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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붓, 綠筆

공허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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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필(綠筆)
작품등록일 :
2013.07.09 20:23
최근연재일 :
2014.03.27 05:04
연재수 :
34 회
조회수 :
20,076
추천수 :
518
글자수 :
216,798

작성
13.07.25 20:19
조회
561
추천
19
글자
20쪽

1. 흔한 전설 - 6

DUMMY

어스름히 빛나는 달이 지평선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에 드문드문 떠있는 구름의 가장자리가 떨어져 나갈 듯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사막은 드물게 적막했다. 말라붙은 덩굴이 바람에 쓸려나가며 바위를 긁는 소리가 모래 위를 쓸쓸히 울려 퍼졌다.

대부분의 아르문 사람들은 자레트에서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사막은 모래사막에서 자갈사막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보통 이 둘은 같이 묶여서 마호칸 사막이라 불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이곳을 지나쳐야 하는 사람들이나, 더욱 심하게는 이 곳을 오가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에게 모래사막과 자갈사막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이들에게 다행스러운 소식이 있다면 밤에 불을 피우지 않고서는 그대로 동사하는 모래사막 쪽과 달리 자갈사막 쪽은 해가 져도 저체온증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추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점을 상쇄하려는 자연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엎드리면 대부분의 경우는 살아남을 수 있는 모래폭풍에 반해 지나가는 자리를 전부 박살내는 자갈폭풍의 경우 발견하자마자 은신처를 찾지 못하면 그대로 발견자를 한 줌 붉은색 모래로 갈아버리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자갈폭풍이 한 번 일대를 쓸고 지나가면 그 근방의 암석 배치를 송두리째 뒤바꿔놓기 때문에, 불행한 투그딘의 상인들에게 사막의 길을 외운다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등에 짐을 잔뜩 진 낙타와 함께 거친 자갈밭에서 가장 평탄한 곳을 이은 경로를 찾아내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편의상 자갈사막이라고 일컬어지는 지역의 실상은 타지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위나 돌멩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큼직한 암석들이 여기저기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사람이 걷기도 까다로운 지역이 있는 판에 낙타를 몰고 이 지역을 헤쳐나가는 것은 그리 호락호락한 재주가 아니다.

해와 달이 높이를 맞바꾸고 있는 조그마한 언덕 너머로 일렬로 낙타 세 마리가 머리를 드러냈다. 발굽 소리가 마호칸 사막의 정적을 찢으며 거센 바람을 불렀다. 가장 먼저 언덕을 넘어온 낙타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주위를 둘러보던 낙타의 주인은 흡족한 얼굴로 외쳤다.


"이봐, 저기 보이는 동굴 맞지?"


"예, 아마 맞을 겁니다. 예정보다 지나치게 빨리 도착했군요."


"지나치게? 이런 일에 시간 끌어서 좋을 게 뭐 있다고. 이봐, 이대로 오늘 안에 탐사까지 끝내볼 생각 없나?"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저는 둘째치고 사리아가 못 버틸 겁니다. 오늘은 여기 입구에서 묵고, 내일 아침에 내려가도록 하죠."


카란, 나르친, 그리고 일행에 합류한 연락병 사리아 제헬이 낙타를 몰아 내달린지도 꼬박 하루가 지났다. 카란의 예측대로였다면 지금쯤 일행은 절반을 조금 넘긴 위치에 있었어야 하지만, 그들의 오백 미터 앞에는 아무리 높게 쳐주어도 입구가 잘 깎인 동굴 이상의 가치를 매길 수 없어 보이는 홀트 유적지가 우뚝 서있었다. 카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나르친의 길잡이가 완벽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도시와 도시 사이의 상대적으로 평탄한 길만을 달리는 연락병과는 달리, 일을 가리지 않는 나르친은 오히려 이 자갈사막에 더욱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카란이 짐작한 도착시간에서 거의 반나절 가까이를 앞당기는 효과를 가져왔다.

모두에게 유일한 불만이 있다면 식량과 물이 카란의 예정대로 준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일 인당 거의 일주일어치의 짐을 짊어진 낙타들은 전속력의 절반 정도로 달릴 수밖에 없었고, 나르친은 오는 내내 만약 목적지를 사전에 알려주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불평했다. 낙타를 끌어 사리아를 뒤에 두고 나르친 옆으로 온 카란은 그 불평을 들어주면서도 순수하게 나르친의 실력에 놀라고 있었다.


"이거 봐. 결국 하루 만에 왔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자갈사막 지대에서 낙타 경주를 벌인다면 당신이 우승할 것 같은데요. 아니, 대체 이 돌바닥에서 어떻게 낙타를 그렇게 빠르게 몰 수 있죠? 어제 분명히 이틀쯤 걸릴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틀이라는 말은 네가 전속력으로 하루 반이라는 말을 듣고 지레짐작한 거다. 보아하니 자갈사막이라고 속도를 거의 걸어가는 수준으로 낮춰 잡은 모양인데, 이 정도 땅이면 어느 정도 달릴 수는 있다. 아마 여기서 남쪽으로 한 십오 킬로미터만 더 내려가도 낙타를 타느니 걸어가는 게 나을 테지만."


"음, 그랬군요. 사실 여기까지 나와본 적이 얼마 없어서 말입니다. 수비대 소속 연락병은 기본적으로 타국과 교류를 하지는 않으니까요. 나르친, 이 사막을 끝까지 건너본 적이 있습니까?"


"한 오 년쯤 전에 도적단들이 성행할 때, 상인들 호위대로 따라간 적이 있었다. 여기보다 더 깊숙한 자갈사막이 쭉 이어지다가 다시 모래사막이 나오더군. 사실 진짜 놀라운 건 사막이 아니라 그 상인들이었지. 자갈폭풍을 매일같이 만나는 인간들이 대체 도적단이 뭐가 무섭냐고,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적어도 자갈폭풍은 상품을 싹 털어가지는 않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아니. 그 때 내가 피해갔던 수십 개의 자갈폭풍 중에서 하나만 정면에서 마주쳤어도 상품이랑 상인이랑 나까지 한데 합쳐서 가루가 되었을 거다."


"그렇게 무시무시한가요? 제가 본 것은 기껏해야 자레트 근처에서 가끔 부는 조그마한 모래폭풍이 전부라서 자갈폭풍이 뭔지는 잘 모릅니다."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군. 네 계획대로 이 근처에서 이틀씩이나 머뭇거렸다면 자갈폭풍과 첫 만남을 가질 수도 있었을 텐데."


"…점점 당신을 고용한 우리 자레트 수비부대장님의 결정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던 세 사람의 낙타는 조금씩 홀트 유적지로 다가갔다. 사실 한담을 나누던 세 사람이라는 표현은 부정확했는데, 두 사람 뒤에서 묵묵히 따라오고 있는 사리아 제헬은 이야기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앞에서 두 사람이 하잘것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이틀째 지켜만 보고 있었다.

사리아의 검고 짧은 머리칼은 다부진 미인이라는 인상을 주는 오뚝한 눈매를 살짝 가리고 있었다. 낙타꾼들이 흔히 그렇듯 큰 키는 아니었지만, 건강미를 느낄 수 있는 그녀의 몸에는 생기가 넘쳤으며, 절도 있게 움직이는 동작에는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굳게 다문 입이 출발 이후 두 번도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제부터 나르친의 궁금증을 끊임없이 자아내고 있었다.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당장이라도 입을 열어 즐겁게 수다를 떨 것 같지 않는 것이 이상해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사리아는 만나자마자 짤막하게 자기소개를 한 뒤, 그대로 침묵의 바다에 뛰어든 채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카란이 자신 옆으로 와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이 상황이 위치적으로 사리아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르친은 카란에게 귀를 가져다 대라는 손짓을 보냈다. 카란이 낙타에서 몸을 살짝 기울이자 나르친은 호기심이 짙게 배어나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이봐, 저 친구는 원래 말이 없는 편인가? 어제는 한 마디 하더니, 오늘은 한 마디도 안 한 것 같은데."


"아, 말이 없다기보다는, 필요 없는 말을 안 하는 쪽입니다. 사리아는 말 이외의 다른 수단을 사용해서 빠르게 정보 전달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면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죠."


"말 할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인가? 일 하면서 그런 축들을 본 적은 있다만."


"그것과는 좀 종류가 다릅니다. 그냥 말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끔 사리아와 대화를 하다 보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걸 대화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 말이죠. 간혹 다음 말이 이어져야 되는데 사리아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그저 기다리고만 있을 때가 있을 겁니다. 충고를 하나 드리자면 그럴 때는 눈에 주의하시면 됩니다."


"눈?"


"막상 설명하자니 예시를 들기가 어렵군요.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직접 보시는 편이 빠를 겁니다."


의심이 다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만족한 나르친은 다시 앞을 보려다가 흠칫 놀랐다. 주인들이 수다를 떠는 동안 충실히 걸어온 세 낙타가 홀트 유적지의 시작이라고 부를 만한 지점에서 갑자기 발을 멈췄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나르친이 그대로 낙타에서 뛰어 내렸다. 뒤를 이어 카란과 사리아도 낙타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내심을 가지고 살펴보아도 도저히 유적처럼은 보이지 않는 동굴은 겉으로만 보기에도 그 규모가 상당했다.

지면 바깥으로는 위로 삼 미터, 옆으로 오 미터쯤 되는 그리 넓지 않은 입구가 드러나 있는 반면, 가파른 경사를 가지고 깊숙이 이어지는 지면 아래로는 놀랍게도 꽤나 광활해 보이는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굴이라기보다는 땅에 수평하게 파인 공동(空洞)과 비슷했다. 지면에 뚫린 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동굴 안쪽을 비추고 있는 탓인지, 안쪽에서는 풀 비슷한 것이 피어있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그 넓이 자체는 일행이 마음 먹고 하루만 살피면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였다.

카란의 말처럼 이틀씩이나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한 나르친이 지금 바로 탐사를 시작하는 안건을 재상정했지만, 한 명은 오늘 체력을 비축하고 내일 밝을 때 내려가야 한다는 적극적인 반론을, 한 명은 무관심한 침묵으로 응답했기 때문에 결국 안건은 재기각 당하고 말았다.

사리아가 낙타를 한데 모아 묶어놓고 짐에서 건초더미를 풀어 늘어놓는 동안, 나르친과 카란은 가지고 온 장작 조금과 주변에 보이는 식물 비슷한 것들을 모아 불을 피울 준비를 했다. 아무리 모래사막보다는 덜 춥다지만, 주변에 바람을 막아줄 지형지물이 전무한 사막에서는 체온 유지를 위해서라도 불을 피우는 편이 안전했다. 그리고 남아도는 식량을 빠르게 처리하려면 아무래도 끓인 물이 필요했다. 주머니 하나에 있는 식재료를 죄다 썰어 넣어서 만들 수 있는 요리를 만들려면 더욱 그랬다.

모닥불을 피운 세 사람은 나뭇가지에 걸친 작은 솥을 바라보며 적당히 불가에 둘러앉았다. 낭만적이라면 낭만적인 광경이겠지만, 언짢은 인상으로 아직도 굴 건너편을 내다보는 나르친이 갑자기 혼자서 동굴로 뛰어들까 봐 카란은 내심 속을 졸이고 있었다. 텅 빈 허공에 나르친이 툭 말을 던졌다.


"흠. 나라고 이 늦은 밤에 무슨 위험이 있을 지도 모르는 동굴에 들어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단지 시간이 아까울 뿐이지. 그럼 내일 빨리 둘러보고 풀처럼 보이는 게 없으면 얼른 돌아가자고."


"나르친, 그래도 명색이 자그마치 왕령입니다. 살펴볼 건 성의 있게 살펴보고 가야죠."


"뭐 어때. 보수가 네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아닌데."


"그게 아니라, 돌아가면 저기 뒤에 있는 사리아가 탐사보고서를 써야 한단 말입니다. 만에 하나 보고서를 본 아르문의 사학자들이 탐사 미흡이라고 판정했다가는 우리 모두 왕령 불복죄로 잡혀 들어갑니다. 저랑 사리아는 수비대 소속이니까 그 자리에서 바로 잡힐 거고, 당신도 아마 자레트 안에서 수비대를 피해서 일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둘은 자연스레 앞쪽에 앉은 사리아를 바라보았다. 사리아는 나르친이 고개를 돌리자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카란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두 번 끄덕거렸다. 대화를 듣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좋아, 인정하지. 애당초 자레트 수비대는 중개인을 통해서 나한테 의뢰를 보낼 정도로 나를 잘 알고 있다. 일하기가 쉽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그냥 자레트를 도주해야 할지도 모르지. 본의 아니게 성실하게 일하게 생겼군."


나르친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럼 대체 어떤 식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건가? 비전문가들끼리 탐색해봤자 뭘 봐도 다 그냥 돌멩이처럼 보일 텐데."


"적어도 성의를 보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냥 '전 지역에서 수상한 흔적 없음' 이라고만 써 올릴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비전문가가 자세히 쓴다고 해봐야 '전 지역에서 수상한 돌 없음, 전 지역에서 수상한 풀 없음'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아르문에서 그따위 보고서를 환영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군."


"음… 그럼 대체 뭘 원하는 걸까요? 하나 생각해 본 게 있는데, 왠지 불로초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칙서에 정확히 불로초를 찾으라고 명시되어 있었을 테니까요."


"그건 확정할 수 없다. 불로초도 일단 영생의 단서니까. 꼴을 보아하니 잘나신 사학자들도 대체 뭐가 있을지 몰라서 대충 얼버무려 놓은 것 같은데."


"그래도 뭔가 먹어서 영생을 누리는 종류의 물건이 아닐까요? 아니면 피부에 바른다거나, 들이마신다거나. 저는 다른 방식으로 영생을 얻는 방법이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또 모르지. 영원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동물 피를 바르고 이상한 모양을 바닥에 그리는 의식을 진행해야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럼 저 동굴 어딘가에 그 의식이 적혀있는 두루마리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군요."


"천장에 벽화로 그려져 있을지도 모르지."


"대체 왜 '영생의 단서'라고만 적어놨는지 의아할 지경이군요. 사학자들은 우리가 그 칙서만 보고 감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입니다."


어제 이후로 대화라는 사회현상은 나르친과 카란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이 되었기에, 티격태격하며 탐사 조항에 대한 열띤 토론을 나누던 두 사람은 이내 사리아의 존재를 잠시 의식에서 지워버렸다. 안 그래도 불 건너편에 앉은 사리아의 모습은 주의하지 않으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래서였을까, 카란은 등 너머에서 정체불명의 물체가 나타나 어깨를 툭 쳤을 때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뛰어오를 뻔 했다. 카란의 급박한 단말마에 즉각 허리춤의 단검을 움켜쥔 나르친은 이내 손가락의 주인을 파악하고는 헛웃음을 지으며 긴장을 풀었다.


"후, 사리아, 갑자기 뭐하는… 이게 뭐야?"


카란의 왼어깨 위에 조그마한 두루마리 하나가 얹혔다. 사리아는 다시 자리에 돌아가 앉은 채 가만히 카란을 응시했다. 대답을 기다리다 못한 카란이 오른손으로 어깨 위의 두루마리를 집어 들어 펼치자, 두 사람의 토론이 얼마나 무의미했는지를 단칼에 증명할 만한 내용이 공개되고야 말았다.


"에, 어디 보자. '다음 내용에 주의하여 탐사를 진행하기 바람. 해당 항목들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시 징계 및 재조사 요망'이라…"


나르친과 카란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맥이 죽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징계 및 재조사라는 소리는 만약 사리아가 이것을 건네주지 않았다면 내일의 탐사는 그대로 무의미한 헛짓이 될 뻔 했다는 말이다.


"사리아, 대체 이렇게 중요한 것을 왜 이제야-"


의문형으로 끝났어야 할 외침은 카란이 사리아의 시선을 확인하자마자 종식되었다. 사리아는 방금 전에 카란을 응시하던 것과 다를 바 없이 방금 그녀가 건네준 두루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란은 멋쩍게 웃으며 나르친을 슬쩍 바라보았고, 나르친은 이제 눈에 주의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이유 없는 정적이 오간 뒤에야 카란은 두루마리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사리아의 두루마리를 뒤집어 뒷면을 펼친 카란은 더욱 충격적인 문구와 마주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분실물 - 사리아 편에 들려 보낼 것'


두루마리 뒤에 적힌 굵직하게 휘날린 필체의 글씨는 수비부대장의 작품이었다. 이제 일의 전모는 불을 보듯 확연해졌다. 수비대장이 잠시 없는 사이 서류 정리를 총괄하던 수비부대장은 카란이 떠난 뒤에야 칙서가 두 개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고 그것을 가까스로 사리아에게 들려 보낸 것이다.


"어이구, 일 처리가 이 모양이니까 수비대장님께 허구한 날 불려가지… 이번 건 안 들켰으면 좋겠네."


"뭐가 어떻게 된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거기 적힌 대로 조사를 해야 한다면 그 내용을 어서 아는 편이 좋겠군."


나르친이 재촉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카란은 두 번째 두루마리를 다시 뒤집어 앞면에 쓰인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적혀 있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가장 먼저, '발견해야 할 단서는 살아있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라고 써있습니다."


"좋은 소식이군. 살아있는 대상이라는 게 쥐나 풀 같은 거면 저 동굴에서 알아채기는 쉬울 거다. 설마 이 척박한 사막에 개보다 큰 동물이 있으리라고."


나르친이 불가에 장작을 밀어 넣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카란은 계속해서 두루마리를 읽어내려갔다.


"다음으로, 사람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빛을 내거나 움직이는 등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있는지 확인할 것."


"그것도 좋은 소식이군. 우리가 뭘 해야 할 필요는 없을 테니."


"마지막으로… 진짜 두루뭉술하게 적혀 있군요. 길, 문, 창문 등 뭔가 뚫려 있거나 지나다닐 수 있어 보이는 것을 위주로 찾아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뚫려 있는 것? 좀 골치 아프게 되었군. 그 말대로라면 저 동굴 천장의 구멍들도 조사해봐야 하나?"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하면 꽤 조사범위가 넓은 편이군. 빨리 행동하지 않으면 내일 안으로 끝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내일 안으로 꼭 끝내야 할 이유는 없잖습니까, 나르친? 식량도 넉넉히 있으니 말입니다."


"꼬박꼬박 봉급 받아서 사는 놈들과는 달리, 용병이라는 망할 직업은 잘 골라잡은 일감 하나로 한 달을 먹고 사는 직업이란 말이다. 언제 좋은 일감이 나올지는 아무도 몰라. 내가 기다리고 있어야지."


카란은 동굴 입구에 도착했을 때부터 느껴왔던 불안감이 갑자기 현실로 다가온 기분을 느꼈다. 나르친에게는 내일 안으로 모든 일을 끝내고 돌아가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 보였다. 이 흐름이라면 아마 나르친과 카란은 식사를 하고 동굴 근처를 다시 탐색하는 것에 대해 지리멸렬한 말싸움을 벌이게 될 것이고, 카란은 승산을 떠나서 거기에 말려들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카란이 어떤 말로 설득을 시작해야 그 무의미한 논쟁을 피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그 때, 놀랍게도 다른 사람이 대신 입을 열었다.


"카란, 솥이 넘치고 있습니다. 저녁으로 먹기로 했던 것이 국인가요, 조림인가요?"


말을 꺼낸 것은 사리아였다. 식물이 말하는 것을 본 듯이 놀란 얼굴의 나르친을 뒤로 하고 카란은 얼른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휘저었다.


"어? 아. 국이지, 국. 위험할 뻔 했군. 고마워, 사리아. 나르친, 일단 저녁 먹고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죠."


완벽한 한 수였다. 이 뒤로는 식사를 위한 침묵이 대화를 잠시 유보시킬 것이다. 카란은 단 한 마디로 평온한 저녁을 지켜낸 사리아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그들의 저녁 식사를 그릇에 담았다.

그러나 사리아와 카란 모두가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그녀가 시기적절하게 내뱉은 한 마디는 논쟁을 유보한 것이 아니라 아예 종결시켜 버렸다. 왜냐하면 나르친은 방금 자기 앞에서 두 번째로 입을 연 사리아를 본 뒤로 저녁을 먹는 내내, 그리고 저녁을 먹은 이후에도 동굴에 뚫린 구멍들을 살피러 가자는 주장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나르친은 밤새도록 말수와 인간상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고찰에 빠져들고 말았다. 여러모로 사리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말

 - 녹필입니다. 어쩌다보니 9천2백자 근방에서 멈추었군요. 아마 1챕터 흔한 전설은 9장쯤에서 끝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작해주신 6분께 감사드립니다.


 조회수와 선작은 조금씩 늘어가는데, 재밌게 보고 계신가요? ㅎㅎ; 댓글만한 활력제가 또 없지 뭡니까 :D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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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30 자견(自遣)
    작성일
    13.08.27 19:36
    No. 1

    충분히 재미있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08.27 23:22
    No. 2

    아직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정진하는 마음가짐으로 집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D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수면선인
    작성일
    13.10.09 18:09
    No. 3

    자.. 자갈 폭풍은 무엇입니까(?) 사막과 스텦의 점이지대에서 주로 발생하는 것은 모래 폭풍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연 현상 부분은... 이계의 자연 풍경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사막=모래 폭풍으로 알고 있다보니.. 약간의 괴리감을 느껴봅니다.

    국은 음식은 사막 양이(?)들의 풍토에 썩 많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개 사막은 건조하고 습기가 없지만 일교차가 심하여 완전식품을 휴대하고 다니는데, 양과 염소, 소, 낙타 등의 고기와 우유가 주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료 자체도 이들 동물의 똥으로 해결해야하고 물도 귀하다보니.. 끓여서 먹는 음식보다는 애초에 그냥 날 것으로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이 쓰이는 것으로 압니다아앗!

    오랜만에 아는 척(!!!) 조금 해보는 편집증 독자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10.09 20:05
    No. 4

    저도 자료조사를 통해 자갈폭풍의 존재를 처음 알았습니다. 실존하는 사막의 대부분은 모래사막이 아닌 자갈사막이며, 끔찍하게 위험한 자연현상이라고 하더군요.
    국은 낙타젖 등으로 끓이는 스프 비슷한 이미지를 생각했는데, 사실 힘든 것은 맞습니다. 특히 장거리 여행 중에 보관하기는 더욱 어렵지요. 떠오른 것이 하필 국인 것을... ㅜㅜ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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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 차갑게, 빠르게 - 7 +8 14.01.29 299 5 11쪽
30 3. 차갑게, 빠르게 - 6 +6 14.01.15 522 7 13쪽
29 3. 차갑게, 빠르게 - 5 +8 14.01.08 284 10 14쪽
28 3. 차갑게, 빠르게 - 4 +6 13.12.17 352 8 9쪽
27 3. 차갑게, 빠르게 - 3 +6 13.11.12 289 9 11쪽
26 3. 차갑게, 빠르게 - 2 +2 13.11.09 287 9 12쪽
25 3. 차갑게, 빠르게 - 1 +2 13.11.05 352 11 8쪽
24 2. 깨진 자물쇠 - 11 (終) +2 13.10.16 397 9 11쪽
23 2. 깨진 자물쇠 - 10 +4 13.10.12 356 20 12쪽
22 2. 깨진 자물쇠 - 9 +8 13.10.07 449 9 15쪽
21 2. 깨진 자물쇠 - 8 +4 13.10.04 966 19 14쪽
20 2. 깨진 자물쇠 - 7 +4 13.09.22 353 11 12쪽
19 2. 깨진 자물쇠 - 6 +2 13.09.17 540 11 15쪽
18 2. 깨진 자물쇠 - 5 +4 13.09.09 477 13 17쪽
17 2. 깨진 자물쇠 - 4 +7 13.09.01 524 24 10쪽
16 2. 깨진 자물쇠 - 3 +8 13.08.27 645 14 19쪽
15 2. 깨진 자물쇠 - 2 +11 13.08.20 659 20 16쪽
14 2. 깨진 자물쇠 - 1 +12 13.08.16 542 18 10쪽
13 1. 흔한 전설 - 10 (終) +13 13.08.10 563 15 9쪽
12 1. 흔한 전설 - 9 +5 13.08.07 430 20 12쪽
11 1. 흔한 전설 - 8 +4 13.08.03 820 32 19쪽
10 1. 흔한 전설 - 7 <여기까지 교정 완료> +7 13.07.29 575 13 16쪽
» 1. 흔한 전설 - 6 +4 13.07.25 562 1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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