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물의 정석, 밖에만 나가면 주인공은 프로 시비(당하)러!
“글, 글을 못 읽겠어···!”
세상에.
지금까지 내가 글 읽을 일이 이렇게 없었나?
나는 주변의 간판을 둘러보며 혼란에 빠졌다.
사실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글도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글이 완전히 외계어다.
영어도 한자도 아닌 전혀 새로운 글자.
나는 주변을 파닥거리던 연신이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뭐야!
뭐 먹으러 갈 건데!”
“···나 왜 글씨는 못 읽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연신이 갑자기 피식, 코웃음을 쳤다.
뭐야.
왠지 모르지만 열 받는데···?
“세상 그렇게 쉽게 사는 거 아니다.
말 통하게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
···.
이놈의 새대가리를 그냥···.
나는 이를 으득 갈고는 시선을 테베에게로 돌렸다.
테베는 의아한 표정을 하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테베.
저 글은 못 읽나 봐요.”
테베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되레 내게 물었다.
“글을 배운 적은 있으십니까?”
“당연하죠.”
아.
글의 배경이 약간 중세 근대 그쪽이었던 것 같은데···.
여자들이 글을 잘 모른다는 설정인가?
그런 주제에 왜 상하수도 시설은 완비래?
고증 거지 같네.
“···.”
테베가 나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
뭐지?
되게 복잡해 보이는 눈인데.
뭔가 날 되게 측은하게 보는 것 같기도 하고···.
···.
설마!
“저기, 로이스터?”
“네, 아샤.”
테베가 생각을 정리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알 것 같다.
“나 노예라던가 천민이라던가···.
글을 못 배운 거 아니에요···.”
“···아.”
테베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역시나.
테베는 내 당연하다는 말을 ‘당연히 안 배웠다’로 알아들은 듯하다.
하긴 저번엔 내가 일방적으로 질문했었지···.
테베는 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내가 이세계에서 왔다는 것 외에는.
“예전에 나는 학생이었어요.
내가 있던 세계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글을···, 아, 우리나라 한정이긴 했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어요.
노예나 천민이나 뭐 그런 계급도 없었고요.”
회사 취직하면 그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지만.
뭐, 그래도 여기도 판타지 세계니 노예라던가 천민이라던가 그런 게 있겠지?
그런 사람들보다는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 백배 나을 것이다.
···.
뭐, 애초에 이 내기만 성공하면 나는 부자가 될 테지만.
“굉장히 좋은 곳에서 지내셨군요.”
테베가 살풋 웃었다.
웃어도 차가운 인상이 남아있다.
으음.
이렇게 좀 더 입술을 옆으로 당기면서 웃으면 차가운 인상이 가실 것 같은데.
“왜 그러십니까?”
“응?
아, 아뇨.
아무튼, 간판을 하나도 못 읽겠어요.
주문도 다 로이스터한테 맡겨야 할 것 같네요.”
으음.
글을 배워야 하려나?
하지만 내가 글을 쓸 이유가 뭐가 있을까.
읽을 필요도 성안에서는 거의 없을 거고···.
어차피 곧 떠날 텐데.
일단 나는 테베의 뒤를 졸졸 쫓아가기로 했다.
“낄낄.
글도 못 읽는대요.”
···.
이걸 그냥 콱.
나는 연신이에 대한 살의를 가라앉히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항상 화사하고 화려한 것들에 둘러 싸여있어서 조금 불편했었는데,
여기는 굉장히 마음이 편하다.
시끌시끌하고 소란스러운 거리.
마치 시장골목에 온 기분이었다.
상인들은 가판대를 설치해놓고 거기서 호객을 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어디다 쓰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 이세계의 물품이 가득했다.
형형색색의 물약 같은 것도 팔고 있고 뭔가 환약 같은 것도 많았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풀떼기나
학교 앞 문구점에 가면 1000원이면 살 수 있을 것 같은 장신구도 있었다.
그야말로 게임이나 소설 같은 데서 나올 것 같은 시가지의 느낌.
신기한 구경거리에 나는 여기저기를 훑어보았다.
“아샤.”
아차.
정신없이 둘러 보다가 테베랑 떨어졌다.
나는 들여다보고 있던 가죽 지갑을 내려놓고 테베에게 달려갔다.
“미안해요.
신기한 게 너무 많아서.”
테베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자신의 망토 끝을 내게 내밀었다.
“···?”
“잡으십시오.”
···.
원래 세계에 있을 때 본 적 있다.
유치원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뭔가 줄 하나를 잡고 가던 그 광경을.
내가 유치원생이냐!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얌전히 망토 끝을 잡았다.
여기서 길 잃어버리면 나는 유치원생 이하가 될지도 몰라···.
“이쪽으로.”
테베가 나를 사람이 적은 쪽으로 이끌었다.
망토를 잡은 채 주변을 둘러보다가 뭔가 섬세한 유리세공을 발견했다.
“아!”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향하다가 멈춰졌다.
다행히 손에 쥐고 있던 망토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엉덩방아는 찧었지만.
“괜찮습니까?”
테베가 손을 내밀었다.
으으.
쪽팔려.
나는 그 손을 사양하고 일어났다.
테베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샤.”
“···미안해요.”
유치원 이하다.
응.
난 유치원 이하였어.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를 보던 테베가 내 손에서 조심스럽게 망토 자락을 빼냈다.
“실례.”
테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로브의 끝자락을 잡았다.
손이 닿을락 말락 하는 아슬아슬한 위치.
이럴 바엔 손을 잡는 게 낫지 않나?
흠.
하긴 생각해보면 테베가 함부로 내 몸에 손을 댈 리가 없겠구나.
테베 같은 기사가 여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댈 리가 없다.
게다가 나는 일단 카이델의 손님이고.
카이델이 나한테 묘하게 신경 쓰는 것도 알고 있고.
“아샤.”
“네.”
“제 등만 잘 보고 따라오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베는 씩 웃더니 내 로브 자락을 잡은 채 앞장섰다.
나는 옆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테베의 뒤를 따랐다.
식당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마 내가 주변을 둘러보느라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더 일찍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
그렇게 생각하니 테베에게 더 미안해지는데···.
테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빈자리를 찾아냈다.
나를 돌아보고 내가 있는지를 확인하더니 자리로 향했다.
“후···.”
도착하자마자 테베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정신적으로 좀 지쳤을지도···.
그리고 원흉은 분명 나다.
음.
“아샤.
매콤한 걸 좋아한다고 했죠?”
“네!
기왕이면 김치 같은 게 있으면 좋겠지만···.”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이세계의 음식에 테베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르치?”
아.
이것도 NG?
뭔가 명사가 제대로 발음되지 않는 듯하다.
하긴.
오늘 확실히 알았지.
한국어와 말과 글이 같은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언어인데도 불구하고 말이 통한다.
아마 이건 연신이의 힘일 것이다.
다만 이세계의 명사는 이 나라의 말로 번역할 방도가 없어서 그런 거겠지.
흘끔 연신이를 봤다.
연신이는 내 어깨에 올라탄 채 신이 나서 메뉴판을 훑어보고 있었다.
···.
너 글 읽을 수 있었냐?!
“나는 테트포와!”
···.
그게 뭔데.
나도 좀 알려줄래?
“로이스터.
테트포와가 뭐에요?”
물어볼 상대라고는 테베뿐.
테베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쉽게 말하면 옐랍 고기 요립니다.
달콤한 로이 소스에 절여 구운 옐랍 고기죠.”
뭔진 모르지만 맛있겠다.
로이 소스···.
꿀로 만든 소스 같은 거려나?
“그럼 그것도 하나 시켜주세요.”
“네.
다른 건 제가 적당히 시켜도 되겠습니까?”
일일이 나한테 요리를 설명하고 어쩌고 하다 보면,
저기서 주문을 기다리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여자분이 폭발할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베는 손을 들어 여주인인지 종업원인지를 부르더니 음식을 여러 개 주문했다.
뭔가 아는 것이 있을까 싶어서 들어봤지만 하나도 모르겠다.
으음···.
테베의 미각을 믿어보는 수밖에.
“아샤가 살던 나라에서는 매운 게 흔했습니까?”
갑작스러운 테베의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뭔가 내가 질문할 때거나 말 걸 때만 대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음.
이건 좋은 징조려나?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는 거니까.
“매운 게···, 흔했죠.
거의 매일 매콤한 걸 먹었으니까.”
물론 우리나라 기준에서 나는 맵찔이였다.
방금 말한 매콤하다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외국인 기준의 매콤함.
즉, 매운맛이 있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너무 매운 걸 안 먹는다.
뭐랄까.
매운 게 너무 부족하니까 당긴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기본적으로 김치 같은 입안을 상큼하게 만들어주는 게 없다.
대부분이 기름지고 느끼한 음식들뿐.
나한테는 좀 무겁다.
“사실 저는 처음 먹어봅니다.”
헉.
대박.
기사인 테베는 그래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음식을 먹어봤을 것 같았는데···.
아니면 귀족이니까 신기한 음식을 먹어본다거나···.
“생전 처음 먹어보는 거예요?”
다시 한번 확인한다.
테베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도 그런 거 안 먹어요?
귀족들이면 뭔가 이국적인 음식 많이 먹을 것 같은데.”
“저희 가문은 기사 집안입니다.
그래서 사치를 멀리하고 절약을 가까이하라 가르치셨죠.
먹는 건 영양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만 먹었습니다.”
그래서 선이 묘하게 가늘구나.
“고기 종류는 근육이 붙으라고 많이 먹긴 했습니다만···”
앗.
내 마음의 소리라도 들린 것일까.
테베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긴 기사 가문이니 음식의 맛이 어쩌고를 떠나서 몸에 근육을 붙일 수 있는 거라던가,
수련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먹었겠지.
근데도 불구하고 선이 가는 건···.
“너, 너무 근육이 많이 붙는 것도 별로예요.
몸이 무거워지잖아요.
로이스터 정도가 딱 좋아요.”
절대 위로는 안 되겠지···.
응.
나도 이해한다.
나한테도 사람들이 맨날 많이 좀 먹으라는 둥,
살이 어느 정도 있어야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둥,
심지어 너무 마르면 안는 느낌이 별로라 남자가 싫어한다는 둥!
거의 성희롱에 가까운 소리를 하며 나를 위해준답시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에.
그러면서 자기들은 살을 빼야 한다고 다이어트를 하곤 했다.
아니.
인간적으로 그러면 나는 그냥 내버려 둬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나한테 난리야.
게다가 그럴 때면 꼭 말한다.
“나도 아사처럼 먹는 거에 흥미도 없고 말랐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왜 내 건강을 걱정해주는 척 살 찌라고 강요하는 건데!
으아아아악!
“아샤?”
분노한 내가 손을 바들바들 떨자 테베가 당황해서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내 안색을 살피는 테베를 보며 감정을 정리한다.
휴.
지금 그런 생각을 해서 뭐해.
아, 물론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그때마다
“좋겠네, 살 많아서.”
라던가,
“나도 많이 먹고 싶다. 난 네가 더 부러워.”
라던가.
비꼬듯 웃으며 말해주긴 했었다.
예의 없고 재수 없는 짓이란 건 잘 알지만,
상대가 예의 없이 구는데 왜 내가 예의를 차려야 하는가.
참는 건 집에서 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하하, 웃어 보이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모험가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 했다.
그 속에서 기사 제복을 집은 테베는 유독 눈에 띄었다.
새삼스럽게 테베를 다시 보게 된다.
새하얀 제복의 어깨를 살짝 덮는 금색 머리카락.
그냥 깔끔하게 빗기만 한 것 같은데 묘하게 결이 좋고 예쁘다.
저거 분명히 보들보들하겠지···.
만져보고 싶다.
주변을 경계하며 바삐 움직이는 눈동자도 그렇다.
가끔 외국인들을 보긴 했지만 저렇게 선명하게 예쁜 초록색 눈동자는 처음이었다.
역시 소설 속 캐릭터.
무결점에 가까운 미모였다.
뭐, 내가 알기론 저 미모가 테베의 콤플렉스 중 하나였긴 하지만.
기사답지 않게 고운 얼굴과 가느다란 몸매.
그것이 테베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 고 했다.
지금이야 크게 신경 안 쓴다고는 하지만 어떠려나.
그나저나 안은 꽤 덥다.
사람들의 열기 때문일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로브를 벗었다.
“···!
아사, 이 바보야!”
연신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나는 뭐가 잘못됐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앞에 앉은 테베가 황급히 일어서 내게 다가올 때야 깨달았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아차.
나 로브 벗으면 안 되는 거였지···.
마치 괴물을 바라보는 듯한 눈동자.
술집에는 어느 틈엔가 적만 만이 가득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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