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정석, 주인공의 적은 사실 작가다
라이안은 의외로 수다스러웠다.
내가 묻는 말에는 뭐든 대답해줬다.
그리고 내게도 다양한 걸 물었다.
질문의 내용은 카이델이 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세계는 어떤지에 대한 것이 주된 의문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카이델이 정치에 대한 것을 많이 물었다면 라이안은 신에 관해 물었다.
“신기하군요···.”
종교전쟁에 관해 이야기해주자 라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 세계의 신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이 세계에는 다양한 신이 존재한다.
케리스만 교는 주로 팔렌 왕국의 사람들만 믿는다.
그리고 이 대륙에 존재하는 7개의 국가의 수만큼 종교는 존재한다.
종교는 강제는 아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많이 접한 것이 케리스만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케리스만을 믿게 되는 것뿐.
다른 신을 믿는다고 해서 딱히 박해받지는 않는다고 했다.
물론 이국에서는 다른 신을 믿으면 박해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나라에서도 자신들의 신이 유일신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나라를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존재이기에 국민이라면 꼭 그 신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뿐.
즉, 내가 살던 세계와는 조금 다르다.
거기에서는 다른 종교를 배척하고 심지어 자신의 신이 유일한 신이라고 주장한 것에 비해
이곳에서는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다 보니 종교전쟁이 일어날 인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사실 신의 뜻에 반하는 행동이기는 합니다.”
신은 평화를 바란다.
특히 케리스만은 겨울의 신인 동시에 평화의 신이기도 했다.
겨울의 눈은 세상의 모든 소음을 뒤덮는다.
그리고 평안함을 준다.
그래서 케리스만은 평화를 좋아한다고 일컬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라이안은 그런 추측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케리스만을 만났을 때 그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신께서는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분노하지 마라.
탐하지 말라.
그것이 평화로의 길이다.”
단 세 마디.
그 세 마디를 위해 라이안은 어릴 때부터 신학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샤님의 세계에도 마녀는 있습니까?”
나는 긍정했다.
마녀사냥에 대해 들려주자 라이안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았겠군요.”
“그랬죠···.”
라이안은 잠시 기도를 올렸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본 적도 없는 그녀들에 대한 안식의 기도인 듯 하다.
마녀라···.
마녀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런데, 금기의 숲은 뭔가요?”
나는 이 세계에 온 첫날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금기의 숲에 있던 검은 머리.
그 때문에 내가 마녀로 오해받았다고 들었다.
라이안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아주 먼 옛날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팔렌의 시조인 고른 디 팔렌을 홀린 검은 머리의 여자.
그녀는 어마어마한 마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고른 디 팔렌은 그녀에게 푹 빠졌습니다.
전투에서 자신의 옆에 둔 것은 물론이고 어딜 가든 함께였죠.
그리고 그녀로 인해 고른 디 팔렌은 망가질 뻔했습니다.
하지만 케리스만께서 힘을 써 그녀를 봉인했다고 합니다.
그 탓에 케리스만 신의 힘이 꽤 많이 약해졌다고 하지요.
그리고 그녀를 봉인한 것이 금기의 숲이라고 불리는 그곳입니다.”
아.
그러면 그 숲에서 검은 머리의 여자가 발견됐다는 건···.
그 마녀의 부활이라고 여겨진다는 걸까.
그나저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뭔가 이상하다.
마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제외하면···.
나, 진짜 마녀 아냐···?
아니 아니.
생각해보자.
내가 빙의된 이 소설은 본래 판타지 소설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여주인공 속성’을 가진 캐릭터 따위는 없었다.
즉 나와 그 마녀는 당연히 다른 존재다.
하지만 나라를 부술 수도 있을 정도의 매력을 가진 존재.
으음.
내가 매력적인 건 아니지만 내 속성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카이델을 잘 구슬려 전쟁이라도 걸면 이 나라는 분명 망가질 테니까.
나는 왠지 모르게 배가 아픈 것 같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만 드십니까?”
라이안이 나를 바라본다.
아.
이 타이밍에서 멈추면 좀 그런가?
라이안의 이야기 때문에 그만 먹는 거로 보일 테니···.
나는 고개를 젓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 마력이라는 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건가요?”
라이안은 잠시 침묵했다.
아.
사제한테 마력에 관해 묻는 건 좀 아닌가?
“그렇진 않습니다.
마력이라는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샤님이 마녀가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있기도 했습니다.
아샤님께는 마력의 냄새가 나지 않기도 하고, 케리스만께서도 아니라고 하셨으니까요.”
아.
그 기도···.
진짜로 케리스만 신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건가?
으음.
역시나 아무나 되는 건 아니겠지.
가능하면 나도 기도로 케리스만 신이랑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진 남주인공이 누군지 묻고 싶다아!
나는 슬쩍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베개 맡에서 하얀 털 뭉치 같은 게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으으.
얄미운 녀석.
“라이안은 마법을 쓰고 싶었던 적이 있나요?”
“아뇨.
제게는 케리스만께서 주신 이 힘이 있으니까요.”
라이안이 엷게 웃었다.
으음.
테베가 웃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뭔가 딱딱한 로봇에게 감정이 있는 것을 발견한 기분이다.
로봇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인형 옷이었고,
그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같은 느낌.
묘하게 인간미 느껴지는 얼굴에 나는 피식 웃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라이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주아주 엷게.
하지만 워낙 얼굴이 하얘서 티가 났다.
“아뇨···.
사제님이 웃으시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아서요.”
저번에는 웃는 것인지 아닌지 애매했으니까···.
제대로 웃는 얼굴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라이안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정말로 케리스만 신을 사랑하시는군요.”
라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은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아있었다.
“저는 신이 주신 사명을 위해서 살아갈 겁니다.”
사명.
어떤 사명일까.
아.
아까 평화를 위해 분노하지 말고 탐하지 말라고 했었던가.
“여기의 사제님들도 결혼하지 못하시나요?”
기독교는 결혼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고,
가톨릭의 신부는 결혼하면 안 되는 걸로 기억한다.
만약 그래야 하면 이 머리 딱딱한 남자가 과연 내게 고백을 해줄까···.
“그건 아닙니다.
저희 사제는 신에게 바쳐진 몸이기는 하나 신께서는 저희에게 번영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애초에 저희는 신과 이성적인 교류를 나누는 게 아니니까요.
다만 타국의 신 중에서는 질투가 심하신 분이 계셔서,
자신을 섬기는 사제는 모두 독신일 것을 요구하시는 신도 계시다고 합니다.”
아.
어딜 가도 그렇구나.
그래도 다행이다.
최소한 라이안은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이라.
그러면 내게 고백하는데도 큰 문제는···.
“아.”
라이안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그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탐하지 말라.
케리스만은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카이델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라이안이 내게 고백을··· 해··· 줄까···?
···.
무리겠지?
와씨, 미치겠네.
뭔가 하나가 해결됐다고 생각했더니 다른 문제가 생긴다.
이게 바로 첩첩산중이라는 건가.
“괜찮으십니까, 아샤님.
또 어디가 아프십니까?”
라이안이 내게 손을 뻗다가 멈췄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거두고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으으.
괜찮지 않지만.
“그, 그럼 사제님도 언젠가는 결혼을 하시게 되나요?”
“···.”
라이안의 눈이 가라앉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서늘하다.
백금색의 눈동자는 마치 빛을 잃은 보석 같았다.
“저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에?”
무슨 뜻일까.
나는 다시 물으려 했다.
그러나 차가운 무기물 같은 눈동자가 나를 막아섰다.
“···저는 아마 일생 결혼하지 못할 겁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올곧다.
가라앉고 어둡긴 하지만 결코 흔들리고 있진 않았다.
아니다.
흔들리는 건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을 억지로 견디어 내고 있을 뿐.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신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인가요?”
나는 억지로 그 질문을 꺼냈다.
알아야 한다.
왜인지.
라이안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답했다.
“저는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
예상치 못한 대답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어라?
나 잘못 짚었나?
아닌데···?
은화한테 했던 행동들.
그건 분명히 사랑에 빠진 남자였다.
남주인공이 보일 법한 변모였다.
지금 내게 하는 행동도 마찬가지.
내가 하는 행동이 답답하고 한심할 텐데도 라이안은 그런 내게 진중하다.
결코, 가볍게 말하지도 않고 가시 돋친 말을 하지도 않는다.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붉어지거나.
그런 행동들이 사랑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뭐지?
나에 대한 라이안의 감정은···?
라이안은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내려놓았다.
무릎에 올려놓은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나를 바라보았다.
식사가 끝났다는 뜻이겠지.
“오,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사제님.
다음에도 또 많이 이야기 들려주세요.”
공략을 위해서는 더 이야기를 듣고 같이 있어야 하겠지만···.
일단 내 정신을 정리하는 게 먼저다.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서···.
내 인사에 라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 앞에서 기도할 때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케리스만 신의 가호가 아샤 님의 위에서 영구히 머물 수 있기를.”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라이안은 문을 열고 나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만약 라이안이 남주인공 후보가 아니라면 나는 대체 며칠을 버리게 된 걸까.
연신이.
연신이한테 물어야 한다.
나는 곧바로 침대로 향했다.
“연신!”
베개 위에서 퐁퐁 뛰고 놀고 있던 연신이가 나를 본다.
반짝반짝 귀여운 눈망울로.
으으.
그 순진무구한 얼굴에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왜?”
“···그, 라이안이 남주인공 후보인 건 맞···지?”
물으면서 순간 떠올랐다.
연신이는 내게 남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물어도 별 소용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응, 맞는데?”
의외로 연신이는 긍정했다.
뭐지.
혼란시키려는 책략인가.
나는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연신이를 바라보았다.
“진짜?”
“응.”
···.
대체 왜?
정보를 주는 거지?
이렇게 갑자기···?
“슬슬 나도 재미없어서.
이대로 두면 너 20년이 지나도 여기 그대로 있을 것 같은데?”
···.
윽.
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확실히···.
이 소설의 소개 글에는 분명 ‘어마어마한 수의 남주인공 후보’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그 소개 글을 보고 최소한 7명 정도는 남주인공 후보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7명은커녕 찾아낸 것이 몇 명 되지 않는다.
지금도 겨우 찾은 라이안이라는 후보를 버릴 뻔했다.
혼자 착각해서.
으으.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연신이 입장에서 얼마나 답답할까.
“그, 그럼 라이안이 진 남주인공이야?”
“그건 모르지~.
그걸 가르쳐주면 재미없잖아.”
킥킥, 하고 웃은 연신이가 다시 침대 위에서 퐁퐁 뛴다.
으으.
얄미운데 귀여워.
알밉워···.
아니, 이런 말장난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정리하자.
라이안은 틀림없는 남주인공 후보다.
라이안은 결혼을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라이안은 사랑을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건···.
···.
나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라는 건 모르고 있다, 인가.
우와.
미치겠다.
이러면 더 귀찮아지는 거 아냐?
아니, 애초에 딱 봐도 라이안의 나이는 20대 초중반.
그럼 그때까지 첫사랑 하나 없었다는 거야?
···.
아, 하긴 카이델도 그렇지.
뭐야.
이 소설의 작가는 첫사랑에 원수라도 졌나?
왜 다 내가 첫사랑인데!
나도 모쏠인데 난이도 극악이잖아!
“으아아아악!”
내 비명에 문이 벌컥 열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데바인이 당황해서 외쳤다.
하지만 나는 머리를 싸쥐고 작가를 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으으.
망할 작가.
이 연신이만도 못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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