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정석, 왠지 모르지만 미로도 아닌데 헤매게 되는 마력의 장소
으으.
마차를 타고 있는 동안 계속 입씨름을 했더니 죽겠다.
“너 의외로 입 좀 놀린다?”
“닥쳐.
사람이 몰리면 뭔들 못할까.
솔직히 내가 뭘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조금 전에도 같은 방을 써야 한다는 문제로 투닥거린 참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대는 기사들과 같은 방을 쓰겠다는 건가?”
“미친 거 아니에요?
이 나라에서는 여자랑 남자랑 막 섞여서 자나보죠?
아니면 날 길거리 여자처럼 보는 건가요?
어느 쪽이건 미개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군요!”
“그러니까···.”
카이델이 변명을 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재빨리 말을 잘랐다.
“그쪽은 남자 아니에요?
그쪽이 얼마나 높은 사람인지 내 알 바 아니거든요?
아니지, 높은 사람이면 더 위험한 거 아니에요?
날 가지고 뭐 하려는 건데요?”
“아니···.”
“됐고요!
전 그냥 여기서 잘래요!
당신들이랑 섞여서 자느니 말이랑 섞여서 자는 게 낫겠어요!”
카이델은 뭔가 나를 더 설득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지만 이내 입을 닫았다.
그리고 머리를 싸쥔 채 테베에게 눈짓을 했다.
“···.”
테베는 나를 보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으윽.
테베의 따스한 눈을 기억하는 나에게 있어 지금의 표정은 꽤 아프다.
하지만 어차피 이번 공략 대상은 테베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공략 대상은 정원사.
나는 테베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그대 마음대로 하라.”
카이델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기사들과 함께 숙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귀찮은 캐릭터를 설정해버렸어.”
“응?
뭐가 귀찮은데?”
“억지로 방방 떠서 행동해야 하잖아.”
“억지로?”
연신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
뭔가 눈빛이 불만 가득해 보인다.
“뭐.”
“뭐.”
“왜 그렇게 보는데.”
“내가 뭘.”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데?”
“니가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 거 아니고?”
···.
빌어먹을 새대가리.
“모르겠다.
난 자련다.”
“담요 가져올 텐데, 곧?”
“아, 맞다.”
이번의 테베도 그래 줄까?
지금의 나는 테베의 취향이랑은 전혀 반대일 텐데.
내가 파악한 테베의 취향은 여리여리하고 지켜주고 싶은 타입.
이렇게 드세고 발랑 까진 타입이 아니다.
농담으로라도 지금 내가 연기하는 내가 지켜주고 싶은 타입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
아니, 테베라면.
그 상냥하고 마음 따뜻한 남자라면 내가 어떤 사람이건 똑같이 대해줄 것이다.
다만, 공략하기 더 쉬운 타입이 그 타입이었을 뿐이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대로 테베가 찾아왔다.
“실례합니다.”
가벼운 노크 소리에 이어 테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거기에는 당황한 듯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테베가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 모포를···.”
“아, 감사해요.
안 그래도 추웠었는데.”
나는 생글 웃어 보였다.
이제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웃음이었다.
일명 ‘어딘지 사람 약 올리는 것 같은 웃음’.
물론 이번에도 명명자는 주변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냥 환하게 웃는다고 생각했던 웃음인데,
왠지 모르게 주변의 사람들은 사람 약 올리냐고 되묻는 일이 많았던 웃음이었다.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지만.
하지만 테베는 그런 웃음에도 살짝 귀를 붉혔다.
“그, 그럼 쉬십시오.”
으음.
귀엽다.
마지막 엔딩롤에서 본 모습이 덧씌워져 간다.
나는 아주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자자.”
“그러고 보니까 나도 남잔데 너랑 자도 돼?”
···.
어이가 없어서 뒤돌아봤더니 나름대로 진지한 얼굴로 묻고 있었다.
그럼 나도 진지하게 대답해줘야지.
“니가 무슨 남자야?”
“나도 남자거든?”
“새는 남자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아요.
그냥 새죠, 새.”
“너, 이씨!
내가 얼마나 멋진 남잔지 알아?!
여기 있는 남자들이랑은 비교도 안 될만큼 멋지거든?!”
“아, 그러셔?
그렇군요.
어이구, 제가 잘난 남자를 못 알아봤네요.
그래봤자 콩알만한 남자지만.”
“콩알이라니!”
“콩알이지 그럼 니가 무슨 밤톨이냐?
···.
아니지, 밤톨이면 좋은 승부가 될지도···.”
“야!”
나는 낄낄 웃고는 연신이의 옆에 드러누웠다.
연신이가 슬금슬금 내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왔다.
“에에?”
“왜.”
“남자라서 나랑 같이 못 자겠다는 분이 왜 여기에 끼어들어?”
“춥잖아!”
“남자라며?
남자라면 버텨야지!”
“그건 편견이거든!”
연신이가 삐뚤어진 표정으로 내 머리카락으로 몸을 덮었다.
···.
멍청이.
그래도 그 작은 몸이라도 묘한 온기가 있다.
응.
따뜻하다.
나는 조용히 잠들었다.
*********
으음.
제멋대로 캐릭터 의외로 편한데.
말괄량이를 연기하다보니 좋은 게 많았다.
뭣보다 카이델이 나에게 간섭해오는 게 줄었다.
“그대, 옷을···.”
“불편한데요.”
“그래도 궁중의 예법···.”
“귀찮고 치렁치렁해요.
그런 게 궁중의 예법이면 그냥 궁에서 나갈래요.”
“···됐다.”
흐흐흐.
이런 식이다 보니 편해졌다.
혼자 행동할 수 있는 시간도 많아졌다.
그렇군.
카이델의 약점은 이런 캐릭터였나보다.
하긴, 반해있는 상대인데 강압적으로 할 수 없다.
그것이 얼마나 귀찮은 일이겠나.
게다가 말이 통하는 상대도 아니고.
덕분에 나는 오늘도 느긋하게 정원에 앉아있을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
지난번에 정원사를 만났을 때는 카이델의 소개가 있었다.
그때 오두막의 위치를 듣긴 했지만, 지금의 나는 그 오두막의 위치를 알아선 안 된다.
내가 불쑥 거기에 나타나면···.
으음.
수상쩍은 인물로 낙인찍히겠지?
벌써 일주일째 정원에서 죽치고 있는데 상대는 나타날 마음도 없고···.
슬슬 정원의 다른 데로 가 봐야 하나?
“야, 연신.”
“왜.”
“산책가자.”
“혼자 가.”
“그럼 그 슈···피? 걔가 어디 있는지나 좀 알려주던가!”
“내가 왜 알려주냐!
나도 몰라!”
으으.
유일하게 내 사정을 아는 놈은 저런 식으로 나오고 있고···.
앞길이 참 험난하다, 험난해.
벌써 네 번째 공략인데 왜 이리 힘이 든 것일까.
나는 무거운 허리를 일으켰다.
“···후.”
하긴.
생각해보면 그동안이 너무 편했던 건지도 모른다.
가만히 앉아서 굶고만 있으면 됐으니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다소 움직여줘야지.
어디 보자···.
오두막이라는 건 본궁과 정원 사이에 있는 작은 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정원을 둘러보던 말괄량이가 오두막 근처로 기어들어 가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뭐, 여차하면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창고 같은 곳인 줄 알고 들어왔다고 하면 되겠지.
응.
“나 간다.
이따가 방에 들어가 있어.”
“응~.”
연신이는 따스한 햇빛이 닿는 자리에 드러누워 있었다.
멍청한 얼굴.
그래도 가만히 있으니 귀엽긴 하다.
나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정원을 헤매고 다녔다.
으음.
이거 꽃 몇 개 꺾으면 나오지 않을까?
슬쩍 손을 꽃으로 가져가 보았다.
하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
쩝.
나는 꽃을 한 번 부드럽게 쓰다듬은 후 놓아주었다.
그리고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며 오두막으로 향했다.
보기엔 가까워보였는데 생각보다 멀었다.
이거라면 정원 정자 근처까지 가지 않고 여기 온 변명이 통할 것 같다.
그건 그런데···.
“헉, 헉···.”
힘들다.
진짜 힘들다.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 빡세다.
정원 사잇길이 그리 넓지 않다.
애초에 이 정원은 그저 멀리서 보기 위해 만들어진 건지도 모른다.
이 길도 하나의 디자인 같은 건지도 모르지.
그 좁은 길을 신경을 곤두세운 채 걷고 있자니 금새 숨이 차올랐다.
안 그래도 체력이 약한데···.
미치겠네.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그나마 위안이 있다면 오두막이 멀지 않다는 것.
좀만 더 가···.
윽.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오랜만에 햇빛을 너무 많이 쬐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대로 풀밭에 쓰러졌다.
“···후···.”
생각보다 바닥은 폭신했다.
풀이 이불 대신이 되어주었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대로 잠시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
후.
좀 살 것 같다.
나는 잠시 누운 채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보지 않은 지가 언제지?
첫날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 후에는 제대로 하늘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것도 이렇게 새파란 하늘은.
그러고 보니 테베가 두 여동생이 보고 싶어지면 하늘을 바라본다고 했었던가.
으음.
조금 알 것 같다.
저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여러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몇 안 되는 내 친구들.
성질 더럽고 사연 많은 내 옆에 있어 주던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다들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어쩌면 나를 걱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여기랑 현실의 시간 관계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네.
어저면 현실에서는 1초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제일 걱정되는 것은 현실보다 훨씬 느리게 시간이 흐르는 것.
혹은 현실과 다름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
그렇다면 나는 지금 여기서 몇 달, 혹은 몇 년을 보내고 있는 건지 모른다.
“···.”
두렵다.
그 아이가 나를 잊으면 어쩌지.
나를 두고 어디론가 가버렸으면 어떻게 하지.
너무 늦게 데리러 간 나를 미워하게 됐으면 어떻게 하지.
처음 내기를 받아들였을 때는 금방 끝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간 관계 따위 알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일단 정원사를 점찍고 공략하고는 있지만 앞으로 얼마가 더 걸릴지 모른다.
앞으로 몇 명이나 더 공략할 대상이 남아있는 것일까.
내 기억으로는 최소한 카이델의 동생과 재무대신은 남주인공 후보로 보였다.
다만 그 둘을 만날 루트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 가장 만나기 쉬운 상대들을 공략하고는 있지만···.
이러다가 나중에 가일을 공략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쓰게 웃었다.
“거기서 뭐 하십니까?”
부드러운 목소리.
마치 꽃잎이 부끄러워 얼굴을 숨길 것 같은 상냥한 목소리였다.
낯설면서도 낯익은 목소리다.
“하늘을 보고 있어요.”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음.
말괄량이인 나를 연기할 필요가 생겼다.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왜 거기 누워서 바라보고 계십니까?”
“힘들어서요.”
“힘들다고 하시면···?”
“어떤 놈이 만들었는지 정원이 더럽게 복잡해서요.
예쁘긴 한데 실용성은 꽝이네요.
한참 헤매다 보니 지쳤어요.”
쿡쿡,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일으켜 웃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풀잎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싱그러운 색을 품고 있는 머리카락.
태양처럼 쨍하니 빛나는 아름다운 눈동자.
햇빛에 그을린 피부와 달리 가늘고 유려한 몸의 선.
틀림없다.
슈···, ···, 뭐더라.
슈피밖에 기억 안나네.
“그쪽은 왜 이런 곳에 있는데요?”
“음, 여기가 제 집이니까요?”
“엥?”
나는 고개를 돌려 슈피의 뒤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생각한 것보다 더 너저분한 오두막이 있었다.
···.
응.
절대 아니지.
응.
“장난치지 말구요.”
“장난 아닌데요?”
“저런 데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요?”
“생각보다 살 만 하답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들러보시겠어요?”
에엥.
···.
아니, 생판 모르는 여자를 집에 들여?
좀 위험하지 않나.
하긴 위험한 건 난가.
나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슈피를 올려다보았다.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 슈피가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지치신 것 같아 차라도 대접하려 했습니다.”
···.
뭐, 이거 19금도 아니고 괜찮겠지.
아니, 아니, 아니.
그래도 방심하지 말자, 화아사!
이미 잘 아는 대로 남자란 다 변태다!
다 늑대란 말이다!
물론 소설 속 캐릭터니 작가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겠지만···.
그래도 남자의 본능을 우습게 보지 마라!
이미 충분히 당했잖아!
“···그럼 차만 마시고 갈게요.”
나는 어쩔 수 없이 마셔준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목마르고 덥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살짝 손부채로 얼굴을 부쳤다.
“후후.”
슈피가 엷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오두막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오두막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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