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의 정석, 진 남주인공과 이어져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카이델이 말을 멈췄다.
어느새 우리는 잔디밭 위에 멈춰 서 있었다.
사르르.
바람이 풀잎을 훑고 지나간다.
그 모습이 마치 파도 같아 나도 모르게 순간 눈길을 빼앗겼다.
카이델도 마찬가지인 걸까.
그는 줄을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는 제가···?”
길어지는 침묵을 깬다.
설마 이 정도 이야기해놓고 또 고백 안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대가 어렵다.”
···하.
미치겠네.
이 이상으로 질투작전을 유발하면 가일의 신변에 위험이···.
그런 생각을 하는 내 귀에 카이델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대는 내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지.
하지만 그대는 벌써 여러 번 내 곁을 떠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대의 진의는 어디에 있는가?
내 곁에 있고 싶은 것이 그대의 진의인가?
아니면 떠나고 싶은 것이 그대의 진의인가?”
여전히 내 눈에는 카이델의 정수리만 보인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풀의 흔들림과 함께 하늘하늘 흔들린다.
···.
후.
알고 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 얄팍한 수는 이런 데서 모순을 드러냈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나을까.
나는 어떤 배드 엔딩을 골라야 덜 고통스러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말에서 떨어져 죽는 게 나을까.
아니면 카이델의 약을 올려 사형을 당해볼까.
아니면 말 뒤로 접근해서 발에 치여 죽는 게 바르고 덜 아플까.
“그대는···, 처음부터 그랬다.
진심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대는 한 번도 내 옆에 있었던 적이 없다.
항상 내 옆에 있으면서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대답해 보아라.
그대는 정말로 내 옆에 있고 싶은가?
내 옆을 떠나고 싶지 않은 건가?”
카이델의 눈이 나를 향한다.
새빨간 눈동자가 촉촉하다.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카이델의 눈동자가 내 입을 틀어막는다.
얄팍한 수를 쓰지 마라.
있는 그대로 말하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 눈이다.
“저는···.”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들을 한 것일까.
그런 내게 또 다른 내가 속삭인다.
이미 알고 있잖아?
너는 그냥 게임 감각으로 이 모든 것을 즐긴 거야.
···.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가 반론하지 못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게임처럼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나의 매일은 괴롭거나 지루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 나를 유일하게 구원해주던 것이 소설이었다.
로맨스 소설을 보는 동안 나는 즐거웠다.
그동안만큼은 당당하고 사이다를 팡팡 터뜨리는 호걸이었으며
수많은 미남과 능력남들을 쥐락펴락하는 팜므파탈이었으며
현실의 괴로움과 동떨어진 소설 속 등장인물이었다.
설령 내게 있어 최악의 소설이었더라도,
그 안으로 들어와 다양한 캐릭터들을 만나며 재밌었다.
두려움에 떠는 매일도 없고 지루함에 몸부림치는 매일에서 벗어나
나는 재미있었다.
카이델에게 있어 이 상황은 현실임에도.
나는 카이델이 나에게 어쩔 수 없는 호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서 고백받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치 실험하듯 이것저것을 시험해본 것이다.
카이델이 본 나는
조잘거리는 입에 꿀을 바르고
얼굴에는 뻔뻔하게 거짓의 가면을 두르고
눈으로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고 외치고 있었을 것이다.
우습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그대는 이미 알고 있겠지.
내가 그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래서 그대는 나를 계속 시험하는 듯한 말을 한다.
무언가를 내게서 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알 수가 없다.
그대는 내 곁에 있고 싶지도 않으면서 왜 나를 흔드는가?
차라리 그냥 몰래 떠나버렸다면···.”
카이델에게서 목이 멘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와 만난 지 오늘로 19일째.
카이델의 가슴에 맺혀있던 고름이 흘러나온다.
나는 카이델에게 흔들림 없는 확신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카이델만을 바라보며 그의 고백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이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정체도 알 수 없는 검은 머리의 여자.
뭔가를 원하고 접근한 것은 아니지만,
뭔가를 원하는 듯 끊임없이 떠보고 시험하는 여자.
곁에 있고 싶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떠나겠다고 말하는 여자.
와.
돌이켜 보니 나 완전 최악이네.
“···가르쳐다오, 아샤.
그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대가 나를 원한다면 나는 모든 걸 다 버릴 수 있다.
나라도, 백성도, 왕의 자리도···.
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대를 택할 수 있다.
그대는?
그대는 어떤가?”
이건 고백으로 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순간 스스로를 비웃었다.
조금 전에 카이델에게 상처 준 것을 후회해놓고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거냐.
어차피 마지막이다.
이게 진짜 고백이 아니라면 다시 시작해서 제대로 고백을 받으면 될 일.
제대로 생각하자.
내가 뭐라고 해야 할지.
“폐하.
저는 처음부터 폐하께 거짓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막상 말을 꺼내려니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카이델에게 별 감정이 없는 내가 이런 마음인데,
카이델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내게 저런 이야기를 한 것일까.
“···.”
카이델의 눈이 가라앉는다.
남자다운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다.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소설로 보는 입장이었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헐?
미친 거 아냐?
무슨 남주인공이 이런 거로 울먹거려?
남주인공이 좀 듬직하고 든든한 맛이 있어야지.
남자답게 생기고 덩치 크면 뭐하나.
속이 이 모양인걸.
여태껏 나는 수많은 캐릭터를 그런 식으로 단정 지어 왔다.
캐릭터의 외양 묘사와 배경 묘사를 보고 이 캐릭터는 이런 성격이어야 한다고 단정했다.
내 안의 카이델은 성군으로서 이름을 드높이는 훌륭한 왕.
듬직한 덩치에 남자다운 얼굴인 호남자.
그렇다면 틀림없이 냉정, 침착한 남자일 것이다.
감정적이지 않고 이성적이며 여자에게 쉬이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를 휘두르게 만드는 속성의 힘은 대단하다, 라고.
하지만 다르다.
카이델은 이 소설 안에서 살아있다.
그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울먹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카이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폐하.
제가 찾는 사람은 처음부터 폐하였습니다.”
카이델의 눈동자에 살짝 커진다.
눈가를 적시던 물기가 한 방울, 뺨을 타고 흐른다.
카이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폐하가 누구인지, 폐하가 어떤 분인지.
그리고 제가 찾는 것이 폐하라는 것도요.”
처음으로 카이델을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의 내 말은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맞습니다.
저는 폐하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제가 말해서는 안 되는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그 말을 해주시길 원했습니다.”
후.
두근두근 떨리는 심장에 손을 얹는다.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치 내 마음속처럼.
카이델의 눈동자처럼.
“폐하.
저는···, 폐하를 원합니다.”
나는 고삐를 놓고 카이델에게 손을 뻗었다.
카이델은 내 손을 잡았다.
나로 인해 받은 상처가 조금이라도 가실 수 있도록,
나는 카이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세상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푸른 잔디밭과 깨끗한 하늘의 색이 뒤섞인다.
카이델은 어느새 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이게 무슨···?!”
카이델의 눈에도 이 일그러짐이 보이는 건가.
나는 카이델을 올려다보았다.
“폐하.”
“아샤, 그대는···.”
내 부름에 카이델이 나를 바라보았다.
평온한 내 얼굴을 보고 카이델이 무언가를 생각해 낸 듯 입을 닫았다.
그의 얼굴이 세계 이상으로 일그러진다.
“그대는···, 그대가 나를 필요하다고 해준 것은···.”
눈물을 흘리던 붉은 눈동자가 날카로워진다.
그 눈에 섞인 것은 항상 이성 뒤에 숨어있던 광기.
내게는 단 한번도 꺼내 보인 적 없는 광기다.
“죄송해요, 폐하.”
카이델은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나를 원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내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카이델을 받아들였다.
그 마음의 차이가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끼긱, 하는 위태로운 소리가 흐른다.
카이델은 광기에 휩싸인 채 나를 꽉 끌어안았다.
“못 보낸다.
그대는 이제 나의 것이다.
그대가 나를 받아주지 않았느냐!”
카이델의 머릿속에 만약 내가 말했던 진실 중 하나가 떠올랐다면,
어쩌면 카이델은 내게 고백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폐하.
말씀드렸을 터입니다.
저는 사람을 찾으러 왔다고.
그 사람을 찾으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카이델이 나를 꽉 안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를 끌어안은 힘에서 느낄 수 있다.
카이델은 나를 죽일 생각이다.
“윽.”
“못 보낸다.
누가 그대를 놓아준다고 했느냐?
그대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런 것은 내 알 바 아니다!
그대를 놓아줄 바에는···.”
카이델이 나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댄다.
그제야 나는 카이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나는···.”
일그러짐은 점점 넓어지고 커진다.
끊어질 듯 늘어난 엿가락처럼.
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 곧 세계가 무너진다.
“아샤!”
쨍! 소리와 함께 세계는 어둠으로 떨어져 내렸다.
*********
“···.”
나는 낯설지만 익숙한 곳에 서 있었다.
온통 어둠뿐인 세상.
그리고 그 중앙에 둥실 떠 있는 커다란 스크린.
거기에는 아직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나는 조금 전까지 카이델에게 잡혀 있던 손을 바라보았다.
크고 따스한 손이었다.
그제야 나는 왜 카이델에게 닿기를 꺼렸는지 알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카이델을 남자로 보고 있었나 보다.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닌 남자로.
그래서 두려웠다.
닿는 것이.
“오, 성공했나 보네?”
연신이의 가벼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미 끝난 일이다.
돌아볼 필요는 없다.
나는 두 손으로 불끈 주먹을 쥐고 연신이를 보았다.
“어디서 돌아다니다가 이제 오는 거야?”
“하하, 그게 뭐가 중요하냐!
뭐 성공한 게 중요한 거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손을 내렸다.
연신이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럼 이제 끝난 거지?”
“뭐가?”
“···?”
내기는 완료되었다.
이제 나를 돌려보내 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의아한 눈으로 연신이를 보자 연신이는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이제 끝난 거···잖아?”
“그러니까 뭐가?”
뭔가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연신이에게서 분해하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일단은 나랑 내기를 한 거고 내가 그렇게 고생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쉽게 클리어하면 분해해야 하지 않나···?
“야···.”
뭔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팟 하고 화면이 나타났다.
거기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화아사는 카이드레아의 고백을 받아들였어요.
-그렇게 화아사는 팔렌 왕국의 왕비님이 되었답니다.
···?
뭐?
왕비님이라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자 화면이 바뀌었다.
거기에서는 쇠사슬로 감겨있는 나와 쇠사슬의 끝을 잡은 카이델이 비치고 있었다.
-카이드레아는 화아사에게 점점 더 집착했어요.
-화아사가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을 하는지, 어디를 가는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어요.
-카이드레아는 화아사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화아사가 남자와 스치기만 해도 질투에 미쳐 사람을 죽였지요.
-화아사는 물었어요.
-“폐하, 왜 저를 구속하십니까? 왜 저를 믿지 못하십니까?”
-카이드레아는 말했어요.
-“그대의 마음을 믿을 수가 없다. 그대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가? 나를 사랑하냔 말이다!”
다시 화면이 바뀐다.
카이델이 왠 남자 앞에서 칼을 빼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귀신이나 도깨비 같았다.
-그 날도 카이드레아는 시종에게 화풀이하고 있었어요.
-화아사의 눈길이 그 시종에게 닿았다는 이유였어요.
-화아사는 더이상 카이드레아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볼 수 없었어요.
-“폐하, 제발···.”
-“놓아라!”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거기엔 칼에 찔린 나와 나를 안고 있는 카이델이 있었다.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카이드레아의 검이 화아사의 가슴을 꿰뚫었어요.
-화아사는 그대로 죽고 말았어요.
-카이드레아는 화아사를 안고 울부짖었어요.
-“아샤! 아샤!”
-BAD ENDING.
화면이 어두워진다.
연신은 내 어깨에 앉아 웃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바보는 너라고.”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