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물의 정석, 처음 만난 인물은 설명충
꿈을 꿨다.
나는 온통 설탕 시럽으로 가득 차 있는 바다 위를 떠돌고 있었다.
그 안에는 수없이 많은 물고기가 있어서 내 눈을 현혹시켰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손댈 수가 없다.
나는 그저 달콤한 강 위에 홀로 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바다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물고기 한 마리가 보였다.
마치 햇살 같다.
그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는 물고기였다.
그 물고기는 유유히 헤엄치며 내게 다가왔다.
내가 감히 만져서 될 것이 아니다.
나는 언제나처럼 멍하니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물고기는 물 위로 팔짝팔짝 뛰어올랐다.
자신을 보여주고 싶은걸까.
아니면 내게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 모습이 묘하게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아아.
미소라니.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재빨리 표정을 지우고 물고기를 외면했다.
그러자 물고기는 그 끈적거리는 시럽의 바다를 헤엄쳐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보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없던 일이 된다.
언제나처럼.
첨벙거리는 소리가 몇 번 더 들렸다.
하지만 이내 소리는 잦아들었다.
아아.
그렇구나.
떠났구나···.
모순적인 감정이 떠오른다.
떠나길 바랐을 터인데 떠난 물고기가 아쉬웠다.
마음속 한구석이 허전해진다.
언제나처럼 나는 혼자다.
이 망망대해 안에서.
나는 혼자 표류하고 있다···.
···.
“···.”
그리고 나는 돌아왔다.
다시 이 숲속으로.
다시 처음으로.
“···하···.”
나도 모르게 작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다행인 걸까.
아니면 다행이 아닌 걸까.
모르겠다.
나는 멍하니 눈을 꿈뻑이며 누워있었다.
“···.”
연신이는 내 앞에서 얼쩡거리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걱정되는 걸까.
평소와 달리 입을 꾹 다문 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연신이에게 엷게 웃어 보였다.
“왜 그래?”
“···아니야.”
“이제 겨우 세 번째잖아.
벌써 지치진 않았어.”
이제 겨우 세 번째 시도다.
첫 시도로 끝내려 했었는데···.
역시 세상일 그렇게 쉽게 흘러가진 않는구나.
나는 핑 돌 것 같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멈춰 서 있으면 다시 배드 엔딩 롤이 뜰 것이다.
일어나야한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처음 이 세계에 온 나로 되돌아오는 거니 당연한 건가.
하지만 머리의 두통은 대체 왜···.
“가야 돼, 아사.”
“···응.”
나는 카이델이 있는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천천히 가도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가지 않으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멈춰서 있는 것도 아니니 배드 엔딩롤이 뜰 이유가···.
“혹시 내가 늦게 가면 카이델과 마주치지 못해서 죽는다거나 그런 엔딩도 있어?”
“글세···.
나야 잘 모르지?
하지만 내가 봤을 땐 가능성 있다고 봐.”
그렇겠지.
그런 악취미의 배드 엔딩을 잔뜩 생각해낸 걸 보면 가능성 있다.
미친···.
···.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니 욕도 못하겠네.
젠장.
나는 조금 더 빠르게 발을 놀렸다.
카이델이 떠나기 전에 가야 한다.
그래야 다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박사박.
기분 좋다고 느꼈던 숲이 기분 나쁘다.
발을 간질이던 풀이 따갑게 느껴진다.
내 마음의 문제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날 거부하는 것일까.
“···.”
눈앞이 확 밝아진다.
그리고 앞에는 그가 있었다.
처음 만났던 그 모습 그대로.
하지만 내 마음속의 그는 이미 검게 물들어 있다.
나를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하던 그 날의 카이델이 겹쳐 보인다.
하하.
나 나도 모르는 사이 카이델을 원망하고 있었던걸까.
가장 나쁜 것은 나라고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던 걸까.
어리석긴.
나에게 그런 사치는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가만히 카이델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누구인가?”
카이델이 경계심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 눈동자에 있는 것은 경계심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그 눈동자에 섞인 것은 집착과 독점욕.
나라라는 대상에 한정되어있던 그의 집착은 사랑을 아는 순간부터 그 대상에게로 옮겨갔다.
작가 피셜 중국과 몽골을 합친 것의 1/7 정도 되는 거대한 땅덩어리와
그 안에서 살고 있던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향해있던 집착이 나 하나한테 옮겨 온 거다.
그렇기에 카이델은 아주 작은 자극으로도 돌아버리는 것이다.
첫수는 어떻게 둬야 하나.
카이델을 자극하지 않고 공략에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이번 공략 대상은 테베.
그와 동시에 다음 공략 대상자를 점찍어 놓는다.
그러려면 일단 테베를 은화 때처럼 내 수호기사로 임명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
감정을 지운다.
그 집에서도 살아남은 나다.
감정을 지우는 것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잖아.
혼자 살면서 그 감각을 잊었었지만, 지옥으로 돌아왔다면 지옥에 맞게 변해줄 수밖에.
그리고 공포에 질린 얼굴을 떠올린다.
쉽다.
그 지옥에서 어린 내가 지었던 얼굴을 그대로 떠올리면 된다.
나는 그 얼굴로 연신이에게 살짝 눈짓했다.
연신이가 내 어깨를 발로 콱 잡는다.
그와 동시에 나는 달렸다.
차가운 바람이 귀를 스친다.
기분 좋다.
조금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진다.
아, 그러고보니 요즘 계속 방에 처박혀 있었구나.
어차피 나가봤자 카이델이 계속 감시한다.
그리고 나가봤자 할 것도 없었다.
라이안을 만나기 위해서도 방에 처박혀 있는 것이 좋았다.
몸을 움직이니 아주 조금이지만 답답한 감정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되지 않았다.
손목이 잡힌다.
기분을 바꾼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
공포에 질린 몸짓.
내가 가장 잘 하는 것.
”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붉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카이델이 있었다.
마치 짐승처럼 사나운 눈동자다.
으엑.
농담이 아니라 진짜 좀 무섭다.
”···.“
카이델은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 눈동자에서 읽을 수 있는 건 공포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 들여다보아 져서 좋을 건 없다.
나는 살짝 손을 비틀어 카이델에게서 빠져나가려 했다.
카이델의 손힘이라면 절대 나를 놓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카이델은 나를 어깨에 둘러멨다.
으으.
이 치욕스러운 자세를 굳이 해야 하나.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이세계에서 온 여자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보일 행동은 뭘까.
그녀는 당황할 것이다.
눈을 떴더니 자신이 잠든 방이 아닌 숲 속에 팽개쳐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탐색한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이 루트를 타고 가려면 나는 ‘누군가를 찾는다’라는 목적을 포기해야 한다.
애초에 그걸 말했던 이유는 카이델을 안달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고백을 받아내기 위해서.
하지만 이게 장기전이 될 것이라는 걸 아는 이상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내가 언젠가는 떠난다는 사실이 카이델에게는 압박이 될 것이다.
그러니 말할 필요 없다.
자, 그럼 여자는 주변을 둘러보다 낯선 사람을 보았다.
내가 살던 곳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
내가 살던 곳에는 백색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하고 푸른 망토를 몸에 두른 사냥꾼 따위 없다.
그렇다면 나는 당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손에 들려 있는 활을 보고 두려워 도망칠 것이다.
응.
역시 이게 정답인 것 같다.
저번의 카이델이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라고 이야기 했던건
내가 감정을 숨기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도 있었겠지만 내 태도에도 문제는 있었다.
나는 처음 만난 카이델에 대한 미안함을 지난번의 카이델에 풀었다.
그러니 카이델이 위화감을 느꼈을 수밖에.
지난번 카이델이 날 화형 한 걸로 퉁치도록 하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다.
아예 처음부터.
나는 마치 공포에 몸이 얼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상태로 버티기를 5분.
으으.
몸에 쥐가 날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마차에 탈 수 있다.
나는 슬쩍 코에 침을 바르며 버텼다.
”마차를 비워라.“
아.
도착했나 보다.
나는 힘이 빠질 것 같은 몸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당황해하던 기사들이 반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1초.
그리고 명령을 완료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 1분.
아.
망했다.
몸에 힘이 빠진다.
으음.
근육이라곤 1도 없는 나 치고 이 정도면 잘 버틴 거지.
응.
나는 슬쩍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날 잡는 힘이 더 강해진다.
이거면 내가 나름대로 도망가려 했다는 어필은 되겠지.
이제 진짜 모르겠다.
나는 온몸의 힘을 빼고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은 마차 안에 조심스럽게 내려졌다.
”···.“
나는 경계하는 눈으로 카이델을 보았다.
카이델은 날 내려놓고 마차에서 내리려다 흠칫 멈췄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 내 앞에 앉았다.
거친 냄새.
하지만 익숙한 냄새.
하지만 이제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
나는 가만히 내 발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솔직히 좀 지친다.
지루하기도 하고.
졸리기도 하다.
이 몸은 조금 전까지 자고 있었을 테니 피곤하진 않을 텐데.
정신적으로 피곤하기 때문일까.
첫 만남 때는 내가 먼저 침묵을 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어디까지나 겁먹고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은화가 그랬듯이.
처음부터 이게 책 속의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와 달리 은화는 당황했었다.
자신은 판타지 소설을 읽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소설 속.
설령 소설 속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두려웠을 것이다.
은화가 읽고 있었던 것은 ‘판타지 소설’이니까.
심하게 겁먹고 카이델마저도 거부하던 은화에게 붙여준 것이 테베였다.
이름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금발의 아름다운 기사는 틀림없이 테베일 것이다.
언제나 묵묵히 카이델의 명령에 따라 은화를 지키던 검.
그것이 테베다.
그렇다면 테베와 항상 함께 있게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은화가 하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면 된다.
나는 흘끔흘끔 카이델을 보았다.
호기심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로.
카이델은 그런 나를 흘끔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마차 안은 침묵만이 가득했다.
먼저 말을 시작하는 것은 카이델이어야만 한다.
”그대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흠칫 몸을 움츠렸다.
아.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하려고 했던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슬쩍 카이델의 눈치를 보자 난감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됐어.
나는 몸을 움츠린 채 카이델의 시선을 피했다.
”···그대는 마녀인가?“
마녀.
마녀라···.
어쩌면 마녀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감정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나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한층 더 몸을 움츠렸다.
”내가 무서운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마차의 벽.
어차피 바깥 풍경은 두 번의 마차 여행으로 질리게 봤다.
겁먹은 내가 마차 밖의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웃기고.
”나는 이 나라의 왕, 카이드레아 샬롯 디 팔렌이다.
그대가 있던 숲은 나의 영토다.
그곳에는 전설이 하나 있다.“
카이델은 마치 어르고 달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내 긴장을 풀어주려는 것일까.
나는 슬쩍 카이델과 눈을 맞췄다가 재빨리 시선을 비꼈다.
”먼 옛날 그곳에는 검은 머리의 마녀가 봉인되었다.
그래서 그대를 처음 보았을 때 숲의 마녀라고 생각하여 거친 행동을 하고 말았군.
나의 무례를 용서하게.“
카이델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일국의 왕이 정체도 모르는 일개 여자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역시나.
카이델은 왕 답지 않다.
내게 익숙한 모습에 순간 동요할 뻔 했다.
하지만···.
나는 살짝 눈을 감았다.
두려워해야 한다.
나는 이 남자를 모른다.
모든 것은 처음으로.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왕···.
여기는 대체 어딘가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카이델은 내가 반응해준 것이 기뻤는지 그 얼굴에 엷은 미소마저 띄우고 있었다.
후···.
이번에는 망치지 말자.
천천히, 느긋하게.
서두르지 말고 치밀하게 생각하자.
나는 눈을 감았다.
- 작가의말
요즘 코로나 때문에 이야기가 많던데,
독자님들 모두 건강하시고 몸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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