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깨달음(5)
몬스터웨이브의 시작점으로 예상되는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전투는 더욱 빈번해졌다.
고블린 같은 소형 몬스터와 맹수들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오크무리는 물론, 오우거와 트롤 같은 대형 몬스터의 출현 빈도가 증가했던 것이다.
그것들을 일일히 상대하다간 도착하기도 전에 탈진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나탈리는 좋은 해결책을 제시하였는데, 주술이 가진 신묘한 능력이었다.
"서로 싸우게 만드는 거예요. 일종의 저주라고 할까. 어차피 녀석들은 서로 마주치면 싸우려고 들어요. 그걸 부추기는 셈이죠."
덕분에 지친 몸을 쉴 시간을 벌었지만, 이동 속도는 더욱 느려졌다.
대형 몬스터들을 발견할 때마다 잠시 멈춰서 주술을 시행할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마나포션은 나탈리의 몫이 되었고, 아이작은 한결 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베켄 마을을 떠나온 지 보름쯤 되었을 때, 그러니까 목적지까지 대략 하루 이틀 정도가 남은 시점이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이변을 마주치고 말았다.
*
최강의 몬스터라고 불리우는 오우거는 맹수와 같아서 무리를 짓지 않는다.
그런데 전방에 무리를 지은 오우거가 있었다.
거의 백여 마리에 이르는 오우거떼는, 그들 숫자보다 열 배는 많은 오크들에게 쫓겨 도망다니는 중이었다.
살육의 현장.
오크는 제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감히 오우거에게 대들 생각을 하지 못한다.
오우거는 혼자서 오크 수십 마리를 혼자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방의 오우거는 미친듯이 달려드는 오크 무리에게 처참하게 물어 뜯기며 발버둥쳤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서는, 오크의 편에 서서 동족인 오우거에게 달려드는 것이었다.
"저, 저게 그, 좀비라는 거야?"
나탈리는 놀라서 말을 더듬었고,
"마, 마, 맞긴 한데요. 아, 왜 이 생각을 못했지."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몬스터도 좀비가 될 수 있다.
이 몹쓸 바이러스는 사람과 몬스터를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도망가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심슨은 우리를 이끌고 현장에서 벗어났다.
오크좀비가 더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야말로 꽁지가 빠지게 내달렸다.
한참이나 숨을 헐떡거린 후, 나탈리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길 지나가야 해."
앨리스가 갸웃거렸다.
"몬스터웨이브가 좀비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라고스 성을 떠나올 때부터 부여받은 임무를 단 한순간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귀족이라는 대단한 자부심은 책임감과 긴밀하게 연결되었고, 시종일관 목적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좀비는 스카이랜딩에서 시작되었다면서요. 그것이 흘러든 것이라면 이곳까지 오는 동안 좀비를 마주쳤어야 하잖아요.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아요. 몬스터웨이브는 좀비 사태보다 먼저 시작됐어요."
나탈리가 앨리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만약에 우리가 북방으로 올라오는 와중에 좀비바이러스가 퍼진 것이라면, 그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다는 뜻이니 그것대로 문제였다.
당장 라고스성과 베켄 마을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겠지."
아이작은 좀비무리가 있을 곳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심슨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중일은 나중에. 지금은 좀비무리를 어떻게 따돌려야 할지 고민합시다!"
*
나는 감염되지 않는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었고, 회복되었다.
어쩌면 오크 좀비들은 나를 동족으로 인식하지 않을까.
"안 돼, 엘피온. 무모해."
앨리스는 화를 냈다.
"나는 다쳐도 재생력이 있어. 목이 물어뜯겨도 살아났었잖아."
"재생이고 나발이고,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야?"
죽지 않을 것이다.
몇 차례 죽음의 위기를 겪고 나자 더는 두렵지도 않다.
만에 하나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솟아날 구멍이 있었다.
토끼.
그 녀석 한 동안 보이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나를 주시하고 있을 터였다.
내가 죽으면 무슨 피해를 입는다고 하였으니 반드시 나타나서 구해줄 것이다.
이건 도박이 아니다.
토끼의 깊은 한숨. 곤란한 표정.
똑똑히 기억한다.
"다른 방법 있어?"
묵묵부답.
나탈리는 주저하면서도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지긋지긋한 몬스터웨이브를 막아야만 했으니.
적어도 이유라도 알면 대비할 수 있을 테니까.
다들 머뭇거렸지만, 앨리스는 끝까지 나를 말렸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가만 있기는 싫었다.
질투와 향상심.
그림자 이면에 있는 빛.
이번엔 제대로 마주하고 싶었다.
피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솔직히 꺼내보이고자 했다.
"전설이 될 거야."
말을 내뱉고 보니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한편으로 속이 시원했다.
관심종자의 속성. 이름을 알리고픈 욕망.
그래서 높이 올라간 자들을 그리도 질투했었나.
어처구니 없는 선언에 심슨이 뜨악한 표정으로 보았다.
"이게 미쳤나."
"그래. 미쳤다!"
나는 진지했다. 그래서 심슨은 말을 잇지 못했다.
미칠 거면 곱게 미칠 것이지, 꼭 그런 표정이었다.
*
나탈리 크래프트는 단순한 주술사가 아니었다.
한손검과 방패술의 달인이었으며, 실버 콕스 장군의 전략가로서 전장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왔다.
베켄 마을에서 북방으로 올라올 때에도 굉장히 전략적으로, 그리고 논리에 어긋남 없이 계획을 작성했다.
때문에 내가 나서겠다고 했을 때부터 그녀는 머릿속으로 새로운 전략을 즉각 떠올렸던 것 같다.
정리가 되자마자 계획을 속사포처럼 줄줄 읊었던 것이다.
"만약 좀비가 엘피온 당신을 정말 같은 종으로 인식한다면 유인이 아니라 선도(先導)가 맞아요. 확인해봐야 할 문제이고, 두 가지의 경우를 모두 고려해서 계획을 짰어요."
첫 번째는, 좀비가 나를 동족으로 인식하지 않고 쫓는다면 그대로 도망치라는 것이었다.
그때 미리 준비한 주술을 통해 좀비 무리를 혼란에 빠뜨린다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좀비가 주술에 걸려들 것인가 하는.
여러모로 생명체라 부르기 민망한 것들이었기에 다양한 실험이 필요했다.
두 번째는, 좀비가 나를 동족으로 인식하고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을 시 유인하는 계책이었다.
얼핏 보기에 오크 좀비들의 몸에는 버섯이 자라지 않았다.
추측컨대 바람이 잘 통하는 외부에서 활동하니 그런 것 같았다.
그렇다면 좀비버섯을 활용한 유인은 애초에 불가능한 상황이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나탈리는 막힘없이 말했다.
"여긴 야생의 땅이에요. 어디든 생명체가 있어요. 미리 몬스터 무리가 있는 곳을 파악한 후에, 사냥을 좀 해서 길목에 놓아두죠. 그리고 엘피온이 미리 준비한 고깃덩이들을 던지면서 무리를 이끄는 겁니다."
그럴듯한 계책이었지만,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좀비떼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간 북방지역의 숲 전지역이 좀비로 득실거리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심슨은 간단하게 말했다.
"어차피 그리 될거야. 조금 더 빨라질 뿐이지."
아이작이 거들었다.
"지금쯤 라번이 하이랜드파크에 도착했을 거다. 생각이 있다면 대비책을 마련하겠지."
결국 우리로서는 불가항력이라는 소리였다.
"우선 마법과 주술이 통하는지 먼저 알아보도록 해요!"
나는 적극적으로 나섰고, 앨리스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치였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마법은 통했고 주술은 통하지 않았다.
아이작과 나탈리는 이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토론을 나눴다.
왜 그러한지 원리를 따지는 것은 저들이 고민할 문제였고, 나는 다른 의문에 사로잡혔다.
좀비였다가 회복된 나는 주술에 걸릴 것인가.
어쨌든 우리는 주변의 고블린 무리를 부지런히 찾아 돌아다녔다.
그리고 아이작과 앨리스는 타니와 함께 짝을 이뤄 사냥에 열을 올렸다.
마법과 활, 강아지의 조합은 생명체가 풍부한 북방의 숲에서 굉장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준비는 차근차근, 그리고 신속하게 진행됐다.
고블린 무리가 가장 많은 지역을 골랐다. 그리고 사냥한 짐승들을 좀비 무리가 위치한 지역에 이르기까지 놓아 두었다.
시작은 아이작이 했다.
마법으로 사냥한 짐승 하나를 날려보낸 것이다.
동시에 나는 등짐을 지고 곧장 출발했다.
"돌아와야 해!"
앨리스가 타니를 끌어안고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촉촉했다.
짜식, 그렇게 화를 내더니.
*
미리 확인한 바에 따르면 좀비는 나를 완전히 동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크 좀비들은 아이작이 날려 보낸 짐승을 물어뜯은 후, 어찌된 일인지 나에게 곧장 달려드는 것이었다.
당황해서 부리나케 달리다가 멍청한 스스로를 꾸짖었다.
내가 아니라 등에 둘러맨 짐승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만보니 이대로 달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력이야 미약한 신성이나마 도와주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었고, 아이작이 바퀴와 여행의 라드를 통해 마법을 걸어주었기에 속도도 더할나위 없이 빨랐다.
나는 즉흥적으로 계획을 바꿔 오크좀비들이 쫓아올 수 있도록 거리를 조절하며 달렸다.
수백의 좀비가 달려오는 통에 대지가 쿵쿵 울렸다.
놀란 새들이 날아오르고, 산짐승들도 경계하며 멀찍이 도망쳤다.
저 앞에 고블린 서식지가 보였다.
무려 오백여 마리나 있는 대규모 촌락이었다.
녀석들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몽둥이를 꺼내들고 두려운 눈빛으로 경계했다.
나는 고블린 무리와 좀비 무리의 사이에서 오롯이 서 있었다.
긴장이 되었지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고양감이 들었다.
두 무리의 사이에서, 뭐라도 된 것마냥 잔뜩 들뜬 것이다.
위대한 테스트, 그 어린 소년처럼 순수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역사적인 순간에 정면으로 나선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더이상 초라한 존재가 아니다.
테스트에게 보였던 찬란한 빛, 그것이 나에게도 빛나고 있을까?
좀비 무리가 다가올 수록 땅은 더욱 흔들렸고, 고블린 무리는 자세를 낮추며 결전을 준비했다.
나는 마치 선봉장이라도 된 것처럼 고블린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좀비무리가 다다를 무렵, 등에 진 짐승을 내려 힘껏 내던졌다.
순간, 내게 달려들던 좀비 무리는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날아가는 짐승을 향해 뛰쳐나갔다.
물이 갈라지듯 좀비들은 나를 지나쳤다.
나는 두려움에 떠는 고블린을 차마 지켜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두두두두두두.
땅 울림 소리만 가득했다.
곧이어 몬스터들의 괴성이 사방을 메웠다.
일행들은 무사히 목적지로 향했을까?
나는 조금 더 남아서 좀비 무리를 더 먼 곳으로 이끌어야 했다.
그때까지 일행들이 무사하기를 기도했다.
모든 좀비들이 나를 지나쳐 갔을 때, 비로소 눈을 떴다.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고블린 서식지에서 새로운 좀비들이 태어났다.
이제 수백의 오크 좀비는 고블린 좀비가 합세하며 천 단위의 거대한 무리가 되었다.
돌이킬 수 없다.
좀비 사태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나는 감상에서 벗어나 재빨리 이동했다.
길목에 미리 숨겨놓았던 짐승을 다시 등에 지고 좀비 사이로 내달렸다.
수천의 좀비들이 따라온다.
땅이 울리고, 온갖 것들이 놀라 튀어나와 도망쳤다.
내 앞에 거치적 거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딱 하나.
저 거대한 날짐승만 빼고.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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