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노벨의 정석, 옷갈아입는 여주인공과 그걸 목격하는 남주인공
“좋은 아침입니다?
아니, 날씨가 좋군요.
오늘 햇살이 너무 좋아요, 도 좀 아니고···.
그것보다는 차라리 간밤에 쓸쓸하진 않았나요?”
마지막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진 모르지만 나는 절대 아니다.
죽어도 싫다.
애초에 저런 소리를 지껄일 거면 본인 방에서 해야 하지 않나?
저걸 왜 내 방 방문 앞에서 하지?
아, 물론 내 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은 내가 쓰는 방인데.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내 방 같은 느낌이 들긴 한다.
“근데 왜 왔냐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하지···.
어제 보고···.
아니, 형님께서···.
그것도 아니고···.”
허.
헛소리 주절거릴 때와는 전혀 다르게 소심하다.
아니면 긴장해서 헛소리를 주절거렸던 건가.
미치겠네, 정말.
그냥 내가 나갈까?
으음.
놀라서 부담스러워하면 어떻게 하지?
그래도 지금 이대로면 언제쯤 들어올는지···.
“야.”
“왜.”
연신이가 시큰둥하게 나를 바라본다.
나는 옆으로 돌아누워 연신이를 바라보았다.
“니가 문 열어.”
“미쳤냐?”
“내가 문 여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
“내가 저 문을 여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냐?”
“···그건 그렇지.”
“그럼 그냥 문 여는 거 기다리던가.”
“기다리다가 늙어 죽게 생겼는데.”
“그럼 니가 문 열던가.”
“···망할.”
이놈의 새대가리는 평생에 도움이 안 된다.
···으음.
이러다가 침대에서 아사했다고 뜨게 생겼다.
그냥 내가 나가자.
근데 나는 뭐 때문에 나왔다고 해야 하지?
아직 잠옷 차림인데.
···미치겠네.
옷 갈아입을까?
오.
옷 갈아입기 이벤트도 꽤 정석이지.
나쁘지 않아.
나는 벌떡 일어나 옷장으로 향했다.
화사한 드레스들을 결사반대하고 얻어낸 단정한 원피스.
그러기 위해선···.
“야, 야!”
연신이가 소리를 지른다.
왜 저래.
나는 무시하고 잠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졌다.
물론 아래에는 속옷을 입고 있다.
내가 살던 세계로 치면 레이스 나시 같은 느낌의 상의와 거들 같은 느낌의 하의.
뭐, 좀 부끄럽긴 하겠지만 맨몸 보여주는 것도 아니니 괜찮겠지.
“조용히 안 하냐.”
“너, 너!
나도 남잔데!
훌렁훌렁 벗지 말랬지!”
뭐래.
쬐끄만 게.
나는 절규를 무시하고 원피스를 집은 채 문 쪽을 흘끔거렸다.
연신이는 포기한 건지 이불을 폭 덮어썼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얼른 들어와라.
얼른.
그러고 보니 문 노크하면 말짱 도루묵인데?
흠.
내가 들어오라고 해놓고 그러면 좀 그런데···.
어쩐다.
차라리 자는 모습을 보여줄까?
솔라가 침대로 다가오면 그때 눈 딱 뜨고 매도하는 게 나을까?
근데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면 어쩌지?
그래도 로판인데···.
그런 기회를 놓치는 남주인공이 있을까?
으으음···.
“···휴.”
고민하는 사이 한숨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마음을 정한 건가.
나도 빨리 침대로···.
“안녕히 주무···.”
···어?
아니.
노크도 안 하고 그냥 막 들어와···?
“아, 아, 꺄아아아아아아아!”
앗.
연기할 생각이었는데.
진심으로 소리 질러버렸다.
뭐, 됐나.
더 생생하고.
“나, 나가세요!”
솔직히 가릴 건 없지만 양손으로 상반신을 가렸다.
가리면서도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별 볼 것도 없는데···.
그래도 그 모습이 솔라에게는 자극적이었던 걸까.
솔라는 새빨개진 얼굴로 넋을 놓고 있었다.
“문 닫으라니까요!”
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솔라를 노려보았다.
부끄러워하기보다는 분노하는 느낌으로.
그러자 솔라가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문을 쾅 닫았다.
후···.
이제 노출까지 해야 하다니.
내가 정한 거지만 참···.
그래도 빨리빨리 끝내려면 어쩔 수 없다.
이 일이 카이델의 귀에까지 들어가야 할 텐데.
“아샤님?
아샤님!
무슨 일이십니까!”
데바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거칠게 문을 두드리면서.
드물게도 흐트러진 목소리다.
아마 내 비명에 놀라 달려온 거겠지.
상황 파악이 안 된 거로 보아 솔라는 다른 데로 간 모양이다.
나는 뒤집힌 잠옷을 다시 입은 후 문을 열었다.
“···아샤님.”
험상궂은 얼굴이 더 험상궂어졌다.
내 모습을 꼼꼼히 살피는 얼굴이 사뭇 진지하다.
뭔가 괜히 가슴이 간지러워진다.
“괜찮으십니까?”
“네.”
나는 살짝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일부러 살짝 데바인의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데바인은 내 시선에 눈치채고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밖에 아무도 없나요?”
“저뿐입니다.”
“···그래요.”
나는 엷게 웃어 보였다.
데바인이 뭔가 불의의 습격이라도 받은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뭐야, 저 눈빛은.
불안하게.
“별일 아니에요.”
“하지만···.”
“···말씀드리기 어려운 일이라서요.
그냥 못들은 걸로 해주세요.
달려와 줘서 고마워요, 데바인.”
아마 지금 내 얼굴은 꽤 창백할 것이다.
놀란 건 사실이니까.
후···.
그런 얼굴로 당당하게 말한 게 데바인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일까.
데바인이 뭔가 괴로운 얼굴을 했다.
“···정말로 괜찮아요.”
나는 엷게 웃고 데바인의 팔을 살짝 두드려 주었다.
데바인은 험상궂은 표정을 조금 풀고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네.
정말이에요.”
나는 있는 힘껏 미소지었다.
데바인은 그제야 완전히 표정을 풀었다.
“···아샤님.”
“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말씀해주세요.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샤님의 편입니다.”
···.
뭔가 지금까지 여러 번 데바인을 만났었는데···.
지금 처음으로 데바인을 만난 기분이 든다.
“고마워요.”
알고 있다.
그래서 라이안 때도 데바인에게 부탁했던 거였다.
근거는 없지만 어째서인지 데바인은 내 편을 들어줄 것 같아서.
어쩌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데바인의 마음을.
데바인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데바인이 진 남주인공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어느 작가가 시종장을 남주인공으로 삼겠어.
아니, 뭐···.
있을 순 있긴 하겠지···.
근데 다른 캐릭터들의 스펙이 비해 너무 딸린다.
일단 기억은 해두자.
데바인도 남주인공 후보라는 것을.
아직도 조금 불안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데바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
“정말로 실례했습니다.”
솔라는 각 잡힌 자세로 앉아 내게 고개를 숙였다.
의외다.
사과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하는구나.
“···일국의 왕자가 숙녀의 방에 발을 들이면서 노크조차 하지 않다니.”
내 차가운 목소리에 솔라가 움찔한다.
바람둥이 이미지는 어디 갔는지 묘하게 커다란 강아지처럼 군다.
으음.
저런 거엔 좀 약한데.
“뭐라 변명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간다.
문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겠지.
가끔 나도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할 때 그럴 때가 있으니까.
뭐, 이 정도만 해둘까.
내가 원하는 건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게 아니다.
내게 빚을 지는 정도면 된다.
그리고 약간의 해프닝까지.
그럼 뭘 요구해볼까···.
가만히 솔라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솔라의 뺨에 붉어진다.
나를 보면 그때가 떠오르는 걸까.
뭐, 바람둥이 캐릭터인데 반응이 이렇게 순수해.
수많은 여자의 나체를 봤을 거면서.
“좋습니다.
전하의 사과를 받아들이도록 하죠.”
솔라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포커페이스가 전혀 안 되네.
평소엔 어떻게 지내왔던 거야···.
뭐, 원래 사랑에 빠지면 사람이 변한다고 하긴 하지.
이 소설의 경우 너무 극단적으로 변하는 느낌이지만.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솔라의 얼굴이 기대로 빛난다.
···.
아니, 뭐.
기대에 응할 부탁이긴 한데···.
저렇게 반응하면 왠지 심술부리고 싶어지는데.
“저를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가 주세요.”
“···네?”
솔라가 어안이 벙벙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잘생긴 놈은 뭔 표정을 지어도 잘생겼구나.
그것도 열 받는다.
“성 밖으로 나가보고 싶습니다.”
솔라는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확실히.
많은 여자를 접해본 만큼 지 형보다는 낫네.
눈 마주친 걸로 빨개질 정도는 아니니.
“성 밖으로 나가서 살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이세계에서 온 여자.
게다가 검은 머리 마녀의 전설이 있는 곳으로 온 흑발의 여자다.
지금 내게 가장 안전한 곳은 성이다.
그렇지만 성안에만 있어서야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된다.
지난번 슈피처럼 느린 전개는 질색이다.
“제가 처음 이 세계로 왔을 때 본 그 숲으로 가보고 싶습니다.”
“···금기의 숲에 말씀입니까?”
누가 말해줬더라.
금기의 숲에 대해서.
라이안이었던가.
검은 머리 마녀가 봉인된 곳, 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그런 곳에 가겠다는 내가 달가울 리 없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하지만 그렇기에 갈 의미가 있다.
“네.
저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솔라의 표정이 굳었다.
역시.
카이델의 동생인 만큼 분명 집착이 심할 거라 예상했다.
내가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면 틀림없이 반응이 있을 거라고.
역시나 반응을 보인다.
“언제까지나 폐하의 후의에 기대어 여기에 있을 순 없으니까요.”
나는 딱 부러지게 말하며 솔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솔라의 눈 역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내 저의를 찾으려는 듯.
카이델은 어디까지나 내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했었다.
그리고 거짓이라면 왜 그런 거짓을 말한 건지에 대해 판단했다.
그러나 솔라는 조금 다른 듯하다.
카이델과 똑같은 붉은 눈동자지만 느낌이 다르다.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캐내려는 듯하다.
내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들고자 하는 눈이다.
나는 그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텅 비어있다.
그런 걸 보여준다 한들 아무렇지도 않다.
“그렇다는 건 돌아갈 방법을 찾으시고 싶다는 건가요?”
“네.”
솔라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마 나라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
나를 도울 것이냐, 말 것이냐.
돕지 않으면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아갈 방법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솔라는 알 수가 없다.
반대로 도우면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더 빠르게 찾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아갈 방법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솔라는 방해할 수 있다.
게다가 나와 붙어있을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돕는다, 가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솔라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걸 돕는 건 제게는 불가능합니다.”
···.
에?
어째서지?
“이미 아샤님도 눈치채고 계실 테지요.
제 형님이 아샤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나?
의외다.
“···제게는 과분한 감정입니다.”
솔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형님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샤님의 이야기를 할 때의 형님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형님을 더 오래 보고 싶습니다.”
“왕자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겠지요.”
솔라는 엷게 웃었다.
그 얼굴은 어딘지 읽기가 어려웠다.
왕자는 왕자다, 라는 건가.
“하지만 아샤님을 숲으로 모셔가는 건 가능합니다.”
···.
무슨 궤변이야.
하지만 어떻게 보면 솔라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 이려나.
내가 떠나는 건 싫다.
하지만 곁에 있고 싶다.
형님인 카이델의 감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옆에 나를 두고 싶을 것이다.
내가 이세계로 가는 걸 도와주지는 않을 것이지만,
내 부탁을 거절하지도 않을 것이다.
겉으로는 형님의 소중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내심은 내 곁에 있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걸 굳이 내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뭘까.
내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을 달래는 말일까?
그것도 아니면···.
“감사합니다.”
이유는 필요 없다.
그 모순된 감정을 가진 채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그걸 카이델이 질투해주면 된다.
2주일.
그 안에 결판을 낸다.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솔라에게 웃어보였다.
얼굴이 붉어질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달리 솔라는 침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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