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판타지의 정석, 여주인공은 왕의 비로 간택되고
어딘지 익숙한 전개다.
잠에서 깨어나니 붉은색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음.
놀라야 할까.
아니면 담담하게 있어야 할까.
나는 어딘지 남 일처럼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폐하?”
“···그럼 누구라고 생각했나?”
붉은 눈동자가 차갑게 일그러진다.
어우.
무서워라.
하지만 한 번 있었던 일이어서인지 좀 덜 당황스럽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라고 반응해야 할까.
“이런 이른 아침에 여성의 방에 들어오시다뇨.
폐하께서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하셨을 거라 믿을 수가 없어서 여쭤봤을 뿐입니다.”
똑부러지게 행동.
음.
이번 내 캐릭터는 그랬다.
나는 서둘러 가면을 쓰고 입을 열었다.
카이델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비뚤어진 웃음을 지었다.
“무례한 행동이라.”
“아니면 이 나라에는 이른 아침에 씻지도 않은 여성의 방에 들어오는 것이 예의인가요?
그런 것이라면 제가 실례를 저지른 것이겠군요.”
나는 이불을 꽉 쥔 채 뻔뻔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이유는 알고 있는 주제에.
갈수록 거짓말이 능숙해지는 것 같다.
“어제는 꽤 큰일을 저질러 주었더군.”
나는 말문이 막힌 것처럼 입을 닫았다.
으음.
어떻게 반응해볼까.
“그런데 이상하지.
어제 나는 그대의 외출을 허가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그대가 자유 교역구역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내 귀에 들려오는 것일까.”
아.
허가, 안 받았던가?
으으음.
보통 때 그런 건 솔라에게 맡겨놨었기에 잘 모르겠다.
어제는 즉흥적으로 어디에 갈지를 정했으니까···.
솔라도 깜빡했을지도 모르지.
뭐, 어쨌거나 덕분에 카이델의 화는 내 예상 이상으로 치솟아 있는 것 같다.
당장에라도 날 벨 것 같은 살기가 온몸에서 풀풀 피어오르고 있다.
“제가 성 밖으로 나가는 것에 폐하의 허가가 필요한가요?”
하지만 나는 마치 일부러 그랬다는 듯 뻔뻔하게 행동했다.
설마 이 정도로 자신의 동생을 죽이거나 어떻게 하진 않···겠지?
“그대는···.”
카이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핏발 선 눈.
이번에도 밤에 한숨도 못 자고 날 지켜보고 있었나.
아, 어쩌면 옆 방이 바로 솔라의 방이니 감시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카이델은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그러나 어차피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나는 의연하게 카이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금 더 자신의 입장을 아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침대 바로 옆에 선 카이델이 침대로 올라온다.
한쪽 다리는 침대 아래에 있는 채로, 한쪽 다리는 무릎을 꿇고.
한 손은 침대 위에 놓아 몸을 지지하고 한 손은 내 뺨에 가져다 대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카이델의 약간 거친 향기는 여전히 마음이 편해지는 향이었다.
“제 입장이요?”
나는 피식 웃었다.
이번에도 나는 카이델에게 끌려왔다.
카이델이 내게 입장 운운할 입장은 아니다.
“폐하.”
나는 살짝 뒤로 물러나 카이델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카이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봐 주었다.
“제가 제 발로 걸어와 폐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받았다면 모르겠지만,
저는 폐하에게 억지로 끌려와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폐하께서 제가 못마땅하시다면 언제든지 성에서 나가겠습니다.”
물론 허세다.
지금 몇 번의 회귀를 거쳤는데도 성 이외에는 거의 모르는 내가 어딜 나가겠나.
하지만 뭐, 솔직히 나간다고 해서 지낼 수 없는 건 아니다.
아마도.
뭐, 죽기야 하겠어.
“···.”
카이델은 명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이게 바로 팩폭이라는 건가.
“제 입장은 폐하의 손님 아니었나요?
폐하는 저의 무엇입니까?
주인이신가요?
저는 폐하의 허락 없이는 성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건가요?
저는 폐하의 노예라도 되는 건가요?”
카이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조금 속이 시원해졌다.
“그대는···.”
“저는 폐하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일부러 선을 긋는다.
카이델의 집착과 질투가 더 심해지게.
나에게 더 집착하고 질투해야 한다.
솔라의 접근을 막아줘야 한다.
기왕이면 지하감옥에 가둬줄 정도로 질투했으면 좋겠다.
솔라는 지금까지 형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왔다.
왕위도 좋은 이미지도.
그러기 위해 많은 걸 포기했다.
자신의 이미지.
진짜 자신을 드러내는 것.
꼽으면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그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솔라는 내 곁에 서는 걸 포기했다.
형을 위해서.
형의 감정을 알기 때문에.
이번에도 형에게 나를 양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점점 마음은 커졌을 것이다.
더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내 이름을 부르며 느끼한 말을 지껄이게 된 게 그 증거다.
진심으로 나를 유혹하고 싶은 것이다.
장난인 척하면서.
그게 무슨 뜻이냐.
그건···.
“제 입장은 어디까지나 폐하의 손님입니다.
처음에는 납치당해온 피해자였지만요.”
솔라의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는 걸 뜻한다.
“···아샤.”
카이델의 눈동자가 복잡해졌다.
광기에 멀어있던 눈동자가 조금 빛을 머금었다.
이러면 곤란하다.
다시 화를 돋울 수 없으려나.
“폐하.
폐하께서 왜 화가 나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폐하께 그런 망언을 듣거나
무례를 범하시게 할 정도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전 그저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그런 저를 도와주시고 계실 뿐이고요.
어제 간 식당 역시 그중에 하나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솔라는 지금도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
내게 고백하고 싶은 마음을.
나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싶은 마음을.
그런 솔라를 자극할 수 있는 마지막 조각.
그것은 나를 막 대하는 카이델이다.
“원래 세계···?”
카이델의 눈동자가 다시 탁해진다.
검게 물든다.
됐다.
“네.
아무 생각 없이 로브를 벗어 소란을 일으킨 것은 사과드리겠습니다.
그 때문에 전하께서 곤란해지셨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
오오.
역시.
딱 좋다.
카이델의 눈이 활활 타오른다.
“돌아간다고?”
“네.”
지금의 카이델은 나에 대한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게 사랑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
그저 나에게 이유 모를 집착을 느끼고 있을 뿐.
그런데 거기에 내가 기름을 부었다.
당연히 불은 타오를 것이다.
자신의 이름조차 모른 채.
“···불허한다.”
카이델이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하얀 머리카락에 가려진 붉은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른다.
“폐하?”
나는 당황한 얼굴로 카이델을 바라보았다.
카이델이 한 뼘 더 내게 다가왔다.
가까워.
가깝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애써 삼켰다.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
“폐하.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지금부터 그대는 나의 손님이 아니다.”
좋아쓰.
감옥.
기왕이면 제일 낮은 대우를 해주면 좋겠는데.
“지금부터 그대는 나의 비가 될 것이다.”
···.
······.
·········.
네?
*********
곤란하다.
매우 곤란하다.
아니, 어째서?
왜 내가 비가 되는 거지?
이건 아니잖아?
나랑 카이델, 이야기한 적도 거의 없는데?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됐을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카이델은 이미 공략한 상대.
공략해도 의미가 없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
“낄낄.
축하한다.”
···.
빌어먹을 새대가리.
즐기고 있구만.
“너, 백숙 되고 싶냐?”
“백숙?”
“몰라?”
“나는 닭이 아니거든?”
“응.
근데 닭으로 만든 건 닭백숙이야.
왜냐면 백숙이라는 건 고기나 생선을 양념 안 하고 맹물에 푹 삶은 걸 말하거든.
즉, 너를 백숙으로 만들면 뱁새 백숙이라는 거지.”
연신이의 얼굴색이 새하얘졌다.
아니, 새하얬지.
처음부터.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아, 창백해졌다.
“그게 싫으면 타개책을 생각해 봐.
이러다가 비가 되게 생겼잖아.”
“거절하면 되잖아.”
“거절은 이미 했지.”
그 날.
나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고개를 내저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카이델은 내 거부를 무시했다.
내게서 멀어지면서 그 남자다운 얼굴로 기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대되는군.
결혼식 때의 그대가.”
아니.
안 한다니까?
나는 어이가 없어서 카이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카이델은 그런 나를 깨끗하게 개무시하고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니···.
곤란하다.
이런 전개는 매우 곤란하다.
자유를 빼앗기지도 않았고···.
뭔가 지시 당하지도 않았다.
감시당하는 것 같지도 않고.
이러면 솔라를 폭발시킬 명분이 부족하다.
뭔가 없나?
뭔가 방법이 필요한데.
“야.”
“응?”
“옆방에 솔···레기안 있어?”
“응.”
에?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
대충 대답하지 말고 제대로 보고 대답해 봐.”
“있다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아냐고!”
“옆 방에서 소리가 나니까.”
“소리?”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린다.
이 새대가리가 날 바보로 아나.
나는 연신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잘난 척하며 에헴, 자세를 취하는 녀석을 꽉 쥐었다.
“어?”
“아무 소리도 안 들리잖아.”
반대편 손으로 딱콩을 날렸다.
순식간에 새하얀 머리에 혹이 솟아올랐다.
“으아아악!”
“귀찮다고 이러기냐!”
“아니, 제대로 들린다고!
나 이래 봬도 신이거든!
귀 엄청 좋거든?!”
귀가 좋으면 신이 아니라 개 아니냐.
애초에 귀가 어디 있다는 거야.
머리가 내 엄지손가락보다 좀 더 큰 주제에.
“만약 갔는데 솔레기안이 없으면 어떻게 할 건데?”
“없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
너 손 없잖아.”
“에잇!
대충 알아들어라, 쫌!
날개 앞에 요기에 장 지지겠다고!”
“거기 깃털이잖아.
장 지져도 안 아프잖아.”
“칫.”
···.
이 새대가리.
누굴 바보로 아는 건가.
“아무튼, 가 보라고.
지금 쟤 미치려고 하는 거 같으니까.”
“미쳐?
왜?”
“나야 모르지.
너 결혼한다는 이야기 들은 거 아니야?”
흠.
하긴 왕족이니 들었을 법하지.
돌겠네.
“쟤 성격에 나 포기하려고 할 텐데.”
“작별 인사라도 해주지그래?”
“···백숙 만들어 줘?”
“흠흠.
아무튼, 가 보라니까?
뭐 좋은 일 있을지도 모르잖아.”
좋은 일이라···.
니가 말하면 불안한데.
나는 차가운 시선을 연신이에게 날려주고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있으면 또 배드 엔딩이 뜰지도 모른다.
어차피 배드 엔딩이 된다면 그냥 움직이는 게 낫다.
“갔다 올게.”
“응, 갔다 와.”
일단 혹시나 해 복도의 기색을 살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가면 곧바로 기사들한테 제압당하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
응, 그럴 줄 알았어.
아무도 없다.
망할.
김 새네.
후.
일단은 솔라의 방으로 가 보자.
“···흠.”
문 앞에 선 채 고민에 빠졌다.
노크할까.
아니면 그냥 문을 열까.
어느 쪽이 더 솔라를 공략하는 데 나을까를 고민하는 사이 왠지 모르지만, 문이 열렸다.
“···아샤, 님?”
어딘지 어두운 얼굴의 솔라가 멍하니 나를 불렀다.
너무 갑작스러워 순간 반응이 늦었다.
“···아샤님.”
솔라의 눈이 글썽인다.
···.
우는 거야, 설마?
이 세계의 남자들은 왜 이렇게 잘 우는 거야, 대체.
“솔레기안 전하.”
솔라의 뒤로 슬쩍 방 안의 상황이 보였다.
어우.
엉망이다.
이래서 연신이가 미치려고 하는 것 같다고 했구나.
“진짜 아샤님···인가요?”
솔라의 입에서 단내가 난다.
뭐지?
이 달콤한 냄새는···.
뭔가 싫은 기분이 든다.
술?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나는 솔라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카이델의 질투를 이 이상 끌어 올릴 필요는 없다.
게다가 질투의 방향이 엇나가고 있으니.
“아샤님···.”
솔라는 얌전히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방 안에 들어가자 달콤한 냄새가 더 심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술 냄새가 풀풀 나기 시작했다.
아.
나는 정말로 술이 싫다.
죽어라 싫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안 든다.
···.
후.
그래도 어쩌겠어.
집에 가려면 공략해야지.
나는 마음을 다잡고 솔라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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