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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붓, 綠筆

공허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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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필(綠筆)
작품등록일 :
2013.07.09 20:23
최근연재일 :
2014.03.27 05:04
연재수 :
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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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3
추천수 :
518
글자수 :
216,798

작성
13.10.16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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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11쪽

2. 깨진 자물쇠 - 11 (終)

DUMMY

"별이 밝다."


자레트의 수비대장은 밖으로 큼직하게 뚫린 창문에 팔을 걸쳤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샤흐와의 귓가를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어둠 저편으로 끝없이 박혀있는 별들은 하나쯤 방 안으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많은 별들 사이에서 마땅히 군림해야 할 달은, 오늘따라 가느다란 선처럼 아슬아슬하게 하늘에 매달려 있었다. 그 때문인지, 샤흐와의 책상 위에 놓인 등불은 평소보다 더욱 밝아 보였다.

샤흐와는 침침해진 눈가를 슥 훔치고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샤흐와는 수비대장의 직위에 올라온 이래 칼보다 펜을 더 많이 잡는 자신의 일상에 약간의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앉아서 하는 일에 능한 부관들이 많이 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샤흐와는 어김없이 두루마리에 도장을 찍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예, 밝지요."


'앉아서 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부관'의 대표를 맡고 있는 수비부대장이 샤흐와의 말에 대답했다. 샤흐와도 놀랄 정도로 역설적인 모습이었다. 부대장의 두 손은 두루마리를 거의 다 가릴 정도로 거대했기에, 칙서의 매듭을 푸는 것도 그에게는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부대장은 자신의 등불에 의지한 채 자못 진지한 얼굴로 두루마리를 펼쳐 들며 말했다.


"그리고 별이 이렇게 밝은 시간까지 불침번이나 야간 당직도 아닌 저희 둘이 왜 이걸 보고 있는 걸까요?"


샤흐와가 짧게 일축했다.


"다 네 잘못이다."


"아, 그렇습니까? 왜 저는 지금까지도 대장님이 잘못하신 줄 알고 있었을까요?"


"그것도 다 네 착각이다."


"예,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샤흐와는 작금의 상황을 불러온 원인제공자가 본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굳이 인과를 따지자면 수비부대장은 오히려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경고를 한 축에 속했다. 상식적으로 사흘 치 보고를 하루 만에 처리하는 것과, 이틀 치 일과를 하루에 처리하는 것은 종류가 다른 문제였다. 덕분에 일과는 하루씩 밀리기 시작했고, 오늘에 와서는 별을 벗삼아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다음 달 부대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샤흐와는 대장의 권한으로 자신의 책임이 분명한 철야 작업에 수비부대장을 불러 세웠고, 툴툴대면서도 시킨 일은 하고 보는 성격인 부대장은 지금 그의 옆에서 익숙치 않은 책상머리와 친해지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샤흐와는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두루마리 중에서 하나를 골라 집었다.


"그래, 올 것이 왔군."


"뭔데 그러십니까?"


샤흐와는 집은 두루마리를 흔들어 보이며 혀를 찼다.


"봐라. 첫 문장에 '투기대회'라고 적혀 있으니 말 다 했지."


"글씨가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제 쪽에 없어서 다행이군요. 아마 있었어도 대장님께 건네 드렸겠지만 말입니다."


샤흐와는 허리를 펴고는 남은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두루마리를 마지막까지 다 읽은 샤흐와는 두루마리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안에 적힌 내용을 다시 읽은 샤흐와는 미심쩍은 기분이 되었다. 그가 예상한 것과 적혀 있는 내용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샤흐와는 두루마리를 책상 위에 펼쳐놓은 채 팔짱을 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샤흐와는 부대장이 두루마리 하나를 다 읽고 도장을 찍을 때까지 그대로 굳어 있었다. 마침내 고뇌가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샤흐와가 부대장을 불렀다.


"잠깐, 와서 이것 좀 봐라."


부대장은 대장의 말을 듣자마자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의자가 뒤로 밀려나며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샤흐와는 의자가 부서지지는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오랜 시간 부대장의 몸에 익숙해진 탓인지 의자는 멀쩡해 보였다. 세 발자국 만에 대장의 책상에 이른 부대장은 책상 위에 놓인 두루마리를 집어 들고는 읽기 시작했다. 샤흐와가 칙서를 읽는 데 걸린 시간의 두 배 정도가 지난 이후, 부대장이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며 자신없는 투로 말했다.


"제 머리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샤흐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들리라는 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에 부대장은 살짝 뒤로 물러섰다. 손가락을 살짝 벌려 가늘게 뜬 눈만 내놓은 샤흐와가 말했다.


"맨 뒤쪽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연습하는 셈치고 찾아 봐."


부대장은 큼직한 두 손으로 다시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샤흐와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불편한 마음을 진정하려 애썼다. 마지막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수비부대장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샤흐와를 바라보았다.


"…이런. 대장님, 이거 투그딘에서 어제 날아온 칙서 맞습니까?"


"맞다. 이제 알겠냐?"


샤흐와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수비부대장은 칙서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세상에, 그럼 나흘이 지났는데 말 한 마디 없군요. 정말로 묻어버릴 셈일까요?"


"모르겠다. 오늘 저잣거리에 나갔다 왔지? 애들이랑 순찰하러."


"예, 잘 하고 있나 보러 점심 쯤에 한 바퀴 쭉 돌고 왔습니다."


"사람들이 아야톨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냐?"


잠시 기억을 되감던 부대장이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샤흐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자살을 했는데도 이 모양이니, 갑갑하구만. 수비대로 책임을 전가해서 물갈이를 하는 건 그래, 좋다 이거야. 이 바닥이 다 그런 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러면 최소한 사파히를 건드리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안 그래?"


"…맞습니다."


볼멘 목소리로 속을 다 털어놓은 샤흐와는 책상 위의 두루마리에 확인했다는 도장을 콱 찍은 뒤, 이미 처리한 칙서를 모아놓는 곳으로 집어 던졌다. 말 그대로, 한 손으로 움켜쥐고, 그대로 상자에 분노를 담아 내던졌다. 세차게 날아간 두루마리가 둔탁한 소리를 냈다. 경쾌한 소리가 났다고 하여 답답한 마음이 풀렸을 리는 없겠지만, 그 둔탁한 소리는 샤흐와를 더욱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대장님, 투그딘 중앙수비대장에 올라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홧김에 무슨 흰소리를 하냐고 성을 내려던 샤흐와는 생각을 고쳤다. 수비부대장에게 잘못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장난을 치는 눈이 아니었다.


"말은 고맙다."


"예?"


"자리에 오르면 이딴 행패를 다 갈아엎을 대장으로 봐줘서."


"그건…"


부대장은 입이 없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는 여섯 발자국을 터덜거리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가 걸터앉자 명백하게 신음하는 의자를 보며, 샤흐와는 공방 목수에게 부대장 전용으로 의자를 하나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펜 사각대는 소리.

날벌레 돌아다니는 소리.


"대장님."


"왜."


"아야톨이 아니었으면 어땠을까요?"


"뭐가."


"사라진 마을이 말입니다."


밤바람 부는 소리.

도장 찍는 소리.


"큰 차이가 있었을까?"


"그래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야톨인 탓이 없지는 않겠지."


의자 삐걱대는 소리.

등불 흔들리는 소리.


모래가 튕기는 소리.

모래밭을 박차는 소리.

모래 섞인 바람을 가르는 소리.


샤흐와는 창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누가 이 시간에 연병장을 가로질러 오는데? 그것도 죽을 기세로."


"정말입니까?"


부대장도 창 쪽으로 성큼 걸어와 밖을 살폈다. 샤흐와의 말대로 연병장을 가로질러 오는 다섯 사람이 보였다. 달빛도 어두운 밤이라 사람들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윤곽으로 보아 네 사람은 천천히 걷고 있었고 한 사람은 맹렬히 뛰고 있었다. 부대장과 샤흐와는 잠시 일을 잊고 연병장을 지켜봤다.

서로 뭉친 네 사람이 놀라 길을 비키는 모습이 보였다. 뛰어 오는 사람은 남자였다. - 두 사람은 여자가 저렇게 뛰는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 남자가 네 사람을 스쳐 지나가자, 그들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이 남자는 연병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앞을 가로막는 공기를 죄다 밀어낼 기세로 달렸다. 남자는 샤흐와가 있는 본영 건물에 부딪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달려들었다. 건물 아래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수비병들이 당황한 듯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가 들썩였다. 이층 창문에서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던 부대장과 샤흐와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금 깃발, 연락병이잖아? 설마 카란인가?"


"마…말도 안 됩니다! 사막에 진짜 무슨 괴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부대장이 기겁을 하며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카란과 사리아를 보낸 사람은 부대장이었다. 지금 달려온 사람이 남자 한 명이라는 사실이 부대장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용병이야 제 살 길을 찾아 돌아갔다고 쳐도, 사리아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대장님, 부대장님! 들어가겠습니다!"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두 남자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발로 문을 걷어찬 남자는 자레트 수비병이었다. 비상 사태가 아니라면 군령 위반이었지만, 부대장과 샤흐와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둘의 시선은 다른 한 남자의 얼굴로 쏠렸다. 수비병이 급히 들고 있던 횃불을 남자 쪽으로 돌렸다. 남자는 카란이 아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남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부대장은 연병장을 지나오던 다른 네 사람이 왜 그 자리에 멈춰 섰는지 알게 되었다. 누가 봐도 치료가 최우선이었다. 이미 흘린 피는 옷자락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고,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당장 의식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헉헉대는 숨소리에서도 피 냄새가 묻어 나왔다. 그러나 남자는 졸도 직전의 상태에서,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남자의 등에 달린 깃발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부대장은 횃불 아래에서 빛나는 깃발의 문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자는 사파히에서 온 연락병이었다.

부대장은 고개를 돌려 샤흐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꽉 막힌 현실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던 샤흐와는 없었다. 그 자리에는 차가운 군인만이 남아 있었다. 샤흐와가 말했다.


"고하라."


남자는 입술을 움직이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숨을 쉬는 것이 더욱 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입술은 사파히 수비대장의 명에 따르려고 했다.


"겨… 겨우… 겨…"


다 갈라진 목청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의 참혹한 모습 아래에서 샤흐와는 남자를 응시했다. 그에게 다시 고하라고 재촉하지는 않았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남자가 말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박동하는 심장이 가까스로 잦아들자, 남자가 전력으로 내뱉었다.


"겨울전갈이…! 사파히의 영주궁에… 겨울전갈이…!"


샤흐와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작가의말


- 2챕터가 끝났습니다. 


이 챕터의 종장부터, 모든 것이 얽히기 시작합니다.


작가는 잠시 쉬고 돌아오겠습니다. 많은 감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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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 깨진 자물쇠 - 9 +8 13.10.07 449 9 15쪽
21 2. 깨진 자물쇠 - 8 +4 13.10.04 967 19 14쪽
20 2. 깨진 자물쇠 - 7 +4 13.09.22 353 1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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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 흔한 전설 - 7 <여기까지 교정 완료> +7 13.07.29 576 13 16쪽
9 1. 흔한 전설 - 6 +4 13.07.25 562 1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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