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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붓, 綠筆

공허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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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필(綠筆)
작품등록일 :
2013.07.09 20:23
최근연재일 :
2014.03.27 05:04
연재수 :
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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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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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17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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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3. 차갑게, 빠르게 - 4

DUMMY

검붉은 협곡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사막. 산맥처럼 솟은 바위 기둥을 한 때는 물이, 지금은 바람이 부지런히 깎아내고 있다. 웬만한 도시 두어 개 크기만한 장대함을 자랑하지만, 협곡에는 이름이 없었다. 이 붉은 협곡은 아르문국 북쪽에 위치한 수도 아르문에서 남쪽 끝에 위치한 투그딘을 일직선으로 이었을 때 반드시 지나쳐가야 하는 관문이다.

그러나 그 지리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이 협곡에 이름조차 붙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르문에서 협곡 바로 위쪽에 자리잡은 도시인 네바리스까지는 다른 길과 별 다를 바가 없지만, 거의 낭떠러지에 가까운 협곡의 끄트머리가 문제였다. 낙타와 말을 타고서는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지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편한 길로 가려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이 붉은 협곡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한참을 돌아 사파히와 가브다니 사이의 길을 통해 아르문으로 향한다.

반대로 말하면, 이 협곡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전부 떠돌이 생활에 잔뼈가 굵은 여행자들이라는 뜻이다. 지금 협곡 위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명백히 그 조건에 부합하는 듯이 보였다. 비쩍 마른 나무 지팡이 하나를 쥔 노인이었다. 덥수룩한 수염과 주변 경치만큼이나 구불구불한 주름살은 노인이 살아온 길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협곡에서 찾아보기 힘든 부류였다.

노인의 뒤에는 열두어 살쯤 되었을 법한 소년이 열심히 그를 쫓아가고 있었다. 약간 짙은 피부에 작은 체구의 소년은 놀랍게도 뜨거운 협곡 위를 달음박질하고 있었다. 노인이 겉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빠르기로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종형곡선을 그리는 나이와 체력의 상관관계 덕분에 뛰고 있는 둘 사이의 거리는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한참을 뛰어가던 소년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노인을 향해 소리쳤다.


"잠깐만요!"


노인은 그 소리에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빙긋 웃으며 어서 따라오라는 듯이 손을 흔들더니, 다시 뛰기 시작했다. 소년은 한숨을 푹 쉬고는 종종걸음으로 다시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그 긴박감 없는 추격 끝에 소년이 노인을 따라잡았을 때, 노인은 협곡 줄기의 끄트머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헉, 이 좁은, 협곡 위에서, 헉, 왜 갑자기?"


"다 왔다!"


소년은 놀란 얼굴로 노인이 쭉 내지른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 끝에는 협곡도 사막도 아닌 것이 자리잡고 있었다. 절벽 아래의 분지에 규칙적으로 뻗은 모랫빛 직선들. 소년은 한 눈에 그것이 도시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건물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흔들리는 깃발들이 있는 곳이 도시가 아니고 무엇이랴. 소년은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후… 거짓말은 아니었군요."


노인은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가슴을 탕 쳤다. 거센 사막의 바람이 노인의 바짓자락을 세차게 휘저었다.


"이놈아, 내가 누구라고 했느냐? 아르문의 시골 끝자락 노바드에서 태어나 온 땅을 돌다가-"


"-폐하의 눈에 띄어 왕궁으로 불려간 이야기꾼 차드. 이후 아르문에서 삼십 이년을 사학자로 일하다가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남. 올해로 예순, 독신."


흐뭇하게 소년의 낭독을 듣던 차드는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맞는 말 했는데 억울하다는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에게, 차드는 능청맞게 대꾸했다.


"쓸만하구나. 하지만 요녀석아, 말에 가시를 담을 생각이라면 아직 한참 멀었다."


소년은 대답 대신 맞은 자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드가 말했다.


" 어떠냐, 모튼. 태어나서 다른 도시를 처음 본 감상은?"


모튼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는 태양 아래에서 빛나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감상은 짧았다.


"많이 다르네요."


"암, 협곡을 경계로 기후가 크게 바뀌니까 말이다. 그리고 네바리스는 바로 옆에 강이 흐르기 때문에 훨씬 시원한 편이란다. 이 앞으로 이어지는 투그딘, 자레트, 에… 그리고 사파히와 가브다니. 이런 도시들은 우물 없이는 물을 구할 수도 없는 사막이지."


"그럼 저 건너편이 마호칸 사막인가요?"


모튼은 손을 뻗어 도시 너머로 지평선과 맞닿은 사막을 가리켜 보았다. 바위 몇 개를 빼놓고는 온통 모래로 덮여있는 광활한 사막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차드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래, 저곳이 내 여행이 끝을 맞이할 곳, 마호칸 사막이란다. 저기에서 확인해야 할 이야기가 일곱 개나 있지. 그 중 몇 개는 내 스승님께서도 진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신 이야기인데 말이다."


"이야기꾼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거예요?"


"물론 그런 이야기는 미리 말을 하고 시작해야지. 여러분, 이 이야기는 아르문 남쪽 끝의 어느 지방에서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랍니다, 같이 말이다. 사실 현자 홀트와 유랑단의 이야기 같이 허무맹랑한 구석이 있는 이야기들은 듣는 사람들도 반쯤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듣겠지만 말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흥을 돋구기 위해 끼워 넣는 거지."


"현자 홀트와 유랑단이요?"


"아서라, 이야기꾼에게 이야기를 묻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거다."


차드는 이마에 손을 얹어 햇빛을 가리며 도시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모튼 역시 차드 옆에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목적지를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문득 차드가 말했다.


"돌아가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란다."


그는 모튼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모튼이 미심쩍은 눈으로 차드를 바라보았지만, 차드는 시선을 협곡 아래의 도시에 못박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이 협곡은 내려가기도 쉽지 않지만 올라오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지. 여기에서 지금 바로 네바리스의 친구들에게 돌아가도 말리지 않으마. 네 몫의 물과 식량은 나눠주마."


모튼은 씁쓸한 코웃음을 쳤다.


"안 가요. 친구는 무슨, 그 지긋지긋한 좀도둑들 사이에서 더 부대끼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이야기꾼은 항상 조마조마한 직업이지. 몸 담을 도시를 찾기 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눌러앉은 뒤에도 안심을 할 수가 없단다. 이야기가 틀렸거나 밑천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인생은 줄타기처럼 매 순간이 불안하지."


"상관없어요. 손에 돈을 산더미처럼 쥐고 있는 사람들도 불안해 하기는 마찬가지던데요."


"그건 그렇지."


"그리고…"


"그리고?"


"이야기, 멋있었어요. 사실 그게 다예요."


차드가 여전히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않고 모튼과 슥 눈을 맞추었다. 그는 일단 모튼이 왜 그런 감상을 가졌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네바리스에서 근육질의 남성 두 명에게 얻어맞고 있는 모튼과 마주쳤을 때, 자신이 모튼에게 보여준 기지는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훌륭한 이야기가 될 만큼 재치 넘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차드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고아 소년 하나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시밭길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차드는 모튼의 눈에서 한 줌의 망설임이라도 읽어낼 수 있다면 두말없이 소년을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먼저 입을 연 쪽은 모튼이었다.


"할아버지, 제가 저 끔찍한 네바리스의 뒷골목에서 자라면서 딱 하나 배운 게 있는데, 뭔지 아세요?"


"무엇이냐."


"손에 들어왔을 때 움켜쥐어야 한다는 거요. 빵이든, 돈이든, 정보든, 기회든. 한순간 망설였다면, 그게 누구 손에 들어가건 불평해봤자 이미 늦은 거죠. 적어도 네바리스에서는 그랬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던지 날 따라 다니겠다는 거냐? 내가 널 그대로 사막 건너에 노예로 팔아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마음대로 하세요. 그건 제가 손에 독바늘 같은 걸 움켜쥐었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그게 망설이다가 전부 놓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열두 살짜리 머릿속에서 나온 교훈치고는 훌륭한 축에 속했다. 차드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를 간지럽히던 뭔가가 사라진 느낌을 받았다.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차드는 손에 쥐고 있던 나무 지팡이에 힘을 주어 뚝 부러뜨린 뒤, 그대로 절벽 아래로 집어 던졌다. 텅 하고 가벼운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히며 떨어지는 소리가 협곡을 울렸다.


"가자. 네바리스만큼은 아니지만, 자레트도 꽤 큰 도시지. 자리잡은 이야기꾼이 못해도 열 명은 있을 게다."


차드는 그렇게 말하고 협곡의 허리 부분으로 몸을 돌렸다. 모튼은 협곡 아래까지 떨어진 지팡이를 잠시 지켜보다가 차드의 뒤를 따랐다. 한 사람에게는 삶의 마지막 목적지가, 다른 사람에게는 삶의 첫 목적지가 될 사막 도시 자레트는 햇빛 아래에서 희게 빛나고 있었다.


작가의말


 정말,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감사합니다 :D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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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 깨진 자물쇠 - 11 (終) +2 13.10.16 397 9 11쪽
23 2. 깨진 자물쇠 - 10 +4 13.10.12 356 20 12쪽
22 2. 깨진 자물쇠 - 9 +8 13.10.07 449 9 15쪽
21 2. 깨진 자물쇠 - 8 +4 13.10.04 967 19 14쪽
20 2. 깨진 자물쇠 - 7 +4 13.09.22 353 11 12쪽
19 2. 깨진 자물쇠 - 6 +2 13.09.17 541 1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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