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 하시죠
"커미션, 안 받겠습니다."
-네?
내 대답을 예상치 못했는지 서 과장은 물론 내 옆에 있던 최지민도 당황한 기색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들은 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커미션을 안 받으시겠다고요?
"네. 아무 수수료 없이 체결해 드릴게요."
서 과장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흠.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커미션 없이 체결해 주신다면 뭐 저희야 마다할 이유가 없죠.
"대신 다른 조건 하나만 걸겠습니다."
-네? 조건이요?
"네. 거래 끝나고 저희한테 5분만 시간 내 주시죠. 그렇게 해 주신다면, 이 거래 수수료 없이 바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커미션 받아서 나오는 수익은 대략 4천만 원 정도. 적은 돈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이걸 포기하고 더 큰 걸 얻을 수 있다면?
이를테면 두화와의 거래를 틀 수 있는 실마리라던지.
그렇다면 프로젝트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다. 나는 그걸 발판으로 또 한 번 치고 올라갈 수 있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감사합니다. 바로 체결할까요?"
-네.
협상 완료.
이제는 실행에 옮길 차례다. 내가 즉석에서 짜낸 이 판 위에서, 얻을 것 최대로 얻어내면 된다.
딸깍-
딸깍-
-체결되었습니다.
내가 마우스를 몇 번 움직이자, 서 과장의 주문이 체결되었다는 알림음이 나왔다.
"과장님, 체결 방금 된 것 같습니다. 과장님 쪽에서도 보이는지 확인해 주시겠어요?"
-잠시만요. 네,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저희가 더 도와드릴 점은 없으신가요?"
-네, 덕분에 일단 급한 불은 껐네요. 감사합니다.
자, 상대에게 원하는 걸 넘겨줬으니, 이젠 우리가 원하는 걸 얻을 차례.
"오더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과장님. 아까 말씀드린 5분··· 편하신 시간 알려 주시면 메일로 통화 스케줄 잡아 보내 드리도록 할게요."
-음, 혹시 괜찮으시다면, 지금 당장 하죠. 내일 오전부터 며칠간 출장이라서요.
"지금 당장이요?"
-네.
'이야, 성격 한번 화끈하네.'
"저희야··· 좋죠? 과장님 시간 괜찮으시다면요."
대답하며 옆자리의 최지민을 슬쩍 쳐다봤다.
최지민은 드디어 무슨 일인지 조금 더 알 수 있다는 것이 기뻤는지 표정이 밝아졌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일단··· 저번에는 제가 다소 무례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급하게 부탁드리게 되었는데 흔쾌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과장님.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무미건조한 말투의 짧은 사과로 시작하는 서 과장.
솔직히 우리를 대놓고 무시하던 그때만 생각하면 욕이라도 한 바가지 쏟아 주고 싶지만···.
클라이언트 앞에 선 증권사 직원에게 자존심은 사치다.
이 정글에서 살아남아 성공하고 싶다면 순간의 자존심 따위는 헌신짝 버리듯이 던져 버려야 한다.
자존심이라는 허상에 눈멀지 말고 일단 이 순간에 집중하자.
-저번에 통화에서 왜 우리가 신투랑 거래 안 하는지 궁금하다고 하셨죠?
"네 과장님."
-그전에, 제가 이 시간에 급하게 전화를 드린 이유부터 말씀드릴게요. 관련이 있거든요.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서 과장. 최지민은 단어 하나라도 놓칠세라 노트와 펜을 집어 들고 필기를 시작한다.
-오늘 오후 늦게 급한 출장 일정이 잡혔습니다. 출장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매수 종목 리스트 중에 몇 가지를 빠뜨렸어요.
한밤중의 고요한 사무실. 정적을 깨고 펜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나와 최지민 모두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서 과장의 말에 집중했다.
-다른 건 막판에 어느 정도 해결을 했는데 아시다시피 VIX 풋 옵션처럼 변동성이 강한 종목을 예약 주문으로 처리하는 것은 좀 곤란해서요.
"운용하시는 자금 크기도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저희는 외사를 통해 주문을 넣습니다.
"아, 외사요?"
외사···. 국내 증권사가 아닌 월가 투자은행들이 운영하는 서울 지사.
국내 증권사가 꽉 잡은 여의도를 벗어나 월가의 서울 지사들은 광화문에 다수 포진되어 있다.
'외사로 물량을 다 넘겨 왔었구나. 그럼 우리가 주문을 못 본 거도 무리는 아니지···.'
-네. 외사는 해외 시간 장 중에 라이브로 주문 체결이 가능하니까요. 저희로서는 그 점이 중요합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왜 오늘은 저희한테?"
-주로 거래하던 외사 두 곳 담당자가 하필 오늘 연락이 닿지 않아서요. 저도 워낙 정신이 없어서 다른 곳 연락할 겨를도 없었고.
"아···."
결국에는 우리는 대안에 불과했다는 거다. 뭐 나쁘게 생각할 건 없다.
우리에게 여태껏 기회가 없었다는 건 일단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나와 최지민은 그걸 해결하려고 하는 거고.
오히려 기회라면 기회일 수 있겠지. 이번 기회로 거래의 물꼬를 틀 수 있다면. 우리가 해결한 그 문제들은 고스란히 우리의 공적이 된다.
-그래서 국내 증권사 여러 군데 전화 돌리다가 신투에도 연락을 드리게 된 겁니다. 솔직히 여태까지 사무실에 계실 줄 몰랐어요.
"그렇군요···."
-원래 이렇게 늦게까지 근무하시나요? 야간 근무조가 따로 있는 건가 싶어서요.
"아 아뇨, 오늘 조금 일이 있었습니다."
'그냥 저 빌어먹을 엘리베이터에 갇혀서요.'
실상은 이렇지만···. 엘리베이터에 갇힌 덕분에 전화를 받은 거니까.
'설마··· 이래서 행운의 숫자가 5였던 거야···?'
만약 정말 그렇다면, 참 행운을 가져다주는 방식 하나 고약하네 싶다.
엘리베이터에 가두고, 최지민 폐소공포증 일으키고, 드디어 집에 가는가 싶었는데 퇴근 직전에 잡혀서 전화 받게 만들고.
'어쨌건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가 필요한 거 얻어 낼 수 있으면 장땡이지 뭐.'
"민성 씨."
"네? 아!"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느라 나도 모르는 사이 대화가 잠시 끊겼었다.
옆에서 날 불러 주는 최지민 덕분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던졌다.
"평소에 외사를 통해 주문하시는 걸 선호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네.
그토록 우리가 원하는 비밀에 다가서는 순간.
-종목별 점유율 때문에요.
"점유율이요?"
-네. 신투가 아무리 국내 증권사 중 해외 자산 유동성 점유율 1위라고는 하지만, 외사에 비할 바는 못 하죠.
"아···."
저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증권 유통시장에서 점유율은 곧 경쟁력이니까요. 굳이 제 입장에서 점유율 낮은 증권사까지 체크해 볼 필요가 있을까요?
지나치게 솔직한 서 과장. 그렇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다. 효율로 시작해서 효율로 끝나는 금융 업계. 적자생존은 이 정글의 기본 법칙이니까.
-이 점을 해결하실 수 있다면, 뭐. 제 입장에서도 신투와 거래를 안 할 이유가 없겠죠?
"그렇군요. 점유율···."
-이해하셨죠? 더 설명 필요하십니까?
아마 그가 대화에 응했던 것은, 단순히 이 늦은 시간에 그의 거래를 수수료도 받지 않고 해준 데 대한 보답 때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걸 보면···.'
우리가 떨어져 나갈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객관적인 지표를 제시하여 압도적인 체급의 차이를 깨닫게 한다? 참으로 꼰대스런, 그렇지만 정석적인 해결책이다.
서 과장은 링 위에서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자신의 승리를 예견했기 때문에. 링 위에 선 자신은 베테랑이고, 우리는 경험 없는 신예다.
하지만 무섭게 달려드는 상대일수록 카운터도 더 매섭게 들어가는 법. 체급이 많이 나가는 만큼 충격도 클 테니까.
숨겨둔 카드를 꺼낼 차례다. 나는 입을 열었다.
"DPM 보통 주···."
-네?
"AAPK 2025년 만기 3.8% 쿠폰 채권···."
-···.
"CKL 영구채권. 과장님께 친숙한 종목들이죠?"
-그 종목들은···.
두화증권 보유 리스트 중 두화증권이 원하는 만큼 구매하지 못했던 종목들. 최지민이 조사해 둔 바로 그 종목들이다.
[DPM Common Stock] : $805,237
[AAPK 3.8% 05/15/2025] : $352,000
···
[CKL 5% PERP] : $348,200
나지막이 종목 이름을 읊자 서 과장은 다소 놀란 듯하다.
-그 종목들··· 제가 구하느라 한동안 애먹었던 종목들이네요. 조사를 열심히 하셨나 봅니다?
"네 과장님. 그리고 또 있습니다."
흐름은 내게로 넘어왔다. 상대 페이스를 끊었다면, 그 이후부터는 몰아치면 된다.
-뭡니까?
"이게 최근 공시에서 나온 자료라는 거죠."
-그래서요?
"저희 생각에는 한동안 이 종목들 찾느라 애먹으셨던 게 아니라, 아직도 찾고 계신 중인 것 같은데요?"
-···.
침묵은 긍정. 계속 몰아치자.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구요."
-도움을 주신다고요?
"네. 이 종목들, 신투가 물량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건··· 제가 미처 몰랐네요.
'줄곧 외사하고만 거래했으니까 모르지 이 양반아.'
"아마 필요하신 만큼은 저희가 현재까지 보유 중인 것 같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과장님. 원하신다면 저희가 과장님께 판매할 수도 있구요."
-그렇다면··· 제가 구매하고 싶은데요.
서 과장의 태도가 바뀌었다. 여태까지 목석같던 그의 태도. 그 태도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방금 그 세 종목, 제가 구매하죠. 아니, 혹시 다른 종목도 보유하고 계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다 구매하고 싶네요.
"물론이죠 과장님."
서 과장의 성량이 커지고 조바심이 묻어난다. 확실하다. 그는 안달이 났다.
조금 전까지 두 팔을 치켜들고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던 챔피언. 자신도 모르는 새 바닥에 넘어진 꼴이다. 나는 그의 상체를 누르고 올라탄 격이고.
'여기서 끝낼 수는 없지.'
링 위에서 쓰러진 상대에 올라탔다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비 없이 파운딩을 날려야지. 파죽지세로, 숨 쉴 틈 없이 몰아쳐서 경기를 끝내야 하니까.
"그럼 거래 원하실 때 연락 주시죠."
-아뇨, 지금. 지금 당장 합시다.
"아 당장이요?"
'와 이거 때문에 골치 좀 아팠나 보네?'
서 과장은 제대로 떡밥을 물었다. 더 이상 가드를 올릴 의지도 없는 것 같다. 감정을 드러낸 순간 이 게임은 끝난 거다.
조금만 더 안달 나라고 약간의 뜸을 들이며 슬쩍 고개를 돌려 최지민을 쳐다봤다.
최지민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 있다. 우리가 즉석에서 설계한 판에 서 과장이 들어왔다. 그것도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이용해서.
최지민을 향해 엄지를 척 세우자 최지민은 활짝 웃었다.
"좋습니다."
-지금 바로 거래할 수 있으시다는 거죠?
"네. 종목 리스트 확정해서 알려 주세요."
-바로 보내겠습니다.
띠링-
띠링-
띠링-
여러 번의 알림음이 울렸다. 서 과장의 거래 주문이 시스템에 도착했다는 소리.
"과장님, 지금 저희 시스템상에서 보내시는 주문들 확인됐습니다."
-아 좋네요. 바로 체결 가능할까요?
"네 과장님."
잠시 말을 멈추고 승자의 기쁨을 만끽하며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많이 얻어낼 수 있을까.
아까 커미션 안 받았지? 내가 고작 서 과장의 5분 따위에 수익을 포기할 리가.
그건, 단지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였을 뿐.
"그럼 이제부터··· 가격에 대해서 좀 얘기를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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