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의 정석, 신은 실재한다.
“안 돼.”
아, 이것도 안 된다고 해버리네.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씻고 나와 머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옷을 입자마자 데바인에게 물어 바로 카이델에게로 왔다.
카이델에게 교회에 가고 싶다고 말하자마자 나온 대답이 저거였다.
미치겠네.
지금 불신으로 가득 찬 카이델이 그나마 나를 교회에는 보내줄 것이라 믿은 이유가 있다.
이 팔렌 왕국은 케리스만 교의, 뭐랄까···.
음···.
본거지?
총본산?
발생지?
뭐, 그런 곳이다.
이 대륙에는 5개의 종교가 있다.
그리고 팔렌 왕국은 케리스만 국왕부터 국민들까지 모두가 케리스만 교의 신자였다.
그것은 나라의 건국 신화와도 관련이 되어있다.
뭐,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다른 건국 신화와 비슷했다.
먼 옛날의 이야기.
영웅이 있었고, 신이 있었다.
신은 영웅을 사랑했고 영웅을 도왔다.
영웅은 사람들을 돕고 그의 곁에는 동료들이 모였다.
그리고 영웅은 자연스럽게 모두의 중심이 되었고 어느덧 왕이 되어있었다.
팔렌 왕국을 건국하는 데에 지대한 도움을 준 케리스만을 초대 팔렌 왕은 신실하게 섬겼다.
그래서 교회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교회로 숨어 들어간 범죄자는 교회에서 나올 때까지 체포할 수 없다.
왕이 나라의 아버지라면 교황은 나라의 어머니였다.
둘 다 케리스만에 의해 존재하며 케리스만의 대행인 같은 존재였다.
그러므로 교회에 간다고 하면 어쩌면 허락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 됐나···.
“왜 교회에 가려는 거지?”
“그건···.”
어제의 살인이 충격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안 된다.
그건 어제 카이델이 나를 위해서 한 일을 내가 부정하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너무 많은 피를 봐서 놀란 것 같습니다.
아침에는 폐하께서 같이 있어 주셨기에 괜찮았는데···.
지금은 마음이 계속 울렁거리면서 진정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내 말에 카이델이 삐딱한 시선을 보냈다.
으으.
얼굴에 티 내지 말자.
나는 뻔뻔하게 기운이 없는 척을 했다.
“하지만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방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치 몸에서 힘이 빠진 것처럼 비틀거렸다.
아.
너무 심하게 했다.
넘어진다.
“읏.”
넘어지는 나를 카이델이 받았다.
“조심하도록.”
차갑게 말하며 내게서 멀어지는 카이델.
하지만 내 팔을 잡았던 손은 차가웠다.
긴장했던 걸까.
저번에도 생각한 건데 카이델은 내가 다치거나 넘어지는 것에 예민한 것 같다.
나는 카이델에게 예를 갖춰 인사한 후 다시 문 쪽으로 다가갔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바라보던 카이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제를 부르도록 하지.”
사제.
라이안일까?
나는 슬쩍 카이델 쪽을 돌아보았다.
카이델은 불안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왜 나를 교회에 보내려 하지 않는 것인지.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 거의 마녀 취급을 받고 있을 것이다.
교회에 갔다간 이단 심문관들의 손에 잡혀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카이델은 그걸 막을 수 없다.
아니, 뭐.
막을 테지만.
카이델이라면.
하여튼 원래대로라면 교회의 일에 왕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가능하면 나를 교회에 보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사제는 라이안일 가능성이 크다.
“감사합니다, 폐하.”
나는 예를 표하고 이번에야말로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데바인이 내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아샤님.”
데바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안심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엄마 같은 남자다.
나는 씩 웃었다.
“폐하가 절 잡아먹기라도 하나요.”
카이델은 내게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내 주변을 조금씩 쳐 내서 날 고립시킬 뿐.
그렇게 자신만을 바라보도록 할 것이다.
내가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은화에게 그랬듯이.
오히려 위험한 건 데바인이다.
내 기억에 소설 속에서 데바인도 한 세 번쯤 죽을 뻔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겨우 24화 사이에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이 소설.
“데바인.”
“네, 아샤님.”
···.
조심하라고 말해봤자 이 남자는 이해 못 하겠지.
어쩌면 나를 마녀처럼 볼지도 모른다.
나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웃어 보였다.
데바인을 지키는 방법을 나는 알고 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데바인에게서 멀어지면 된다.
내가 혼자가 되면.
어려울 것 없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면 된다.
예전에 했던 그대로.
*********
“···.”
라이안은 차가운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그것도 그런가.
마녀 아니라는 선언을 내린 게 라이안이었으니 아마 큰 질책이 갔을 것이다.
게다가 그 당사자가 자신을 호출.
얼마나 황당할까.
“어, 저기···.
이, 일단 앉으시겠어요, 사제님?”
라이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내 반대편에 앉았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의외의 말에 라이안이 작게 입을 열었다.
그 눈동자가 당혹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뭐든 반응을 끌어내야 대화가 될 테니, 나쁘지 않다.
“제가 마녀가 아니라고 보증해 주셨는데···.
저 때문에 여러 가지로 귀찮으셨죠?”
라이안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
망했나.
나는 일단 반응을 기다리며 가만히 라이안을 바라보았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참 잘생긴 남자다.
남색 머리카락은 밤하늘처럼 은은한 색.
거기에 백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보니 마치 밤하늘에 뜬 달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 신자들에게서는 밤의 사제님이라던가 밤하늘 님 따위로 불리기도 하는 것 같다.
사제라고 하면 가느다란 몸일 것 같은데 의외로 체격도 좋다.
키도 크고.
어쩌면 외모로만 보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타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이 소설은 은화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내 타입 따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내고 눈앞의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라이안이 입을 열었다.
의외로 꽤 무겁지만 맑은 목소리.
카이델이 마치 동굴처럼 웅웅 울리는 목소리라면
라이안은 바위처럼 묵직한 목소리다.
“왜 저를···?”
라이안이 내 시선을 살짝 피한다.
하지만 그 귀 끝이 살짝 붉었다.
물론 은화에게도 같은 반응이었다.
그래서 남주인공 후보라는 것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제라는 직업을 가진 남주인공이 있었던가.
보통은 서브 남주인공이었던 것 같아 공략 대상에서 제외해 놨었다.
지금이야 뭐 어쩔 수 없으니···.
“마음의 안정이 필요해서요. 사제님, 함께 기도해 주세요.”
라이안도 어젯밤의 일은 대충 들었을 것이다.
내 말은 아마 평범한 여자라면 크게 이상하지 않은 말일··· 것이다.
아마도.
라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두 손을 들었다.
“···.”
근데 여기 기도는 어떻게 하는 거지?
은화가 하는 걸 보긴 봤었는데···.
대충 봐서 기억이 잘···.
나는 결국 내 세계에서 하던 기도처럼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우리를 항상 굽어살피시는 케리스만이시여.
저에게 당신의 손길을 빌려주소서.”
라이안이 내 머리에 살짝 손을 얹었다.
그 손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 빚이 내게 스며든다.
이세계인인 나에게도 과연 신이 축복을 베풀어 줄 것인가.
그런 생각을 지워내듯 마음이 가라앉아 간다.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하자 마음이 꽤 편해졌다.
사실 불안했던 걸까.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마음이 꽤 울렁거리고 있었던가 보다.
그래서 아까 카이델이 물었을 때 순간적으로 그런 말이 나왔었던 모양이다.
나는 살짝 눈을 떠 앞을 바라보았다.
라이안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읏.”
눈이 마주치자 라이안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리에 얹어져 있던 손이 떨어진다.
그 금욕적인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사제님, 감사합니다.”
나는 웃어 보였다.
라이안은 슬쩍 나를 곁눈질하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금욕적이어야 하는 사제인 만큼 자신의 감정에 당혹스러운 거겠지.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나는 굳이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낯가림이 심한 고양이의 경우 먼저 다가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지.
나는 살짝 뒤로 물러나 앉았다.
“마음이 조금 편해지네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라이안의 질문에 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로 이유를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물어보는 걸까.
어느 쪽이건 대답할 마음은 없었다.
“또 기도가 필요하면 말해도 되나요?”
내 말에 라이안이 흠칫 놀랐다.
설마 내가 또 부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일까.
“민폐일까요?”
라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기도는 만능이 아닙니다.”
···허?
사제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기도는 당신에게 안식을 줄 수는 있습니다.
한때의 위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필요한 것은 똑바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라이안이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백금색의 눈동자가 은은하게 빛난다.
“바라보는 것···이요?”
“그렇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있는 문제가 무엇에서 파생된 것인가.
그 문제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신은 당신을 위로하시면서 동시에 묻고 계십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답을 찾는 것은 당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있던 세계의 신과는 다른 건가.
함께 있어 주고 위로해줄 수는 있지만 해결해주진 않는다.
음.
솔직히 말하면 우리 세계에 있던 신들보다 마음에 든다.
그 사상도 그렇고 이렇게 실존해서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내 세계에 있던 신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사제님.
그게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카이델의 광기는 해결하기 어렵다.
그건 그의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니, 뭐랄까···.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카이델은 사랑의 방법을 집착밖에 모르는 것 같다.
그게 저런 식으로 표현되는 듯하다.
그걸 내가 고쳐준다?
무리다.
나는 그렇게 여유 있지도 않고 그럴 이유도 없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빨리 다른 남자를 공략해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그럴 땐 피하시죠.”
라이안은 시원스럽게 말했다.
와.
저렇게 대답할 줄이야.
내가 살던 세계의 종교라면 불경죄일지도.
“당신의 신은 누구입니까?”
···.
내 신.
내 신은···.
“···.”
“당신의 신에게 구하세요.
그의 지혜를.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신의 지혜를 구하고,
신의 지혜를 구해서도 해결할 수 없다면 피하면 됩니다.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에 연연하지 마세요.”
하긴.
피하면 된다.
피하면 편하다.
하지만 이번 경우엔 피하기만 해서도 안 될 것 같은데···.
뭐···.
해결방법은 안 되지만 최소한 마음은 편해졌다.
조금 조급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군요···.”
나는 라이안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라이안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사제님.
다음에 또 함께 기도해 주세요.
저는 아무래도 성에서 나가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성에서 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은···?”
아차.
생각으로만 한다는 게 말로 나가버렸다.
나는 고개를 내저어 말하기 곤란함을 표시했다.
라이안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차도 한 잔 대접하지 않았네요.”
“···.”
라이안은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문을 향해 갔다.
아직 친해지려면 멀었겠지.
인사 정도는 해줘도 될 텐데.
흠.
“다음에는···.”
갑자기 라이안이 뒤를 돌았다.
그리고 문 근처에서 나를 보며 말했다.
“텔라민 차가 좋겠군요.”
라이안이 아주아주 엷게 웃어 보였다.
아니, 웃은 게 아닌가?
으음.
아니, 입꼬리가 살짝···.
아니 근데 눈동자가···.
저게 웃음인가 아닌가를 가늠하느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라이안이 양손을 교차해 어깨에 댔다.
“케리스만 신의 가호가 아샤 님의 위에서 영구히 머물 수 있기를.”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으음.
아주 조금 친해진 기분이 든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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