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판타지의 정석, 말을 처음 타는 여주인공과 벌어지는 사건!
반짝거리는 햇빛 아래의 마구간.
내 앞에는 새하얀 셔츠와 승마바지를 입은 카이델.
그리고 그의 앞에는 눈에 익은 말 한 마리가 서 있다.
내가 이곳에 온 첫날 봤던 카이델의 말이다.
새까만 털이 비단처럼 빛난다.
부드러워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긴 겁난다.
예전에 페이스 노트에서 말 뒷발에 차이는 남자 영상을 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카이델은 느긋하게 말을 쓰다듬어주고 있지만,
나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는 중이었다.
“이쪽으로 오지 그러나.”
카이델이 나를 부른다.
으음.
겁나는데···.
뭐, 설마 죽기야 하겠어.
···.
갑자기 머릿속에 첫날 봤던 엔딩롤이 떠오른다.
설마, 아니겠지?
나는 주춤주춤 발을 옮겨 카이델에게 다가갔다.
말은 느긋한 얼굴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카멜은 굉장히 영리한 녀석이다.
그대가 겁을 먹으면 카멜도 겁을 먹을 것이고,
그대가 카멜을 좋아하면 카멜도 그대를 좋아할 것이다.”
카이델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깃든다.
나도 그 얼굴에 이끌려 마음먹고 말의 앞에 섰다.
“···음.
안녕, 카멜?”
카멜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나를 관찰했다.
가까이서 본 카멜의 털은 정말로 부드러워 보였다.
만져도 되나···?
나는 슬쩍 손을 올렸다.
“아직.”
그 손은 말에게 닿지 못했다.
카이델은 내 손을 채어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카멜은 온순하고 영리하지만 그래도 말은 말.
말이라는 생물은 본디 겁이 많은 법이다.
카멜이 충분히 그대를 알아볼 수 있도록 시간을 준 후에 만져보도록.”
카이델이 내 손을 카멜의 코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카멜이 살짝 코를 내밀어 내 손의 냄새를 맡았다.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내 손에서 손을 떼었다.
“이제 카멜의 목을 살짝 쓰다듬어 보거라.”
조심조심 손을 움직이자 카멜이 몸을 살짝 왼쪽으로 틀었다.
내민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사실 조금 뻣뻣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건 생각 이상으로 부드럽다.
어느새 나는 두 손으로 카멜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었다.
“우와···.”
카멜은 살짝 눈을 감고 내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묘한 감각.
뭐라 표현하긴 어렵지만, 결코 싫지 않은 감각이었다.
“카멜이 그대를 좋아하는군.”
카이델이 엷게 웃었다.
새에게도, 여자에게도 질투하던 카이델의 눈동자가 평온하다.
그것이 아마도 이 카멜의 힘일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온화하게 만들어주는 힘.
“카멜, 고마워.
너를 만지게 해 줘서.”
겁이 많은 생물에게 있어 자신을 만지게 해준다는 것은 엄청난 신뢰의 표시일 것이다.
낯선 나에게 몸을 만지게 두는 건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카멜은 내게 몸을 맡겨주었다.
카멜의 눈과 눈이 마주친다.
그 눈동자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까만 포도 같은 눈동자가 검은 털 속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반짝반짝 빛난다.
나와 카멜의 시선 교환을 바라보고 있던 카이델이 문득 입을 열었다.
“한 번 타보겠나?”
“제가요?”
으음.
어떠려나.
사실 타보고 싶긴 하다.
하지만 무섭다.
나에겐 완전히 미지의 경험이니까.
게다가 소설에서 나오는 명마들은 하나같이 콧대가 높았다.
그래서 주인공, 혹은 주인들에게만 등을 허락한다.
과연 카멜은 내게 등을 허락해줄까?
타보려다 떨어뜨려진단거나···.
으음···.
나는 조금 멀어진 곳에서 카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카멜은 여전히 맑고 평온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보고 싶긴 한데.
카멜이 절 태워줄까요?”
“그대는 말을 타본 적이 있나?”
“아뇨···.”
카이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으음.
괜히 타본다고 했나.
“가란데일!”
대체 어디 있었던 것일까.
카이델의 부름에 한 미청년이 다가왔다.
햇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금실 같은 머리카락.
새파란 호수 같은 눈동자.
왕자님의 조건을 모아놓은 것 같은 조합이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와.
데바인도 인상이 좀 험악한 편이었지만,
이 남자는 험악하다기보다 사납다.
아마 치켜 올라간 눈매와 꽉 다물린 고집스러운 입매 때문인 듯하다.
그것만 아니면 얼굴은 엄청 잘생겼는데.
으음.
뭐랄까···.
금색 털을 가진 시베리안 허스키를 보는 느낌이다.
“아샤에게 승마복장을 갖추어 주게.
그리고 등자와 안장도 가지고 오고.”
가란데일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카이델에게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었다.
“폐하의 뜻대로 모두 이루소서.”
오오.
외모와는 달리 목소리가 굉장히 예쁘다.
차가운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투명한 목소리.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목소리다.
가란데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예를 갖추었다.
나도 덩달아 같이 고개를 숙였다.
“이쪽으로.”
가란데일은 나를 데리고 마구간에 딸린 작은 오두막으로 향했다.
승마준비를 하는 곳인가?
안에는 다양한 치수의 승마복이 걸려 있는 행거가 있었다.
행거 아래에는 온갖 크기의 승마 부츠가 가지런히 열을 맞춰 서 있고,
벽에는 채찍과 이름 모를 장비들이 걸려 있었다.
세상에.
뭐가 이렇게 많아?
소설에서 봤을 땐 채찍이랑 안장 정도만 보이던데···.
가란데일은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승마복 한 벌을 내밀었다.
“저기서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나는 오두막 한구석에 마련된 작은 탈의실에 들어섰다.
탈의실이라고 해도 문을 잠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천으로 된 가림막이 있을 뿐.
설마 왕의 손님인 내가 안에 있는데 막 확확 열고 그러진 않겠지?
하긴, 뭐···.
별로 볼 것도 없지.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며 의심을 접기로 했다.
“부츠는 여기에 두겠습니다.
가림막 아래에 까만 부츠가 보였다.
헉.
길다.
나는 재킷의 단추를 잠근 후 낑낑대며 부츠를 신었다.
그리고 가림막을 걷었다.
“이렇게 입으면 되는 거 맞나요?”
으음.
이 핏이 아닌 거 같은데.
TV에서 봤던 승마복은 거의 몸에 딱 달라붙었던 것 같은데 이건 너무 헐렁하다.
재킷은 무슨 엄마 옷 훔쳐 입은 것처럼 길고 크다.
바지도 종아리 쪽은 그래도 좀 괜찮은데 엉덩이나 허벅지 쪽은···.
무슨 푸대자루를 입혀놓은 것 같을 정도다.
원래 이게 맞나?
“지금은 그게 가장 작은 치수라···.”
으음.
하긴 뭐 왕비나 공주가 있는 것도 아닌데 여자 치수의 옷을 갖춰놓을 필요가 없었겠지.
내가 옷 매무새를 정리하는 사이 가란데일이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나가라는 뜻이겠지?
나는 잠시 열린 문과 가란데일을 번갈아 바라보다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젠장.
부츠도 너무 크다.
어쩐지 쑥 들어가더라.
나는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
가란데일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 정도로 걷기 힘들어 보이나?
“괜찮아요.”
“···넘어지십니다.”
···.
으으.
벗을까?
“종아리가 까질 수 있어 부츠는 꼭 신으셔야 합니다.”
헉.
가란데일이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뭐지?
내 얼굴에 적혀있나?
나도 모르게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
가란데일이 뭐 하냐는 듯한 눈으로 바라본다.
···.
바보짓은 그만하고 빨리 가자.
나는 얌전히 가란데일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가란데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향해 엷게 웃어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장갑은 안 꼈는데 괜찮나?
으음.
안 주는 거 보면 괜찮은 거겠지···?
카이델은 나를 보자마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우습긴 하겠지···.
폭소하지 않은 것은 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마치 모친의 손을 잡은 작은 아이 같군.”
···.
아닌가 보다.
나는 처음으로 카이델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 사이에 가란데일은 조용히 등자와 안장을 카멜의 등에 채웠다.
싫어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카멜은 얌전히 서 있었다.
“카멜, 싫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물은 말에 카멜이 푸르르, 하고 대답했다.
음.
맞다는 쪽과 틀렸다는 쪽 어느 쪽일까.
뭐, 애초에 무슨 뜻인지 이해했을 리 없나.
카이델이 카멜의 왼쪽에 섰다.
왼손으로 고삐와 갈기를 움켜쥔 뒤 왼발을 등자에 걸친다.
오른손으로 안정의 뒷부분을 잡고 오른발로 땅을 박찬다.
마치 교본과도 같은 자세로 카멜의 등에 올라탄 카이델이 나를 보았다.
“이렇게 타면 된다.”
으으으으음.
이렇게 하라고 해도···.
괜찮으려나.
카이델이 고삐를 왼손에 모아쥐고 오른손으로 안장 앞을 잡았다.
오른쪽 손을 등자에서 빼고 오른쪽 다리를 넘겨 몸을 들어 올렸다.
말의 왼쪽으로 완전히 몸이 이동하자 오른쪽 손으로 안장 뒷부분을 잡았다.
그대로 왼쪽 등자에서도 발을 빼고 바닥으로 흘러내리듯 내려왔다.
타는 것도 타는 건데 내리는 게 더 문제다.
내 팔이 저걸 해낼 수 있으려나···.
“아샤.”
카이델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으음.
모르겠다.
해봐야지 알겠지.
“카멜의 엉덩이를 차지 않도록 주의할 것.
그리고 앉을 때 너무 세게 앉지 말 것.
이것만 주의하면 된다.”
나는 카이델이 했던 것처럼 고삐와 갈기를 왼손으로 잡고 왼쪽 등자에 발을 걸었다.
···.
높다.
등자에 발을 건 채로 굳어 있자 카이델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오른손은 안장 뒤편에.”
카이델은 내 손을 잡고 안장 뒤에 올려놔 주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닌데.
지금 내 꼴은 뭐랄까···.
거미줄에 한쪽 다리가 걸려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사마귀가 된 기분이다.
올라갈 수는 있겠지만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카멜의 엉덩이를 있는 힘껏 때릴 수도 있다.
게다가 지금도 헐렁거리는 부츠가 혹시 벗겨지기라도 하면···.
폭주하는 카멜에게 휘말려서 사망 엔딩을 보는 건 싫다.
으으.
“···.”
카이델이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앉았다.
뭐 하는 거지?
“내 손 위에 그대의 발을 올리고 카멜에게 기대도록.”
나는 시키는 대로 카이델의 손 위에 오른발을 올리고 카멜에게 몸을 기댔다.
그러자 카이델이 내 오른발을 들어 반대쪽으로 훌쩍 옮겨주었다.
“오른발도 등자에 걸도록.”
카이델의 말대로 등자에 발을 걸고 안장 위에 앉았다.
으으.
평소보다 눈높이가 높다.
무섭다.
“허리를 쫙 펴고 몸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
안 그러면 넘어질 수도 있으니 주의하도록.”
윽.
나는 곧바로 허리를 쫙 폈다.
카이델이 흐뭇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고삐를 다시 쥐여주었다.
그냥 막 잡는 건 줄 알았는데 잡는 방법이 따로 있는지,
내 약지와 새끼지 사이로 고삐를 통과시키더니 엄지와 검지 사이로 나오게 쥐여주었다.
반대쪽도 똑같은 방법으로 잡자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삐는 살짝 느슨하게 잡고, 몸의 중심은 조금 더 뒤로···.”
카이델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자 신기하게도 카멜이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와.
대박.
“소리를 지르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을 것.”
고삐와 연결된 줄을 잡은 채 카이델이 계속 주의사항을 말했다.
근데 그런 건 내가 타기 전에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뭐, 어쨌든 사실 기분이 좋다.
평소와 다른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는 것도 재밌고,
살랑살랑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스치는 것도 좋다.
그리고 내 아래에서 타박거리며 걷는 카멜의 움직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도 재밌다.
“잘 하는군.”
카이델이 나를 올려다보며 엷게 웃었다.
높은 곳에서 봐도 카이델은 굴욕 없이 잘생겼다.
흠.
역시 소설 캐릭터.
빈틈이 없다.
“가란데일에게 말해 둘 테니 내가 없더라도 언제든 와도 된다.”
음.
가란데일은 마구간지기 같은 느낌인가.
그럼 남주인공 후보는 아닐 테니 마음 편하게 대해도 되겠지?
“폐하는 언제부터 말을 타셨습니까?”
“10살 때부터다.
이 카멜은 내가 20살이 되었을 때 선왕에게 하사받은 말이다.
카멜이 내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고, 내가 카멜의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지.”
알 것 같다.
카멜은 고집이 없는 게 아니다.
나를 순순히 태워준 것은 그저 내가 카이델과 함께 왔고,
카이델이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카이델이 나를 태워주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신의 고집을 꺾은 것뿐이다.
“고마워, 카멜.”
뜬금없는 내 말에 카이델이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톡톡, 카멜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었다.
카멜에게 올라탄 뒤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슬슬 엉덩이가 아프다.
승마바지에 두툼한 패드 같은 게 들어있지만, 안장이 꽤 딱딱하다.
거기에 카멜이 움직이면서 위아래로 흔들리니 자연히 엉덩이가 아파져 온다.
“이제 내려오겠나?”
윽.
뭐야.
내가 그렇게 알기 쉬운 사람이었나?
아프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카이델이 내게 물어왔다.
“···네.”
카이델이 발을 멈추자 카멜도 덩달아 함께 멈춰섰다.
문제는···.
어떻게 내려가지?
“등자에서 발을 빼고 내 손을 잡도록.”
카이델이 손을 뻗었다.
으음.
혼자서 내려가는 건 좀 힘들겠지···?
아까는 엉덩이만 아팠는데 이제는 허벅지도 당기면서 아프다.
나는 순순히 카이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카이델은 무슨 인형이라도 드는 것처럼 가볍게 나를 안아 들었다.
“으앗.”
순간 다리에서 힘이 빠져서 카이델의 품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그대는 꽤 덜렁대는군.”
카이델이 쿡쿡 웃었다.
덜렁댄다기보다 근력이 약한 것뿐인데.
나는 민망함에 하하, 하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카멜은 그런 우리를 맑은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하늘 한구석에 먹구름이 끼어있었다.
비가 올 것 같다.
그리 멀지 않은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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