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의 정석, 고증이 아쉬울 때가 있다
아.
할 일이 없다.
뭐 하지.
“안 나가도 돼?”
“응.”
나는 성의 없이 대답하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당신을 꺼내드릴 수 있을까요.”
꺼내달라는 말에 테리는 그렇게 물었다.
나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테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의도가 뭐지?
무슨 생각으로 내게 되묻는 거지?
진짜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아니면 무슨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일까?
마지막의 마지막.
테리는 원래의 의뭉스러운 눈동자로 돌아갔다.
전혀, 눈곱만큼도 읽을 수 없는 눈동자로.
대체 테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테로아님?”
“당신은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그는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속을 읽을 수 없는 뻔뻔스러운 미소.
어째서지.
난 뭔가 잘못한 건가?
“무엇을 알고 있다니요?”
“당신은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눈치가 없는가 싶었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니,
이걸로 됐다.
나는 마치 교태를 부리는 듯한 묘한 미소를 띄웠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글쎄요.”
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읽어냈다.
그동안 내게 보였던 그 눈동자조차 연기였음을.
재미있는 남자다.
마음을 놓은 연기라니.
저런 건 해본 적이 없다.
좋은 눈빛을 배웠다.
평소와 전혀 다른 연기를 하며 날 속였다.
그건 아마도 내가 자신을 알고 있다고 짐작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속아 넘어가는 듯 박차를 가하는 날 보며 또한 생각했을 것이다.
틀림없다.
나는 테로아를 알고 있다, 라고.
“처음부터군요.”
나는 소파에 기댄 채 오만한 눈으로 테로아를 바라보았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반란은 일어날 것이다.
내가 공략을 진행했으니까.
여기서 고백을 받아내지 못하면 나는 죽는다.
틀림없이.
“왜 속아주셨나요?”
“···속아주다, 라···.”
테리는 엷게 웃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다리를 꼰 채 두 손을 모았다.
오오.
악역 자세.
악역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꼭 하는 자세지.
“글쎄요···.”
“···저는 당신이 하려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이건 사실이다.
처음 이세계로 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니니까.
“그때 로웰님이 당신에게 한 말.
그 남자, 라는 그 한 단어에서 눈치챘습니다.
아무리 외부인이라지만 너무 무방비한 것 같네요.
뭐, 그 전부터 의심은 했지만요.
그 백발, 이 나라의 왕족 외에는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 색이라고 하더군요.
눈동자는 붉지 않지만요.
렌즈 같은 걸까요, 그 파란 눈동자.”
테리는 고개를 저었다.
눈빛은 숨기고 있지만,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그렇다는 건···.”
“제가 이걸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파란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마치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다.
“설명하자면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군요.
제 아버지, 어머니는 선왕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조차 지워졌습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취급당하기로 했죠.”
말하진 않지만···.
역시.
생각대로인가보다.
아무래도 테리는 선왕의 형의 아들인 듯하다.
“누구도 선왕에게 거스르지 못했습니다.
유모는 저를 빼돌려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고 제게 울며 사죄했죠.”
으음.
역시.
정석대로 가는구나.
“저는 어릴 때부터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선왕, 아니 롤랜드 그 새끼를 갈가리 찢어 죽여버리겠다고.
그 한 가지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자금을 모으고, 사람을 모으고.
상단에 꽤 많은 사람이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아마 선왕은 꽤 미움을 산 모양이다.
“하지만 최근 아샤님 덕분에 성에 드나들게 되었고···.
그러면서 알아낸 것이 있습니다.”
음.
어떻게 알아낸 건지 좀 궁금하다.
뭐, 좋게 알아낸 건 아니겠지.
테리의 부모는 존재조차 지워졌다.
그리고 대부분이 그걸 받아들였다.
그건 선왕이 힘을 발휘해서도 있겠지만···.
틀림없이 이유가 있는 거겠지.
그러니 귀족들 안에서도 크게 이야기가 돌지 않는 것일 테고.
그걸 알아냈다면···.
응.
묻지 말자.
“저는 아무래도 아버지의 피가 반만 섞여 있는 모양입니다.”
···.
엥?
당연한 거 아냐?
부친이 반, 모친이 반.
그렇게 사람이 형성되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제 모친은 소위 정부를 두고 있었던 듯합니다.”
···.
오우.
막장 드라마네.
“참으로 용의주도한 분입니다, 제 어머니는.
연인은 낮에, 아버지는 밤에.
밤에 아버지와 한 침대에 들지 않는 날에는 연인도 만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흐음.
그게 뭐가 문젠지 사실 잘 모르겠다.
어쨌든 테리는 백발을 타고 났으니···.
왕가의 핏줄 아닌가?
“문제는 저는 그 둘을 모두 닮았다고 합니다.
당시 왕태자였던 아버지의 백발과,
그리고 연인이었던 그 이름 모를 남자의 푸른 눈동자를.”
···.
불가능하다.
난자에 두 개의 정자가 수정될 순 없다.
하지만···.
뭐, 판타지 소설이니까.
라고 해버리면 할 말이 없다.
수인과의 애기도 만드는 게 판타지 소설인데.
“왕가의 핏줄은 일종의 저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백발과 적안은 저주의 증거 같은 것이죠.
거기서 벗어나는 왕가의 핏줄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저만 죽였다면 되었을 것을.”
사라져야 할 증표는 살아남았고,
그 증표를 낳은 자들은 사라졌다.
아니···.
어쩌면···.
“어쩌면 테로아님의 아버님은 스스로 죽기를 바라셨는지도 모르지요.”
카이델도 그렇고 솔라도 그렇다.
아니, 아마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왕태자라는 자리는 앞으로 왕이 되어야 할 자리.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큰 토지를 다스려야 하는 자리이다.
그런데.
그 왕태자비가 감히 정부를 두고 절대 벗어나선 안 되는 레일을 벗어나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태어나선 안 될 아이가 태어났다.
설령 선왕이 왕태자비와 테리만 죽였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왕태자는 살아갈 수 있었을까?
“아무리 더럽고 추해도 가족은 가족이에요···.”
내가 끝끝내 부모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그토록 학대당했는데···.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마음 어딘가에서 그들에게 뭔가를 바라고 있다.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망하고, 또 실망하는데.
어째서.
그것이 가족이라는 것이다.
저주, 그것도 정말 지독한 저주가 걸린 이름.
“어머님과 테로아님을 잃은 아버님께서는···.
아마 살아도 산 게 아닌 게 되겠죠.”
심지어 그는 부인을 사랑했을 것이다.
왜 그걸 알고 있냐고?
그야···.
그게 소설의 정석이니까.
“그러니 혼자 살아남으신 것에 죄책감을 느끼실 필요 없어요, 테로아님.”
나는 생긋 웃었다.
테리는 그런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불쌍한 남자.
빌어먹을 작가.
소설을 볼 때 구르는 캐릭터들에게 별 감정이 없었다.
아니, 불쌍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캐릭터가 구르면 구를수록 소설은 재미있어진다.
그러니 나는 어쩌면 캐릭터들이 구르는 걸 보며 재미있어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눈앞의 남자가 담담하게 자신의 과거를 늘어놓는 걸 보니 가슴이 아팠다.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 이라고밖에 할 수 없겠지.
차라리 그때 죽어버렸다면 테리는 저토록 고통스럽게 살아오지 않았어도 될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죽음에 이유가 있다는 걸 알고 나서 제 복수심은 가라앉아있었습니다.”
아, 그래서 이 전의 다른 공략 때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던 건가.
“사실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나 하나의 욕심으로 이 나라를 망가뜨려도 되는 걸까.
게다가 그 이유가 적반하장이라니.
처음부터 나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그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어리석긴.
그의 어머니가 그런 짓을 벌이지 않았다면 그는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것의 시초는 그의 어머니.
잘못의 원인은 그의 어머니에게 있는데.
“그러던 중 아샤님이 제게 다가오셨습니다.
···.
감히 말하지요.
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샤님께 호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어?
이거 고백 아니야?
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당신이 이 나라에 있다.
그것도 왕의 손님으로서.
그래서 저는 거의 계획을 포기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아하.
그래서 로웰이 나한테 그토록 적대적이었나.
아무리 외부인에 여자에 테리랑 붙어있다고 해도···.
처음부터 너무 적의를 보인다 싶었다.
“당신이 있는 이 나라를,
당신이 몸을 맡기고 있는 이 나라를 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흐음.
개연성 부족.
이런 소설, 돈 주고 읽으라면 절대 안 읽을 텐데.
하긴 그러니 225화나 연재했는데도 유료 전환이 안 됐지.
그토록 오랫동안 반란을 준비해왔는데,
그 수많은 사람을 모아두고서 겨우 여자 하나 때문에 포기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복수의 이유가 무너진 것도 원인 중 하나겠지만···.
글쎄.
나라면 이 정도 되면 떠밀려서라도 추진할 거 같은데.
“하지만 당신은 내게 이 나라를 무너뜨리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째서입니까?
당신은 대체 누구죠?”
···.
하하.
하하하하.
여기까지 와서 그게 중요한 건가?
슬슬 귀찮다.
테리의 사연은 가슴 아프다.
작가 미친놈, 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 내가 누군지, 내가 무슨 생각인지가 중요한가?
중요한 건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거고, 내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인데.
“저는 전설의 마녀예요.”
나는 웃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테리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나라를 무너뜨리러 왔죠.
그리고 당신이라는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났어요.
처음부터 느껴졌습니다.
당신이라면 틀림없이 이 나라를 무너뜨려 줄 것이라고.”
입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하.
이제는 내 몸도 내 맘대로 안 움직이는구나.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리의 옆으로 향했다.
테리는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계산이 틀어진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테리의 옆에 앉아 가만히 몸을 기댔다.
거의 품에 안기듯이.
그의 품에서는 시원한 냄새가 났다.
마치 바람과도 같은 냄새.
시원하면서도 상쾌한 냄새다.
“설마 정말로 당신을 이렇게나 생각하게 될 줄이야.”
나는 테리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사실은···.
폐하를 유혹해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도 좋을지도 몰라요.
그게 더 쉬울지도 모르죠.
그것도 제 생각 중 하나였으니까요.”
테리의 손이 허공을 헤맨다.
나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테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싫어요.”
손을 들어 테리의 얼굴에 살짝 놓았다.
마치 간질이듯 부드럽게 얼굴을 타고 손가락이 흘러내린다.
“저는 당신이 왕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바라 건데···.
나랑 함께 추락해 줘요.”
테리는 아무 말 없이 내 어깨를 살짝 끌어안았다.
그것이 어제의 일.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기다려야지.”
“기다려?”
“응.”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연신아.”
“응?”
“끝말잇기 할래?”
“에엑?
자신 있어?
나 연애소설의 신인데?”
“내가 이기면 목욕 같이 들어가기, 콜?”
“콜!”
길지 않다고 해서 지루하지 않은 건 아니지.
나는 첫 시작단어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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