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색전
"민성 씨. 오랜만에 나오니까 좋죠?"
뭐가 그리도 기분 좋은지 잔뜩 들뜬 모습의 최지민. 반대쪽에 앉아있다가 우리 테이블로 건너와 말을 건넸다. 그녀에 의해 나와 이상혁의 대화는 끊겼다.
"어, 상혁 씨!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요."
조금 전 나에게 선전 포고할 때의 뻔뻔한 표정은 어디 가고, 이상혁은 웃으며 최지민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쪽 테이블에서 보니까 둘이서 진지한 얘기 하는 거 같던데, 혹시 내가 방해했어요?"
"아뇨 방해는 무슨. 일어서려던 참이었어요. 그럼 민성 씨, 지민 씨. 또 봐요."
인사와 함께 일어서려는 이상혁.
"왜 한국이에요?"
"네?"
다소 뜬금없는 내 질문이 떠나던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끌었다.
"날 때부터 입에 20캐럿 다이아 수저 물고 태어났을 텐데 왜 월가가 아니라 신투에 오셨을까 궁금해서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조금 전, 이상혁은 대놓고 나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내가 임시 배정 중인 해외자산팀을 원한다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뒤로 돌아와 멱을 딸 기회가 있었음에도, 굳이 선전포고를 택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겠지.
'진검 승부를 하고 싶은 변태거나, 아니면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거나.'
전자는 당연히 아닐 거다. 이 업계에서 낭만에 젖은 정면 승부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낭만 찾는 놈들은 애초에 발도 들이지 못한다.
"컬럼비아 금융공학 석사면 월가 못 뚫을 리가 없는데? 거기에 그쪽 아버지 커넥션 정도면 월가에서도 탄탄대로일 텐데. 왜 한국으로 왔어요?"
"아니,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냐고요."
고고하신 귀족 도련님이 선전포고까지 하면서 나랑 싸우길 원한다?
그렇다면 상대해 줘야지. 대신 철저하게 내 방식대로. 내 페이스에 맞춰서.
나한테 대놓고 도발한 상대를 그냥 보내 줄 만큼 나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리고 내 홈그라운드는 잘 갖춰진 링 위가 아니다. 도련님 멱살 잡고 길거리로 끌고 와서 흙먼지 내며 엉켜 볼 생각이다.
"못 들어갔죠? 월가."
"지금 기껏 생각해 낸 게 내 자존심 건드리는 거예요?"
"그냥 나는 그 정도 배경을 갖고 태어났으면 고작 신투 내에서 밥그릇 싸움이나 하진 않을 것 같아서요."
"하···. 이래서 못 가진 새끼들이랑은 말을 섞지 말아야 하는데."
다 들리게 혼잣말로 비아냥거리는 이상혁. 여태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 뒤에 지금까지 잘 감춰 왔던 냉소가 만면에 드러났다.
"먼저 시작하지 않았어요?"
"뭐, 내가 민성 씨 자리 갖겠다고 한 거요?"
"난 그쪽처럼 다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라서 내 것 뺏으려는 사람 그냥 두고 보질 못하거든요."
이상혁은 나를 잠시 노려보더니 의자 위 놓인 재킷을 집어 들고 자리를 떴다.
"아니 저거 미친 새끼 아니에요?"
"네?"
옆에서 잠자코 대화를 듣던 최지민.
"아니 자기가 뭔데 못 가진 새끼니, 뭐니 하면서 지랄인데?"
"···."
"별것도 아닌 게. 민성 씨, 우리 어떻게든 방법 찾아서 저 새끼 뭉개 버려요."
"하하···."
얼굴이 빨개진 게 취했나 보다. 그래도 같은 팀이랍시고 내 편을 들어주는 게 은근히 고맙다.
'방법만 알면 나도 그러고 싶어요.'
최지민은 이상혁의 말이 자신을 향하기라도 한 양 씩씩거리며 술잔을 연거푸 비웠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이상혁은 떠났지만, 그의 말은 아니다. 자리에서 맴도는 이상혁의 말을 곱씹느라 머리가 아프다.
'슬슬 일어나야겠다.'
그만 집에 갈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차에, 익숙한 얼굴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 그러니까 스트레스받을 땐 이게 최고라니까요?"
"아니 기석 씨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우리야 믿지."
"하하, 잠시만요. 여기 다섯 명이요!"
어라··· 이기석?
앉아 있던 우리와 눈이 마주친 이기석. 얼마나 당황했으면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 기석 씨, 잘 가다가 왜 갑자기 멈춰?"
"뭐야, 자리 없대? 저기 빈 테이블 있는데?"
덩달아 그의 뒤를 따라오던 일행들도 걸음을 멈췄다. 그중 한 명의 목에 걸려 있는 사원증이 눈에 들어왔다.
[AIK 생명]
[김XX 과장]
아, 이제야 알겠다.
어떻게 이기석같이 실속도 없는 놈이 3위까지 치고 올라왔나 했더니만.
발품 팔면서 영업 뛴 거구만? 술 영업.
"아··· 과장님, 혹시 저희 다른 곳 더 좋은 데로 가실래요?"
"엥? 무슨 소리야? 기석 씨가 오늘 먹방 한번 제대로 보여 준다고 일부러 여기로 데려왔으면서."
"그건 그런데···."
이기석은 좌불안석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과 자신의 일행을 번갈아 바라봤다.
'꼴에 자존심은 있다, 이거지?'
저번에 조창훈 전무 앞에서 발표를 완전히 말아먹으며 밑천을 드러낸 이기석.
일종의 방어 기제일까? 이기석은 그 이후로부터 동기들과 대화만 시작됐다 하면, 열심히 허세 섞인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이번 조별 과제에서도 마찬가지. 이기석은 자신의 실적이 3위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한동안 시끄러웠다.
'직접 개발한 클라이언트 맞춤 솔루션이라고 했었지?'
그 솔루션이란 게 결국 접대 영업이랑 술 공세란 게 들통나게 생겼으니···. 반칙은 아니지만, 쪽 좀 팔릴 거다.
"아 빨리 아까부터 얘기하던 그 매운 치킨이나 시켜 봐."
"아, 네 과장님."
"맥주도 좀 시키고. 피처로 큰 거."
"저기요! 여기 주문할게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거 보니까 이미 어디서 한 잔 땡기다가 온 것 같다.
"핵불닭튀김 날개 스페셜 하나랑 맥주 큰 거로 두 개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기석은 주문하는 내내 계속 우리 테이블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다른 동기들도 나만큼이나 이 상황이 우스운지 연신 피식거린다.
이기석이 오죽 자랑을 해 댔으니···.
'자업자득이지.'
저놈은 저 근거 없는 허세만 좀 줄여도 중간은 가지 않을까?
"크크, 기석 씨 고객사 술자리에서 또 무슨 허세 부렸나 봐요."
"아니 허세도 허센데, 나는 먹는 거로 허세 부리는 사람들이 제일 이해 안 간다니까."
"잘 안 들리는데, 그냥 객기 부린 게 아니라 매운 것 잘 먹는다고 자랑한 것 같은데?"
"어어어, 맞는 거 같아. 명예의 전당 도전인가 뭔가 한다고 하더라고."
열중해서 저쪽 테이블의 대화를 엿듣던 동기들의 대화. 참, 저 흥미로운 새끼는 별거에 다 허세를 부리네 싶다. 뭐 고객사가 광대를 마음에 들어 하면 장땡이지만.
어떻게 보면, 영업도 실력이긴 한데.
'차라리 영업팀을 가지 그랬냐. 왜 고집부려서 운용팀을···.'
벽면에 붙어 있는 광고 전단지. 보기만 해도 혀가 얼얼해질 것 같은 치킨 사진이 큼직하게 나와 있다.
[매운맛에 도전! 불보다 매운 핵불닭튀김 출시!]
[눈물 쏙! 스코빌 지수 10,000의 놀라운 매운맛!]
[한 시간 내 완료 시 맥주 무료 쿠폰과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려 드립니다.]
고객사 손님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시뻘건 닭튀김도 물어뜯는 저 정신. 저거 하나는 높이 사 줄 만하다. 아무리 그래도 나 괴롭히던 놈이라 도저히 좋게는 안 보인다만.
"후아, 맵다. 그래도 먹을 만하네요."
"햐, 기석 씨는 정말 독종이야."
"제가 말했잖습니까? 저는 제가 내뱉은 말은 무조건 지킨다구요."
"하하, 그래서 내가 기석 씨를 좋아한다니까? 무슨 일에서건 신뢰를 안 잃으니까."
"그럼요. 신뢰의 아이콘, 그게 접니다."
"그래, 우리 담당하는 증권사 직원이 이 정도는 돼야 뭘 믿고 맡기지!"
테이블 두 개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대화. 듣고 있자니 은근히 흥미롭다.
"맞다. 아까 말하던 거나 다시 설명해 줘 봐. 내일 부장님께 한번 말씀드려 보게."
"아, 네. 이게 보유하신 포트폴리오에 커버드 콜 매도하는 건데요."
'어라?'
대화가 좀 진전되니 이기석은 기회다 싶었나 보다. 거침없이 시작되는 그의 전략 피칭. 문제는···.
'저거 내가 짜 준 전략이잖아?'
내가 팀 옮기기 직전에 최민호 팀장에게 어필이라도 해 보려고 열심히 준비했던 전략.
이기석이 하도 기웃거리길래 슬쩍 보여 준 적 있다. 깔끔하게 정리해서 책상 위 서류함에 넣어 뒀더니만.
'그걸 슬쩍했다고?'
재주도 좋다. 영업은 몸으로 때우고, 모자란 실력은 내 것 슬쩍하고. 저렇게 해서 실적 3위까지 올라왔구나···.
"지금 이 스트래들 가격을 보시면 시장이 5일 이내에 8퍼센트는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이 자료를 보시면···."
"오, 괜찮은데? 이거 자료 이메일로도 보내 줄 수 있지?"
"그럼요. 제가 리포트까지 꼼꼼하게 작성해 뒀습니다."
이기석이 읊는 전략 핵심 포인트를 가만히 들어 봤다.
인용하는 수치만 바꿨지, 그밖에는 정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내 작업에서 가져왔다.
'뻔뻔한 새끼.'
오늘은 몸 굴려 가며 직접 영업 뛰는 게 짠해서 그냥 놔두려 했는데. 아무래도 응징해야겠다.
무슨 방법이 좋을까 머리를 굴리며 두리번거리던 중, 눈에 들어오는 숫자.
[눈물 쏙! 스코빌 지수 10,000의 놀라운 매운맛!]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흠, 그래도 이건 조금 비인간적이려나?'
"진짜 잘 썼는데? 보고서 이 정도로 작성하려면 기석 씨 고생 좀 했겠어?
"제가 과장님을 위해서면 뭘 못하겠습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너를 인간이라 생각했던 내가 잘못했다. 잘 가라.
핸드폰에서 Number 어플을 켜 광고 전단지 문구를 촬영했다.
'흠,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정말 이 숫자를 선택하시겠습니까? 한 번 선택하면 변경이나 취소가 불가능합니다]
-Yes
핸드폰 화면이 잠시 밝아지고, 내가 원하는 대로 숫자는 바뀌었다.
[눈물 쏙! 스코빌 지수 70,000의 놀라운 매운맛!]
이기석은 한 차례 설명을 마친 후 치킨을 포크로 찍어 입에 집어넣던 참이다.
"욱!"
"응?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요, 괜찮···습니다."
"왜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지? 괜찮은 거 맞아?"
어디 보자···.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까 볶음 라면 중에 제일 매운 게 1만 스코빌. 잘못 먹으면 큰일 난다는 태국 고추가 대충 5만에서 10만 스코빌 사이.
이기석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치킨을 쳐다보더니 일순간 컵을 들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저 진짜 죄송한데 잠시 화장실 좀···."
"기석 씨! 괜찮아?"
부리나케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로 뛰는 이기석.
쿠콰콰콰쾅-
화장실 문을 뚫고 나오는 엄청난 소리. 그 폭음이 몇 차례나 들린 후에야 이기석은 창백해진 얼굴로 기진맥진 걸어 나왔다.
**
"야 너 장난하냐?"
"뭐? 너? 방금 너라고 했냐?"
"그래, 너. 백주창."
이기석에게 참교육을 베푼 다음 날. 어김없이 아침은 찾아왔다.
출근해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평화로운 모닝 해장 시간을 가지던 참. 내 옆에서 높아지는 언성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야, 니가 개판 쳐 놔서 지금 수습하기 힘들거든?"
"아니 그게 왜 내 잘못이냐고."
"환 헤징 오더 우리가 보낸 거 확인을 했어야지! 지금 손실이 얼만 줄 알아?"
"와, 나 미쳐 버리겠네. 너희 헤징 주문 수량이 제대로 된 건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얼핏 듣다 보니 금세 상황이 파악됐다.
하기훈 대리가 해외 채권을 고객사에게 판매하며 생긴 환율 위험을 없애려고 한 모양이다. 당연히 절차대로 환 헤징 거래를 외환팀 백 대리에게 보냈고.
'어디 보자···. 이번엔 또 누가 조졌을까나···.'
시스템에 남아 있는 주문 기록을 하나씩 살펴봤다. 안타깝게도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하 대리 실수.
주문 여러 개를 한꺼번에 처리하다가 빼야 할 숫자를 합쳐 버린 것 같다.
"니가 실수해 놓고 왜 나한테 지랄인데?"
"일 하루 이틀 해? 우리랑 거래 하루 이틀 하냐고? 단위가 말도 안 되게 크면 거래 확정 누르기 전에 우리한테 물어봤어야 할 거 아냐?"
뭐, 하 대리 말대로 우리 업무에서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눈치긴 하다.
백주창 대리가 조금만 더 센스 있게 행동했더라면 하 대리의 실수를 알아채고 수정 요청을 했을 거다. 안타깝게도 그대로 처리해 버리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난 거겠지만.
"민성 씨. 이거 주문 목록 가져가서 하나씩 대조해 줘. 시장 움직이기 전에 빨리!"
"네, 대리님."
후··· 그래. 사고 치는 놈은 따로 있고 처리는 이번에도 내가 하게 되는구나.
그나마 이젠 이런 급한 요청도 제법 익숙해졌다고 위안으로 삼으려는 찰나.
'어라? 이건?'
분명 몇 번이고 반복했던 작업인데 이걸 왜 이제야 알아챘을까.
화면 위에 보이는 하나의 패턴.
이거면 이상혁을 누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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