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의 정석, 사고의 끝에는 항상 키스신이 있다
“···.”
귀찮다.
매우 귀찮다.
매우매우매우 귀찮다.
뭐가 귀찮다면,
일단 저 눈빛이 귀찮다.
첫 만남에서 사람을 싸구려 취급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저런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대체 뭐 하자는 걸까.
차라리 저럴 거면 가까이 다가오면 좋겠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대체.
멀리서 얼쩡얼쩡.
“···.”
그런 주제에 마치 자기를 봐달라는 듯 존재감을 뿜뿜 뿜어낸다.
내 옆에 있는 슈피가 힐끔힐끔 솔라를 바라본다.
그리고 내게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온다.
···.
미안.
나도 쟤 왜 저러는지 몰라.
아니, 뭐.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다.
연애와 놀이에 익숙한 만큼 직감했겠지.
우리 첫 만남이 얼마나 최악이었는지.
그러니까 함부로 말을 걸지도 못하고 저렇게 주변에서 얼쩡거리기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아는 척하고 싶지 않다.
나는 슈피의 시선을 모른 척 눈앞의 모종에 집중했다.
“···전하.”
결국, 슈피는 앞치마에 손을 닦고 솔라에게 다가갔다.
솔라는 움찔하더니 고개를 들어 솔라를 바라보았다.
“음, 무슨 일입니까?”
“혹시 뭔가 불편하시거나 시키실 게 있으신가요?”
“아뇨.”
“그럼 정원에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있으신가요?”
“아뇨.”
“···.”
결국, 슈피는 말을 잃었다.
도움을 청하듯 나를 바라본다.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카이델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솔라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윽.”
솔라 같은 타입은 솔직히 말해서 너무 싫다.
자기가 잘생겼다는 걸 잘 아는 남자.
게다가 그걸 이용해 여자들을 꼬드기는 남자.
설령 난봉꾼 컨셉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어왔을 것이다.
저 잘난 얼굴과 지위를 이용해서.
그런 남자와 꽁냥거리는 척을 한다니 솔직히 정말 싫다.
그래서 자꾸 미루게 된다.
“좀 받아주지그래?”
“···싫어.”
“왜?
뭐 하려고 쟤 만나려던 거 아냐?”
“···느끼해.”
“뭐?”
내 귓가에서 속닥거리고 있던 연신이가 황당하다는 듯 큰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내 입을 막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둘에게 들리지는 않았는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둘은 연신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한테 관심이 없다.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의 힘 싸움을 하고 있다.
···.
흠.
카이델이 그렇게 가깝게 여길 정도의 사람이면 솔라도 슈피를 예전부터 알았겠지?
저대로 둘이 제멋대로 싸워주면 좋을 텐데.
그럼 나에 대한 슈피의 마음에 뭔가 변화가 생길지도···.
“제가 여기 있으면 곤란합니까?”
솔라가 웃으며 도발한다.
붉은 눈동자가 번뜩인다.
으음.
조금 무섭다.
“네.”
슈피는 평소의 웃는 얼굴 없이 단언한다.
와.
단호박인가요.
저런 슈피의 모습은 처음 본다.
“뭐가 불편한가요?
하던 거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높은 지위이신 전하가 계신 것만으로도 계속 신경 쓰이고 위축되게 됩니다.
그러니 말씀하실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와.
불꽃 튄다.
평소 조용하던 슈피가 의외다.
나와의 시간을 방해받는 게 싫은 걸까?
흐음.
그렇다기에는 연신이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다.
그러면 원래 솔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까?
설마.
카이델과 친밀하다면 솔라도 분명···.
아니지.
오히려 반대려나.
슈피가 카이델을 지지하는 세력의 아들이었다면
솔라는 오히려 슈피에게 있어서 방해물, 혹은 정적일 수도 있겠네.
나는 안 보는 척하며 둘의 동향에 귀를 기울였다.
“···이럴 거야, 슈피 형?”
“말씀 조심하세요, 전하.
다른 사람의 앞입니다.”
···.
아니, 다 들리는데요.
속삭일 거면 제대로 하던가···.
저렇게 떨어져서 작게 이야기한다고 해봤자 나한텐 다 들리지, 이 사람들아.
“좀 있으면 안 돼?”
“네.”
“왜!”
“저도 아샤님도 불편합니다.”
“내가 뭐 했다고!”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불편하죠, 당연히.”
오호.
의외로 애 같은 면이 있네, 솔라.
마치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내놓으라며 떼를 부리는 어린 아이 같다.
···.
이 경우에 장난감은 난가?
끙.
기분이 좀 묘하네.
“그냥 보고만 있을게, 응?”
“안 돼요.”
“아, 형!”
솔라는 소리를 빽 지르려다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내 기색을 살핀다.
나는 모르는 척 흙을 토닥거렸다.
물론 벌써 5분째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 그럼 나도 정원 일 할래.”
“안 돼요.”
“왜!”
“전하의 손에 흙을 묻히면 제가 폐하께 혼납니다.”
“아샤 양은 하잖아.”
“···.”
오.
슈피의 말문이 막혔다.
거기를 찌르고 들어가면 슈피는 할 말이 없어진다.
처음에 내가 하겠다는 것도 말리긴 했지만
결국은 나를 이기지 못하고 시켜주고 있는 것도 슈피니까.
“나도.”
“안 됩니다.”
“왜!”
“전하는 왕족이시니까요.”
“그렇게 치면 슈피 형도···!”
텁.
슈피가 재빨리 솔라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슬쩍 나를 본다.
나는 무심의 마음으로 흙을 두드리고 있다.
물론 아까 그 자리다.
슈피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솔라의 입을 막은 손을 떼었다.
“전하.”
“왜, 왜, 요.”
“제 ···명은 말하지 않으시기로 약속하셨잖아요.”
“그랬···습니다.”
“약속은 지키셔야지요.”
“···네.”
흠.
저 능글맞은 남자가 형님 앞에서는 약하네.
카이델의 친구라서인가?
아니면 어릴 때부터 저런 관계였을까.
“그리고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일에 방해가 되니 가주세요.”
“···.”
뭔가 더 이야기하려는 듯 솔라가 입을 열었지만
이내 슈피의 단호한 눈빛에 가로막혔다.
그리고 뭔가 풀이 죽은 얼굴로 돌아갔다.
오.
이러니저러니 해도 슈피 말은 좀 듣는구나.
저렇게 강하게 나가는 거에 약한가?
“···.”
슈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나는 눈이 마주치기 전에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
보고 있었던 거 모르겠지?
나는 모종삽으로 옆을 파기 시작했다.
슈피는 조용히 내게 다가왔다.
“아샤님.”
“네?”
“혹시 전하와 만나신 적이 있으세요?”
···.
으음.
거짓말을 할까?
아니다.
아무리 속성의 힘 때문에 내게는 약하다고 해도,
너무 대놓고 거짓말을 하면 바로 알아챌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요.”
“밤···에요?
혹시 전하가···.”
아.
저 반응을 보아하니 슈피도 솔라의 이명을 아는 가 보다.
난세자.
난봉꾼 왕세자의 줄임말.
여자들은 난세자, 난세자 하면서도 솔라에게 대시 받는 걸 즐긴다.
그걸 마치 보석 자랑하듯 이야기한다.
솔직히 재수 없다.
“전하가?”
“···혹시 방으로 방문했다거나···.”
슈피의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려 하지만 쉽지 않은 듯 입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
카이델의 광기를 부추기려던 것이 의외로 슈피에게 들은 모양이다.
둘이 아는 사이였던 걸 몰랐으니, 뭐···.
게다가 솔라가 설마 다음날 바로 날 찾아올 줄은 몰랐으니까.
“아뇨, 방으로 간 건 저에요.”
나는 일부러 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애매하게.
상상의 여지를 줘야 한다.
예상대로 슈피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감정을 숨기지 않은 얼굴.
처음으로 보는 얼굴이었다.
“···전···, 하의 방에요···?”
“네.”
“왜···.”
“아···.”
나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얼버무리듯 웃었다.
“그런 것보다 이 모종, 뿌리가 좀 상한 것 같은데요?”
“···.”
슈피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내가 건넨 모종을 살폈다.
가녀린 몸에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손.
그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몇 주를 같이 지내며 그 마음은 커졌을 것이다.
그러나 슈피는 아마도 남들의 감정을, 생각을 읽는 능력을 가진 만큼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한 듯했다.
그런 남자가 지금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내보내고 있다.
금색 눈동자가 혼란으로 흔들린다.
녹색 머리카락이 파르르 떨린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슈피의 손에서 모종을 건네받았다.
그러면서 일부러 떨어뜨렸다.
“아.”
파삭.
모종에 달려있던 흙이 사방으로 튄다.
나는 놀란 척하며 몸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카이델이나 테베를 보며 느낀 거지만 검을 배운 사람들은 반사신경이 남달랐다.
내가 넘어지려 할 때마다 재빨리 나를 잡아줬었으니까.
비록 검은 잠깐 배웠다고 했지만 지금도 정원 일을 하는 만큼
슈피의 반사신경도 틀림없이 좋을 것이다.
아마도.
뭐, 안 좋으면 흙에서 좀 구르는 정도로 끝날 거고.
어느 쪽이건 뭔가 사건을 일으키기엔 충분할 거다.
“윽.”
슈피가 놀라 나를 붙잡았다.
하지만 쪼그려 앉아있던 자세에서 뒤로 넘어가는 나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그대로 흙 위로 쓰러졌다.
“아야야.”
다행히 흙이 부드러워 크게 아프진 않았다.
나는 꽉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앞에 태양이 보였다.
만약 이게 진짜 로판이었다면 지금 여주인공은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을 거다.
바로 앞에서 풍기는 향기로운 풀 내음.
고소한 흙의 냄새.
그리고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
가녀리고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어딘지 남자다움을 느끼게 하는 커다란 손.
누워있는 나와,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손과 무릎으로 자신을 지지한 채 내 위에 엎어져 있는 남자.
“···.”
슈피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당혹감도 혼란도 다 사라지고.
그저 내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에···.”
내가 입을 떼자 슈피의 몸이 움찔 떨렸다.
몸을 지탱하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흙에서 뿌드드득, 소리가 난다.
“산책하러 나갔다가 잠결에 방을 착각해서 들어갔었어요.”
슈피의 눈동자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봐 주었다.
새빨간 거짓말.
처음부터 노리고 솔라를 만나러 간 거였고, 잠결도 아니었다.
산책하러 나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속이기로 했다.
지금의 나는 화아사가 아니다.
아샤.
로판의 여주인공인 아샤다.
“···전하께 몹쓸 짓을 당하시진 않으셨어요?”
슈피가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눈동자는 따스하다.
나는 킥킥 웃었다.
“몹쓸 짓을 당했으면 슈펠리에가 혼내줄 건가요?”
“···.”
“몹쓸 짓은 안 당했어요.
모욕은 좀 당했지만.”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씁쓸한 듯 살짝 슈피의 시선을 피했다.
사이가 좋아 보였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래서 효과가 있다.
아아.
나는 정말로 마녀일지도 몰라.
어쩌면 그 전설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슈펠리에.”
“네, 아샤님.”
“고마워요.”
나는 슈피의 얼굴에 살짝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손끝으로 뺨을 덧그린다.
부드러워 보이던 뺨은 생각 이상으로 단단했다.
아무리 가냘파도 가녀려도 남자는 남자.
그것이 느껴지는 감촉이었다.
“그런데 이제 좀 비켜줄래요?”
내 말에 슈피가 문득 정신이 든 듯 자신의 자세를 돌아보았다.
마치 나를 덮치기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
슈피의 목이 새빨개졌다.
“아니, 이건···.”
슈피가 당황한 듯 뭔가를 설명하려 했다.
그 모습이 의외로 귀여웠다.
“이러고 있으면 슈펠리에가 절 덮치기라도 하는 것 같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웠다.
슈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마까지 새빨개졌다.
아.
진짜 꽃이다.
초록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새빨간 얼굴.
그야말로 붉은 꽃.
슈피가 내 위에서 일어나려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긴장으로 굳어 있던 관절이 그대로 풀려버렸다.
“윽.”
내 위로 슈피가 무너진다.
그러나 이미 예상한 바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내 뺨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는다.
역시.
이런 사고의 끝에는 꼭 키스신이 있거든.
사고든 아니면 고의든.
그대로 당했어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소설 속 캐릭터에게 첫 키스를 바치기엔 아직 저항감이 있다.
슈피가 당황해서 몸을 옆으로 비킨다.
나는 가만히 누운 채로 슈피를 올려다보았다.
“아, 아샤님.
괜찮으십니까?”
“···슈펠리에.”
“네?”
“···.”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슈피는 내 몸에 손을 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지도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신선하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나는 마지막 확인 사살을 위해 엷게 웃으며 말했다.
“고개, 안 돌렸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슈피의 얼굴이 펑, 터지듯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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