 품은 눈동자로 카이델을 바라보았다.
“슈펠리에는 절대 그대를 마녀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남자는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는 자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하.
그런걸로 믿을 수 있을 정도면 세상에 겁많은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뭐, 그래도 최소한 믿는 시늉이라도 해줘야겠지.
나는 쭈뼛거리며 슈펠리에를 바라보았다.
“···.”
슈펠리에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의 색을 품은 눈동자가 나를 탐색한다.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게 아닌가 싶은 눈동자는 두 번째다.
카이델과 이 남자.
방심해서는 안 될···.
“아샤님의 마음에는 상처가 많아 보이네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두려웠다.
“아샤님은···, 보이는 것과 달리 연약하며 또한 강인한 분이시군요.”
···.
다르다.
나는 강하지 않다.
나는 약하다.
나는···.
“두려워하지 마세요, 아샤님.
모든 것이 당신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슈펠리에는 내게 생글 웃어 보였다.
카이델에게 말할 때의 묘하게 불경한 태도와는 전혀 다른
어딘지 부드러우면서도 따스한 태도다.
이런 캐릭터는 감이 좋다.
방금 나에 대해서 얼핏 이라도 맞힌 것처럼.
조심해야 한다.
나는 쭈뼛거리며 카이델의 옆으로 조금 더 붙었다.
카이델은 자신에게 의지한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난감하면서도 기쁜 눈치였다.
“오늘 당장 친해지라는 것은 아니다.
아샤, 그대가 정원을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 저 남자를 찾게.
그는 그대를 위해 가장 적합한 정원을 보도록 해줄 것이네.”
카이델이 부드럽게 웃었다.
슈펠리에는 그런 카이델을 보고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역시.
아마 슈펠리에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에 대한 카이델의 마음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이 남자를 되돌려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카이델은 그런 나의 반응에 난감한 듯 슈펠리에에게 눈짓을 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폐하.
다음에는 최소한 미리 언질이라도 주세요.
정원을 손질하다 와서 손님을 맞이할 몰골이 아니잖습니까.”
“음.
미안하군.”
슈펠리에는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보인 후 떠나갔다.
카이델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군.
그대를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직 다른 사람은 조금 무섭습니다.
폐하나 기사님이 아니면 아직은···.”
“기사님?
아아, 로이스터 경인가.
그는 그대에게 잘 대해주고 있는가?”
···.
눈빛이 묘하다.
이건, 시험하는 걸까.
카이델의 성격상 잘못 대답하면 분명 또 의심병이 도질 거다.
어떻게 대답할까.
“기사님께선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기사님이 음식을 나르고 하는 건 제가 잘 모르긴 해도 아마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일일 텐데
폐하의 명이기 때문인지 불평 한마디 안 하십니다.
저는 감사하지만, 기사님께는 좀 죄송하네요.”
카이델의 눈동자가 내 눈동자를 살폈다.
하지만 내게 찔릴 것은 없다.
사실은 사실이다.
내가 무슨 귀족 영애도 아니고 그냥 일반 평민일 뿐인데···.
그런 여자의 수발을 들라니 대부분의 기사는 자존심 상한다며 왕에게 읍소할 일이다.
그러나 테베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물론 나를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나를 카이델의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베는 그런 것에 둔해 보이지만 의외로 눈치가 빠르다.
특히 자신에게 중요한 인물에 관해서는.
카이델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가 내 곁에 있으려 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저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성정.
그것이 내가 파악한 테베라는 남자다.
즉, 지금 내가 테베와의 시시한 일상에 힘을 쓰는 이유는 하나다.
여차할 때 필요하다.
테베가 카이델을 등지고 나를 선택할 이유가.
여주인공이라는 속성은 내게 호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뿐이다.
그 마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나도 모른다.
카이델의 경우는 나라나 백성에게 쏟던 모든 집착을 내게 돌렸다.
그래서 썩 어렵지 않았다.
라이안은 처음부터 자신이 신의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여성에게 면역이 없었다.
그래서 아주 조금만 흔들었을 뿐인데도 그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테베는 다르다.
테베는 그렇게 쉽게 내게 고백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게 테베를 진 남주인공으로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가.
그는 좋은 기사지.
그에게는 나도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네.”
테베는 카이델을 저버릴 수 없다.
지난번 배드 엔딩롤에서 봤었던 것처럼.
완전히 무너져버린 라이안과 달리 테베는 의연했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그 마음속이 어떻건 테베는 티를 내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내가 카이델의 첫사랑이기 때문에.
나는 엷게 웃고는 카이델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카이델은 아쉽다는 듯 벌어진 간격을 바라보고 있었다.
*********
정원이라.
테베랑 가면 안 되겠지.
슬슬 테베와의 시간에도 뭔가 변화를 주고 싶은데.
밖으로 나간다고 하면 카이델이 의심스럽게 볼 테고···.
카이델이랑 같이 나가면 테베랑 시간을 보낼 수가 없는데.
으음.
고민하는 내 눈에 넓은 풀밭이 보였다.
풀밭···.
말···.
아.
“저기, 로이스터 경.”
“말씀하십시오, 아샤님.”
테베가 엷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으음.
그, 그렇게 쳐다보면 좀 부끄러운데.
벌써 꽤 오랫동안 같이 있는데도 테베의 얼굴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종종 저렇게 부드러운 표정을 보일 때면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을 때도 있다.
카이델의 앞에서는 긴장돼서 그런가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얼굴이 니 취향이라서 그런 거 아냐?”
연신이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
이게 지금 테베 앞이라 못 건드리는 걸 알아서 막 나가네.
나는 테베에게 엷게 웃어 보이며 어깨에 내려앉은 연신이를 손으로 폭 덮어 감쌌다.
“잠시만요.”
나는 뒤를 돌아 욕실 쪽으로 향했다.
문을 닫고 테베가 따라오는 기색이 없는 걸 확인한 나는
연신이를 포획한 손을 입가로 가져왔다.
“죽는다?”
“···아이, 난 그냥 농담한 거지···.”
“농담도 한 번이 농담이지 이게 지금 몇 번째냐? 응?”
“미, 미안.”
나는 연신이를 쥔 손에 살짝 힘을 넣었다.
콱 쥐면 짜부라질 게 자꾸 까불어.
흠흠.
나는 연신이를 쥔 손에 힘을 풀었다.
작은 새가 포로로 날아오른다.
나는 연신이를 내버려 둔 채 테베에게로 돌아갔다.
“이야기하다가 죄송해요.”
“아닙니다, 아샤님.”
···.
뭐지, 저 쑥스러운 듯한 미소.
···.
아.
나 화장실 갔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뭐.
상관은 없는데···.
뭔가 좀 민망하긴 하네.
“흠흠.
다른 게 아니라 혹시 제가 승마를 어설프게나마 배운 적이 있는데,
말을 타볼 순 없을까요?
말에 타서 달리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좀 개일 것 같아서요.
얹혀 있는 주제에 이런 말 할 처지가 아닌 건 알지만···.”
나는 최대한 힘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당연히, 연기다.
이렇게 하면 테베는 절대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역시나 테베는 난감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승마는 나도 저번에 해봤지만, 꽤 위험하다.
말이라는 것이 항상 말을 잘 듣는 건 아니니까.
그나마 카이델의 말이니까 그 정도였던 거지, 다른 말은 더 거칠지도 모른다.
물론 왕성의 말이니까 나름대로 다 준마 이상은 될 테지만···.
혹시라도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내 목 같은 건 그대로 꺾일 거다.
뭐, 되살아나긴 하겠지만.
그걸 모르는 테베로서는 난감한 부탁일 것이다.
나의 안전에 대해 보장을 할 수가 없으니까.
즉, 내 안전을 위해 아마도 테베가 동행할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테베와 함께 승마를 하게 될 것이고,
혹시라도 의심스러우면 카이델이 따라올 것이다.
카이델이 따라온 날은 조심하면 된다.
응.
“아샤님.
승마가 얼마나 위험한 활동인지는 이미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아샤님이 계시던 세계의 말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이 세계의 말은 꽤 난폭한 편입니다.
숙련된 기사들도 틈을 보이면 낙마하기 일쑤일 정도입니다.”
어우.
그 정도까지야···?
새삼 카멜의 위대함을 알게 된 것 같다.
나는 눈에 띄게 풀이 죽은 얼굴을 했다.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테베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제가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아샤님의 몸의 안전과 관계된 것이라···.
폐하께 말씀드린 후 허가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으음.
뭐, 카이델 공인인 편이 편하지.
나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내가 직접 부탁하는 게 낫지 않나?
어차피 카이델은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카멜을 소개해줬던 것도 카이델이고.
물론 그때는 내 손을 다치게 만든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였겠지만.
하지만 이내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뭐, 지금은 내가 카이델과 너무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테베한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다.
내가 카이델과 가깝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테베의 고백은 점점 먼 일이 될 것이다.
그런 건 곤란하다.
느긋하게 가자고 마음먹긴 했지만, 굳이 안 돌아가도 될 길을 돌아갈 필요는 없으니까.
“잘 부탁드려요, 로이스터 경.”
나는 살며시 테베의 팔에 손을 댔다.
테베가 흠칫 놀라며 몸을 굳혔다.
표정은 언제나와 다름없지만.
나는 엷게 웃었다.
이 한 수가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에 유리하게 작용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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