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관물의 정석, 남은 방이 없어서….
불이야.
불났어요.
새까만 어둠 속에서 빛을 등지고 있는 미남자.
하지만 이 어둠 속에서도 확실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얼굴은 새빨갰다.
그리고 나의 얼굴은 아마 새하얗게 질려 있을 것이다.
남자와 보내는 첫 밤이 소설 속 캐릭터와 함께, 라니.
내가 소위 말하는 오타쿠라면 기뻐 날뛰었겠지만 절대 싫다.
“나, 남은 방이 있지 않을까요?”
원작에서 어땠더라?
일해라, 내 머리!
으으으음···.
아.
망했다.
은화도 빈방을 찾았지만, 빈방은 존재하지 않았다.
비어있는 것은 카이델이 예약해뒀던 방 두 개뿐.
열다섯 명의 기사가 불침번을 서며 돌아가며 휴식을 취하는 방과,
카이델의 방.
남녀가 여관을 찾으면 방이 하나밖에 비지 않는 마법 같은 공식이 여기서도 발휘됐었다.
“그, 아니면 마구간에서 자도 괜찮은데···.”
하지만 마구간은 이미 만석이다.
우리가 끌고 온 말만 18필.
내 심정을 나타내는 것 같은 숫자인 18필!
이런 18필 같은 상황이 있나!
“···?”
순간 머리에 뭔가가 번뜩였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머리가 드디어 일하기 시작한다.
내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
마차!
그럼 난 어디서 자면 될까?
마차!
“폐하!”
갑작스러운 내 부름에 카이델이 흠칫 뒤로 물러난다.
그 얼굴은 뭘 생각하는 건지 더 붉게 물든다.
저러다 폭발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저는 마차에서 자겠습니다!”
“···?”
카이델은 순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멍한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어떤 여자가 낯선 세상에서, 그것도 밖에서 자겠다고 말하겠는가.
그래도 나에겐 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남자가 있는 방보다 마차가 훨씬 편하다.
별일 없을 거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대가 방에서 자는 것이 좋겠군.
아무리 치안이 좋다 하더라도 사고란 것은 어디서나 일어나는 법이다.
내가 마차에서 자도록 하지.”
···?
아, 아니요?!
어째서 그렇게 되죠?!
“폐하, 폐하를 지키는 기사님들을 위해서라도 폐하께서 방에서 주무시는 것이 맞습니다.”
나의 말에 경악에 차 있던 기사들이 조금 진정되었다.
카이델은 그런 나를 가만히 보더니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나도 함께···.”
“폐하!
다 큰 남녀가 같은 방에서 하루를 보내는 건 어떨지요!
남들이 알면 추문이 될 것 같습니다!”
내 결사반대에 기사 중 하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오오, 도와줘요, 금발의 기사님!
이 왕이 미쳤나 봐요!
“폐하, 그분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폐하께서 그분의 안전을 염려하신다면 제가 옆에서 불침번을 서도록 하겠습니다.”
차가운 얼음 같은 목소리가 카이델에게 가서 박힌다.
입바른 말에 과연 카이델도 할 말이 없는지 불만 섞인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나선 금발의 기사가 뒤에 서 있는 기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들은 카이델의 뒤에 서서 무언으로 방에 올라갈 것을 재촉했다.
“···알겠다.
잘 쉬도록, 아샤.
내일 아침에 보도록 하지.”
휴···.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카이델에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도 카이델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음.
부담스러운데, 그렇게 바라보면.
한참 동안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카이델은
금발의 기사가 헛기침으로 재촉하고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마차에는 나와 금발의 기사만이 남았다.
“그럼, 아샤님.
편히 쉬시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저는 문 옆에 서 있을 겁니다.”
기사는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빠른 속도로 말을 내뱉었다.
최소한 사람에게 말을 할 땐 얼굴을 보고 이야기 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기사님···.
하긴 생각해보면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다.
아까 카이델이 머리를 가리라고 한 것도 무의미한 소동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 기사의 반응이 오히려 정상에 가깝겠지.
“필요한 건 없을 것 같아요, 감사해요.”
나는 기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마차 위로 다시 올라섰다.
아니, 올라서려고 했다.
“어···?”
몸을 비트는 순간 다리가 저리며 힘이 풀렸다.
넘어진다.
순간적으로 눈을 꽉 감고 충격에 대비했다.
그때였다.
금발기사의 나를 낚아챈 것은.
“으으윽!”
등 뒤로 느껴지는 단단한 가슴···, 따위의 일은 없었다.
나는 마치 고양이처럼 커다란 손에 목덜미를 낚아채인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수치스러운 건 둘째치고 목이 아프다.
수, 숨 막혀.
“그, 손, 숨, 숨이···.”
새파래진 얼굴로 그의 손을 툭툭 치자 화들짝 놀란 그가 손을 놓았다.
나는 그대로 계단 위로 철퍽 주저앉았다.
“켁, 윽, 헉···.”
크게 숨이 들이 쉬어지지 않았지만 길게 숨을 쉬려 노력했다.
조금만 더 매달려 있었으면 질식사 판정 났을지도···.
금발의 기사는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몹시도 복잡해 보였다.
“괘, 괜찮아요.
숨이 좀 막혀서.
잡아줘서 감사해요.”
그걸 잡아준 거라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싶긴 하지만···.
어쨌든 넘어지려는 걸 받아준 거니까 감사해야겠지.
나는 마차의 벽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도와줄 만도하건만 금발의 기사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니, 바라보고 있지도 않다.
어디 보는 건가요, 기사님···.
내가 민망하지 않게 도와주려는 것인지 본인이 민망해서 저러는 건지.
어느 쪽이건 상관없지만 빨리 들어가서 문을 닫고 싶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기분 탓일까.
달빛 아래 비친 얼굴이 약간 붉었던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하지만 확인하기도 전에 나는 마차 문을 닫아버렸다.
···.
으음, 뭐···.
붉어졌든 말든 뭔 상관이야.
카이델도 아닌데.
“흐흥, 저런 얼굴이 취향인가 봐?”
두 날개로 자신의 부리를 가린 연신이 낄낄거린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조금 전에 벌어진 일에 대해 변명하자면,
밤이 되니 생각보다 꽤 낮아진 기온 속에서 나는 맨발로 계속 서 있었다.
그러니 갑자기 움직였을 때 순간적으로 다리에 쥐가 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결코, 결코 금발의 기사가 잘생겼기 때문에 어떻게 해보려는 의도는 없었다.
애초에 내 목표는 오로지 카이델이니까!
“그, 그런 거 아니야.”
“어떠려나~”
낄낄거리는 연신을 잡으려 손을 휘둘렀지만 잡히지 않았다.
빨라!
“헹, 아까는 방심하다가 맞았지만 두 번은 없다!”
“이게!”
한참을 달밤의 체조를 했다.
느려터진 내가 10cm도 안 돼 보이는 조그만 새를 잡기란 불가능했다.
큭, 분하다···.
나는 나를 놀리며 유유히 허공을 유영하는 연신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안 될 일에 감정 소모하지 말자···.
나는 으득, 한 번 더 이를 갈아준 후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눈앞에서 연신이 약 올리듯 누운 자세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후···.”
“엥?
벌써 끝이야?
요즘 젊은이들은 체력이 약해서 큰일이야.
나 때는 말이야···.”
···.
조그만 새에게서 느껴지는 꼰대의 향기에 귀를 닫는다.
걸걸한 목소리로 뭐라고 뭐라고 떠드는 연신을 보며 딴생각에 잠겼다.
에휴.
이제부터 난 어째야 할까···.
고백을 받아내는 데 연신이 도와줄 리는 없고.
나한테 연애의 기술이라고는 개뿔만큼도 없고.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 누구세요?”
대답이 없다.
누구지.
아까 금발의 기사가 문 옆에 서 있겠다고 했었는데.
그 기사님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의 문을 열었다.
달빛 아래에 드러난 얼굴은 역시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갑자기 불쑥 뭔가를 내밀어 내게 안겨주었다.
그리고 가벼운 눈인사를 남기고 문을 닫아버렸다.
뭐, 뭐지?
“오, 담요.”
가슴에 안고 있던 것을 들어 눈앞에 펼쳐 보았다.
조금 낡긴 했지만 따스해 보이는 담요였다.
생각보다 센스 있는 기사님이었네.
나는 자리에 앉아 머리에 둘렀던 카이델의 망토를 접어 베개처럼 만들고,
금발의 기사가 준 담요를 둘렀다.
음, 훨씬 따뜻하네.
근데 이거 무슨 냄새지?
뭔가 짐승 냄새는 아닌데, 거친 냄새가 난다.
카이델의 냄새인가?
“근데 너 진짜로 꼬실 마음이 있긴 있냐?”
가만히 누워 눈만 끔뻑이고 있는데, 반대편 좌석에 앉은 연신이 말을 걸어왔다.
어둠 속에서 콩알보다도 작은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빛난다.
“뭐가.”
“이럴 땐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살살 꼬리 쳐야 고백을 받아내기가 쉽지, 멍충아.”
“이 소설 19금 아니잖아.”
“그런 거야 대충 얼버무리면서 넘어가면 돼.”
“연애소설의 신이 그런 말을 하면···.”
쬐끄만 게 응큼하긴.
잠자리는 조금 좁긴 해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오는 길에 그 덜컹거리는 승차감 속에서도 잘 잤는데,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
연신은 어느새 대짜로 뻗어 잠들어 있었다.
신이라면서 잠도 자냐.
할 건 다 하네.
하긴 저 조그만 날개로 거기서 여기까지 날아왔건,
아니면 힘을 써서 왔건 힘들었을 것이다.
흠.
이제 내일부터는 어째야 할까.
내 목표는 오직 하나다.
카이델 공략!
내일은 제발 카이델이랑 좀 좋은 분위기가 될 수 있어야 할 텐데.
에라, 모르겠다.
나는 내일의 나에게 카이델 공략을 맡기기로 하고 눈을 감··· ㅇ···, 커어···.
*********
“아샤.”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잠에 잠겨 있던 의식이 목소리에 끌려 깨어난다.
누구?
···남자?
···아버지···?
“죄송해요!”
번쩍 눈을 뜨고 시계를 보려 했다.
하지만 시계는 어디에도 없었다.
있는 것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남자와 쿨쿨 잠에 빠진 새 한 마리뿐.
···.
아, 여기 집 아니지.
“···어, 느, 늦게 일어나서 죄송해요?”
황급히 얼버무려봤지만, 카이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나를 보며 뭔가 생각에 잠겼다.
“···어, 폐하.
안녕히 주무셨어요···?”
멋쩍게 웃어 보이자 카이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잘 잤는가?
잠자리가 불편했겠군.”
조금 전의 내 추태는 못 본 것으로 해주기로 한 걸까.
카이델은 더 묻지 않고 내 자리 반대편에 앉았다.
아, 거긴···.
“삐----!”
···.
연신의 처절한 비명에 카이델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글썽글썽한 연신이 재빨리 내 어깨로 대피했다.
“그 새는···?”
“아···.
저를 따르는 새입니다.”
연신이를 바라보는 카이델의 눈빛이 묘하게 번들거린다.
무섭다.
어둡고 질척하며 끈적거리는 눈빛.
등에 소름이 돋는다.
“폐, 폐하. 저희는 언제쯤 출발하게 되나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발하도록 하지.
내려오게.”
으음.
식사라···.
딱히 배고프지 않은데.
그래도 멀뚱히 혼자 마차 안에 앉아있는 것도 좀···
카이델은 먼저 내려 내가 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식사 후에 출발하는 거죠?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신발도 없는데 도로를 걷고 싶진 않다.
풀밭이야 부드러웠으니까 그나마 나았지만···.
밝은 곳에서 보는 도로는 내가 살던 곳과 별다를 것 없었다.
다른 것이라면 아스팔트가 아닌 시멘트라는 것일까.
으, 저기를 맨발로 걷는 건 좀···.
백퍼 발에 피날걸.
“아샤.
어제도 아무것도 안 먹지 않았나.”
윽.
그, 그랬죠···.
원체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미라 원래부터 하루쯤 굶는 일은 예사였다.
하루에 보통 한 끼나 두 끼 먹을까 말까···.
그나마도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주변 잔소리 때문에 먹곤 했다.
그러다가 진짜 아사체 될라.
아사가 아사체, 라임 오지고요.
너 다이어트 더 안 해도 되지 않아?
너무 말랐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데.
···으으, 잔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린다.
“머, 먹을게요.”
나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에서 내리기 위해 계단을 밟았다.
으음.
마지막 한 계단을 내려가면 이제 시멘트인데···.
에잇,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며 한 발 내딛으려는 순간 몸이 번쩍 들렸다.
···허?
왠지 익숙한데, 이 상황.
“그대의 발을 생각지 못했군.”
첫 만남과 다른 것이 있다면 카이델의 어깨가 아니라 품 안에 안겨있다는 것일까.
내려달라고 발버둥 쳐볼까 고민했지만 관뒀다.
의외로 카이델의 품 안은 승차감이 좋았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저 시멘트를 밟고 다닐 자신이 없다.
“감사합니다, 폐하.”
카이델이 엷게 웃었다.
태양 빛 아래에서 그의 붉은 눈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문득, 어젯밤 베개에서 맡았던 냄새가 났다.
묘하게 거친 냄새.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목을 들고 있었던 걸까.
목이 결려 와 카이델의 품에 머리를 맡겼다.
그러자 쿵, 쿵,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 심장 소리인가?
왜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지···.
아니다, 이건···.
카이델의 심장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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