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트라이베카 님의 서재입니다.

숫자버프 신입사원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트라이베카
작품등록일 :
2021.05.12 10:43
최근연재일 :
2021.06.16 15:52
연재수 :
53 회
조회수 :
75,630
추천수 :
2,851
글자수 :
288,618

작성
21.05.14 21:00
조회
2,014
추천
59
글자
12쪽

행운은 용감한 자를 돕는다

DUMMY

자리에서 일어나 정장 자켓 윗단추를 하나 잠그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 팀장님."

"응? 왜?"

"제가 발표 마저 해보겠습니다."

"뭐?"


멍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최민호 팀장.


"제가 발표 마무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 너 지금 상황 파악 안 돼?"


사람이 너무 화가 치밀면 멍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기석이가 준비하는 거 제가 도왔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시끄럽고 사무실이나 내려가 있어!"


이건 예상대로다.


가뜩이나 열 받아 있는데 내가 눈앞에 얼쩡거리면 당연히 이렇게 나오겠지.


내가 질문을 던진 쪽은 최민호 팀장이지만, 사실 내 질문은 그를 향한 것이 아니다.


"자네는 이름이 뭔가?"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국내주식운용팀 김민성 사원입니다."

"응? 자네도 최 팀장네 사원이라고?"


내 질문은 바로 저 사람. 조창훈 전무를 향한 것.


조금 전까지 나에게 윽박지르던 최민호 팀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가 고개를 떨구고 화를 참는 것이 보인다.


오케이.


조창훈 전무가 떡밥을 문 순간 최민호 팀장이 끼어들 여지는 사라졌다.


'자, 이제 조금만 더 상황을 밀어 볼까?'


"네. 최 팀장님 지시에 따라 방금 발표자였던 이기석 사원과 함께 발표를 준비했습니다. 이기석 사원이 많이 긴장한 것 같은데 제가 마무리해 볼 수 있을까요?"

"흠 그래? 최 팀장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희 팀에서 준비한 건데···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어. 뭐 준비했다는데 들어나 봐야지."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최민호 팀장이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느껴진다.


흐흐, 어쩌겠냐. 네가 아무리 날고 기는 에이스 팀장이라 해도 지금은 사자 옆의 하이에나 꼴인걸.


최 팀장이 공동으로 준비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건 99% 거짓과 1%의 과장된 진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말한 이상 게임은 끝이다.


아무리 잘나봤자 팀장은 팀장. 전무의 지시를 번복할 수는 없다.


'허락은 받았고···.'


지체할 것 없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박 대리한테 마이크를 넘겨받아 이기석이 멈췄던 부분에서 시작했다.


"이기석 사원에게 바톤을 넘겨받아 발표를 마무리하러 온 김민성 사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 팀의 발표주제는 노후화된 위험관리 시스템입니다."


조 전무를 한번 쳐다본 뒤 본격적으로 발표를 진행했다.


"현재 신투의 문제를 찾아보려면 신투의 과거를 이해해야 합니다. 신투의 모체는 미국계 투자사 스테이튼과 한국 토종 금융기업 서광투자증권입니다."


서두를 떼며 조 전무를 슬쩍 쳐다봤다.


아직은 심드렁한 그의 표정. 그 심드렁한 마음을 되돌릴 기회는 내게 주어진 10분 남짓이 시간이 고작이다.


"90년대 후반 IMF 위기 당시, 외자 유치와 외환보유고 증가를 위한 한국 금융당국의 각종 금융 정책 도입에 대해 알게 된 스테이튼은 신흥국 투자 부서를 기반으로 한국에 지사를 설립해 공격적인 확장을 펼쳤습니다."


오리엔테이션 때 들었던 조 전무의 프로파일에 의하면, 조 전무는 그 옛날 서광투자증권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이 업계의 고인물이다.


고인물 치고 옛 얘기 싫어하는 사람 본 적 없다.


애초에 발표하려고 했던 방향과는 약간 다르지만, 이왕에 어그로 끌기 시작한 거 당신이 좋아할 만한 얘기만 골라서 할 거다.


"격변기의 한국 경제. 위기가 클수록 기회도 많았습니다. 스테이튼 한국 지사는 외환 시장과 국내 우수기업 투자 점유율을 상승시키며 급속한 성장을 거쳤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 저를 포함한 대부분은 경험도 못 해봤을 것 같습니다만···."


말끝을 일부러 흐리며 조 전무를 한 번 더 쳐다봤다. 아직은 애매하지만 조 전무의 표정이 묘하게 바뀐 것 같다.


'왠지 해볼 만할 것 같은데?'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조창훈 전무 같은 업계 고인물들이 옛날얘기만 나와도 자존감이 팍팍 살아난다.


'나는 알지만 너희들은 모르는' 시간에 대해 실컷 떠들 기회가 생기니까 말이다.


거기에다 잠깐이지만 아까 자신의 신입사원 시절까지 언급했잖아? 이 이야기를 안 좋아하고 배길 수가 있을까나.


내가 읊고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신투의 기초적인 역사. 하지만 여기서 조 전무가 끼어들 틈을 조금만 열어 준다면?


"2000년대 초반에 들어오며 닷컴 버블의 붕괴로 미국 장이 휘청이자 스테이튼의 미국 본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물어라.'


"과다한 레버리지는 스테이튼의 안정성에 직격탄을 날렸고, 결국 미국 본사는 한국 지사를 매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당시에 이 상황을 겪었던 사람들의 심정이 어떨지는 저로서는 알 길이 없네요."

"그래서 위험 관리가 중요한 거지. 그때는 진짜 장난 아니었어. 다들 정리해고 위기에 회사에서 울고불고···.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고 난리 치던 사람도 있었다니까."


지금처럼 바로 저렇게. 끼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흐흐, 고인물이면 이건 못 참지.'


바로 '나 때는 말이야'를 써먹으면서 은근슬쩍 자기 자랑할 기회 말이다. 이쯤 되면 눈치 볼 것도 없다.


"아, 생각해 보니 전무님께서는 그때 그 상황을 실제로 겪고 계셨겠네요."

"그리고 헐값에 나온 스테이튼 한국 지사를 인수한 곳이 바로 서광투자증권이고. 지사 사람들은 도대체 왜 사업을 덤핑한 거냐고 본사에 항의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발표라기보다 거의 간담회 수준이 된 내 프레젠테이션 초반. 단상에 올라와 있는 내가 무언가 판을 깔아주면 조 전무는 은근히 한 마디씩 덧붙이며 따라온다.


이제 다시 진지한 분위기로 몰아가며 갈피만 잘 잡아 본론을 건드려 준다면?


군더더기 없는 마무리가 된다.


"맞습니다 전무님. 실패한 리스크 관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예시였죠. 그래서 저희가 고안해 본 솔루션은···"


내 발표는 발표 자체로 놓고 보면 그다지 성공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 발표의 심사위원은 오직 한 명.


조창훈 전무.


그리고 조 전무는 내 발표 내용이 꽤 마음에 든 것 같아 보였다.


어차피 여기 모인 팀장들도 마찬가지다.


조창훈 전무 한 명 만족시키자고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교육 과정에 참관하는 거니까, 내 전략을 가지고 뭐라 할 사람도 없다.


"···흡수식 인수 합병을 통해 외국계 투자사의 선진 경영 구조를 받아들인 서광투자증권은 '새로운 서광'이라는 뜻의 신서(新西) 투자증권으로 리브랜딩을 하며 굴지의 증권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호흡하고, 마무리.


"신투가 가진 장점은 선진 경영의 로컬화라는 것이죠. 우리는 이 점을 절대 잊으면 안됩니다."


짝-짝-짝-


발표를 마치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들리는 박수 소리.


쳐다보지 않아도 저 박수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니 흐뭇한 표정으로 손뼉을 치고 있는 조창훈 전무가 시야에 들어온다.


"자네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사원 김민성입니다."

"최민호 팀장 소속이라고?"

"네 전무님."


조창훈 전무가 최민호 팀장을 보고 이야기 했다.


"최 팀장 그래도 한 명은 트레이닝 잘 시켰네?"

"네?"

"요새 다들 차세대 기술 설명하라고 하면 말도 안 되는 거 가져다 놓고, 미래사업이다 뭐다 하면서 떠들기 바쁜데 저 친구는 회사 역사부터 꼼꼼히 따져서 솔루션을 제공할 줄 아는구만."


그리고 이어지는 조 전무의 나를 향한 예상치 못한 질문.


"그런데 왜 처음부터 자네가 발표하지 않은 건가? 아까 그 친구는 완전히 얼어붙어서 말도 못 하던데 뭐 무대 공포증이라도 있는 거야? 준비하면서 누가 더 발표에 적합한지는 자연스럽게 드러났을 텐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 다른 대답이 떠올랐다.


한 대답은 굉장히 안전하고 무난한 순한맛 대답.


다른 대답은 위험하지만, 최민호 팀장에게 한 방 더 크게 먹여줄 수 있는 매운맛 대답.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쥔 손을 내밀었을 때, 주인공 네오가 했던 고민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어차피 여기서 멈추면 죽도 밥도 안 되겠지.'


지금 여기서 내가 멈추면? 최민호 팀장한테 아무 일도 없겠지.


그리고 최민호 팀장이 멀쩡하다는 건? 내 정규직 전환은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아무리 내가 조 전무한테 좋은 인상을 남겼더라도 결국 최종 인사평가는 최민호 팀장이 할 거니까.


막말로 최민호 팀장이 이기석도 쳐내고, 나도 자르면 내 계획은 도루묵이 된다.


결론. 여기서 뭔가 강력한 한 방을 날려야 한다.


솔직히 계속 다른 잡생각이 난다. 그래서 그냥 풀 악셀 밟아 버리기로 결정했다.


'아 몰라. 그냥 질러버리자.'


오늘은 뭘 해도 되는 날인 것 같으니까!


"최민호 팀장님이 직접 결정하셨습니다."

"최 팀장이?"

"네. 아까 제가 발표를 넘겨받기 전까지 진행하던 이기석 사원이 K대 출신이거든요. 아무래도 학벌 좋으면 발표도 잘할 거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니까요."

"음?"


아주 잠깐의 평화를 찾았던 것 같은 최민호 팀장의 표정이 다시 구겨졌다. 그가 노려보는 눈빛이 아주 살벌하다.


그런데 조 전무의 표정은 더 구겨졌다.


"최 팀장은 내가 임원진 중에 유일하게 명문대 출신이 아닌 건 알고 그런 말을 했나? 최 팀장 정도면 모를 리는 없을 거로 생각하는데?"


'아?'


저건 완전 예상 밖인데.


내가 조 전무의 출신 학교까지 다 꿰고 있을 수는 없잖아. 내가 회사 임원 전담 비서도 아니고.


일단 질러버려서 속은 좀 시원한데, 괜히 오버한 건가?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나?'


젠장.


"아닙니다. 제가 판단 실수를 했네요."

"우리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려면 최대한 선입견 버리고 판단해야 돼. 예전처럼 학벌만 좋다고 모든 게 다 보장됐던 시대는 끝났으니까 말이야. 늙은 나도 아는데 자네가 이걸 몰라?"

"명심하겠습니다 전무님."


조 전무에게 대답하는 최민호 팀장. 그가 내게 보내는 눈빛의 메시지는 간단해 보인다.


'사무실로 돌아가서 보자. 돌아가서 넌 이제 내 손에 죽는다.'


이사 승진을 위해 한창 회사 내에서 입지를 다지며 몸집 불리기에 정신이 없는 최 팀장을 고작 신입사원 하나가 전무 앞에서 개망신을 준 셈이니.


그것도 정직원도 아닌 계약직 직원이.


단상에서 내려와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박 대리가 발표 시간을 마무리하는 것을 보며 머리를 열심히 굴려 봐도 도저히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대로 다시 사무실로 복귀하면 생길 일은 불을 보듯 뻔한데.


유진테크 주가 터져서 돈도 잃었고, 전무 앞에서 쪽도 팔린 최민호 팀장이 나를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당장 자를 수는 없더라도 아마 불이익이란 불이익은 다 줄 텐데.


어떡하지···.


'아씨 실수했나?'


다시 생각해 봐도 좀 실수 한 것 같다. 미리 계산된 계획까지만 진행했어도 내가 원하는 그림이 나왔을 텐데.


역시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안 하는 것이 정답. 실수였다.


'후 일단 사무실이나 돌아가 있자.'


답이 없다고 생각하며 복잡한 심정으로 사무실로 돌아가는 찰나.


누군가 나를 붙잡는다.


"야."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익숙한 얼굴. 분명 답이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상황을 반전시킬 만큼 큰 행운이.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숫자버프 신입사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신작 연재중입니다. +1 21.08.04 114 0 -
공지 감사합니다! +6 21.06.16 269 0 -
공지 전무님, 보고 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21.05.31 239 0 -
공지 제목 변경 공지입니다 21.05.13 238 0 -
공지 연재 시작했습니다 +4 21.05.12 1,883 0 -
53 도약 -完- (감사합니다!) +19 21.06.16 941 35 12쪽
52 변화 21.06.16 791 26 15쪽
51 이상혁 (7) 21.06.16 771 27 12쪽
50 이상혁 (6) +1 21.06.16 735 25 11쪽
49 이상혁 (5) +2 21.06.16 736 24 12쪽
48 이상혁 (4) +1 21.06.16 739 27 12쪽
47 이상혁 (3) +1 21.06.16 730 21 12쪽
46 이상혁 (2) 21.06.16 751 27 12쪽
45 이상혁 +7 21.06.12 931 43 12쪽
44 갖고 싶은 것 +4 21.06.11 950 52 14쪽
43 욕심 +3 21.06.10 977 44 12쪽
42 가설 +3 21.06.09 1,002 49 12쪽
41 시스템 완성 +1 21.06.08 996 44 12쪽
40 냄새가 난다 +1 21.06.07 1,026 53 12쪽
39 트로이 목마 +2 21.06.06 1,048 47 12쪽
38 잠입자 +1 21.06.05 1,076 46 14쪽
37 해결책 +1 21.06.04 1,107 59 13쪽
36 탐색전 +2 21.06.03 1,133 56 13쪽
35 선전 포고 +4 21.06.02 1,182 53 12쪽
34 1등? +7 21.06.01 1,189 64 12쪽
33 거래 하시죠 21.05.31 1,164 61 11쪽
32 행운의 숫자 +2 21.05.30 1,175 61 12쪽
31 조별 프로젝트 (3) +2 21.05.30 1,187 58 13쪽
30 조별 프로젝트 (2) +2 21.05.29 1,208 54 16쪽
29 조별 프로젝트 +1 21.05.28 1,276 61 13쪽
28 운 좋아? +2 21.05.27 1,337 60 12쪽
27 확장 서비스 +2 21.05.26 1,355 67 13쪽
26 한진생명 (9) +12 21.05.25 1,404 68 12쪽
25 한진생명 (8) +2 21.05.24 1,371 65 13쪽
24 한진생명 (7) 21.05.23 1,384 57 12쪽
23 한진생명 (6) +5 21.05.23 1,385 53 12쪽
22 한진생명 (5) 21.05.22 1,384 55 13쪽
21 한진생명 (4) +4 21.05.21 1,461 59 12쪽
20 한진생명 (3) 21.05.20 1,503 56 12쪽
19 한진생명 (2) 21.05.19 1,592 56 12쪽
18 한진생명 21.05.18 1,637 58 11쪽
17 첫 활약 (2) +1 21.05.18 1,630 52 12쪽
16 첫 활약 +2 21.05.17 1,655 56 12쪽
15 신입이 업무를 잘함 +2 21.05.17 1,719 54 12쪽
14 내기 할래요? 21.05.16 1,740 57 13쪽
13 외환 팀 백 대리 21.05.16 1,821 56 11쪽
12 7층 +2 21.05.15 1,903 60 12쪽
11 스카우트 +4 21.05.15 1,985 68 13쪽
» 행운은 용감한 자를 돕는다 21.05.14 2,015 59 12쪽
9 참교육 +2 21.05.14 2,038 63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