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 포고
"안녕하세요 팀장님! 조창훈 전무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어, 왔어요?"
'하, '왔어요'라고?'
박 팀장이 신입한테 존댓말이라니.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아무리 철혈(鐵血)의 성과 제일 주의자 박창섭 팀장이라고 해도 로열패밀리 앞에서는 한 수 접는다는 건가?
아···. 하긴, 따지고 보면 성과 제일 주의자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 싶다. 이 바닥에서 원하는 걸 가장 빠르고 쉽게 성취하는 지름길이 바로 인맥을 통하는 거니까.
"요새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바쁘다던데, 조별 과제도 일등 했다면서?"
"네 하하, 운이 좋았죠."
"운이 좋기는 무슨! 20억이 어디 그냥 운빨만 내세워서 가능한 돈인가?"
20억···?
압도적이랄 것까진 없지만, 우리의 수익과는 충분한 격차.
"IP에셋 표 대표님 어릴 때부터 알던 분이라서요. 안 그랬으면 꿈도 못 꿨죠."
"인맥이 다가 아니잖아? IP에셋하고 이번에 거래한 게··· 듣기론 CMS 구조화 채권이라고?"
"네 팀장님."
"햐, 역시 컬럼비아 금융공학 석사 출신다워. 인맥도 그냥 놔두면 인맥일 뿐인데 사용까지 완벽하게!"
"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럼 일단 회의실로 이동해서 얘기 계속합시다-."
'화려하구만.'
컬럼비아 금융공학 석사에, 구조화 금융 딜까지 손댈 정도로 빠삭한 지식. 거기에, 화룡점정 인맥까지.
넘어야 할 산이 높다. 여태까지의 경쟁은 내게 별것 아니었다. 기껏해야 동네 뒷산 정도? 하지만 이상혁이라면···.
'K2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라산 정도는 되겠지.'
하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나는 난놈이니까.
이상혁에게 인맥이 있다면 나에게는 능력이 있다. 능력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나는 숙련된 셰르파다. 준비만 할 수 있다면, 한라산이건 K2건 못 넘을 리가 없다.
**
"지민 씨 계산 끝났어요?"
"네. 잠시만요."
열람실 한편에 갖춰진 간이 회의실. 노트북 자판 위에서 최지민의 손가락이 열심히 움직였다.
"음··· 이거 좀 헷갈리는데요?"
"네? 어떤 부분이요?"
"여기, 우리 팀 수익이랑 이상혁 씨 팀 수익이랑 비교하는 부분이요."
최지민의 옆으로 다가가 모니터를 쳐다보자 그녀가 손가락으로 화면의 셀 몇 개를 짚었다.
"일단 민성 씨 말대로 예측 수익을 계산해 봤는데요."
"그런데요?"
"우리 거래량 증가 비율은 현상 유지라고 가정하면 될까요?"
"아뇨. 마지막 3주 정도는 줄어든다고 봐야 해요."
안타깝지만 냉혹한 현실. 우리에게 '막판 뒤집기'는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불가능하다.
"네? 왜요?"
"우리가 두화랑 거래 트게 된 계기 알죠?"
"네···. 저쪽에서 못 구하고 있던 종목들 유동성 공급해 준 거요? 근데 그게 왜요?"
"두화가 원하는 걸 다 얻고 나선 어떻게 될까요?"
"아···!"
우리가 가지고 있던 패는 강력했다. 고객사가 원하는 부분을 직접적으로 파고들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패는 아니다.
그래서 첫날 이후, 우리는 두화운용 서 과장에게 그가 원하는 종목을 한꺼번에 넘겨주지 않았다.
그가 애타게 찾아오던 종목을 하나씩 넘겨줄 때마다, 우리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종목들의 거래를 유도했다.
'다섯··· 아니 여섯 종목 정도 남았나?'
우리 팀 전략의 한계점은 너무나도 뚜렷했다. 탄창에 남은 총알은 불과 여섯 발. 그에 비해서 이상혁의 전략은···.
"맞다! 민성 씨가 조사해 달란 것도 좀 더 알아봤어요."
"아, 진짜요? 어떻게 됐어요?"
최지민이 비닐 폴더에 끼워진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신서투자증권 구조화 채권 발행 및 유통 일정]
"이거··· 어떻게 구하셨어요?"
"아, 구조화채권팀 대리님이랑 점심 먹으면서 여쭤보니까 바로 주시던데요?"
기밀까지는 아니겠지만, 이 정도면 공식적인 부서 간 협업 없이는 얻기 쉽지 않은 서륜데.
'참··· 편하네.'
아마도 그 팀 대리가 최지민한테 관심 좀 있나 보다.
어쨌건 원하는 정보가 손에 떨어졌으니 이제 분석할 차례. 최지민과 함께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앞으로 5주간의 발행 일정에 발행 마크업 예상 수익을 적용해 보면···."
"여기 계산식에 집어넣으면 되는 거 맞죠?"
"네 맞아요. 여기 예상 수요도 바꿔 주시고요."
엑셀 상 숫자 몇 개 바꾸는 간단한 계산. 숫자를 다 입력한 최지민이 F9 키를 눌러 스프레드시트를 새로고침 했다.
[예상 마크업 수익 : +4,232,012,320 원]
예상 거래량을 기준으로 산정된 이상혁 팀의 수익.
그에 반해 우리 팀의 예상치는···.
[예상 마크업 수익 : +2,032,425,000 원]
구조화 채권의 막대한 수익구조.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빠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전략과는 달리, 이상혁 팀의 수익모델은 채권 발행량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꾸준히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무지막지한 장점이 있다.
'채권 발행량이 늘어나네?'
최지민이 얻어낸 자료에 의하면, 현재 유통 계획 중인 구조화 채권의 거래량은 작년 동기간에 비해 분명히 증가해 있다.
"민성 씨. 이거···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데요?"
"계획 중인 채권 발행량이 늘어났으니까요."
"어라? 이상하다? 발행량이 늘어나면 마진이 줄어들어야 하잖아요? 공급이 많아진다는 말인데···."
교과서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간단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 공급량이 늘어나면, 거래가 일어나는 균형 가격 점은 낮아져야 하니까.
물론, 실제 세상은 교과서와는 다소 다르다.
"그건 수요량이 같아진다는 가정하에서고요. 지금은 얘기가 다르죠."
"아···."
"이상혁 씨 팀 성과 때문에 채권 수요가 늘어난 거 감안하면서 더 찍어낼 테니까요."
내 설명을 들은 최지민.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곡을 찌른다.
"그럼 우리가 저쪽이랑 격차를 줄이려면 우리도 방법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맞아요."
문제는···.
"현재로서는 마땅한 수가 안 보이네요."
"흠···. 민성 씨까지 그렇게 얘기하니까 진짜 막막한데요."
최지민이 잠시 화장실 간 사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Number 어플을 켜서 엑셀 창에 계산된 숫자를 촬영했다.
'역시···.'
어플 화면 위, 숫자들은 빛나고 있지 않다. 터치해 봐도 묵묵부답. 이젠 알 만도 하다. 쉬운 길은 없다는 거.
"아 맞다. 민성 씨, 오늘 저녁에 뭐 해요?"
"네?"
어느새 화장실에서 돌아온 최지민. 자리에 앉더니 대뜸 질문을 던졌다.
"오늘 동기 모임 있는 날이잖아요."
"아··· 네, 깜빡 했네요."
"안 가실 거예요?"
솔직히 모임이 그리 달갑지는 않다. 지난 몇 주간 동기들이 메신저로 모임 참석 여부를 물어볼 때마다 핑계를 만들어 조용히 빠져나가곤 했다.
모임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주로 퇴근 직후인 일곱 시 경. 그때는 내게 피크타임이나 다름없다.
해외장 시간 맞춰서 오더 처리하고, 여유 있는 날에는 바이너리 옵션으로 내 계좌 불리느라 바쁘니까.
"같이 가요! 재밌을 거예요."
"오늘이요? 오늘 조금 바쁘긴 한데···."
"단톡방 보니까 이상혁 씨도 나온다는 것 같아요."
흠, 이건 좀 흥미가 생기는데?
어차피 프로젝트 막힌 부분은 계속 잡고 늘어져 봤자 해결될 일도 아니긴 하고. 머리도 식힐 겸 오랜만에 모임이나 나가 봐야겠다.
**
"오! 이게 누구야?"
"민성 씨 요새 왜 이렇게 비싼 척해?"
"너무 오랜만인데?"
회사 근처 치킨집. 최지민과 함께 내가 등장하자 동기 몇이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받으며 맥주잔을 부딪치길 세 차례. 어느새 분위기는 무르익고 퇴근 시간이 조금 늦었던 동기들도 하나둘씩 합류했다.
"아, 그러니까 거기 거래처에서 말이지···."
"오늘 코인 차트 봤어? 내가 이프리움 말고 다른 거 들어가랬잖아···."
"그래서 김 대리 그 새끼가 왜 결제 안 됐냐고 쪼는데, 내가 아주 미치겠더라니까?"
드문드문 들리는 동기들의 대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빠른 비트의 음악. 이따금 들리는 주문 벨 소리.
적당한 취기와 소음 때문에 정신은 산만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옆자리 사람의 말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다.
슬슬 피곤해지기도 하고 그만 자리를 뜰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사 갈 준비도 해야 하는데···.'
옆에서 들리는 동기들의 열띤 주식 종목 토론을 들은 체 만 체하며 전셋집에 들어갈 가구를 생각하던 찰나.
"또 보네요?"
또 본다는 그 한마디. 순식간에 전셋집에 가 있던 내 멱살을 잡아끌어 회사 옆 치킨집에 도로 앉혀 놨다.
"그러게요. 두 번째 보는 거니까 이젠 구면인가요?"
"아까 더 얘기하고 싶었어요."
이상혁. 방금 도착한 모양이다.
그는 재킷을 벗어 반 접어 의자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뒤집혀 있던 맥주잔을 바로 세우더니 직접 잔을 채우고 내게 잔을 들어 보인다.
"어! 상혁 씨 언제 왔대?"
주변 동기들이 그를 알아보며 반겼다. 이상혁은 얼굴에 미소를 한껏 띤 채 주위의 둘, 셋과 연거푸 건배하며 인사를 나눈다.
동기들은 연신 이상혁 칭찬뿐이다. 유명해서 부럽다, 그런데도 겸손하다, 앞으로 잘 이끌어 달라는 식의 농담 섞인 말을 하면서.
'벌써 사장이라도 된 거야?'
잘난 놈한테 으레 던질 수도 있는 농담이 오늘따라 비굴해 보인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거슬리는 건···.
누군가 말을 걸어올 때마다 아주 잠시 찌푸려지는 그의 미간. 미소 뒤에 숨겨진 찰나의 표정.
아무래도 다들 취기 때문인지 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불쾌하다는 표정인데···.'
뭐 내가 잘못 보는 걸 수도 있겠지 싶기도?
이상혁은 몇 차례나 이어진 인사를 마치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를 다시 똑바로 바라봤다.
"민성 씨 대단하던데요?"
"네?"
"여태까지 해 왔던 거 좀 들춰 봤어요."
"들춰 봤다고요?"
"네. 말한 대로요. 궁금해서 나름 찾아봤어요."
이상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을 잇는다.
"신투 GPS 알아요?"
"알죠."
GPS. 글로벌 퍼포먼스 시스템 (Global Performance System). 신투 내 개인 성과를 보여 주는 전산 시스템이다.
업데이트도 더디고, 속도도 느려서 회사 내에서 욕만 왕창 먹는 시스템인데. 그걸 찾아봤다 이거지?
"처음엔 시스템이 잘못된 줄 알았어요."
"···."
"민성 씨 실적 오류인 줄 알았거든요. 하필이면 처음 찾은 이름이 민성 씨라서."
"제 이름을··· 처음으로 찾았다고요?"
"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궁금해하는 내 모습이 재밌다는 듯 이상혁이 씩 웃는다.
"민성 씨 이름 왜 찾아봤냐는 거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저기, 상혁 씨."
"네?"
"미국에서 유학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요?"
이상혁의 눈썹이 올라갔다.
"미국에서는 보통 두괄식으로 결론부터 얘기하지 않나요? 하시는 말이 죄다 결론이 뒤에 있어서 답답해서요."
"하하···."
내 말을 듣고 웃는 이상혁.
올라간 입꼬리에 비해 움직임이 없는 눈. 입만 웃고 있는 전형적인 가짜 웃음이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에서 등장하는 악역들이 짓는 웃음처럼.
"그래서 하필 왜 제 이름을 먼저 찾아봤는데요?"
"제가 욕심이 조금 많아서요."
"누구한테라도 성과로 뒤처지기 싫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또 결론을 뒤로 빼시네요. 습관인가 봐요?"
"하하, 그러게요. 그럼 직설적으로 말할게요."
"···."
"조창훈 전무님한테 말씀드렸어요. 이 과제 끝나고 최종 배치받고 싶은 팀이 있다고."
이상혁은 잔을 들어 바닥에 남아 있는 맥주를 마저 마셨다. 그리고 나를 향해 빈 잔을 비스듬히 치켜들며 말했다.
"해외 자산 운용팀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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