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정석, 눈물없는 캐릭터는 정에 약하다
마리와 마치 교대라도 하듯 테베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왠지 모르지만 그런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저를 볼 때마다 그렇게 물으시네요.”
“···.”
테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렴풋하게 웃었다.
침묵 속에서 테베는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않고 문 앞에서 멀거니 서 있었다.
불편하다.
자기 집인데 마치 정말 내 방처럼 행동하고 있다.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에 불편한 걸까.
“지금의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경의 주군이 사랑하는 여자도 아니고, 검은 머리의 마녀도 아니에요.
그냥···, 그냥···.
···그러니 그렇게 윗사람 대하듯 하지 마세요.”
일개 평민, 조차도 못 되는 나에게 테베가 저렇게 어려워하는 건 이상하다.
심지어 지금의 내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그런데도 테베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샤님은 제 손님이십니다.
손님으로 모셔온 이상 주인으로서 할 도리를 하는 것뿐입니다.”
“어느 주인이 제 집에서 멀뚱히 서 있나요.
정말로 그런 거라면 편하게 계세요.”
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쁘게 보일 필요도 없고, 좋게 보일 필요도 없으니까.
그런데도 테베는 내게 엷게 웃어주었다.
“아샤님께서 불편하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
감정의 잔재는 마음에 마치 녹처럼 달라붙는다.
긁어내도 긁어내도 쉬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녹 아래에 있는 쇠까지 손상시킨다.
테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테베는 어떤 느낌일까.
내가 아닌 나의 기억.
그 기억 속에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사랑한 여자.
하지만 나 자신은 그 여자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다.
그건, 어떤 기분일까.
“···.”
아무리 생각해도 테베를 생각하면 여기 있어선 안 된다.
그런데도 나는 왜 여기에 남아있는 것일까.
누가 감시하는 것도 아니다.
나가려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다.
나 혼자 있는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문득, 스스로에게 비웃음을 지었다.
왜긴 왜야.
두려우니까.
무서우니까.
저 밖에 나가기 싫으니까.
이 안락하고 포근한 곳에서 나가면,
차갑고 험난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는 것뿐이다.
“무슨 일이세요?”
“그냥 상태가 궁금해서 찾아왔을 뿐입니다.”
“왜요?”
“···제 손님이시니까요.”
하긴, 그렇겠지.
너무 날 선 대답을 했나.
하지만 진심으로 생각한다.
테베가 자신의 감정을 착각하지 않기를.
“그건 감사합니다만···.
이제 열도 진정된 것 같고, 저는 슬슬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입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막을 생각은 없다.
조금 전, 스스로를 비웃지 않았던가.
나가야 한다.
여기서.
안 그러면 나는···.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다.
조금 더 머물다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간절한 눈빛.
나는 차가운 얼굴로 미소 지었다.
“경께서 기억하시는 저는 제가 아닙니다.
그건 그냥···.
거짓되고 지어낸 저일 뿐.
지금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마음 쓰지 마세요.
그냥, 모두 잊어버리세요.”
녹이 슬어버린 마음은 다시 쓸 수 없다.
그러면,
가장 좋은 것은 버리는 것이다.
내가 사라지면 된다.
“사실 흔들렸습니다.
너무 따스하고 좋아서···.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나가야 합니다.
저는 당신이 원하는 아샤님이 아니니까요.”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나를 알아버린 테베는 아마도 내 안에서 자신이 아는 아샤를 떠올릴 것이다.
망설임은 끝났다.
*********
난감하다.
마지막 호의라고 생각해달라며 디리가 건네준 옷과 신발을 갖추고 떠나는 나를 잡은 건,
맑은 눈망울이었다.
“안 가면 안 돼요?”
마리가 녹색 눈동자로 매달리듯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이사를 떠오르게 했다.
떠나던 나를 바라보던 이사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겨우 하루 만난 나를 저런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리는 어떤 아이일까.
어떻게 자라면 저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갈구할 수 있는 걸까.
모르겠다.
“미안해요, 마리.”
슬쩍 주변을 살폈다.
절대로 배웅을 나오지 말라는 내 신신당부를 어긴 것은 다행히 마리뿐인 듯했다.
나는 마리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오빠를 위해서는 제가 떠나야 해요.”
“왜요?”
순수한 질문.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
“오빠는 아샤 언니가 좋댔어요.”
“···오빠가요?”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색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마구 흐트러졌다.
마치 불꽃놀이처럼 반짝이며.
“오빠는 아샤 언니가 여기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
기억이 되돌아온 것뿐만 아니라 감정도 되돌아왔나?
아니면···.
속성의 힘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걸까?
다른 남주인공 후보를 만나봐야 알 것 같다.
나는 디리가 챙겨준 보따리를 바닥에 놓고 마리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오빠는 나랑 있으면 안 돼요.”
“왜요?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고.
그래서 어머니는 우리 가족이 다 함께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댔어요.”
그건 서로 사랑할 때다.
나는,
그래, 인정한다.
나는 테베를 좋아한다.
인간적으로 테베는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저에겐 마리의 오빠를 사랑할 자격은 없어요.”
“사랑에는 자격이 없댔어요.”
···.
그건···.
어렸을 때나 통하는 이야기다.
“마리.
가족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어요.
왜냐면, 가족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조건을 채웠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나와 마리의 오빠는 가족이 아니잖아요.”
애한테 뭘 설명하고 있는 건가, 싶다.
근데 막상 마리의 눈을 보면 대충 넘길 수가 없다.
“사랑하는 데는 너무 많은 조건이 필요해요.
가문도, 출신도, 외모도, 능력도···.
오빠에게는 나 같은 여자는 어울리지 않아요.”
무엇보다,
테베처럼 사랑을 줄 줄 아는 사람은 나 같은 여자랑 엮여선 안 된다.
그저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는 관계.
하지만 나는 사랑을 받는 방법조차 잘 모른다.
길게 이어질수록 테베가 피폐해질 뿐이다.
“그러니까 마리.
오빠가 혹시 마음이 아파하거든 옆에서 잘 위로해줘요.
내가 멀리 떠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분명.”
나는 마리의 머리를 살짝 헝클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금세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갔다.
“붙잡아줘서 고마워요, 마리.”
나는 그 말만 남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마리는 그런 내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제야 마음이 놓여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거짓말쟁이.”
나한테 별장은 사용 안 하는 곳이라고 했으면서.
마리나 디리가 괜히 저기 있을 리가 없겠지.
아마 내 부담을 덜어주려고 한 거겠지만···.
···.
아니, 테베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내게도, 카이델에게도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
그렇다는 건, 설마···.
내 간호 때문에 디리나 마리를 부른 건가?
“설마···.”
그런 이유로 자신의 여동생을 불러들이는 게 가능한가?
하급이지만, 귀족인데?
음.
절대 아니다.
“연신아···.”
무심결에 연신이를 부르다가 흠칫, 놀라 멈췄다.
바보같이.
벌써 며칠이나 연신이가 없었는데···.
하긴.
혼자 있는 시간은 거의 잠들어 있었고,
그게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구나.
평소 혼자 있는 시간 아니면 연신이랑 이야기를 안 했으니까···.
하하.
바보 같다.
영화나 소설에서 이런 바보짓 하는 거 볼 때마다 비웃었는데.
내가 이러고 있네.
“···!”
스스로를 비웃는 사이 숲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흠칫 놀라 멈췄다.
무섭다.
지금까지는 연신이가 지켜주던,
아니면 남주인공 후보 중 누가 지켜주던 했으니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죽으면 되살아난다는 보장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연신이도 없고, 남주인공 후보 중 그 누구도 내 곁에 없다.
죽으면 되살아···날 수 있을까?
그런 보장이 있나?
원래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속성의 힘이 발동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그 구조는 이미 깨어졌다.
회귀의 조건이 그대로라는 보장은 있을까?
죽을지도 모른다.
그 두려움이 내 발을 멈추게 했다.
“···.”
세상에.
나도 사람이었구나.
죽음이 두려웠구나.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의 이중성에 놀랐을 뿐.
이사 핑계를 대기엔 늦었다.
그 소리를 들은 시점에서 나는 이사 생각 따위 하지도 않았다.
이사를 만나기 전에 나는 죽음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죽을 용기가 없어서 살고 있을 뿐이라고.
근데, 아니었구나.
나도 사람이었구나.
살고 싶었구나.
그런 스스로의 마음이 우습고 또 슬펐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숲속에서 나는 울었다.
그 감정은 뭐였을까.
죽음의 공포가 두려워서였을까.
아니면 살아났다는 것에 환희했던 것일까.
이제 정말 혼자라는 사실에 외로움을 느꼈던 걸까.
아니면 안도감을 느꼈던 것일까.
그 숲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살아있다고,
내가 살아있다고 느꼈다.
소설 속에서.
*********
“···.”
숲속에서 발견한 버려진 오두막에서 밤을 보낸 나는 생각에 잠겼다.
연신이가 돌아올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려면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으려면 먹을 것, 마실 것, 그리고 잘 곳이 필요하다.
잘 곳은 뭐···.
더럽고, 냄새나고, 낡긴 했지만 나쁘진 않다.
아쉬운 건 이불인데···.
그건 어떻게든 구해보도록 하자.
여차하면 나뭇잎 모아서라도 자야지, 뭐.
오래 기다리지 않기를 바라야지.
하.
일단 해야 할 것은 숲 탐색이다.
먹을 거든 마실 거든 덮을 거든 숲에 가야 뭐가 있겠지.
그러려면 나가야 하는데···.
나가기 싫다.
“···끄응···.”
테베의 별장에 있을 때도 열이 오르다 내리다 했었는데···.
아무래도 또 열이 오르는 모양이다.
미치겠네, 진짜.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도 울렁거린다.
마지막으로 뭘 먹은 건 어제 테베의 별장에서, 떠나기 직전.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디리가 챙겨준 보따리는 뭐지?
“아.”
보따리를 풀자 안에는 도시락통이 있었다.
그리고 도시락통 안에는···.
“쌀을 대체 어디서···.”
이 나라에서 쌀은 평민들이 먹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니 귀족 집안인 테베의 별장에 이런 게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나 때문에 일부러 준비한 건가?
“···.”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아졌던 걸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사람들은 대체 뭘까.
검은 머리의 마녀일지도 모르는 낯선 이방인에게 어떻게 이렇게 친절할 수 있을까.
테베는 속성의 힘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디리나 마리는 그런 게 아닐 텐데.
사랑받으며 큰 사람들이란 다 그런 걸까.
그렇다면 내 세계의 사람들은 모조리 사랑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들 중 나를 품어주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마녀도, 뭣도 아닌 평범한 나조차도.
“···역시.”
잘 떠났다.
거기 있으면 그 사람들도 불행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를 악물어 눈물을 참았다.
잘한 일에 흘릴 눈물은 없다.
그리고 앞으로 눈물을 흘릴 일은 수없이 많을 텐데,
그때마다 울 순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도시락 속 주먹밥에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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