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정석, 주인공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카이델은 울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숨을 죽이고.
“폐하···?”
카이델의 눈물이 나에게서 무언가를 끌어올린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흘리는 눈물이 무언가를 떠오르게 한다.
그 날···.
그 어린 날의 기억들을.
“왜···.”
나는 뒤로 물러났다.
물러서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물러나선 안 된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대는 내가 무엇으로 보이는 건가?”
흘러내리는 눈물이 카이델의 입술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틀림없이 짠맛이 날 그 액체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 걸까.
카이델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 만난 그 날, 그대는 나를 그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대는 나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바라보았다.
나를 마치 찾고 있었던 것처럼 바라보았다.”
···.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가면 카이델이 있다는걸.
그리고 나를 이곳에 데려와 줄 것이라는 걸.
“그대는 처음엔 나를 따스하게 바라보았었다.
동시에 두려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인가?
그대는 나를 한 번도 본 적 없을 터인데.”
카이델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느껴졌다.
카이델은 내 생각보다 더 망가져 있었다.
언제나 위풍당당하던 풍채는 조금 말라 있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밝게 빛나던 하얀 머리카락이 푸석해져 있었다.
보석처럼 아름답던 붉은 눈동자는 생기를 잃고 있었다.
몸단장은 언제나처럼 단정했지만···.
그렇구나.
카이델은 이미···.
“말해다오, 아샤.
그대를 향한 내 가슴의 이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대는 알고 있을 터이다.
그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았던가.
나는 대체 그대를 어떻게 하려는 건가?”
카이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쳤다.
그런가.
내가 테베와 외출했던 그 날의 일은 그냥 방아쇠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전부터 이미 총의 공이치기는 당겨져 있었다.
남은 것은 방아쇠를 당기는 것뿐.
카이델과의 엔딩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나쁜 것은 나다.
나는 카이델을 소설 속 인물로만 봤다.
그리고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 내 인식을 고치지 못했다.
카이델이 진 남주인공이 아니었던 것은 둘째치고
그런 식의 배드엔딩이 나온 것은 내 탓이다, 라고.
그래서 지금의 카이델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을지도 모른다.
너무 친숙하게 대했을지도 모른다.
마치 카이델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그야말로 마녀처럼.
카이델은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과,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여자 때문에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랬던 주제에 나는 카이델을 계속 밀어내기만 했다.
카이델은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그의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
카이델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틀림없다, 라고.
맞다.
나는 카이델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가 내게 고백하지 않도록 거부하고 있었다.
그럴 거라면 처음부터 친밀하게 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모든 것을 안다는 식으로 하지 않았어야 했다.
차라리 은화처럼 겁먹은 모습이라도 보였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나쁜 것은 처음부터 나였다.
카이델은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는 천천히 내 앞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매달리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알려다오, 아샤.
그대는 대체 나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건가?”
···.
나는 돌아가고 싶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 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웃기게도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면 했다.
설령 엑스트라 역할의 인물이라도.
그런가.
나쁜 것은 처음부터 나였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야 했다.
영화.
그래, 영화다.
이것은 소설도 게임도 아닌 영화다.
그래서 내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선택 때문도 아니고 나 때문도 아니다.
누가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무대 뒤에서 죽은 사람 역할의 배우는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극의 전개를 기대하며.
···.
알고 있다.
이것은 나에 대한 기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분명···.
“폐하,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카이델에게 손을 뻗었다.
바닥을 짚은 카이델의 손을 잡고 끌어 올렸다.
그리고 웃었다.
“폐하.
제가 폐하에게 어떻게 보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에 대한 폐하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카이델의 손을 내 입가로 가져왔다.
그리고 아주 살짝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저는 폐하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경애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은 확실합니다.”
나는 웃었다.
만들어진 웃음을.
*********
“···괜찮아?”
연신이가 나를 바라본다.
카이델과의 불편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침대 한구석에서 잠들어 있던 연신이가 눈을 떴다.
나는 고생하고 있는데 팔자 좋구만···.
그런 생각을 하며 연신이의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문질러 주었다.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연신이가 뭘 걱정하는 건지는 알 것 같다.
아마 지금 내 안색이 이상한 거겠지.
그럴 것이다.
모처럼 마음먹었는데 마음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말장난 같은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많이 힘들어?”
“···이 소설작가를 좀 만나고 싶은 생각은 들어.”
“왜?”
“또라이냐고 물어보려고.”
연신이가 사나운 얼굴로 몸을 부풀렸다.
아.
얘 작가 편이었지.
너무 오래 같이 있었더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렇지···.
심판 같은 게 아니다.
처음부터 나와 정 반대편에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왠지 연신이에게는 마음을 풀게 된다.
“또라이는 좀 아니잖아, 또라이는!”
“왜 니가 화를 내고 그래. 작가한테 한 소린데.”
“내가 연애소설의 신이기 때문이다!”
“난 이 소설을 욕한 적 없다? 작가를 욕했지.”
“그게 그거지!”
칫.
안 넘어가나.
역시 소설의 신답네.
“정 힘들면 일단 멈추고 좀 쉴래?”
“멈춰?”
“앞으로 몇 번을 더 회귀하고 몇 번을 더 공략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쉬는 시간도 없으면 너무 가혹하지 않겠어?”
···.
이번으로 끝내고 싶은데, 나는.
애초에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해주던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잠깐만.”
연신이가 몸을 뒤틀어 뒤를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의 꽁지깃을 하나 똑 떼냈다.
“···?”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허공에 꽁지깃으로 무언가를 써넣기 시작했다.
무슨 언어인지는 알아볼 수 없지만···.
연신이의 꽁지깃이 허공을 지나갈 때마다 검은색 글씨가 새겨진다.
그리고 서너 줄의 문자가 새겨진 후 연신이는 만족스러운 듯 깃털을 거두고 나를 바라보았다.
“잘 보라고.”
꽁지깃의 끝이 문자의 정중앙을 톡,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주변 배경이 모두 사라졌다.
마치 암전이라도 된 것처럼.
갑작스러운 변모에 나는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나는 이곳을 알고 있다.
세상이 깨부숴져 내려앉았을 때 보이는 그곳.
거대한 스크린이 있는 그곳.
그 검은 공간이다.
“···여기는···.”
“여기는 소설과 현실의 중간 세계야.
음, 쉽게 말하면···.
여기는 일시 정지 같은 거야.”
···그런가···.
그렇다는 건 카이델이 이곳에 들어올 일은 없다는 거겠지.
다 내 잘못이라더니,
결국, 카이델의 행동에 나름의 스트레스는 받고 있었던 걸까.
나는 피식 웃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헤이.
아가씨가 바닥에 앉는 거 아냐.”
···?
뭐래.
느끼하게.
연신이는 뭔가 치명적인 척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손에 깃털을 쥐었다.
허공에 짤막한 문장이 몇 개 휘갈겨진다.
그리고 아까처럼 문장 가운데를 깃털로 톡 치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침대가 나타났다.
···.
뭐야.
마법 같은 건가?
“헤헹.”
어디가 허린지도 정확히 모를 정도의 짤막한 몸뚱이지만···.
아마도 허리로 예상되는 위치에 날개를 대고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을 보자니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진심으로.
“···고맙다, 그래.”
나는 침대에 앉았다.
이건···.
“성에 있던 그 침대인가?”
“오오, 아네?”
“벌써 몇 번이나 누웠었으니까. 솔직히 거의 내 침대 같아.”
폭신함도 부드러움도 그 침대와 똑같다.
나는 신발을 벗고 침대로 뛰어들었다.
“으으···.”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쉴 수 있다.
그게 얼마나 큰 것인지···.
집에서도 그랬다.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편히 쉬어본 것은 20살, 처음으로 기숙사에 들어갔던 그때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대학에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소문을 낸 것은 내 룸메이트였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직도.
묘하게 친한 척하는 여자애였다.
그게 귀찮았다.
처음으로 가지는 내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것이.
낯선 타인.
왜 내게 신경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벽을 만들고 계속 밀어냈다.
그녀는 처음에는 내게 호의적인 눈빛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호의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역시나 내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눈동자에는 적의가 깃들었다.
그리고 소문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문의 내용은 참으로 어이가 없는 것들이었다.
내가 기숙사에 남자를 끌어들였다던가,
공부 안 하는 척하면서 기숙사에서는 공부만 하고 있다던가,
과의 다른 사람들의 욕을 하고 다닌다거나.
내가 자신에게 친한 척하며 이것저것 사준다고도 했다.
어이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당시의 나는 아르바이트 하기도 바빠 기숙사에는 거의 자러 들어가는 정도였다.
그 빌어먹을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공부를 했었기에 과외 알바를 잡기는 쉬웠다.
유명 국공립 대학교의 수석입학생.
그 칭호가 붙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내게 계속 과외를 의뢰했다.
강의가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밖에 나가 있었다.
기숙사 폐문 시간 아슬아슬한 시간에 귀가하곤 했다.
그런 내가 어디서 어떻게 그 여자가 말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
오래 가지 않을 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착각이었다.
사람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추문을 좋아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나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내 소문은 점점 과장되고 점점 넓게 퍼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나는 바빠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불시점검이 있겠습니다.”
내 방은 이상하게 불시점검이 잦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1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모아두었던 과외비로 계절학기 비용과 기숙사비용을 결제한 나는,
인원이 부족해 혼자 방을 배정받았었다.
좋았다.
진짜 혼자서 사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내게 간섭하지 않았다.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너무나 기뻤다.
그런데 불시점검이라는 이름의 점검이 나를 귀찮게 했다.
많을 때는 일주일에 세 번.
적을 때도 이삼 주에 한 번.
차라리 매일 점검을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예측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불시점검이라는 것은 예측하지 못할 때 나왔다.
그래서 골치가 아팠다.
좀 편히 쉬어보려 하면 불시점검을 나온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점검에 지친 근로장학생이 말해줬을 때였다.
“계속 신고가 들어와서요···.
화아사 학생 방에 남자가 드나드는 걸 봤다던가 술을 마시고 있다던가···.”
그들은 장난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것엔 익숙했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그랬으니까.
인정한다.
어렸을 때 이미 겪었던 일들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성인이 되었다며 뻐기고 다니는 이들이 이런 유치한 짓을 벌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나는 계절학기를 기숙사에서 버티고 과외를 계속했다.
그리고 2학기에는 자취를 시작했다.
나는 간섭당하는 걸 싫어하는데도 간섭당하는 인생을 살아왔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포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 혼자만의 시간이라는 것을.
“···고마워, 연신아.”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이야기했다.
여기엔 누구도 나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비록 내 적인 새대가리가 있긴 하지만 귀찮게 굴지는 않으니까···.
오랜만에 푹 잠들 수 있겠다.
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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