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의 정석, 그와 욕조에서 단둘이….
으음.
나른하다.
움직이기 싫다.
나는 넓은 탕 안에서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있었다.
“후우···.”
차박, 하는 소리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 소리의 끝에 엎어진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연신이가 있었다.
“흑흑, 너무해···.”
쫄딱 젖은 채로 눈물짓고 있는 작은 새.
묘한 죄책감이 느껴지지만, 애초에 나는 나쁘지 않다.
나쁜 것은 연신이다.
지금 시각 9시 30분.
적어도 나는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일어날 생각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카이델에게 가서 뭔가 고백을 받아낼 방도를 생각해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아침 공기가 너무 차가웠다.
누가 그랬더라.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나는 딱 그 상태였다.
“저리 좀 가봐.”
그 행복을 깨뜨린 것은 연신이었다.
털로 감싸진 쬐끄만 덩어리가 뭐가 춥다는 건지.
나는 김밥 말 듯 이불을 내 몸에 돌돌 말았다.
“온몸이 깃털인 주제에 뭐가 춥다는 건데.”
“추워!
춥다고!
이 쬐끄만 몸에 깃털이 있으면 몇 개나 있겠어!”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흐흐, 하며 승리의 포즈를 취하자 연신이 털을 부풀렸다.
커다란 공 같다.
톡 쳐서 날려버리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그러다 연신은 뭘 생각했는지 내 긴 머리카락을 몸에 감기 시작했다.
“흐흐.”
“씁.
놔라.
니 발톱에 엉키면 머리 다 뜯기잖아.”
“아씨, 치사하게 진짜! 너 천벌 받는다?”
나는 격하게 고개를 흔들어 연신을 떨쳐냈다.
연신의 눈이 세모가 되더니 뜬금없이 천벌 운운하기 시작했다.
웃기고 있네.
쬐끄만 게 천벌을 내려봤자 뭐 얼마나 내리려고.
나는 코웃음을 치고 얼굴만 이불에서 내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이이이!”
분노에 바들바들 떨리던 연신의 몸이 갑자기 진정된다.
불길한 예감에 눈을 떴더니, 눈앞에는 커다란 물방울이···.
아니, 저걸 물방울이라고 불러도 되나?
이 미친 새가···!
“윽, 차가워!”
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연신이 내 얼굴에 물의 덩어리를 내리꽂았다.
덕분에 이불도 축축하게 젖었다.
망할.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불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헤헷.
어떠냐!”
연신이 팔짝팔짝 뛰면서 춤을 췄다.
이 빌어먹을 새대가리가···.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어둠의 기운에 연신이 움찔, 몸을 움츠렸다.
그러더니 양 날개로 가드를 올렸다.
“뭐냐, 해볼 테냐!”
퐁퐁, 가드를 풀지 않은 채로 옆으로 뛰어다니는 녀석을 노려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저번 달밤의 체조 사건으로.
마음먹고 도망가는 연신을 잡을 방법은 내게 없다.
젠장, 좀만 몸이 더 빨랐어도···!
“슈슉, 슉슉!
해봐, 해봐!”
내가 좀처럼 손을 뻗지 않자 자신감이 생긴 듯,
연신은 양 날개로 잽을 날리며 나를 도발했다.
이걸 그냥 콱···.
내가 주먹을 올리자 연신이 다시 가드를 올렸다.
···하.
내가 사람도 아니고 새랑 뭐 하는 거냐.
“씻으련다.”
“엥?
안 하는 거야?”
가드를 올린 날개 사이로 빼꼼 거리며 나를 바라보던 연신이 씩 웃는다.
승리의 미소다.
얄밉지만 도리가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씨 때문에 홀딱 젖었으니까.”
“그럼 난 나갔다 온다!”
걸걸한 목소리로 보아 연신은 아마도 수컷.
그래서인지 내가 씻는다고 할 때마다 나가 있곤 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여기 온 지 한 5일쯤 됐는데 연신이 씻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나 몰래 밖에서 씻고 오는 건가?
근데 어디서?
“넌 안 씻어?”
“엥? 씻어? 내가 왜?”
···.
설마···.
“아니, 먼지도 뒤집어쓰고···.”
“나는 신이라 그런 거 없는데?
이 깨끗하고 정결한 몸은 절대로 더러워지지 않는 몸이다!”
···지···랄···.
나는 욕설을 씹어 삼켰다.
지금 저 미친 새대가리가 씻지도 않고 나랑 같은 침대에서 비비적거리고,
내 머리 위에 올라오고 내 어깨 위에도 올라왔다는 거야···?!
내 표정이 심각해지긴 심각해진 모양이다.
연신이 흠칫하며 다시 가드를 올린다.
침착, 침착하자.
화아사, 진정하는 거다.
지금 저 새대가리를 긴장하게 만들어서 좋을 게 없다.
“···.
아, 맞다.
목욕하면서 먹으라고 놔둔 건지 욕실 선반에 과자가 있더라?”
“과자?!”
“응.
난 어차피 안 먹으니까 너 먹어.”
“오예!”
연신은 신이 나서 열린 화장실 문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선반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멍청한 새대가리.
미쳤다고 화장실에 과자를 넣어두겠냐.
눅눅해져서 어떻게 먹으라고.
나는 씩 웃으며 연신의 뒤를 따라 화장실로 들어갔다.
“과자 어딨어?
과자, 과자!”
선반 앞을 기웃거리는 연신의 뒤로 조용히 다가갔다.
연신은 열린 선반에 앉아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켁!?”
아차.
너무 세게 쥔 모양이다.
연신이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후후.”
나는 욕탕에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내가 들어가기엔 아직 아직 멀었지만, 연신이 들어갈 정도의 물은 금방 받아졌다.
연신이 나를 슥 쳐다본다.
“왜?”
“설마 나 여기 집어넣을 건 아니지?”
“하하, 설마!”
나는 연신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연신을 욕조에 집어 던졌다.
“꾸엑!”
“소설의 신이면서 그것도 모르냐?
원래 설마가 사람 잡는 거야.”
···.
흠흠.
그런 연유로 지금 나는 느긋하게 목욕을 즐기고 있는 중이고,
연신은 욕조 위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눈물을 흘리는 중이었다.
“추우면 떨고 있지 말고 들어와.”
“너, 너!
어떻게 여자애가 남자랑 막 욕조에 들어가고 그러냐!”
“···?
남자?
남자가 어딨는데?”
내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자 연신이 욕조를 날개로 팡팡 두드린다.
“으허어엉.
내가 왜 저런 거랑 내기를 해서!”
“그러게.”
연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뭐지?
“이건 뭐야?”
“삐이이이익!”
꼬리깃 쪽에 있는 깃털 하나가 묘하다.
꼬리깃은 전체가 검은색인데 딱 하나만 핑크색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지려 하자 연신이 소리를 질렀다.
“마, 만지지 마!”
“···호오?”
약점인가!
어차피 잡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꼬리깃을 만질 것처럼 손을 조물조물했다.
그러자 연신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두 날개로 꼬리깃을 감췄다.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
뭐지, 이 성추행하려다 실패한 아재가 된 것 같은 기분.
눈물이 글썽글썽한 작은 새.
그 꼬리깃, 즉 엉덩이를 만지려 하는 나.
···음.
상황이 좀 그렇긴 하다.
“미, 미안.”
“됐어···.”
그 뒤로 어색한 공기 속에서 우리는 조용히 몸을 씻고 나왔다.
*********
“후.”
개운해진 몸으로 입던 옷을 입고 나왔다.
바보처럼 왜 옷을 안 가져갔대···.
나는 옷장에 손을 대었다.
“아무거나 편한 거···.”
제일 입기 쉬운 진자주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시계를 본다.
현재 시각 10시 40분.
애매하다.
“아, 일단 시녀든 시종이든 누굴 불러야 할 텐데···.”
오늘은 내가 푹 쉬도록 내버려 두라는 명령을 받았는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제 내가 손을 다친 후 카이델은 나에게 오늘 쉴 것을 명령했다.
오늘이 무도회 마지막 날이라 원래라면 드레스를 고르고 있어야 했을 테지만,
덕분에 이렇게 느긋하게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시종이 오지 않는 것은 귀찮다.
뭔가 부를 방법이 없나?
항상 데바인이 옆에 있어서 한 번도 시종이나 시녀를 불러본 적이 없어서···.
나는 두리번거리다가 침대 옆에 늘어진 긴 밧줄을 발견했다.
“오, 혹시 저거···.”
그 판타지나 로판에서 나오는 그 줄인가!
당기면 시종이나 시녀가 쪼르르 달려오는!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줄을 잡아당겼다.
음.
아무도 오지 않는다.
잘못 당겼나?
나는 다시 한번 온 힘을 다해 세게 줄을 잡아당겼다.
···.
······.
·········.
“···왜, 왜 아무도 안 와?!”
체감상 5분은 넘게 기다린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늦다.
슬쩍 연신이 쪽을 보니 시무룩하고 있던 때가 언제냐는 듯 깔깔거리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이, 이게 아닌가.
나는 살짝 상기된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흠흠.
어쨌든 침대나 이불을 이대로 둘 순 없다.
사람을 불러와야 한다.
방법은···.
“직접 가면 되지, 뭐.”
나는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리는 연신을 발로 톡 차주고 문으로 향했다.
절대 일부러 찬 건 아니다.
그냥 내가 가는 진로 방향에 연신이 있었을 뿐.
응응.
나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니, 나가려 했다.
“···?”
앞이 어둡다.
눈앞이 새까맣다.
뭐지?
내 미래인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위로 올렸다.
카이델이 불쾌한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야, 표정이 왜 저래.
“폐하?”
“어디를 가는가?
나는 그대에게 쉴 것을 명했을 터다.”
“아···.
그 데바인을 좀 부르러 가려 했습니다.”
카이델의 눈썹이 씰룩인다.
아니, 왜 저래!
내 신변을 도와주라고 데바인을 붙인 건 당신이거든요!
“침대가 좀 젖는 바람에 치워줄 것을 부탁하러 가려던 참입니다.”
하하, 하고 웃자 카이델이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흐트러진 침대를 보며 살짝 얼굴을 굳히더니 옆에 늘어진 줄을 잡아당겼다.
···.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침묵만이···.
“아.
그러고 보니 이 방은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어 연결을 끊어두었겠군.
원래 이 방은···.”
카이델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진다.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카이델에게 다가갔다.
카이델은 입술을 꽉 깨물고 뭔가에 견디고 있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카이델은 내 시선에서 도망치려는 듯 뒷걸음질을 쳤다.
뭐지?
원래 이 방은···, 이라고 했었나?
원래 이 방이 뭐였길래 갑자기 저러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카이델의 바로 앞까지 발을 옮겼다.
“폐하.”
카이델은 내 부름에도 나를 보지 않았다.
그제 정도부터 나를 봐도 얼굴이 붉어지지 않길래 익숙해졌나 했는데.
오늘은 첫 만남이 있었던 그 날만큼이나 얼굴이 붉다.
“폐하?”
“···마, 말하라.”
말을 더듬는 카이델이라니.
이게 소설이라면 틀림없이 이 장면을 회차 표지로 삼았을 것이다.
나는 왠지 모르게 장난기가 발동해 씩 웃으며 물었다.
“이 방은···, 무엇입니까?”
카이델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입에 자물쇠를 달아놓은 것 같은 굳건함.
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무엇입니까, 폐하?”
카이델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새 벽이 카이델의 등에 닿고 있었다.
이제는 뒤로 물러날 수도 없게 된 카이델은 묵묵히 견디고만 있었다.
“폐하?”
그런 카이델이 재미있어 나는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자 카이델이 약간 화난 얼굴로 눈을 떴다.
“그대는···, 내가 이러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군.”
윽.
나는 찔끔해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카이델이 내 옆쪽으로 슥 돌아 나왔다.
“나는 그대가 걱정되어 온 것인데 그대는 종종 나를 놀리는군.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다.”
아차.
또 선을 넘었나.
사람을 대하는 것이 서투른 나는 한 번씩 이렇게 선을 넘을 때가 있다.
나는 순순히 사과하기로 했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폐하.”
카이델은 화가 난 얼굴이지만 불쾌한 얼굴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쑥스러운 상황을 화내는 것으로 해결한 느낌이다.
으음.
뭐, 됐나.
굳이 알아내야 할 것도 아닌데.
“제 손은 이제 괜찮습니다, 폐하.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사제를 닦달해서 칭칭 동여맨 붕대 아래에는 흉터도 상처도 없다.
유리 조각을 빼지 않은 채로 치유마법을 걸어서 좀 걱정했는데,
어떤 원리인진 모르지만 제대로 제거된 건지 아픔도 간지러움도 없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카이델에게 웃어보였다.
“그렇다면 됐다.”
카이델은 무뚝뚝한 말 한마디만 남긴 채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내 기분 탓일까.
그 귀는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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