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녹색의 붓, 綠筆

공허한 세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녹필(綠筆)
작품등록일 :
2013.07.09 20:23
최근연재일 :
2014.03.27 05:04
연재수 :
34 회
조회수 :
20,084
추천수 :
518
글자수 :
216,798

작성
14.03.27 05:04
조회
320
추천
9
글자
10쪽

3. 차갑게, 빠르게 - 10

DUMMY

자레트의 서쪽에서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샤넷은 무심히 낙타 위에 실려가면서 조금씩 다가오는 구름들을 세고 있었다. 하늘을 듬성듬성 메꾸고 있는 먹구름들은 아침까지의 더위를 간직한 그대로 자레트를 덮치는 중이었다. 낙타 세 마리에 탄 채 사파히로 향한 일행은 이미 두어 시간쯤 전에 구름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구름이 빠른 것도, 낙타를 몰고 있는 나르친과 사리아의 기승술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낙타를 전속력으로 몰았다가는 샤넷이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뿐이었다. 나르친의 말대로 상황은 분명히 급박했지만, 그렇다고 샤넷이 정신을 잃어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낙타는 연락병들의 기준에서는 꽤 느리게 나아가고 있었다.

나르친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샤넷이 갑작스레 던져온 질문에 정말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그에 대해 샤넷이 보여준 반응은 나르친이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관심이 없을 수도 있지, 그게 저 정도로 충격을 먹을 일인가? 저 녀석이 왔다는 세계는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샤넷은 아침 이후로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명백히 넋이 좀 나가 있었다. 보통 넋이 나간 사람들은 자신이 지극히 멀쩡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노력하지만, 샤넷은 그것조차 포기할 정도로 넋이 나가 있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샤넷이 구름을 세고 있는 것은 앞으로의 기상 상태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보이니까 센다'에 가까운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카란은 반쯤 졸면서 낙타를 몰고 있었다. 밝으면서 동시에 흐릿한 하늘 아래의 원근감 없는 풍경들은 멍하니 정신을 놓고 바라보기에 제격이었다. 그러나 카란은 풍경 대신 옆으로 시선을 돌려 샤넷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속으로 하늘에 못박힌 샤넷의 눈동자가 보였다. 카란은 말을 꺼내기 전에 약간 망설였다. 다행히 그 찰나의 주저를 샤넷은 보지 못했다.


"샤넷, 조금 더 천천히 갈까?"


샤넷은 - 멍한 사람의 증거라도 되는 듯이 - 잠시 뒤에 카란을 바라보았다. 샤넷과 정면으로 마주한 카란은 순간 몸을 움찔했다. 깊이 있는 눈망울 너머에서는 분명히 카란이 짐작하기도 힘든 생각이 빠르게 오가고 있었다. 그 눈빛은 카란의 지레짐작처럼 결코 초점을 흐린 눈이 아니었다. 샤넷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살짝 웃어 보였다.


[아니, 괜찮아. 고마워.]


샤넷의 앞에서 낙타를 몰던 나르친은 뒤를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카란과 샤넷의 대화에 집중했다. 카란 또한 샤넷이 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말을 걸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렇다면 곧 카란은 샤넷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조금 힘이 없어 보이는데, 낙타가 흔들리는 것 때문에 그런가 해서."


나르친은 쾌재를 부르며 카란과 손뼉을 마주쳤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속으로만.


[음…? 아니, 괜찮아, 카란. 흔들린 건 낙타가 아니야. 낙타? 아, 그래, 낙타도 흔들리고 있기는 한데...]


카란은 샤넷의 대답이 횡설수설의 완벽한 표본이라고 생각했다. 주저하는 것까지 정확하게 '들리는' 샤넷의 대화 수단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카란이 뭐라 대꾸할 지 고민하는 사이에, 나르친은 천연덕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낙타가 흔들리는 것 때문이 아니라 흔들리는 건 낙타가 아니라고? 마치 다른 것이 흔들렸다는 투로 들리는데. 맞나?"


나르친의 등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샤넷이 대답했다.


[와, 예리한데요. 맞아요. 흔들린 건 제 생각이니까.]


"생각?"


[설명을 조금 해 드릴까요? 제가 말한 영생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샤넷의 말이 끝나자마자 낙타 세 마리가 빠르게 멈춰 섰다. 아무리 샤넷을 위해 느리게 달리고 있다지만 그래도 낙타의 속도는 사람이 뛰는 속도보다 빨랐고, 그 덕분에 샤넷은 낙타 등에서 튕겨나갈 뻔 했다. 낙마 직전 나르친이 손을 뻗어 붙잡은 덕분에, 샤넷은 2미터가 넘는 높이에서 낙마하는 대신 조금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나르친에게 핀잔을 줄 수 있었다.


[후, 세상에, 놀랄 일인 건 알겠는데 정말 죽을 뻔 했다고요.]


"미안, 좀 많이 놀라서. 그리고 나만 놀란 건 아닌 것 같군."


나르친은 주저 없이 샤넷에게 사과하면서 카란과 사리아의 낙타를 둘러보았다. 두 사람은 약간 멋쩍은 듯이 나르친의 시선을 피했다. 나르친이 말했다.


"샤넷,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 영생에 관련된 건 손에 쥐고 있겠다고."


[생각해보니 필요 없다는 사람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서요.]


"꼭 그렇지는 않지, 만약 내가 돈을 받고 너를 팔아 먹는다면… 아니, 됐다. 수비대장과 내가 한 말을 다 들었으니, 내가 안 그럴 거라는 확신이 있었겠군."


샤넷은 역시 예리하다는 눈치로 엷게 눈웃음을 지었다. 나르친은 샤넷에게 재촉하며 물었다.


"그래서, 대체 그 세계에서의 영생은 뭘 말하는 건가? 아무도 늙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그런 꿈만 같은 세상이라도 되는 건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음… 나르친, 방금 전에 당신이 낙타를 멈추다가 저처럼 떨어져서 바닥의 돌부리에 머리를 부딪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디 보자, 마침 여기는 자레트랑 사파히의 딱 절반 지점이군. 어느 쪽으로 달려도 의원까지 도착하기 전에 죽겠는데, 설마 노린 거냐?"


[벌써 절반이나 왔어요? 아,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여하튼, 만약 그렇게 어처구니 없이 죽으면 엄청나게 허무하지 않을까요?]


"그야 허무하기는 하겠지."


[다시 살아나고 싶지 않을까요?]


"뭐라고?"


나르친은 두 눈을 크게 떠서 샤넷을 쏘아보았다.


[만약 그 상황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바로는 아니고, 한 십에서 이십 년 정도 뒤에.]


카란과 사리아는 그 자리에 박힌 듯이 굳고 말았다. 어제부터 놀랄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샤넷의 말은 그보다더 더욱 압도적인 비현실성으로 두 사람을 짓누르고 있었다.


"설마 네가 말하는 네 세계에서의 영생이라는 게 불로불사가 아니라…"


[맞아요. 누구나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어요.]


"그건…"


나르친이 말끝을 흐렸다. 잠시 동안 텅 빈 모래벌판에 바람만이 거세게 불었다. 샤넷을 제외한 세 사람은 상식이 완전히 어그러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들은 자기가 지금까지 들어본 최고의 헛소리를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하는 샤넷에게 대꾸할 말을 자아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나르친이 조심스레 말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세계군. 좋아, 그런 영생이라면 그 가치는 인정하지. 난 사양할 것 같지만."


"나르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영생이 아니라 부활이잖아요? 부활에도 관심이 없어요?"


옆에서 카란이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물었다. 사리아는 아무 말 없이 지긋이 나르친을 바라보았다. 나르친은 살짝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글쎄. 공짜로 시켜준다고 해도 좀 고민을 해볼 것 같군. 뭔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면 거절할 것 같은데."


[놀라운데요. 당신은… 카란도 놀라는 것을 보니 여기서도 특이한 건 맞나 보군요.]


나르친은 자신을 향한 샤넷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 아니, 난 내 삶에 한 조각 미련도 없다는 게 아니다. 아직 돈도 여자도 내 손에 없는데, 미련이야 차고 넘치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죽음을 인정하고 그걸 바라보면서 살아야 한다는 소리다. 늙어 죽으면 그건 천수를 누린 거고, 그 전에 죽으면 내 선택의 잘못으로 죽은 게 아닌가? 거기서 다시 살아난다는 건 뭐랄까, 그건 더 이상 내 삶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내 존재는 거기에서 끝났을 텐데 말이다."


카란은 나르친의 말을 듣고는 절반 정도는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르친은 장난스럽게 킬킬대며 말했다.


"이렇게 말해봤자, 촌구석 용병 나부랭이가 삶이고 죽음이고, 알아야 뭘 알겠냐. 아르문까지 가면 온종일 그런 것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임무는 널 거기까지 데려가는 거니까, 내가 내뱉는 말 같은 건 신경 안 써도 된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사리아는 천천히 고삐를 잡아끌었다. 슬슬 출발하자는 표시였다. 사리아의 동작을 확인한 나르친이 말했다.


"자, 이대로 쭉 저녁까지 가면 사파히 서쪽에 도착하게 될 거다. 아침에 말했듯이 지금 사파히는 난장판일 게 뻔하니까 다들 조심하도록."


세 마리의 낙타는 나르친의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다시 동쪽으로 나아갔다. 샤넷은 울렁거리는 속을 다잡으며 약간 지친 기색으로 나르친의 등에 기댔다. 생각은 아직도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방금 전보다도 더욱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샤넷은 마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 숨결은 샤넷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쓰디쓴 이름 하나를 끄집어냈다. 샤넷이 속삭였다.


'레스틴, 당신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부정당했군요. 이들도 언젠가는 당신처럼 될까요?'


샤넷은 진심으로 그 대답을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작가의말

[댓글과 추천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D]


휴재 탈출! 안 쓰다 쓰니까 또 손이 굳었습니다.

이번 챕터는 조금 씬이 잘게 잘려서 숫자 상으로 조금 길어지는 군요.

챕터당 6.5~7만자 정도를 유지할 계획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5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공허한 세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혹시나 이 글에 남아계신 분들을 위해. +2 16.06.11 140 0 -
공지 당분간 수요일 연재에 돌입합니다. +1 14.03.25 394 0 -
공지 <수정기록> * 13/11/09 업데이트 * : 1-7까지 문단 구성 조정 +2 13.09.06 283 0 -
공지 [필독] 공지사항 +6 13.07.14 635 0 -
» 3. 차갑게, 빠르게 - 10 +5 14.03.27 321 9 10쪽
33 3. 차갑게, 빠르게 - 9 +3 14.02.25 253 9 14쪽
32 3. 차갑게, 빠르게 - 8 +6 14.02.11 263 10 14쪽
31 3. 차갑게, 빠르게 - 7 +8 14.01.29 299 5 11쪽
30 3. 차갑게, 빠르게 - 6 +6 14.01.15 522 7 13쪽
29 3. 차갑게, 빠르게 - 5 +8 14.01.08 284 10 14쪽
28 3. 차갑게, 빠르게 - 4 +6 13.12.17 352 8 9쪽
27 3. 차갑게, 빠르게 - 3 +6 13.11.12 289 9 11쪽
26 3. 차갑게, 빠르게 - 2 +2 13.11.09 287 9 12쪽
25 3. 차갑게, 빠르게 - 1 +2 13.11.05 352 11 8쪽
24 2. 깨진 자물쇠 - 11 (終) +2 13.10.16 397 9 11쪽
23 2. 깨진 자물쇠 - 10 +4 13.10.12 356 20 12쪽
22 2. 깨진 자물쇠 - 9 +8 13.10.07 449 9 15쪽
21 2. 깨진 자물쇠 - 8 +4 13.10.04 967 19 14쪽
20 2. 깨진 자물쇠 - 7 +4 13.09.22 353 11 12쪽
19 2. 깨진 자물쇠 - 6 +2 13.09.17 540 11 15쪽
18 2. 깨진 자물쇠 - 5 +4 13.09.09 477 13 17쪽
17 2. 깨진 자물쇠 - 4 +7 13.09.01 524 24 10쪽
16 2. 깨진 자물쇠 - 3 +8 13.08.27 645 14 19쪽
15 2. 깨진 자물쇠 - 2 +11 13.08.20 660 20 16쪽
14 2. 깨진 자물쇠 - 1 +12 13.08.16 542 18 10쪽
13 1. 흔한 전설 - 10 (終) +13 13.08.10 564 15 9쪽
12 1. 흔한 전설 - 9 +5 13.08.07 431 20 12쪽
11 1. 흔한 전설 - 8 +4 13.08.03 821 32 19쪽
10 1. 흔한 전설 - 7 <여기까지 교정 완료> +7 13.07.29 576 13 16쪽
9 1. 흔한 전설 - 6 +4 13.07.25 562 19 2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