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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붓, 綠筆

공허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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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필(綠筆)
작품등록일 :
2013.07.09 20:23
최근연재일 :
2014.03.27 05:04
연재수 :
34 회
조회수 :
20,077
추천수 :
518
글자수 :
216,798

작성
13.08.03 18:06
조회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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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글자
19쪽

1. 흔한 전설 - 8

DUMMY

동굴 천장을 차양처럼 통과한 햇빛이 바닥을 독특한 모양으로 조각내고 있었다. 만약 사막 동굴 전문가라는 것이 있다면, 홀트 유적지는 수제자를 기르기에 매우 수월한 동굴로 평가 받을 것이다. 사막 동굴이 지닐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지형이 갖추고 있는 홀트 유적지는 학문적으로 접근한다는 가정 하에서는 더없이 흥미로운 동굴이었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홀트 유적지라고 불리는 이 다채로운 모습의 동굴은, 안타깝게도 그 아름다움 역시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는 비운의 동굴이었다. 적어도 아르문 왕령으로 탐사를 진행하고 있는 일행 셋은 그렇게 추측했다. 그들 중에서 동굴의 구조학이나 아르문 지리사에 능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주변에 갈비뼈와 슬개골이 마구잡이로 굴러다니는 상황이라면 그 누구라도 이 아름다운 동굴을 알고 있는 생존자가 그리 많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느긋한 마음으로 동굴에 들어온 세 사람은 그들이 낙타를 동굴 안쪽에 매어두자마자 갑자기 오 킬로미터쯤 밖에서 미친 듯이 몰아치는 자갈폭풍을 보고는 숨을 죽여야 했다. 나르친조차 징조를 알아차리기 힘든 폭풍이었다. 세 사람은 유적지에 이름만 붙여두고 그 자리를 떠난 홀트라는 사람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제 하룻밤을 별 다른 대처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이 기적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일행은 서둘러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흰 바위처럼 보였던 것들이 실은 사람의 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흰 색이 아닌 바위들의 상당수는 채 썩지도 못한 채 그대로 말라붙은 시체들이었다. 축축하고 어두운 동굴이었다면 충분히 섬뜩한 광경이었겠지만, 사막 동굴은 그와 정반대로 건조하고 밝았다. 동굴 안으로 비치는 창백한 빛은 노르스름한 사암(沙巖)에 부딪히며 잔혹했던 과거의 현장을 모두 속죄하듯 따스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덕분에 그곳에서 유골을 바라보던 일행은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인상을 받았다. 오히려 그 평온함이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동굴을 들어선 이래 나르친은 제일 앞에 서서 하나부터 천천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수를 하나씩 세어나가는 것은 보통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일이지만, 신기하게도 이 경우에는 안정감이 아니라 긴장감이 더해지고 있었다. 수가 더해갈 수록 점점 무거워지는 나르친의 분위기에 카란은 의아해했다. 그는 어제 동굴 입구에서 보이던 큰 동공에 들어서고 나서야 나르친이 세고 있는 대상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카란은 나르친의 긴장감을 공유하게 되었다.

나르친은 두개골의 수를 세고 있었다.


"스물 하나."


잠시 정적.


"스물 둘."


또 다시 정적.


"스물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갑자기 숫자가 급증했다. 그것도 다섯씩이나.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나르친의 시선을 쫓은 카란은 벽에 꽂혀 오각형을 그리고 있는 두개골들을 보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기이한 오각형의 아래에는 온갖 종류의 뼈들이 허벅지 언저리 높이의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대체 어떤 악취미의 소유자가 유골로 저런 모양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당히 불쾌한 심미적 감각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나르친은 성큼 벽으로 다가가 그 섬뜩한 도형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단 살아있지는 않고. 가까이 다가가도 별 반응은 없고. 어딘가로 뚫려 있는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오각형의 꼭지점 중 하나가 사라졌다. 나르친이 어루만진 머리뼈는 증발의 대가로 이리저리 휘날리는 뼛가루를 만들어냈고, 덕분에 나르친은 손사래를 치며 한 발짝 물러나야 했다. 뒤에서는 사리아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맣게 재채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카란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잘 하셨습니다."


"비꼬는 거냐?"


"아뇨, 이건 진심입니다. 화살로 벽에 꽂힌 유골이라니, 저건 망자에 대한 모독 아닙니까."


"아. 그래, 지독한 모독이지. 이렇게 된 참에 나머지도 다 고이 보내드려야겠다."


나르친이 차례차례로 오각형의 나머지 꼭지점을 어루만졌다. 패배의 상징처럼 비참하게 걸려 있던 두개골 다섯 개는 순식간에 뼛조각 몇 개와 먼지로 바뀌어 이 세상과의 연을 완전히 끊어냈다. 세 사람은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명복을 빌어주었다. 카란이 물었다.


"나르친, 혹시 이것들을 보고 언제쯤 죽은 사람들인지 알 수 있습니까?"


"아니. 시체는 많이 보아 왔지만 이만큼의 뼈를 보는 것은 나도 처음이라서, 뭐라 확신을 못하겠군. 시체들은 아주 오래 되지는 않았어. 십 년도 안 된 것으로 보인다."


"십 년 안쪽이라면... 아마 겨울전갈이겠군요."


"그렇겠지. 그리고 나머지는 자레트 수비대일 거다. 스물 여덟."


카란이 자레트 수비대에 들어간 것은 겨울전갈과의 소탕이 끝난 이후였다. 하지만 그 말인즉슨 카란은 입대 직후부터 지겹도록 선임들이 겨울전갈과 싸운 무용담을 들어왔다는 것을 뜻했다. 이 동굴이 원래 어떤 유적지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 위에 겹쳐올린 또 다른 역사가 현재진행형으로 말라붙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사리아가 입을 열었다.


"카란, 이 시체들 중 일부가 수비대라면 유해를 수습해야 하지 않을까요?"


갑자기 들려온 사리아의 목소리였지만, 나르친은 어제만큼 질겁하며 놀라지는 않았다. 이틀 간의 경험을 통하여 나르친은 사리아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찾아낸 것이다. 카란이 말해준대로, 사리아는 말을 못하거나 꺼려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사를 알리는 목적 이외의 무의미한 대화를 즐기지 않고, 말 대신 다른 방식의 소통이 가능한 경우라면 그쪽을 택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동굴 속에서 일렬로 세 명이 걸어가고 있는 상황은 다른 방식의 소통이 힘든 경우였다. 사리아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마 우리 둘이서 시체를 수습하는 건 힘들겠지만, 적어도 이 근처에서 혹시 유족에게 전해줄 만한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죠.


"그럴까? 좋아. 이건 임무 외적인 활동이긴 하지만, 수비대로서 이걸 보고 그냥 지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군. 겸사겸사 혹시 놓치고 지나간 단서가 있는 지도 탐색하면 되겠네. 나르친, 당신은..."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란이 잠시 말을 흐린 사이, 사리아가 주저 없이 나르친에게 허리를 숙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이유로 사리아에게 당황한 나르친은 결국 웃음기가 섞인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말 잘하잖아. 좋아, 이 친구 봐서 도와주지. 대신 얼른 둘러보고 갈 길 가자고."


사리아는 다시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하고는 곧바로 모래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카란과 나르친도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작업에 착수했다. 동굴은 넓고 깊었다.

전장의 바닥에는 생각보다 많은 물건들이 떨어져 있었다. 빛이 드문드문 비쳐 결코 어둡지 않은 동굴 안에서, 세 사람은 불과 오 분만에 각자 손에 가득 찰 만큼의 유품들을 건질 수 있었다. 험난한 자연환경 때문에 도굴꾼들이나 시체털이들이 접근도 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조그마한 보석이 들어간 반지에서부터 목걸이, 팔찌, 머리에 쓰는 관처럼 보이는 장신구까지 그 종류 또한 다양했다. 나르친은 모래둔덕에 털썩 주저앉은 채 물건들을 손에 모아 절그렁거리며 말했다.


"돈이 될 만한 것들도 꽤 있는데. 역시 도적단은 도적단이라는건가."


"아마 값져보이는 물건 대부분은 겨울전갈의 물건일 겁니다. 반지나 목걸이까지는 몰라도, 이건 수비대에가 전투에 가져올만한 물건이 아니죠."


카란이 들어올린 얇은 보자기에는 문양이 잔뜩 수놓여 있었다. 귀족들이 사는 저택의 양탄자에나 쓰일 법한 화려한 문양이었다. 그 아름다운 문양을 모두 덮어버릴 정도로 붉게 물들어 모래가 엉겨있는 귀퉁이 한 쪽은 주인의 행방을 헤아릴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살아서 이 동굴을 빠져나간 자들 중에 이 보자기의 주인은 없었으리라.


"그래, 이 반지 위에 있는 것도 자레트 수비대 정도의 봉급으로는 꿈도 못 꿀 정도의 보석인데. 색으로 봐서는 남옥 아니면 월장석이겠군."


"나르친, 혹시 보석도... 아, 괜한 걸 물었군요. 대체 얼마쯤 하는 물건입니까?"


"가격으로 따지면 대충 내가 이번 일을 끝내고 받을 보수보다 살짝 적거나 그 근처까지는 되겠는데. 흠, 이건 내 손을 거쳐간 적이 있는 보석들 중에서도 보기 드문 상급품이다."


반지를 빛에 이리저리 비춰보던 나르친에게 불현듯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카란과 이틀을 같이 지낸 나르친은 적어도 이 자레트 최고의 유명인사가 그 소문만큼 오만한 놈이 아니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는 특징이다. 자신의 의지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것을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말투에서, 행동거지에서 어떻게든 방자한 태도의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다.

그러나 단지 오만하지 않다고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세상에는 이와는 정반대로 악소문을 남기고 다니는 인간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일신의 출세를 위해 강자 앞에서 제 줏대를 버리는 축들이었다. 이들은 하루 이틀 만난 것으로는 그 정체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도움이 되는 자들 앞에서는 웃는 얼굴로 꼬리치고, 필요없는 자들은 교활하게 내치는 족속들. 제 습성을 감추고 있다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 있으면 그제서야 앞니를 드러내는 이들은 나르친이 귀족들보다 더욱 꺼리는 부류였다. 대처하기가 더 까다로운 탓이었다.


아마 제 재능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카란이라면 이런 축에 속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처럼 날아든 기회를 헛되이 날리는 것도 아까운 일이었다. 나르친은 잠깐의 고민 끝에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나도 겨울전갈이 여기까지 찾아온 손님들에게 남긴 이런 귀한 선물을 남겼을 줄은 몰랐군. 혼자 받기에는 좀 과한 양이 아닌가 싶은데."


나르친은 그렇게 말하며 카란 쪽으로 턱을 살짝 끄덕였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적당히 흔적이 남지 않는 선에서 서로 주머니를 채우자는 제안이었다. 수비대의 물건도 아니니 도의적으로도 문제는 없지 않겠냐는 심산이었다. 만약 거부한다고 해도 시체털이에 대한 부담감을 내비치는 선에서 끝날 것이니, 나르친에게 손해를 볼 것은 없었다. 그는 덫을 치고 먹잇감을 기다리는 사냥꾼의 심정으로 카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카란의 대답은 나르친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에, 어디 보자. 이번 탐사를 끝내고, 수비대로 돌아가서, 겨울전갈 소탕작전에서 사망한 수비대의 유족들을 찾아 유품 분배 작업을 마치고, 주인이 없는 물품들을 시장에 내다 팔아서, 수익금이 결산된 뒤에도 발견자의 분배권을 주장하고 싶으시다면, 언제나 시민들의 안전에 최선을 다하는 자레트 수비대를 찾아주셔서 규정에 따른 비율만큼 수령해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카란은 한 단락을 말할 때마다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까닥이며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에 감사합니다 덧붙일 때의 카란은 나르친이 그런 제안을 꺼냈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르친은 그 자리에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카란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감추지 않은 채로 싱글대며 말했다.


"나르친, 스스로도 좀 속보이는 연극이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아, 그래. 낙타 경주로 돈은 벌 만큼 벌었다, 이건가?"


"돈 문제가 아니죠. 제가 이런 어줍잖은 미끼에 걸릴 만큼 형편없어 보였나요?"


나르친이 겸연쩍게 웃었다.


"할 말이 없군. 인정하지. 한 번 떠보고 싶었다. 네가 알고 있는 네 소문이 세 개라면 내가 주워들은 건 여섯 개라서 말이지. 귀족들 자경대에만 있다 보니, 수비대 규정이 그렇게까지 철저할 줄은 몰랐군."


"그 셋 여섯 이야기는 되도록 삼가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그리고 나르친, 만약 제가 그런 제안을 대번에 수락할 정도로 돈에 환장한 놈이었다 해도 이번에는 아마 거절했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제 후임은 효율적인 일처리만큼 도덕관도 투철해서 말입니다."


나르친은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불과 십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자레트 수비대가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르친의 뒤쪽에서 뼈다귀 더미를 살피고 있는 사리아는 나르친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빛이 비치지 않는 구석인데다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핑계조차 못 되었다. 소리는 전부 들렸을 것이다. 사리아가 카란의 후임이라는 것을 처음 들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나르친은 졸지에 수비대 옆에서 수비대에게 부정행위를 권유한 작금의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이... 용병 체면이 말이 아니군. 좋아, 나가서 덜떨어진 용병에 대한 괴소문을 퍼트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뭘 원하나?"


"술 한 잔."


"좋았어. 말이 통하는군."


사태는 예상 외로 빨리 정리되었다. 나르친은 이 정도면 싸게 먹힌 셈이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털었다. 건질 만한 물건은 다 건진 참이었다. 카란은 방금 전에 자신이 발견한 보자기에 다른 유품들을 모두 싸넣어 매듭을 지었다. 드넓은 공동에는 좁은 통로로 이어지는 수많은 굴들이 있었고, 하루 만에 여기를 다 탐사하려면 어서 발을 옮겨야 할 것이다. 카란은 나르친에게 빚을 만드는데 일조한 사리아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느끼며 그녀를 불렀다.


"사리아? 이제 슬슬 자리를 뜨자."


사리아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리아?"


그녀는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벽면을 바라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카란과 나르친은 조금 떨떠름한 심정으로 사리아에게 다가갔다. 사리아가 서 있는 벽은 아까 일행이 두개골의 성불에 명복을 빌어준 바로 그 벽이었다. 카란이 사리아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왜, 거기 아직도 살펴볼 게 남아 있어?"


"카란, 여기를."


두 사람이 다가오자 사리아는 자리에서 비켜났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손가락으로 벽면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사리아가 지목한 곳에는 새끼손가락 반만한 두께의 구멍이 뚫려있었다. 머리뼈를 벽에 고정하던 화살이 꽂혀 있던 자리였다. 그녀는 구멍 앞에 선 카란에게 한 눈을 감고 손을 모아 눈 앞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했다. 알아보기 쉬운 손짓이었다. 사리아의 지시대로 벽에 한 눈을 가져다 대고 구멍 안쪽을 바라보던 카란은 불현듯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나르친이 상황을 알려달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카란이 흥분한 투로 말했다.


"나르친, 이 구멍 반대쪽이 뚫려 있습니다. 벽 너머에 뭔가가 있어요."


나르친은 벽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드디어 수상한 구석을 찾았군. 잘 되었다. 더 깊이 안 들어가고 여기서 너희 수비대 유품을 모은 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어.”


"이 벽 반대편으로 어떻게 갈 수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음, 예전에 이런 동굴을 본 적이 있다. 잠깐 그 자리에서 물러서 봐."


카란이 몸을 옆으로 비키자 나르친이 벽 앞에 섰다. 나르친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느닷없이 오른발을 뒤로 쭉 뻗었다. 한껏 가속된 나르친의 발은 깔끔한 호를 그리며 그대로 모래벽을 들이받았다. 발끝에서 퍼져나간 파문은 양 옆으로 퍼져나가며 모래벽을 한 차례 흔들었다. 대처없이 무식한 해결법에 놀란 나르친과 사리아는 쩍 하는 소리와 함께 허물어지는 벽면과 동시에 무너져 내리는 천장을 보게 되었다. 자욱한 모래먼지가 가라앉자 벽 안쪽에서 좁게 꼬인 나선형의 통로가 나타났다. 카란이 넋이 조금 나간 채로 물었다.


"사암이 발로 차서 부술 수 있는 돌이었나요?"


나르친이 예상했던 결과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이 부분은 사암이 아니다. 그냥 모래더미가 조금 단단해진 것일 뿐이지. 이 위에 있던 천장이 뻥 뚫려 있는 것을 봐라. 원래는 천장의 틈새로 모래와 돌들이 흘러내려온 것뿐이다. 그게 높이 쌓이니까 나중에는 결국 틈새까지 막아버려서 벽처럼 보인 것이고."


"오, 그걸 어떻게 알아냈죠?"


"사암에다가 맨손으로 화살을 꽂아 넣는 괴물이 겨울전갈에 있었다면, 아마 너희는 아직도 겨울전갈과 싸우고 있었을 거다."


"아... 그 생각을 못했군요."


"아르문의 사학자들이 여길 유적지라고 부른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여기겠지."


나르친이 무너진 벽의 잔해를 밟고 좁은 통로로 들어갔다. 카란과 사리아도 차례로 그 뒤를 따라 벽 안쪽 미지의 공간으로 발을 디뎠다. 위로 살짝 경사가 진 길을 비집듯이 통과한 나르친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방처럼 생긴 꽤 넓은 공간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란과 사리아는 그럴 수 없었다. 출구에 다다르자 나르친이 갑자기 멈춰 섰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뒤따라오던 둘은 각자 앞사람의 등에 머리를 부딪히고 황급히 중심을 다잡았다. 특히 나르친과 충돌한 카란은 잠시 돌벽과 부딪힌 듯한 충격을 견뎌내야 했다. 카란은 혹이 날 것만 같은 이마를 연신 문지르며 억울한 듯 소리쳤다.


"아이고야, 나르친. 이 좁은 길에서 갑자기 왜 멈춘 겁니까?"


그리고 카란은 방금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다. 나르친의 등 뒤로 느껴지는 분위기는 방금 전에 자신을 떠보려다가 실패하고 허둥대던 장난기 넘치는 용병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다시 죽음과 인접한 자에게서만 느껴지는 냉기가 흘러나왔다. 좁고 어두운 통로의 입구를 막고 서 있던 나르친은, 대답 대신 조용히 숫자를 읊조렸다.


"스물 아홉."


잠시 정적.


"서른."


또 다시 정적.


"마흔, 쉰, 예순, 일흔..."


작가의말

 - 카란/사리아/나르친의 앞에 놓인 것은...? 



선작해주신 아홉 분께 감사드립니다. 8천~9천자라고 예상했는데 8508자... 오호라.

1챕터도 두 장 남았습니다. 재밌게 보고 계신가요? :D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30 자견(自遣)
    작성일
    13.08.27 19:45
    No. 1

    달리고 있습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08.27 23:22
    No. 2

    따라 달리고 있습니다! 헥헥 ;D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수면선인
    작성일
    13.10.09 18:15
    No. 3

    과거의 살인자들이 확실히 수상하군요. 사람을 몰살시키고 비싼 보석을 챙겨가지 않다니. 약탈에 목적이 있지 않으니 무언가를 노리고 행한 일이겠군요. 사람 죽이는 일도 힘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니.. 떡밥이 없어서 무얼 노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10.09 20:08
    No. 4

    여기서 강조를 하면 왠지 후반부의 복선을 미리 까발리는 것 같지만, 현재 일행은 주운 보석이 이후에 죽은 겨울전갈의 물건이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해골들을 남긴 자들의 목적은... :D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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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3. 차갑게, 빠르게 - 1 +2 13.11.05 352 11 8쪽
24 2. 깨진 자물쇠 - 11 (終) +2 13.10.16 397 9 11쪽
23 2. 깨진 자물쇠 - 10 +4 13.10.12 356 20 12쪽
22 2. 깨진 자물쇠 - 9 +8 13.10.07 449 9 15쪽
21 2. 깨진 자물쇠 - 8 +4 13.10.04 966 19 14쪽
20 2. 깨진 자물쇠 - 7 +4 13.09.22 353 11 12쪽
19 2. 깨진 자물쇠 - 6 +2 13.09.17 540 1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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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 흔한 전설 - 9 +5 13.08.07 430 20 12쪽
» 1. 흔한 전설 - 8 +4 13.08.03 821 32 19쪽
10 1. 흔한 전설 - 7 <여기까지 교정 완료> +7 13.07.29 575 13 16쪽
9 1. 흔한 전설 - 6 +4 13.07.25 562 1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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