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물의 정석, 돌리고 돌리고~
익숙한 풀 내음.
벌써 세 번째.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벌써 5분째 멍하니 앉아있었다.
“너 이러다가 또 배드 엔딩 본다?”
알 바냐.
나는 연신이에게서 몸을 돌려버렸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거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지?
카이델이 남주인공이 아니라고···?
말도 안 돼.
BAD ENDING이라는 글자가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카이델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진 남주인공이라는 거야?
망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앞으로를 생각해야 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하지?
새로운 남주인공 후보를 찾아야 하나?
누가 있었더라.
솔직히 나는 카이델이 진 남주인공이라고 계속 생각해왔기 때문에
다른 남주인공 후보들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생각이 나기는 하지만···.
아마 재무대신, 카이델의 동생, 그리고···.
순간 내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야, 연신.”
내 부름에 연신이 총총 뛰어 내 앞으로 왔다.
그 얼굴에는 싱글싱글 기분 좋은 미소가 가득했다.
그 얼굴을 보니 또 울컥한다.
이 빌어먹을 새대가리.
처음부터 알면서 그랬겠다···?
“남주인공이 있긴 있는 거야?”
“그럼!
당연한 거 아냐?
남주인공 없는 로맨스가 어딨어?”
칫, 이것도 아닌가.
근데 그게 왜 카이델이 아니라는 거지?
처음 만난 남주인공.
게다가 일국의 왕.
집착 쩌는 능력남에 내 여자 앞에서만 사람 변하는 캐릭터.
대체 어딜 어떻게 하면 이 캐릭터가 남주인공이 아닐 수가 있지?
미치겠네.
아니, 이제 이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잖아.
앞으로 내가 뭘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지.
돌아가고 싶은 곳은 아니지만 내겐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도 하루라도 빨리.
여기에서의 시간이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도 모르는데 언제까지나 여기 있을 순 없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남주인공이 있긴 있다···.
근데 그게 카이델은 아니라는 건 다른 남주인공 후보 중에 하나라는 거겠지?”
연신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 귀여움에 살짝 누그러지긴 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울컥 이고 있다.
망할 새대가리.
그동안 카이델이 틀림없다면서 외치고 있던 나를 보고 얼마나 비웃고 있었을지.
그 생각을 하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마음 같아선 연신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지만···.
이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진짜 또 미라 엔딩이 튀어나올 것 같다.
나는 일단 몸을 일으켰다.
“어디였더라?”
“저기.”
내 앞을 파닥거리던 연신이 날개로 한 방향을 가리키곤 내 머리 위에 앉았다.
나는 연신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알고 있기에 빠른 걸음으로 숲속을 걸었다.
비록 숲속이지만 발밑이 폭신하고 길이 평탄해서 어렵진 않았다.
그리고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숨이 가빠온다.
“헥, 헥···.”
“저질 체력~.”
“헉···, 니가 무거워서···, 헥···, 그렇잖아.
너 안, 내려오냐? 헉헉···.”
“에에~. 나 10g밖에 안 되거든!”
“10g···.”
뭐야.
솜덩이냐.
하긴 생각해보면 위화감은 느껴도 무게감은 그다지 느낀 적 없는 것 같다.
억지로 손으로 무릎을 눌러가며 조금 더 걷자 익숙한 공터가 나왔다.
안 늦었나?
기억을 더듬어 카이델이 있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좀 전의 배드 엔딩롤은 사실 거짓말이고 지금 처음 시작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도망가지 않고 그 시선을 받아들였다.
“···.”
“···.”
내가 도망가지 않자 카이델도 쫓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로 바라볼 뿐.
“그대는···, 마녀인가?”
카이델이 굳은 얼굴로 나를 본다.
정말로 처음 만난 것처럼.
아니, 카이델은 나를 처음 만나는 것이니 당연한가···.
나는 어쩐지 씁쓸함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마녀도 저주받은 존재도 아닙니다.
저는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이세계인입니다.”
더이상 카이델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마음에 들어야 할 이유도 없고.
뭔가를 숨겨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나는 빠르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엷은 미소를 띄웠다.
*********
“놀랍군.
요컨대 그대는 이 서방대륙도, 동방대륙도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왔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여기보다 기술이 더 발달하고 마법이 없는 세상입니다.”
숲속에서 카이델은 내게 경고했다.
이곳은 금기의 숲이라고.
이곳에서 발견된 이상 자신을 따라와 줘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순순히 카이델을 따라왔다.
어차피 남주인공 후보는 다 왕도에 모여있다.
거기까지 모셔준다는데 내가 거부할 이유는 없다.
나는 얌전히 마차에 탔다.
처음에는 나를 탐색하던 카이델이 하나씩 질문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 이름은 아샤.
이세계에서 신과 어떤 내기를 했다.
그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이곳에서 사람 하나를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찾아내면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이곳이 금기의 숲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다.
왜냐면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그 신이기 때문이다.
카이델은 처음에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내가 같은 주장을 되풀이해서 이야기하고,
내가 살던 세상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해주자 조금 믿는 눈치였다.
“상식적으로 숲에 들어오면서 이런 차림으로 들어올 리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세계에는 이런 의복 원단은 없을 것입니다.”
내 잠옷은 전설의 폴리에스테르.
합성섬유니 이 세계에는 없는 원단일 것이다.
실제로 저번에도 내 옷을 세탁한 시녀들이 궁금해하기도 했고.
나는 카이델에게 팔을 내뻗었다.
카이델은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만져보시라는 뜻이었어요.”
“···여성의 신체에 함부로 접할 수는 없지.
그대의 말을 믿겠다.
무엇보다 그대의 눈이 진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음.
살아있는 거짓말 탐지기.
왕으로서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겠지···.
그나저나, 카이델의 분위기가 전과는 조금 다르다.
저번에는 뭔가 우물쭈물 어쩔 줄 몰라하는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이번엔 내가 편하게 대해서 그런가?
아니면 한 번 클리어했기 때문에 내 속성의 힘이 약해진 건가?
나중에 연신이한테 한번 물어봐야겠네.
카이델은 내가 살던 세상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왔다.
백성들은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나라가 굴러가는지, 정치구조는 어떤지···.
“···풋.”
“왜 웃는가?”
왜 웃었을까.
다시 만나도 카이델은 카이델이었다.
그 사실이 조금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나는 카이델에게 내가 아는 한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것이 내가 카이델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카이델은 오랜 시간 동안 내 말을 경청해주었다.
내 말이 신기해서인 것도 있었겠지만 그게 카이델이라는 남자다.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신비한 남자다.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사이 왕도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눈에 익은 숙소에 도착했다.
연신이는 어느새 내 옆에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나와 카이델의 수다에 지쳐서, 일까.
나는 피식 웃고는 카이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폐하!
숙박비까지 신세를 지는 것은 너무 죄송하니 저는 이곳에서 묵겠습니다.”
카이델이 말을 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지난 전과 같은 전개는 사양.
귀찮다.
카이델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
거기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 머리 색은 여기에서는 불길한 색이라고 불린다지요?
그러니 저는 내리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뭣보다 폐하께서는 아직 비가 없으시지 않습니까.
비도 없으신 폐하께서 여성과 한방에서 묵었다고 하면 큰 소란이 일 것입니다.”
카이델이 놀란 눈으로 나를 살폈다.
아차.
비가 없다는 건 아직 이야기 안 했던가?
“그대는 내가 비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음.
여자의 감입니다.”
윽.
나랑 가장 연이 없는 말이다.
나는 여태껏 단 한번도 저 말에 어울리는 예측을 해본 적이 없다.
예전에 내게 호감을 보이는 것 같은 남자에게 철벽을 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혼자 날 차네?
미친년 아니냐?
얼굴도 예쁘지도 않은 게 어디서 지랄이야.”
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그 소문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그리고 이런 적도 있었다.
밤길, 집에 오는데 뭔가 느낌이 싸해서 뒤를 돌아보니 웬 남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빠르게 걷자 상대도 빠르게 걸었고 내가 느리게 걷자 상대도 느리게 걸었다.
이건 틀림없이 치한이다!
아니면 성폭행범!
그런 생각에 나는 그대로 골목을 돌아 집이 아닌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우유를 하나 사서 내부의 테이블에 앉았다.
슬쩍 살펴본 밖에 남자는 없었다.
···.
다 내 착각이었던 거다.
그런 내가 여자의 감을 입에 담다니.
양심에 너무 찔린다.
하지만 카이델은 여태까지 진실을 말해온 내 말을 믿어주기로 한 것 같다.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있는 금발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로이스터 경.
미안하지만 그대가 아샤의 곁에 있어 줄 수 있겠나?”
“폐하, 하지만 저는···.”
“그대는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최고의 기사 중 하나지.
그렇기에 아샤의 곁에 그대가 있었으면 하네.”
카이델의 붉은 눈동자가 금발기사의 녹색 눈동자를 직시한다.
그들 사이에서 무슨 대화가 이루어진 걸까.
금발기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뜻대로 모두 이루소서.”
“음, 고맙네.
아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로이스터 경에게 뭐든 말하게.
그럼.”
“아, 폐하.
좋은 밤 되세요.”
나는 벌떡 일어나 마차의 가장 낮은 계단까지 내려갔다.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카이델이 엷게 웃어 보였다.
카이델이 기사들을 이끌고 숙소로 들어 가버리자
나는 지난번과 같이 금발기사와 단둘이 남았다.
“음, 기사님도 가셔도 괜찮은데···.”
솔직히 부담스럽다.
지난번에 날 대하던 태도를 생각해보면 날 싫어하는 모양이고···.
“···명령을 받았으니 저는 이곳에 있을 것입니다.”
으음.
충실한 기사 그 자체인 듯하다.
나는 설득을 포기하고 얌전히 마차에 오르기로 했다.
내가 실수한 게 있다면, 지난번의 그 사건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일까.
오랫동안 밤공기에 의해 차가워져 있던 발은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견디지 못했다.
내가 마차에 들어가려 몸을 비트는 순간, 발부터 시작해서 중심이 무너졌다.
넘어지는 순간 아차 싶었다.
데자뷔.
그리고 나는 그 끝을 알고 있다.
“으으윽!”
역시나.
나는 마치 고양이처럼 커다란 손에 목덜미를 낚아채인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번에도 이 굴욕적인 자세를···.
아니, 그건 둘째치고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
“소, 손···.”
재빨리 그의 손을 톡톡 치자 그의 손이 풀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곧바로 금발기사의 손을 쳤기 때문에 저번만큼 괴롭진 않았다.
나는 크게 숨을 몰아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후···.”
뒤를 돌아보자 금발기사가 오른팔을 내민 채 굳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엷게 웃어 보였다.
“넘어지지 않게 잡아준 거죠?
고마워요.”
순간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에?
에?
설마?
저 남자도 남주인공 후보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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