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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붓, 綠筆

공허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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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필(綠筆)
작품등록일 :
2013.07.09 20:23
최근연재일 :
2014.03.27 05:04
연재수 :
34 회
조회수 :
20,091
추천수 :
518
글자수 :
216,798

작성
13.08.27 17:12
조회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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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글자
19쪽

2. 깨진 자물쇠 - 3

DUMMY

그 뒤로 이틀 동안 샤넷은 수많은 고비에서 발을 헛디디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 샤넷이 살아온 십육 년을 완전히 부정하는 이틀은 꽤 힘겨운 체험이었다. 사막에 이틀 만에 적응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은 아무래도 날씨라는 개념과 타협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추운 날씨에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한 샤넷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막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했다. 레품에서는 얼어붙는 음지에 한 줄기 따스한 은총을 내려주던 태양이, 이곳 마호칸 사막에서는 흉포한 폭군이 되어 보이는 지상의 모든 것을 녹여버리고 있었다.

동굴 속에서는 의연한 모습으로 손부채만을 부치며 여유를 보인 샤넷도 입구 쪽으로 다가갈 수록 배어나오는 땀방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셔츠 말고 더 이상 벗을 것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샤넷은, 동굴 밖으로 나가면 머리를 천으로 감싸야 한다는 나르친의 조언에 손사래를 쳐가며 사양을 표했다. 만약 사리아가 샤넷을 - 놀랍게도 - 완력으로 누르고 그 조언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일행은 일사병에 걸린 환자를 대동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얗게 타오르는 모래밭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는 것도 어려웠다. 아지랑이는 안 그래도 어찔한 눈동자를 현혹시켰다. 느닷없이 아르문국에서도 가장 더운 곳에 내던져진 대가는 녹록치 않았다.

안타깝게도, 더위는 가장 큰 문제였지만 유일한 문제는 아니었다.

샤넷의 등장이 본궁에서 조사해 오라는 단서에 대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한 이상, 더 이상의 조사는 무의미했다. 그리고 샤넷을 데리고 동굴을 더 탐사하는 것은 자연스레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세 사람에서 네 사람으로 불어난 일행은 잠깐의 토의 끝에 우선 자레트에 도착한 뒤 나중 일은 나중에 결정하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사막은 대화를 하기에도, 질문을 하기에도, 신문을 하기에도 그리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동굴 밖에 매어진 세 마리의 낙타를 네 사람이 타고 가는 방법에 대한 논의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나르친은 나름대로 건장한 체격이었고, 사리아의 낙타는 남은 짐과 샤넷의 가방을 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샤넷의 체구는 카란 뒤에 앉아서 사막을 건너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예상 외의 변수가 샤넷을 멈춰 세웠다.

다른 승용물과는 달리, 낙타는 왼쪽 다리 두 개를 동시에 움직인 뒤, 오른쪽 다리 두 개를 연이어 움직이는 식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말을 타 본 경험조차 없는 소녀에게 이 주행법은 사고가 불가능할 정도의 멀미를 불러왔다. 그렇다고 낙타에서 내려 발목까지 빠지는 사막을 수십 킬로미터나 걸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흔들리는 낙타에서 떨어질까 봐 저도 모르게 앞에 앉은 카란을 덥썩 붙잡은 샤넷은 수 초 만에 손을 황급히 떼고 말았다. 숯덩이 같은 옷자락을 잡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뜨겁다기보다는 따가운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든 것도 잠시, 샤넷은 다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따사로운 햇살에 영혼을 잠식당하고 말았다. 나른한 기분에 다시 카란을 붙잡고, 화들짝 깨어나고, 다시 나른해지기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던 샤넷은 차라리 기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조금씩 지평선에 가까워지자, 세 사람은 찾아오는 추위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샤넷의 얼굴에는 완연한 생기가 돌아왔다. 사막의 밤이 춥다지만, 자갈사막에서의 밤은 제 아무리 추워도 레품의 봄철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호칸 사막의 밤에는 샤넷이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이 숨어있었다. 온도는 단순히 높고 낮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반나절 만에 삼십 도의 낙차를 보인 기온은 샤넷의 체력을 급격히 저하시켰다.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감각, 어질어질한 시야, 약한 열까지. 샤넷에게 질문을 던질 기세로 가득했던 세 사람은 졸지에 사막 한 가운데에서 횡설수설하는 환자를 간호하게 되었다. 그렇게 카란 일행과 샤넷이 처음으로 만난 날이 저물어갔다.

요약하자면, 샤넷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따지고 들면 위안 삼을만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막에서 가장 처리하기 까다로운 문제는 예상 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바로 샤넷 몫의 식량과 물이었다.

짧은 임무나 탐사를 목적으로 사막에 나가는 자들은 연 단위의 긴 일정을 잡고 대규모로 사막을 지나는 사막 상인들과 달리 여분의 식량을 준비하기 힘들다. 체력 소모가 급격한 사막에서, 세 사람에 맞춰 준비된 식량을 네 사람이 나누어 먹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 분배를 식수에 적용하려고 했다가는 틀림없이 심각한 갈등이 벌어질 테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참기 힘든 갈증뿐일 것이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샤넷처럼 사막에서 만난 모험가나 낙오자와는 합류하는 것은 안전 상의 문제와 더불어 이 식량 문제가 발목을 잡곤 한다.

하지만 나르친의 예상 외로 빠른 진격 속도와 카란의 느긋한 계획이 맞물려 만들어낸 여유분의 짐들은 예상치 못한 임자를 만나게 되었다. 샤넷 때문에 올 때는 하루, 갈 때는 이틀 반이 넘는 일정이 되었지만, 탐사 역시 반나절 만에 끝났기에 적어도 배를 곯거나 침을 아껴 삼키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튿날 아침, 몸 상태를 되찾은 샤넷은 어제보다 사막에 조금 적응한 듯이 보였다. 해가 뜬 뒤 한 시간 정도를 제정신으로 있었다는 뜻이다. 전날 십 분만에 혼수상태에 이른 것을 생각해보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솥에 끓인 죽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낙타에 올라탄 일행은 타오르는 태양 아래로 질주를 계속했다.

말 한 마디 없는 달음박질에 지칠 무렵, 모든 여행자들의 길잡이꾼이 해를 제치고 새로이 떠올랐다. 자레트까지는 십 킬로미터 정도 남은 지점에서, 일행은 마지막 밤을 맞이했다. 유달리 쌀쌀한 밤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옷섶을 여미었지만, 샤넷은 머리에 둘렀던 천 자락마저 풀어놓은 채 차가운 모래밭을 거닐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리를 옮기는 모래언덕의 앞쪽에 자리를 잡은 일행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여느 때처럼 둘러 앉았다. 달빛과 모닥불의 잔영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그림자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온종일 달궈진 몸을 식히고 시원해진 기분으로 자리에 앉은 샤넷은, '드디어 때가 왔다'라고 질문을 벼르던 세 사람을 마주하게 되었다. 하물며 모험가조차도 고향에 돌아오면 이야기꽃을 피우며 여생을 보내는데, 세 사람의 눈에 샤넷이 떠나온 곳은 아무리 현실적으로 봐줘도 마법세계에 가까웠으니 그 기대가 하늘을 찌를 만도 하다. 침묵을 깨는 첫 한 마디는 카란의 차지였다.


"이제 몸은 좀 괜찮아?"


샤넷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덕분에. 다들 고마워.]


세 사람이 동시에 올빼미마냥 샤넷을 돌아봤다. 귀와 가슴으로 동시에 들리는 감각 때문은 아니었다. 쏟아진 시선에 당황하던 샤넷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되물었다.


"갑자기 왜들 그래?"


카란이 멋쩍은 듯이 대답했다.


"아니, 갑자기 말투가 확 바뀌어서. 상관은 없지만."


[말투가......?]


옆머리를 만지작대던 샤넷은 이유를 알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미안, 내용은 확실히 전달되는데, 말투 같은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야. 이 참에 미리 실험을 하나 해봐야겠다. 나르친? 혹시 제가 당신에게 하는 말이 카란에게 하는 말과 같은 말투인가요?]


가만히 듣고 있던 나르친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달라. 그러니까 본인은 상대에게 어떻게 들리는 지도 모른다, 이건가?"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시도한 게 단번에 성공할 줄은 몰라서......]


나르친이 '단번에'라는 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려다 이내 관두었다. 샤넷은 사리아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사리아, 너는 어떻게 들려?]


사리아도 싱긋 웃으며 머리를 카란 쪽으로 한 번 까딱 기울였다. 이것으로 샤넷은 간단한 가설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아무래도 말투는 상대에 대한 내 생각이 반영되는 모양이네."


"편한 말투로 들리면, 편하게 봐주고 있다고 보면 되는 거지?"


[응.]


입을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표정만 바꿔가며 '말'을 하고 있는 샤넷에게 일행은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었다. 어느 새 사리아는 일행 전체에서 입을 가장 적게 움직이는 사람의 칭호를 반납한 지 오래였다. 그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사리아는 모처럼 입을 열었다.


"샤넷,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우와, 사리아가 말하는 거 처음 봤어!]


순수하게 놀란 듯한 샤넷의 함성에 나르친과 카란은 서로 쿡쿡대며 웃었다. 그러나 사리아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이 번쩍이는 것들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


[번쩍이는 거?]


그 말에 나르친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막의 밤공기는 고요했다. 나르친은 주변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범위를 모두 둘러보았지만, 번쩍이는 것이라고는 모닥불에서 튀어 나오는 불티뿐이었다. 사리아가 불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어할 리가 없다고 판단한 나르친은 옆에 앉은 카란에게 슬쩍 물었다.


"이봐, 카란. 뭐가 번쩍인다는 거야?"


"예? 아. 여기 이거 안 보이십니까?"


나르친은 카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 연장선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조금 답답해진 나르친에게 카란이 말했다.


"잘 안 보이시면, 여기 끝을 두 손바닥으로 감싸서 어둡게 만들어 보세요."


나르친은 그 지시를 따랐다. 그러자 손바닥 사이에서 솜털보다 작은 것이 떠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리아가 말한 대로, 그것은 달빛보다 짙은 푸른 색으로 번쩍였다.


"보이시죠?"


"보이네. 저 애가 나타났을 때와 비슷한 그거."


나르친이 숨을 탁 내쉬며 말했다.


"너희는 눈도 좋다. 달빛에 불도 피웠는데 여기 이 조그만 게 보인다고?"


"연락병들이니까요. 이 정도 밝기면 낮에는 거의 안 보이겠네요. 밤에도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대부분 안 보일 겁니다."


"샤넷? 이거 자세히 보니 어제 무슨 돌을 부수더니 만들어낸 가루랑 비슷하군. 이게 뭔가?"


샤넷은 잠깐 단어를 선택하는데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돌부터 설명을 드려야 하는데, 그러자면 여러분께 혼학을 가르쳐야 할 판이니 그건 좀 어렵겠네요. 쉽게 말씀 드리자면, 그 가루는 영혼의 조각을 응축시킨 겁니다. 제가 온 곳에는 그것이 공기처럼 퍼져있지만, 여기에는 거의 없어요.]


"거의 없다고? 네가 온 세계에서 보면, 우리에게는 혼이 없다는 건가?"


[아니, 사람들에게는 영혼이 있는데, 세계에는 이 조각들이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은 몸에 물을 잔뜩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물 속에 사는 건 아니죠? 하지만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은, 역시 몸에 물을 가지고 있지만, 사는 곳에도 바닷물이 가득해요. 물론 바닷물과 물고기의 체액은 같은 물이라도 다른 물이죠.]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탐탁찮은 표정으로 샤넷을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해하는 샤넷에게 카란이 이유를 알려주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바다가 삼백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어. 동화 속에서 엄청나게 넓은 물에 물고기가 잔뜩 살고 있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그걸 직접 본 적은 없어."


[이런, 그건 생각도 못했네. 어쩌죠? 바다 말고 다른 방법으로 이걸 설명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생각을 안 해봤는데.]


나르친이 깍지 낀 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샤넷 쪽을 흘깃 돌아보며 말했다.


"굳이 복잡하게 안 설명해도 돼. 그건 이런 걸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한테나 해주면 되고, 우린 저게 어쩔 때 번쩍거리는지만 알면 된다. 밤중에 걸어 다닐 때마다 저런 게 빛나면 너도 대책을 세우는 편이 좋을 텐데."


[저도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아마 제가 말을 할 때 조금씩 번쩍이는 것 같기는 한데......]


"저 가루들은 앞으로도 널 계속 따라다니는 거야?"


카란이 물을 잔에 따라 샤넷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물은 사막에서 마실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것보다 훨씬 시원했다. 입에 물을 가져다 대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샤넷에게, 카란은 모래 속에 잠시 묻어둔 수통을 꺼내 보여주었다. 꿀꺽대며 잔을 비운 샤넷은 약간 늦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기본적으로는 그래. 영혼조각끼리는 서로 미약하게 끌리는 힘이 있으니까. 그런데 아마 입자가 공기 중으로 점점 흩어질 테니, 가끔 저... 그래, 그냥 돌이라고 하자. 저 돌을 가루로 다시 바꿔주면 괜찮을 거야.]


나르친은 '그래서 저 가방이 그렇게 무거웠군' 이라고 중얼댔다. 만약 이 소녀가 십 킬로그램이 넘어가는 가방을 지고 홀로 마호칸 사막에 떨어졌다면? 슬픈 일이지만, 후대에 홀트 유적지를 살피러 온 사람들은 샤넷과 겨울전갈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나르친은 우연도 이만큼 기막힌 우연이 없다고 생각했다.


"말이 나온 김에 묻는 건데, 혼학자는 뭘 하는 사람들이야?"


수통을 통째로 들고 마시던 카란이 마지막 물방울을 입에 털어 넣고 샤넷에게 물었다.


[줄여 말하면, 영혼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탐구하는 사람들이야. 죽음 이후의 행방, 서로 연결된 세계들, 저 돌, 음, 굳이 넣자면 너희가 유적지까지 찾아온 것도 우리가 탐구하려는 것에 포함되어 있어. 혼학자들은 대부분 협회에 소속되어 있는데, 나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다미우스 협회 소속이고, 체렐이나 곤, 수르나 협회도 있지.]


"다미우스에 체렐이라......"


나르친이 얼굴을 아주 약간 찌푸리며 반문했다.


[어? 혹시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인가요?]


"아니, 그 이름을 직접 들어본 적은 없는데, 좀 어감이 희한한 이름이라서. 어디서 그 비슷한 이름들을 들어본 것도 같은데......"


[정말인가요? 어디서죠?]


샤넷이 눈에서 빛을 내며 불 반대편의 나르친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 여파로 몸을 살짝 뒤로 뺀 나르친이 대답했다.


"그래, 사파히. 네가 방금 말한 이름들과 아주 비슷하지는 않은데, 사파히 근처에서 좀 특이한 이름들을 많이 본 것 같다."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가봐야겠네요. 자레트에서 많이 먼가요?]


"사파히? 자레트 바로 옆이다. 이런, 사파히라고 하니까 이 왕령 때문에 하나 놓친 게 마음에 걸리는군."


샤넷은 등 뒤의 가방에서 펜과 잉크, 조그마한 종이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카란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글씨들을 적어 내려갔다. 아마 알아낸 사실들의 목록일 것이라 생각하며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란은 이윽고 나르친에게 시선을 돌렸다.


"놓친 거라면, 사파히에 남기고 온 의뢰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니고, 투그딘 투기대회 말이다. 이번에 결승에 올라간 진출자 하나가 자레트 출신인 건 알고 있지? 다른 진출자가 사파히 출신이라는군."


카란이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 사람! 소문 파다했죠. 상대 공격을 모조리 흘려넘기는 복면 속의 괴인! 우리 수비대에서도 세 사람 정도가 본선에 진출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그 괴인과 붙었답니다. 세상에, 힘도 못 쓰고 무너졌더라구요. 바람을 상대로 싸우는 기분이었다나."


"먼저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정도란 말이지? 그래도 자레트에서 나간 진출자는 허투루 대할 상대가 아닐 거야.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봤는데, 한 대라도 얻어맞았다가는 그대로 나가 떨어지겠더군."


"에이, 제가 자레트 출신 선수를 비방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속도 앞에서 강자 없습니다. 저번 투기대회에서 창 쓰던 선수를 결승에서 거의 가지고 논 가브다니의 우승자, 모르세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로 속으로 파고들더니, 그대로 목덜미 앞에 칼을 가져다 놓았잖아요."


"그건 그 창 쓰던 놈이 멍청했던 거야. 거리를 잘 조절했어야지, 매가리 없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니까 검 쓰는 놈이 창대에 맞을 각오를 하고 들어올 기회를 줬잖아. 힘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창잡이는 그런 기회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을 거다."


"그건 창과 칼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동등한 실력이었다면 창잡이가 우위를 가져갔겠죠. 하지만 작년의 우승자는 칼이 날아오는 곳을 직감적으로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빨랐습니다. 설마 투그딘 투기대회의 초대 우승자를 잊으신 건 아니겠죠?"


"이도류. 그래, 다들 버려진 검술을 들고 나온 멍청이를 비웃었지만 마지막까지 남은 놈은 이도류 하나였다지.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자레트 최고의 검사였던 알마지드는 어떻게 설명할 건가? 그 몽둥이 같은 장검 앞에서 쓰러진 수많은 날파리들은?"


그렇게 카란과 나르친은 투기대회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출전자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토론을 벌였다. 사리아는 쉴새 없이 제창되는 주장과 반론의 홍수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장작을 휘저었다. 두 사람의 토론은 전투철학과 미학에 확장되려는 찰나, 샤넷의 잔잔한 코골이로 인해 가까스로 종결되었다. 두 사람은 살짝 낭패를 보았다는 심정이었다.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다. 다른 세계에 대해서, 영생에 대해서, 그리고 여기까지 넘어온 이유에 대해서. 하지만 그 어떤 질문도 상대가 곤히 잠들어 있으면 속으로 삭여야 하는 법이다.


"우리끼리 너무 오래 떠들었나?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군."


"힘들었겠죠. 마호칸 사막은 건장한 남자들도 이 기후에 익숙하지 않으면 건너기 힘든 곳이니까요."


"슬슬 우리도 눕지."


"먼저 주무시죠. 잠이 올 때까지 시간을 좀 죽여야겠습니다."


카란은 모포를 주워들어 샤넷에게 슥 덮어주었다. 달빛 아래에서 새근대며 잠든 샤넷의 머리맡에는 어느새 빼곡히 채워진 종잇장이 널브러져 있었다. 카란은 조심히 종잇장들을 모아 하나로 포개었다. 그리고 카란은 저도 모르게 종이를 한 장씩 넘겨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글자 하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깊이가 느껴지는 필기였다. 밤을 지새우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작가의말

- 기다려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D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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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30 자견(自遣)
    작성일
    13.08.27 20:08
    No. 1

    잘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08.27 23:24
    No. 2

    완주 축하드립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감격스럽기가 이루 비할 데가 없군요 ㅜ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1 쿠리오
    작성일
    13.08.27 22:22
    No. 3

    카란이 남주인가 보군요.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08.27 23:26
    No. 4

    후후... 글쎄요? 주인공이 하나인 작품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주인공이 하나가 아니라는 말도 안 했습니다. 속좁은 작가 같으니...)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3.08.30 14:49
    No. 5

    여태 맥아리라고 생각했는데 '매가리'가 맞는 표현이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08.31 00:04
    No. 6

    저도 확실치 않아 사전을 다시 찾아본 단어입니다. 예상 외로 맞춤법이 발목을 잡을 때가 있죠. 애독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D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수면선인
    작성일
    13.10.09 18:34
    No. 7

    좋은 표현이네요. 민물과 바닷물의 차이로 이계와 현계를 설명한 부분은. 마치 인플레이션을 지폐를 물에 타는 것이라고 비유한 김재익 경제수석의 비유마냥 독자에게 아주 쉽게 들리는 좋은 설명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10.09 20:16
    No. 8

    감사합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영혼의 입자들이 퍼져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관의 근본과 관련된 아주 깊숙한 내용이므로, 자세한 내용은 또 다시 뒤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주시는데, '모든 것은 뒤에 설명됩니다'만 반복하려니까 죄책감이 자꾸 속을 찌릅니다. 덕분에 저는 연중을 할 수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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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3. 차갑게, 빠르게 - 3 +6 13.11.12 290 9 11쪽
26 3. 차갑게, 빠르게 - 2 +2 13.11.09 288 9 12쪽
25 3. 차갑게, 빠르게 - 1 +2 13.11.05 352 11 8쪽
24 2. 깨진 자물쇠 - 11 (終) +2 13.10.16 397 9 11쪽
23 2. 깨진 자물쇠 - 10 +4 13.10.12 356 20 12쪽
22 2. 깨진 자물쇠 - 9 +8 13.10.07 449 9 15쪽
21 2. 깨진 자물쇠 - 8 +4 13.10.04 967 19 14쪽
20 2. 깨진 자물쇠 - 7 +4 13.09.22 353 11 12쪽
19 2. 깨진 자물쇠 - 6 +2 13.09.17 541 11 15쪽
18 2. 깨진 자물쇠 - 5 +4 13.09.09 477 13 17쪽
17 2. 깨진 자물쇠 - 4 +7 13.09.01 524 24 10쪽
» 2. 깨진 자물쇠 - 3 +8 13.08.27 646 14 19쪽
15 2. 깨진 자물쇠 - 2 +11 13.08.20 660 20 16쪽
14 2. 깨진 자물쇠 - 1 +12 13.08.16 543 18 10쪽
13 1. 흔한 전설 - 10 (終) +13 13.08.10 564 15 9쪽
12 1. 흔한 전설 - 9 +5 13.08.07 431 20 12쪽
11 1. 흔한 전설 - 8 +4 13.08.03 821 32 19쪽
10 1. 흔한 전설 - 7 <여기까지 교정 완료> +7 13.07.29 576 13 16쪽
9 1. 흔한 전설 - 6 +4 13.07.25 562 1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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