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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붓, 綠筆

공허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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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필(綠筆)
작품등록일 :
2013.07.09 20:23
최근연재일 :
2014.03.27 05:04
연재수 :
34 회
조회수 :
20,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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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글자수 :
216,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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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7.09 20:24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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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0. 문을 여는 바람 - 1

DUMMY

레품의 겨울은 춥다기보다는 매섭다. 불과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밖으로 터져나갈 것만 같던 도시는 하얀 눈밭 위에서 열기를 식히고, 태양은 금방이라도 식을세라 얼굴을 보이자마자 곧 자취를 감춰버린다.

거센 바람이 레품 사람들의 옷섶을 대바늘처럼 헤집고 들어올 때가 되면 장식품용으로 높이 평가되는 레품의 나무들은 대부분 장작으로 그 생을 마감하게 된다. 레품의 나무들은 겨울이 되면 목질이 유달리 단단해져 도저히 장식품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지의 나무꾼들이 레품의 나무를 처음 베어보면 그들은 누군가가 신참들을 골리려고 나무에 물을 붓고 얼려놓은 것이라 착각할지 모른다. 물론 그런 의심은 진짜로 레품에서 얼어붙은 나무를 베어보면 말끔히 사라진다.

이 때문에 다른 지역에 약간이나마 남아있는 장작의 자급자족이라는 개념은 레품에서 아예 사장되고 말았다. 대신 겨울철이 되면 곁눈질만으로 나무의 결을 알아챌 수 있는 솜씨 좋은 나무꾼들만이 레품 곳곳에 나무를 대러 분주히 산에 오른다. 레품의 나무꾼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농담 중에는 부러진 도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그들은 가만히 서있는 나무를 베어낸다기보다는 레품의 겨울 산 그 자체와 싸우러 가는 전사와 닮았다.

길더는 레품 제일의 나무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덩치에 걸맞지 않은 그의 순박한 인상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직업을 혼동하기도 하지만, 그가 도끼를 박은 대들보감의 수가 네 자리를 넘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길더는 충분히 훌륭한 나무꾼이었다. 물론 길더의 자부심을 받치고 있는 것은 숫자 같은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이름 있는 나무꾼들에게는 매일같이 벌여지는 술판에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할만한 납품처 한 군데 정도는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길더는 그 중에서도 마을 외곽에 위치한 다미우스 혼학자(魂學者)협회에 장작을 공급하고 있는 나무꾼 중 한 명이었다. 레품의 나무꾼은 노동직이라기보다는 기술직에 가깝기에, 장작보다 양초를 더 많이 사용하는 레품의 유일한 장소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자신의 솜씨를 인정받았다는 것은 나무꾼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찬사였다.

하지만 길더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가 다미우스 혼학자협회에 장작을 납품하는 사실을 기뻐하는 또 다른 이유를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언덕 너머로 오두막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이자 길더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최근 유독 늘어난 주문량 때문에 그의 등에는 사십 킬로그램이 넘는 나무가 들려 있었지만, 길더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손에 들린 도끼로 덤불들을 쳐가면서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도착한 길더는 울타리 옆 공터에 가져온 나무를 내려놓고는 때 아닌 한숨을 쉬었다.

이전에도 그랬듯, 길더는 장작의 양으로 보건대 조만간 혼학자협회에 큰 행사가 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혼학자들은 - 다른 학자들도 마찬가지지만 - 기본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이 추운 레품의 겨울을 모르는 바 아닌 혼학자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비정기 학회 개최로 인한 혼학자들의 전원소집이다.


"샤넷, 나무 가져왔다!"


길더는 큰 소리로 외치며 생각을 계속했다.

다미우스 혼학자협회의 비정기 학회는 정기 학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중요한 안건이 있을 때 열리는 학회이다. 다미우스 혼학자협회의 협회장이 가지는 전원소집권한은 이 비정기 학회의 개최에 사용되곤 한다. 이 권한은 협회원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당초 일 년에 한 번으로 제한된 것을 삼 년에 한번으로 줄인 적도 있지만, 사실 협회원들에게 공분을 살 이유가 없는 협회장의 입장에서는 이 권한을 남발할 필요가 없다. 역대 협회장 중에서는 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재임 기간 중 한 번도 전원소집권한을 발동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길더가 기억하기로 저번 비정기 학회는 오 년쯤 전에 있었다. 길더는 다미우스 협회장이 수많은 협회원들의 비난 어린 눈초리를 받을 것을 각오하고도 두번째 비정기 학회를 여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짐작 가는 소집 이유를 하나씩 열거해보다가 머릿속이 상당히 복잡해진 그는 이 건에 대해 더 이상 깊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일이 어찌 되었든 학회가 열린다는 것은 장작의 수요량이 많다는 뜻이다. 당분간 벌이 걱정은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길더는 곧 그를 마중나올 소녀를 기다렸다.


"와,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잠시 문간이 소란스럽더니, 오두막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길더의 가슴팍에 닿을 듯 말 듯한 소녀는 그가 내려놓은 장작더미를 보고 잠깐 말문을 잃은 듯 했다. 누구에게라도 어깨 높이의 물건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법이다. 샤넷은 서서히 시선을 돌리며 길더에게 말을 건넸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한데, 그걸 어떻게 혼자서 지고 오는거예요?"


"우리 공주님 따뜻하게 해주는 장작인데, 나뭇가지 이쯤이야 무겁기는."


"잠깐, 그놈의 공주님 소리 좀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미안, 이게 입에 익어버려서.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공주님은 맞지 않나?"


"그러니까 아저씨한테서는 듣고 싶지 않다는 말이에요."


길더는 멋쩍게 웃었다. 길더는 자연스럽게 샤넷의 말을 거리감의 증거가 아닌 친근함의 발로로 받아들일 정도로는 샤넷과 친숙한 사이였다. 그가 처음으로 이 오두막에 장작을 대러 왔을 때 문을 열고 그를 맞이한 것은 몇 살인지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조그마한 여자아이였다. 길더는 그가 집을 잘못 찾은 줄 알고 그 여자아이에게 혼학자협회의 건물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았고, 샤넷은 웃는 얼굴로 친절히 길을 알려주었다. 두 시간쯤 뒤 다시 문을 두드린 길더를 샤넷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맞아주었다. '제가 혼학자냐고 물어보지는 않았잖아요?'라는 샤넷의 말에 길더는 차마 화를 낼 수조차 없었다.


"날도 추운데 잠깐 들어올래요?"


"그러지."


샤넷은 뒤로 돌아 겨울철만 되면 삐걱거리는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겉모습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혼학자들의 거처가 으레 그러하듯, 샤넷의 연구실 역시 밖에서 보면 사냥꾼들의 오두막인지 연구실인지 전혀 구분이 가지 않는 너저분한 모양새였다.

사실 길더의 관점에서 보면 연구실 안쪽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구실 안쪽에서는 길더가 발돋움을 하면 나무판자를 떼어낼 수 있을 정도의 낮은 천장 아래에서 책과 종이더미가 모종의 산맥을 이루고 있었고, 그 산맥에 막혀 창문이 제 구실을 못 하고 있는 탓에 벽난로와 몇몇 양초들이 고군분투하여 간신히 어둠을 걷어내고 있었다. 물론 샤넷에게 물어보면 이는 좁은 공간에 가장 효율적인 배치로 물건을 늘어놓은 것이라 항변할 테지만, 길더는 별채에 따로 떨어져있는 샤넷의 침실 역시 이와 비슷할 것이라는 의심을 완전히 버릴 수 없었다.

다행히 샤넷은 길더가 얼마나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길더는 평소에는 탁상 비슷한 것으로 쓰이는 듯하지만 그가 오면 의자가 되곤 하는 나무조각 위에 걸터앉았다.


"그래, 곧 비정기 학회가 열리는 모양이지?"


길더의 맞은편에서 의자를 가득 메우던 서류더미를 치우고 자리에 앉은 샤넷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요. 저번 비정기 학회도 그렇고, 이상하게 비정기 학회는 겨울에 많이 열리더라구요. 마치 누구 작정하고 괴롭히려는 것처럼."


"너희 아버지가 누굴 괴롭히고 싶어 할지는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니?"


"짐작 가는 사람이야 여럿 있지만, 이번 건은 아마 정말로 긴급해서 소집하는 거라서 별 의미는 없을 거예요."


"그래? 소집사항은?"


"지금 달려오고 있는 전국의 혼학자들도 아무도 몰라요."


길더는 의외라는 듯 물었다.


"비정기 학회가 소집사항도 비공개로 한 적이 있었던가? 그럼 대체 무슨 구실로 그 많은 혼학자들을 다 모이라고 한 거야? 가노피 부학장의 경우를 제외하고서라도 다들 건강이나 경조사 핑계를 대고 안 올게 뻔한데."


"어, 사실 그 사람들은 이 학회 주제를 멋대로 예상하고 달려오고 있어요. 혼학자라면 누구든지 달려올 정도의 주제를. 그렇게 되도록 소문을 좀 냈거든요."


"누가? 네가?"


"정확히 말해서는 소집사항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 음, 그러니까…"


샤넷이 살짝 주저하다가 포기하듯 말했다.


"저도 포함해서요."


길더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샤넷은 아침부터 두 가지 고민에 휩싸여있었다. 그 중 하나는 길더와의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서 그가 비정기 학회의 안건을 물어볼 것이라는 문제였다.

길더가 말했듯이 원래 모든 학회의 학제는 사전에 모든 참가자들에게 공지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문제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리고 샤넷은 되도록이면 길더에게 자신이 안건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길더는 다행히도 이 건에 대해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길더에게도 역시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진작 했을텐데, 안 되는 이유야 뭐 얼마나 있겠냐마는… 주최자가 내놓은 초안 보고 학회장께서 극비 도장 찍으셨구만. 아니, 대답은 안 해도 돼. 내 멋대로 해보는 생각이고, 그 바닥 규칙이야 워낙 깐깐한 거 아니까 더 물어볼 수도 없고."


"거기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저씨, 전생에 혼학자였어요?"


"허허, 그럴 리가. 내가 여기 장작 공급한 게 햇수로 칠 년이다. 저기 건너편 연구실에서 뭐 연구하는지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알걸?"


"어? 아무리 느슨해졌다고는 하지만 원래 협회 내 연구정보들은 심사 거치기 전까지는 전부 대외비인데?"


"그런 규칙이 참 잘 지켜졌으면 비정기 학회 같은 건 있지도 않았겠지?"


"아하. 제대로 한 방 먹었군요."


샤넷과 길더가 서로 마주보며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길더가 샤넷을 만나러 오는 것을 내심 반기듯이, 샤넷 역시 길더에게 모종의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감정이 길더라는 개인에 대한 호감이라기보다는 학회에서 느끼는 압박감 속에서 찾아낸 탈출구 정도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 사실이 길더와의 대화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말재주가 좋고, 대화도 잘 통하고, 가끔은 혼학 연구에 대한 밀담까지 나눌 수 있는 나무꾼과의 짧은 만남은 샤넷에게는 소중한 시간이었고, 더 바랄 것은 없었다.


"그나저나 대체 이번 비정기 학회의 주인공은 또 누굴까 걱정이 되는데. 외부인인 내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매번 학회 전체가 풍비박산이 나지 않았나? 바로 저번 레스틴 건만 해도 큰일이었잖아. 너 그 때 막 들어와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그 윗대가리들 다 잡아다가 물어보고 싶은데. '열한 살짜리 꼬마 애한테 뭘 시키는 거냐!' 라고."


"음, 정확히 말하자면 풍비박산은 아니죠. 결과적으로 보면 혼학 전체의 발전을 불러온 일들이었으니까요. 그 와중에 못 볼 일들이 좀 일어나기는 했지만 말이죠.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레스틴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덕분에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던 꼬마에서 순식간에 협회 상층부까지 올라올 수 있었으니까."


"그야 그렇지만, 일의 종류가 좀 나빴지."


"일 가려서는 단체생활 못해요. 아저씨도 나무꾼 처음 할 때는 이곳저곳에서 수주 받고 남은 거 다 처리하면서 기술 익혔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죠, 뭐."


"그런가? 그래도 난 열한 살에 살해협박을 받지는 않았다만. 그리고 내 열한 살과 네 열한 살은 의미가 좀 다르니까 더욱 그런 거고. 지금이야 크게 문제될 거 없겠지만, 앞으로도 협박 비슷한 거 받으면 바로 말해. 나 같으면 자고 일어났는데 마당에 도끼가 한 마흔 개쯤 박혀있으면 다음부터 말을 할 때 굉장히 조심하게 될 거야."


"우와앗, 도끼 마흔 개라니 심했다. 겨울철에 어떻게 살라고?"


샤넷은 잠시 눈앞에서 싱글거리며 말하는 이 나무꾼 아저씨가 실질적으로 레품에서 누군가를 1년 만에 추방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장작 없이 레품의 겨울을 나려면 아마 겨울잠을 자는 방법에 대해 특별 강습을 받기 위해 뱀이나 개구리를 찾아 헤매야 할 것이다.


"그거 알지? 우리 예전에 세금 문제 때문에 집회할 때 관계자 집 앞에 장작 대신 양초 던져준 거."


"네. 그래서요?"


"좀 많이 던져주지. 한 마흔 개쯤. 그 정도면 침대 옆에 두르고 자기는 충분할거야."


하잘것없는 농담이었지만 두 입꼬리를 들어올리기는 충분했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나오다가 둘러싸인 양초를 밟고 넘어지는 사람을 상상하던 샤넷은 결국 웃어젖히고 말았고, 동시에 오늘 아침까지도 망설이고 있던 두 번째 문제에 간신히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원래 비밀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말하고 나서야 비로소 비밀이 되는 법이다. 웃음기가 잦아들자 샤넷은 속으로 셋까지 센 다음 심호흡을 한 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건넸다.


"그리고 저도 학회 시작하기 전에 일이 하나 생겨서, 당분간 못 뵐 것 같아요."


"일? 일이라니. 협회에서 너한테 일을 시킬 리가 없는데?"


"제가 자청한 일이에요."


"어디, 뭔지 들어나 보지."


샤넷이 나직이 말했다.


"저, 아마도 자리를 비우게 될 것 같아요."


길더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 했다. 그는 자리를 비운다는 말이 혼학자들에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잠시 꺼낼 말을 찾던 길더는 결국 샤넷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자리를 비운다고?"


"네."


길더는 너무나 빨리 돌아오는 대답에 조금 당황했다. 보통 혼학자들이 '자리를 비운다'는 행동은 흥분, 공포, 사명감, 호기심 등의 강한 감정과 함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샤넷의 대답은 아주 평온했다. 길더는 잠시 동안 샤넷의 대답이 중의적인 표현을 이용한 말장난이 아닐까 고려해봤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조금 전과 같은 눈웃음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거 아무리 봐도 당분간이 아니잖냐. 일이 있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말리실 거예요?"


샤넷이 말을 끊고 길더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런 문제는 선수필승이다. 방금 전 샤넷이 한 방 먹었을 때의 표정이 이번에는 길더의 얼굴에 떠올랐다.


"네가 나보다 오래 고민해봤을 테니 말리는 건 관두마. 대신 걱정은 좀 해도 되지?"


"그러시라고 미리 말씀 드리는 건데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는 샤넷 앞에서 길더는 헛웃음을 지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 꼬마한테 말로 이기려는 생각은 진작 포기했다.


"그래, 어디로 갈 생각이니? 혼학자들이 갈만한 곳이라면 나도 절반 정도는 경험이 있다만."


"그건 당일까지는 비밀로 할게요."


"아니, 그 정도는…"


"알려드려도 경험이 없으실 게 분명하니까 말씀을 안 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목적지를 말씀 드리면 아까 내리신 결정이 뒤바뀔 것 같기도 하고."


"결정? 무슨 결정?"


"말리는 건 관두겠다는 거요."


"…돌아올 확률이 절반은 넘는 곳이니?"


"확신할 수는 없어요."


길더는 조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당일 내가 네 목적지를 어떻게 알게 된다는 거냐? 내가 매일 같이 너희 학회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비밀."


"에라, 오늘은 애먼 궁금증만 실컷 일으켜놓고 정작 얻어가는 건 없구나. 이것도 저것도 전부 비밀이니 뭐 더 할 말이 있어야지. 슬슬 가련다."


길더가 낮추었던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샤넷이 말했다.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아마 제가 자리를 비우는 날이 되면 전부 알게 되실 거예요."


"알았다, 대충 언제쯤이니?"


"멀어야 사나흘 안쪽."


"그렇게 일찍? 운이 나쁘면 당분간은 못 보겠구나."


"부학장님 지병이 또 도진다면 학회가 조금 더 미뤄질 수도 있겠는데, 이번에도 그랬다가는 그 분 아주 가실 거예요."


"아, 그건 그렇겠군. 이번에는 정말 여기까지구나. 그럼 나중에 보자."


길더가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그는 일부러 작별인사 같은 것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특히 자리를 비우는 혼학자들에게 있어서 작별인사는 되려 불운한 쪽에 가깝다. 하지만 샤넷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길더, 저번에 우리가 헤어질 때가 되면 해달라고 한 게 있었을 텐데요?"


샤넷은 고개를 돌린 길더의 얼굴에 살짝 난색이 감도는 것을 보았다.


"이런, 그걸 걸고 가야 할 정도면 내가 걱정을 해봤자 별 소용이 없겠구나. 그런데 그거 효과 거의 없다고 밝힌 게 너희 다미우스 학파 아니었나?"


하지만 샤넷은 말을 꺼낸 이상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거의 효과가 없는 거랑 효과가 없는 건 달라요."


짧은 한숨을 내쉰 길더는 샤넷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샤넷이 부탁한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길더는 마치 맹세를 위해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는 것과 같은 복잡한 기분 때문에 반쯤은 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길더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샤넷, 나를 기억할거니?"


그녀가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대답했다.


"길더, 당신을 기억할게요."


예상했던 것만큼 얼굴이 달아오르지는 않았다.

샤넷은 숲 사이 언덕 너머로 멀어져가는 길더의 등을 바라보았다. 나무를 지지 않은 나무꾼은 어딘가 쓸쓸해보였다. 노을이 하늘을 붉은 빛으로 가득 메우자 길더의 뒷모습은 마치 다시는 못 볼 사람이 영원히 떠나가는 모습처럼 보였다. 샤넷은 경이로운 자연의 연출자들에게 거부감을 표하며 시선을 돌렸다. 저 감상적인 풍경을 더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더 이상 여기에 남아있을 수는 없어.'


샤넷이 고개를 돌려 석양을 피했다. 길더를 마지막으로 샤넷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신변의 정리는 끝났다. 더 이상 남겨둔 것도, 남겨둘 것도 남지 않았다. 이제 학회에 참가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 복잡하다면 복잡한 기분이 샤넷을 덮쳐왔다. 샤넷이 조용히 마음속의 길더에게 속삭였다.


'이번 비정기 학회의 주최자는-"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작가의말

- 녹필입니다. 즐겁게 보셨나요? :D

첫 편이라서 묘사가 조금 깁니다. 프롤로그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작품이니 쭉 읽어주시면 품질로 보답하겠습니다 (꾸벅)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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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6

  • 작성자
    Lv.55 EyeWater
    작성일
    13.08.12 00:28
    No. 1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08.12 08:24
    No. 2

    감사합니다! :D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마인천하
    작성일
    13.08.13 12:53
    No. 3

    샤넷과 길더가 서로에 대한 감정을 생각하는 문단이 중복됬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08.13 14:39
    No. 4

    오탈자 수정 중에 중복이 생겼군요.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7 RemainDe..
    작성일
    13.08.13 21:16
    No. 5

    우와... 대화가 물 흐르듯 흘러가네요... 재미있습니다. 진행된 내용을 다 보려면 시간 좀 걸리겠지만 다 보면서 추천을 박아드리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08.14 22:36
    No. 6

    추천예약댓글! 달게 받겠습니다 XD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3.08.27 16:10
    No. 7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08.27 17:37
    No. 8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0 자견(自遣)
    작성일
    13.08.27 17:30
    No. 9

    아직 뭐라고 말하기는 이르지만 흐름이 좋군요, 추천 누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08.27 17:38
    No. 10

    와! 추천이다! ◀:D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윈드윙
    작성일
    13.10.08 04:26
    No. 11

    오오~ 흥미진진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10.08 11:04
    No. 12

    감사합니다! 이야기가 나아갈 수록 점점 더 흥미진진해질 겁니다 :D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수면선인
    작성일
    13.10.09 00:50
    No. 13

    첫편이 주는 느낌은 약간은 평화롭고 부드러운 목가적인 풍경같습니다. 딱히 걸리는 느낌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내릴 수 있었습니다. 혼학이란 학문에 대해서는 아직 떡밥이 모자라 판단을 내릴 수가 없네요.

    프롤로그라고 생각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한 단어씩 꼼꼼하게 읽어내렸는데.. 화면 우측을 보니 스크롤바가 아직도 한참 남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놀란 마음에 글자수를 살피니 8583자가 웬 말입니까.. 계속 주행하고 싶지만 내일의 즐거움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에 간만 보고 후퇴하려 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10.09 15:01
    No. 14

    매섭도록 추운, 그와 동시에 눈이 내려 포근한 산의 조그마한 오두막을 상상하며 쓴 작가를 잘 헤아려주셨습니다. 세계관의 비밀은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갈 쯤에야 풀리는 것들도 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됩니다. 매 단어에 심혈을 기울이는만큼, 앞으로도 한 단어씩 곱씹어 읽어주시면 그 대가를 하리라 약속드립니다. :D

    * 8353자로 놀라시면 이후에 더 놀라실 편도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XD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3.10.20 23:29
    No. 15

    글의 성숙도가 높다고 생각됩니다.
    추천하고 물러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녹필(綠筆)
    작성일
    13.11.05 02:19
    No. 16

    아직 성숙도를 논하기에는 많이 미흡한 글입니다 :D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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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 차갑게, 빠르게 - 6 +6 14.01.15 522 7 13쪽
29 3. 차갑게, 빠르게 - 5 +8 14.01.08 284 10 14쪽
28 3. 차갑게, 빠르게 - 4 +6 13.12.17 352 8 9쪽
27 3. 차갑게, 빠르게 - 3 +6 13.11.12 289 9 11쪽
26 3. 차갑게, 빠르게 - 2 +2 13.11.09 287 9 12쪽
25 3. 차갑게, 빠르게 - 1 +2 13.11.05 352 11 8쪽
24 2. 깨진 자물쇠 - 11 (終) +2 13.10.16 397 9 11쪽
23 2. 깨진 자물쇠 - 10 +4 13.10.12 356 20 12쪽
22 2. 깨진 자물쇠 - 9 +8 13.10.07 449 9 15쪽
21 2. 깨진 자물쇠 - 8 +4 13.10.04 967 19 14쪽
20 2. 깨진 자물쇠 - 7 +4 13.09.22 353 11 12쪽
19 2. 깨진 자물쇠 - 6 +2 13.09.17 540 11 15쪽
18 2. 깨진 자물쇠 - 5 +4 13.09.09 477 13 17쪽
17 2. 깨진 자물쇠 - 4 +7 13.09.01 524 2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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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 흔한 전설 - 8 +4 13.08.03 821 32 19쪽
10 1. 흔한 전설 - 7 <여기까지 교정 완료> +7 13.07.29 575 13 16쪽
9 1. 흔한 전설 - 6 +4 13.07.25 562 1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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