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의 정석, 반란을 일으키는 캐릭터의 정석은 바로 이런 것!
파란색과 녹색의 눈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
음.
부담스럽다.
“그대가 일하기엔 거리는 너무 위험하다.
그대의 머리카락을 보였다간 어찌 될 것인지 아직 모르는 것인가?
어쩌면 그대의 목숨까지도 위험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테로아 경에게도 큰 폐를 끼치게 될 것이네.”
생각 외로 카이델은 강하게 반대했다.
어째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나는 카이델과 거의 접점이 없었다.
만난 것도 처음 날 데려올 때랑 무도회에서 만난 것이 전부일 정도였다.
나에 대한 감정을 정리한 것도 아닐 테고···.
나한테 집착하기 시작하는 계기도 아직 없었는데.
뭐지.
그냥 내가 나가는 거 자체가 싫은 건가?
“폐하.
제발 부탁드려요.
저는 원래 세계에서도 부모에게 기대지 않고 저 혼자 살아갈 수 있도록 계속 노력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와서 계속 폐하께 기대고만 있는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어요.
게다가 지금은 폐하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계속 폐를 끼칠 수도 없구요.
폐하의 손님인 제가 궁에서 일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하지만 테로아 경은 폐하께서 믿으시니까 성에 들이신 것이지요?”
그동안 다소 모자라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따박따박 따지고 들었다.
깊숙이 파고들자면 결국 나는 자립을 할 준비를 한다는 소리가 된다.
그 말인즉 카이델의 곁에서 떠나겠다는 뜻.
그걸 애매하게 건드리지 않고 이야기한다.
카이델이라면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지금의 카이델이라면.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모르는 척을 해야 한다.
그걸 알면서 말하는 걸 알면 절대 나를 놔주지 않을 테니까.
“테로아 경이라면 제가 검은 머리라는 것을 아는 분이시고,
동시에 제가 마녀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아는 분이십···.
···아, 아시죠?”
조아쓰.
멍청한 면도 보여 줘야 안심을 하지.
어차피 이 성을 나갈 생각은 못 할 것이다.
결국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라고.
“네, 데바인 경에게 들었습니다.”
엥.
경?
데바인 경?
데바인이 왜 경이야?
경이라는 칭호는 귀족에게만 붙는 거 아니었나?
기사라던가 귀족이라던가···.
왜 데바인에게 붙은 거지?
···.
아니지, 정신 차리자.
지금은 데바인이 문제가 아니다.
“들으셨죠?
게다가 저를 고용해주실 여유도 있고, 일손도 부족···.
···.
하신가요?”
다시 테리를 보며 물었다.
테리는 그런 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일손은 언제나 부족하지요.”
“그쵸!
들으셨죠, 폐하?
제가 일하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요!”
뭐, 반란군이지만.
내가 생각한 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역적.
그는 아마도 이 나라 왕실과 관련된 핏줄일 것이다.
여기 와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본 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적은 수의 사람들을 본 것도 아니다.
내가 본 사람 중에 하얀 머리카락은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얼마 전 솔라와 함께 나갔을 때 로브를 쓴 걸 봐도 아마 확실할 거다.
저 하얀 머리카락은 왕가의 일원이라는 증거 같은 것일 터다.
“그러니 제발 허락해주세요, 폐하.”
입으로는 애원하면서 머리로는 생각을 이어간다.
그렇게 생각하면 테리가 묘한 태도도 이해가 간다.
분명 왕실은 테리에게 있어서 좋은 장사 상대일 것이다.
그런데 카이델을 볼 때마다 그 눈동자가 묘했다.
불꽃이 튀거나 어딘지 가식적인 얼굴을 하거나.
예상컨대 보통 판타지의 흐름대로면···.
아마 테리의 아버지는 선왕보다 더 높은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솔라처럼 선왕의 동생이었거나.
어느 쪽이건 선왕에게는 정적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왕가에서 그렇듯.
그리고 선왕은 모종의 방법으로 테리의 아버지가 가진 계승권을 박탈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죽이는 것.
암살이건 기습이건 뭘 했건 간에 선왕은 테리의 아버지를 죽였다.
그렇다면 선왕은 불씨를 남겨뒀을까?
절대 아니다.
설령 그가 죽인 게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이 죽였다고 치자.
그렇다면 복수의 칼날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틀림없이 선왕을 향하게 된다.
테리의 아버지가 죽은 시점에서 선왕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몰살.
“폐하···.”
“···으음.”
카이델은 불쾌한 표정으로 나와 테리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은 끽해야 두세 시간.
그 시간 안에 내 마음이 테리에게 향했을 리 없다.
물론 본인은 내게 한눈에 반했지만, 카이델은 자신의 감정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을 터였다.
뭐, 하여튼.
테리는 그 속에서 살아남았다.
클래식한 전개로 간다면 역시 집안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하인이나 하녀.
어쩌면 유모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 사람이 테리를 빼돌렸다.
테리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빼앗겼다.
이름도, 가족도, 돈도, 지위도, 명예도.
그 모든 것을 선왕에게 빼앗겼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어떤 목표를 가지게 될까.
뻔하다.
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왕위를 찬탈하거나, 나라를 멸망시키거나.
내가 지금까지 본 테리에게 야망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잘 숨겼다면 잘 숨겼겠지만···.
이건 그냥 내 감인데 아마 그의 목적인 나라의 멸망이지 않을까?
그 분노에 이글거리던 눈동자를 생각해보면.
“폐하···.”
“···알겠네.
그대의 자유는 그대에게 있으니.
내가 이 이상 그대를 막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겠지.
다만 그대 혼자서 성을 나갈 순 없네.”
카이델은 생각에 잠겼다.
뭐지.
누군가에게 날 맡기려는 건가.
···.
뭐지.
불길한데.
“로이스터 경을 불러오게.”
아.
어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을까.
뭐 씹은 얼굴을 애써 감추며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종은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베와 함께 돌아왔다.
“로이스터 경.
그대에게 부탁할 일이 있네.”
테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예를 갖춘 채 카이델의 명령을 기다렸다.
음···.
아주 조금 마음이 아프다.
왜지.
왜일까.
지금까지 공략한 사람만 다섯 명인데.
굳이 테베에게서 왜 이런 감정이 느껴지는 걸까.
···.
하긴.
최후가 좀 그랬지.
엔딩에서 나 때문에 죽은 남주인공 후보는 둘.
라이안은 내가 찾아가지 않는 이상 나랑 마주칠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테베는 내가 카이델의 옆에 있는 이상 종종 마주치게 된다.
아무래도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지.
음···.
“아샤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겠지?
그대도 그 날, 같이 있었으니까.”
“네, 폐하.
지금은 폐하의 손님으로서 이 왕성에 머물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으음.
그녀가 테로아 경의 상단에서 일하고 싶어 하네.
하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을 생각해보면 그녀 혼자 내보내기엔 아무래도 불안한 감이 있군.”
카이델의 말이 끝나자마자 테베는 머리를 깊게 숙였다.
이미 알아챈 것이다.
카이델이 뭘 부탁할지.
“그대가 아샤를 호위해주었으면 하네.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는가?”
테베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기분은, 조금 알 것 같다.
주군의 여인에게 사랑을 품었다.
그에게 있어 주군은 목숨과도 같은 존재.
그런 존재의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사랑을 품는다는 건 용서되지 않을 감정이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나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러니 안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마음도 점점 흐려질 것이라고.
그러나 만나버렸다.
다시.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하지만, 괜찮다.
이번에는.
절대 그는 죽지 않는다.
“와, 멋진 기사님이시네요!
저 때문에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싫으시면 싫다고 말씀해주세요!
저는 혼자 나가도 괜찮으니까요.”
웩.
이 마음 침울한 와중에도 저런 대사는 뱃속을 울렁이게 만든다.
“아닙니다.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테베는 그렇게 카이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발생 된 것이 지금 이 상황.
“이렇게 하면 될까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아까부터 죽을 것 같다.
두 사람은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서로의 존재는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하며.
부담스럽다.
죽겠다.
이런 느낌은 맨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으으으으으으.
“잘 하셨습니다, 아샤님. 손재주가 나쁘다고 하시더니 아주 좋으신데요.”
···.
이게?
나는 분명 장미꽃처럼 생긴 꽃의 도안을 받았다.
초보자에겐 너무 어려운 자수라고 했더니 테리는
“이게 우리 상단에서 제일 쉬운 자수입니다.”
라고 했다.
뭐라고 하겠나.
얌전히 자수를 놨지.
만화 캐릭터처럼 손이 엉망이 되진 않았지만 내 괴멸적인 손재주는 어디 가지 않았다.
분명 도안은 장미였는데 출몰한 것은 어째서인지 파이X였다.
그, 왜.
불꽃 괴물.
이렇게 엉망인데 좋다니.
내 마음을 표정으로 나타내라면 이게 뭔 개소리냐는 얼굴로 테리를 쳐다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내게서 시선이 떨어졌다는 게 기뻐 나는 웃었다.
“정말요?”
“네.
당분간은 여기서 계속 자수연습을 하도록 하죠.”
아.
그런 의도구나.
칭찬해서 떠받들어주는 척하면서 이 방에 가둬놓을 심산이다.
하긴.
글을 읽을 줄 아는 것도 아닌데 나가봤자 할 일이라고는 접객 정도.
하지만 물건을 팔려고 해도 글자를 읽을 수 있어야 팔 테니···.
그럼 힘을 쓰는 일이나 몸을 쓰는 일 정도일 텐데.
둘 다 내가 하기엔 내가 봐도 좀 그렇다.
내 콤플렉스인 마른 몸이 원망스럽다.
“네!
저, 열심히 할게요!”
그래도 모르는 척 반기는 척 웃었다.
어차피 내 진짜 목적은 일하는 게 아니다.
테로아와의 접점을 만드는 거지.
오히려 일도 안 하고 테로아와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야.
내게는 바라던 바다.
문제는···.
“···.”
테베가 열심히 감시하고 있다는 것 정도.
나랑 이야기 한 다음에 테베를 남기더니···.
아무래도 나와 테리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은 듯하다.
망할.
기사를 그런 데다 써먹지 말란 말이야···.
“그, 기사님.”
“로이스터라고 불러주십시오, 아샤님.”
···.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그, 로이스터님.
거기 서 계시면 힘드시지 않으세요?
저 여기 데려다주셨으니 다른 일 하다 오셔도···.”
“괜찮습니다.”
···.
어우.
단호박.
미치겠네.
이래서야 뭐 작업을 걸래야 걸 수도 없다.
저 남자, 저래 봬도 꽤 예민하다.
게다가 내 일이라면 더더욱.
내가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테리를 꼬시려 한다는 걸 알면 어찌 될까.
으으.
생각하기도 싫다.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저 때문에 기사님···.”
어우.
눈빛 무서운 거 봐.
“이 아니라, 그, 로이스터님께서 일도 못하고 여기 와 계신 거 잖아요.
그것도 죄송한데 그렇게 계속 서 계시면···.
제가 너무 죄송할 것 같아요.”
앉으라는 이야기는 안 한다.
내 사무실도 아닌데.
테리가 어떤 생각으로 내 요청을 받아들였는지는 잘 모른다.
예측하기로는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하나.
카이델이 내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이용해 일을 벌일 생각.
즉, 나를 이용해서 카이델에게 뭔가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의 친밀도를 올려두는 것이 좋겠지.
둘.
나라는 사람을 더 가까이 두고 보고 싶어서.
즉, 이성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내 요청을 받아들였을 가능성.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테리도 테베가 여기 있으면 곤란할 것이다.
뭔가 도움을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직 멀었나.
“로이스터 경.
일단 일을 배우는 동안만이라도 다른 곳에서 대기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테베의 눈이 가늘어졌다.
녹색 눈에 살기라고 부를 만한 거친 기색이 가득 찬다.
무섭다.
왜 저렇게 경계하는 거지?
어쩌면 카이델도 알고 있나?
테로아의 정체를?
“누추하긴 하지만 일단 여기는 상단주의 방입니다.
누군가에게 새어나가선 안 될 문서도 매우 많지요.
아샤님께서는 글을 읽지 못하시니 그래도 괜찮지만···.
솔직히 말하면 로이스터 경께서 계시는 건 부담이 됩니다.”
오오.
잘한다.
테베의 눈동자가 조금 풀어졌다.
타당한 말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내가 폐를 끼치는 상황이다.
거기에 테베까지 더해져서야···.
“그럼 제가 따로 방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이 상단 건물의 손님용 방을 내어드리지요.
거기서 대기하시다가 아샤님이 성으로 돌아가실 때 다시 오시는 건 어떠실지요.”
“하지만···.
저는 아샤님의 안전을 지켜야 할 호위입니다.
아샤님의 곁에서 떨어질 수는···.”
으으.
딱딱한 남자 같으니.
FM도 이런 FM이 없다.
“그럼 일단 오늘은 지켜보시고 내일은 폐하께 여쭈신 후 그렇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리고 저도 상인 나부랭이입니다.
몸을 지킬 정도의 무술은 몸에 익히고 있으니 아샤님의 안전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상단 건물 안에서는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겠습니다.”
능글맞은 테리의 말에 결국 테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대단해.
나는 경탄의 눈으로 테리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번엔 이 도안으로 수를 놓아보시지요.”
아.
지금 명백하게 피했다.
이제 조금 테리의 성격을 알 것 같다.
테리는···.
- 작가의말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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