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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붓, 綠筆

공허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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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필(綠筆)
작품등록일 :
2013.07.09 20:23
최근연재일 :
2014.03.27 05:04
연재수 :
34 회
조회수 :
20,074
추천수 :
518
글자수 :
216,798

작성
13.11.05 02:19
조회
351
추천
11
글자
8쪽

3. 차갑게, 빠르게 - 1

DUMMY

세상의 소리들은 이곳을 끝으로 모든 여정을 끝마치고 눈 속에 파묻힌다. 눈송이를 밟는 소리조차 삼켜버리는 눈송이들이 한때 풀밭이었던 땅을 가득 뒤덮었다. 구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울해지고, 하늘과 땅의 구분은 희뿌연 안개처럼 그 의미를 잃었다. 동물들이 몸을 감추고 바람조차 발소리를 죽이는 이 고요한 눈밭에, 주목할 만한 점이라고는 매 순간 발자국 두 개씩이 아로새겨지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문득 한쪽 발자국이 우뚝 멈춰섰다. 발자국에서 소리가 들렸다.


"잠깐, 이름이 현장조사 위원회라고?"


다른쪽 발자국이 놀란 기색도 없이 말했다.


"맞아."


그러자 발자국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조금 기운빠진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상한데. 어지간한 조사는 거의 다 끝나지 않았던가? 다 늦은 지금 만들어진 위원회라는 건 원래 제때 끼어들지 못한 어중이떠중이들이 열심히 허탕이나 칠 모임이어야 할 텐데…"


"모인 사람들을 보니 그렇지가 않다는 소리지?"


"맞아. 혹시 다른 소리 들은 게 있어? 연락을 직접 받은 건 너였던 모양인데."


다른쪽 발자국은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 때문인지 발자국은 조금씩 느려졌다. 두 발자국 사이의 거리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조금씩 멀어졌다. 앞서가던 발자국이 홀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즈음, 뒤쳐진 발자국이 말했다.


"샤넷의 자리비움에 대해서라면,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거의 끝났어. 내가 들은 바로, 이번 현장조사 위원회는 앞으로 일어날 지도 모르는 또 다른 자리비움을 대비하기 위해서일 거야."


"또 다른 자리비움이라는 게 무슨 뜻이야? 설마 우리들이 샤넷을 쫓으러 닫힌 세계로 건너가는 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뒤쳐진 발자국은 종종걸음으로 앞서간 발자국을 따라잡았다. 나란히 선 발자국이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아마 위원회는 샤넷 이후의 모든 자리비움, 그러니까 사후처리에 대해 논의하게 될 거야. 우리, 협회원들의 자리비움, 또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다른 사람들의 자리비움, 그리고…"


"그리고?"


두 발자국은 다시 소리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발자국에 발자국이 꼬리를 물고 두 사람의 자취를 숨김없이 남겼다. 드물게도, 질문한 발자국은 다른 발자국에게 더 캐묻지 않았다. 사실 혼자 생각할 문제도, 여럿이 생각할 문제도 아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있는 저 오두막에 도착하면 답을 아는 사람이 있을 터였다. 발자국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이 세계에서 가장 기묘한 장소를 줄 세운다면 만장일치로 첫째 손가락에 꼽힐 동굴은 흐릿한 눈안개 속에서도 압도적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옆을 지키는 오두막 역시 기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더욱 특별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3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혼학자들이었다. 단적으로, 지금 불발된 채굴용 화약 하나가 오두막 굴뚝 속으로 데굴데굴 굴러간다면, 짧은 폭음과 함께 그대로 3세계의 혼학은 멈춰버릴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3세계 유이(有二)의 혼학자협회인 체렐 학파는 당당히 '우리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 테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샤넷 다미우스의 우연한 발견을 통해, 다미우스 학파는 전 세계에서 튜넌 공리를 수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 되었다. 체렐 학파가 독자적으로 그 필요성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다미우스 협회 입장에서는 간신히 붙잡은 이 실낱 같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답을 캐묻지 않은 발자국은 괜스레 굴뚝 쪽을 한번 흘겼다. 다행히 절벽 아래에 자리잡은 오두막 위에는 불발탄은커녕 눈조차 드물게 내리고 있었다. 스스로도 별 이상한 걱정을 다 한다는 생각을 하며, 발자국은 단어 하나를 되새겼다.


"사후 처리라."


대답하지 않은 발자국이, 이번 질문에는 빠르게 대답했다.


"레스틴 생각이 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기는 해."


발자국은 동의의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품의 수많은 사람들이 오 년 전의 '사후 처리' 때문에 가슴 속에 메울 수 없는 흉터 하나씩을 남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지.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수를 따져보면 대충 세 집 건너 한 집마다 레스틴의 추종자가 나온 셈이라고 하더라고."


"그렇게나 많이?"


"직터 다미우스 본인에게서 직접 들은 얘기니까, 가장 믿을만한 이야기일 거야."


발자국 위에서 작은 한숨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날숨이 흰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발자국이 말했다.


"괜히 사후 처리라고 하니까 걸리는데, 좀 더 좋은 단어가 없을까? 사실 레스틴 사건이 불운한 사고를 수습하는 일이었다면, 이건 닫힌 세계라는 기막힌 보물상자를 두고 어떻게 나눠가질 지를 고민하는 일이잖아."


"글쎄, 생각보다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닐지도 몰라."


"적어도 즐겁게 할 수는 있지 않을까?"


다른 발자국이 대답하지 않은 채 잘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느새 두 발자국은 오두막 문간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문은 얼마 전에 진짜 발자국이 새겨진 전적이 있는 문이었다. 관리부 소속 혼학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오두막 문을 발로 걷어찬 흔적은 아직도 문짝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발자국은 나무에 새겨진 흔적을 애써 모른 척했다. 이번에도 같은 일을 했다가는 두 발자국이 나란히 학회에서 매장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발자국들은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오두막 안에는 눈이 쌓여있지 않았고, 두 발자국은 이윽고 두 사람이 되었다.

오두막에 들어선 두 사람은 이미 모인 사람들에게 압도당하고 말았다. 정기학회가 아니라면 모습을 보기조차 쉽지 않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었다. 아니, 정기학회조차 나오지 않는 사람마저 참석해 있었다. 그런 자리에 단 두 의자만이 비어있는 모습은, 두 사람을 알 수 없는 죄책감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빼고 다 도착하신 것 같은데, 혹시 저희가 너무 늦었나요?"


마지막으로 도착한 방문자들의 목소리에서 불안한 티를 느꼈는지, 상석에 앉은 위원회장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시길. 두 분이 늦은 게 아니라 다들 너무 일찍 온 겁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두 사람은 살짝 눈인사를 한 뒤, 옷자락을 가볍게 털었다. 그리고는 지체 없이 빈 자리에 각자 몸을 앉히려 했다. 그러나 모인 회원들을 빠르게 둘러보던 두 사람의 시선은 한 곳에서 동시에 멎었다. 틀림없었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은 한 사람을 향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어, 그 명부!"


"아, 로안… 다미우스와, 실 다미우스? 맞나요?"


두 사람은 남자가 자신들의 이름을 외우고 있다는 사실에 한번 더 놀랐다. 남자 역시 로안과 실을 여기에서 마주칠 줄 몰랐기에 적지 않게 놀랐다. 영문을 모르는 나머지 회원들은 어정쩡하게 선 두 사람과 자리에 앉은 한 사람을 번갈아 보며 사태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위원회장인 직터 다미우스는 로안과 실이 자신의 초생 제자를 보고 왜 저렇게 놀라는지 심히 궁금해졌다.


작가의말


기나긴 시험을 끝마치고, 작가가 돌아왔습니다! 결과는 망했습니다


기다려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로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금, 잘 부탁드립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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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 차갑게, 빠르게 - 10 +5 14.03.27 320 9 10쪽
33 3. 차갑게, 빠르게 - 9 +3 14.02.25 253 9 14쪽
32 3. 차갑게, 빠르게 - 8 +6 14.02.11 263 10 14쪽
31 3. 차갑게, 빠르게 - 7 +8 14.01.29 299 5 11쪽
30 3. 차갑게, 빠르게 - 6 +6 14.01.15 522 7 13쪽
29 3. 차갑게, 빠르게 - 5 +8 14.01.08 284 10 14쪽
28 3. 차갑게, 빠르게 - 4 +6 13.12.17 352 8 9쪽
27 3. 차갑게, 빠르게 - 3 +6 13.11.12 289 9 11쪽
26 3. 차갑게, 빠르게 - 2 +2 13.11.09 287 9 12쪽
» 3. 차갑게, 빠르게 - 1 +2 13.11.05 352 11 8쪽
24 2. 깨진 자물쇠 - 11 (終) +2 13.10.16 397 9 11쪽
23 2. 깨진 자물쇠 - 10 +4 13.10.12 356 20 12쪽
22 2. 깨진 자물쇠 - 9 +8 13.10.07 449 9 15쪽
21 2. 깨진 자물쇠 - 8 +4 13.10.04 966 19 14쪽
20 2. 깨진 자물쇠 - 7 +4 13.09.22 353 11 12쪽
19 2. 깨진 자물쇠 - 6 +2 13.09.17 540 11 15쪽
18 2. 깨진 자물쇠 - 5 +4 13.09.09 477 13 17쪽
17 2. 깨진 자물쇠 - 4 +7 13.09.01 523 24 10쪽
16 2. 깨진 자물쇠 - 3 +8 13.08.27 645 14 19쪽
15 2. 깨진 자물쇠 - 2 +11 13.08.20 659 20 16쪽
14 2. 깨진 자물쇠 - 1 +12 13.08.16 542 18 10쪽
13 1. 흔한 전설 - 10 (終) +13 13.08.10 563 15 9쪽
12 1. 흔한 전설 - 9 +5 13.08.07 430 20 12쪽
11 1. 흔한 전설 - 8 +4 13.08.03 820 32 19쪽
10 1. 흔한 전설 - 7 <여기까지 교정 완료> +7 13.07.29 575 13 16쪽
9 1. 흔한 전설 - 6 +4 13.07.25 561 1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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