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교육
오후 한 시. 12층에 위치한 중형 세미나실.
매주 신입사원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쓰는 공간이다.
매주 수요일마다 이곳에 서른한 명의 신입사원들이 모여 직업윤리나 업무에 필요한 교육, 혹은 시장 동향에 대해 배운다.
정규직이건 계약직이건 현재 신입사원들이 속한 부서는 어디까지나 임시배정 부서다.
정규직 신입사원들은 부서 최종배정에, 계약직 신입사원들은 정규직 전환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부서 최종배정과 정규직 전환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임시배정 부서에서의 인사 평가.
그래서 신입사원들은 수요일마다 갖은 핑계를 대며 교육을 빠지곤 했다.
어차피 이 세미나실에서 머리 싸매고 교육을 들어봤자, 부서 내 과장이나 부장한테 칭찬 한 번 더 나오게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니까.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다들 자리에 착석해 주세요."
보통 같으면 제시간에 맞춰 오는 사람이 드물지만, 오늘은 시작 십오 분 전부터 모두 도착해있다.
앳된 얼굴의 신입사원들뿐만 아니라 머리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부장급들도 포함해서.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무님."
"이쪽으로 앉으시죠."
"전무님, 식사는 잘 하셨어요?"
문 쪽에서 입장하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남자.
바로 신서투자증권 내 권력의 정점 조창훈 전무다.
각 팀에서 큰소리 뻥뻥 치던 팀장들도 조 전무 앞에서는 그저 굽신굽신하기 바쁘다.
웬만한 인사에는 시크하게 고개만 까딱거리는 조창훈 전무. 호리호리하면서도 큰 키 때문인지 그 위압감이 배로 더해진다.
저 사람을 직접 본 건 입사 첫날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때를 제외하고는 이번이 유일하다.
전무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참관하는 행사니까, 각 팀 팀장들이 이렇게 기를 쓰고 신입사원들을 들들 볶으며 발표 준비를 시킨 것이고.
"전무님, 오셨습니까?"
"응 박 팀장. 보고는 잘 받았어. 이따 끝나고 얘기하자고."
"네, 감사합니다."
조창훈 전무가 세미나실에 들어와서 처음 말을 섞은 대상은 해외자산운용부 박창섭 팀장.
'저 정도는 되어야 말이라도 붙여볼 수 있는 거구나.'
저 박창섭 팀장을 상대로 경쟁을 할 수 있는 최민호 팀장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물론,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나한테 개새끼인 것은 변함없지만.
"흠 흠."
"아,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조창훈 전무가 자리에 앉아 헛기침하자 단상 앞에 있던 인사과 박택진 대리가 마이크를 툭툭 치며 시선을 모았다.
"안녕하세요. 바쁘신 와중에 참석해 주셔서 다들 감사드립니다. 장 중이라 각 팀 팀장님들 참여하시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서론은 최대한 짧게 하고 바로 본 순서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박 대리는 조 전무를 비롯한 임직원들을 한번 훑어보더니 말을 계속했다.
"오늘부터 3주간 진행되는 각 부서 발표는 이 자리에도 참석해 주신 조창훈 전무님께서 올해부터 직접 주관하시는 새 프로그램입니다."
"우리 신서투자증권이 가진 내부의 다양한 문제점들을 신입사원들이 직접 찾아내고, 새로운 관점으로 해결해 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이 발표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조창훈 전무님의 말씀을 잠시 듣겠습니다."
박 대리의 멘트 이후 조창훈 전무가 단상 위로 걸어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내가 나이가 들고 보니까 말이야, 생각이 많아져."
"결재할 것도 많아지고,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아지고. 또 무슨 사건 사고는 그렇게 많이 터지는지 아주 골치가 아프단 말이지."
조창훈 전무는 잠시 말을 끊고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신입사원 시절이 그립더라고."
"뭐 그때가 좋았다, 너네 열심히 해라, 이런 말이 아니고. 그때는 내가 생각할 것이 그냥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밖에 없었거든."
"그냥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으니까. 다른 잡생각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 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고."
그는 앞쪽 벽면을 가득 채운 전광판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 전광판 보이지? 저기에 온갖 종목들 주가가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우리 같은 금융쟁이들이 하루를 끝마치고 기억하는 유일한 게 뭔지 알아?"
아무런 대답이 없자 조 전무는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최민호 팀장을 넌지시 바라봤다.
"제일 많이 오른 종목과 제일 많이 떨어진 종목입니다!"
"그래 맞아. 일등과 꼴찌다."
조 전무는 최민호 팀장의 대답이 흡족한 듯 보인다.
"누가 아무리 잘나 봤자 사람들 기억에 남는 건 딱 둘이야. 일등, 아니면 꼴찌."
"그런데 우리가 꼴찌를 할 수는 없잖아? 그럼 어떡해야겠어. 일등을 계속해야지. 잊혀지기 싫으면 말이야."
"그런데 나 같은 늙다리가 계속 회사를 경영하면 문제를 볼 수가 없어. 그래서 신입사원들한테 나오는 젊은 생각을 좀 듣고 싶어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 본 거니까, 최선을 다해서 해 보라고."
조 전무가 멘트를 마무리하자 박 대리가 다시 단상 위로 올라와 발표 순서를 공지했다.
첫 발표는 전환사채사업부, 두 번째 발표는 외환 팀,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발표가 바로 국내주식운용부의 이기석.
십오 분씩 할당된 발표. 첫 주자의 발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최민호 팀장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는 이기석을 슬쩍 쳐다보니 잔뜩 긴장한 얼굴이다.
평소 능글맞은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발표 준비용 노트를 손에 쥐고 덜덜 떠는 모습이 처량하기까지 하다.
"···이상으로 저희 발표를 마칩니다."
이윽고 두 번째 발표자의 발표도 거의 끝나 가자 이기석이 앞으로 나설 준비를 한다.
그와 동시에 나도 준비를 했다.
핸드폰을 꺼내 오른손에 들었다.
화면을 터치하니 미리 로딩해 둔 Number 어플이 나타났다. 바꾸고 싶은 숫자를 선택했다.
"안녕하세요. 최민호 팀장님의 국내주식운용부 신입사원 이기석입니다."
티가 날 정도로 떨리는 이기석의 목소리. 그런 이기석을 쳐다보는 최민호 팀장의 표정이 불안해 보인다.
조 전무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발표를 망치기라도 할까 걱정스러운 듯싶다.
자신이 진행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새파란 신입사원이 진행하는 발표라고는 해도, 신경 많이 쓰라고 위에서 지침이 내려왔으니 걱정이 아예 안 될 수는 없겠지.
"슬라이드 보시면서 오늘 제가 발표할 주제 바로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이기석이 발표 자료 화면을 넘기는 와중 슬쩍 무언가를 곁눈질한다.
이기석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지 않았다면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미묘했다.
이기석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역시나.
아까 조 전무가 단상에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바로 그 주가 알림 전광판.
이렇게 중요한 발표 자리에서 이기석이 저 전광판에 정신을 잠시 뺏긴 이유?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알 것 같다.
바로 저것 때문이겠지.
[유진테크놀로지 : 6,450원 (+29.7%)]
'햐, 참. 이 새끼.'
그래. 이 정도면 확실해졌다. 이기석 저놈 백 퍼센트 프론트 러닝에 발 담갔다.
아무리 노련한 사람도 마음속 깊은 곳 무의식을 컨트롤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잔뜩 긴장한 이기석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중요한 순간에 곁눈질로 주가를 확인해? 그것도 하필 유진테크놀로지 주가를?
내 가설은 조금 전까지 일말의 의심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의심이 아닌 확신이다.
그와 동시에 여태까지 최민호 팀장과 이기석 때문에 했던 마음고생이 주마등처럼 생각났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지만 고개를 살짝 저으며, 의식적으로 생각을 비우려 노력했다.
침착과 냉정. 그리고 계획의 실행. 내게 필요한 전부다.
'감상에 젖지 말자. 일단 계획한 일부터···.'
내 계획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타이밍.
"제가 발견한 문제점은, 바로 지나치게 노후화된 리스크 결산 시스템입니다···"
이기석이 운을 떼며 무의식적으로 전광판에 다시 시선을 가져간 찰나.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슬쩍 넣고 화면을 터치한다.
[정말 이 숫자를 선택하시겠습니까? 한 번 선택하면 변경이나 취소가 불가능합니다]
-Yes
화악-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 화면이 밝아진다.
「Number :
숫자 변경 잔여 횟수 : 0회
고객님의 인생 역전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이기석은 말을 멈췄다. 전광판을 쳐다본 채로.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말 그대로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응? 쟤 왜 저래?"
"뭐하는 거지?"
세미나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이다.
이기석이 몇 초 동안이나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딘가를 멍하니 쳐다보자 그제야 이기석이 쳐다보는 대상을 눈치챈 사람들은 그의 시선을 좇아 주가 알림 전광판을 본다.
[유진테크놀로지 : 3,480원 (-29.9%)]
[속보 – 유진테크놀로지 안양 생산공장 대형 화재. 생산 설비 심각한 파손 우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내가 뭘 했냐고?
그저 주가의 앞자리를 6에서 3으로 바꾼 것뿐이다.
사실 이기석이 진짜로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거나, 발표에 집중했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놈은 범죄를 저질렀고, 발표 도중 한눈을 팔았으며, 그리고 조창훈 전무가 직접 주관하는 신입사원 프레젠테이션 도중에 얼어붙었다.
'실시간으로 돈이 타버리고 있으니까 발표가 눈에 들어오겠어?'
"흠···."
조창훈 전무가 인상을 찌푸리자 최민호 팀장의 표정도 굳어진다.
'유진테크 주식에 들어있는 최민호 팀장의 돈도 이기석의 돈 만큼이나 활활 잘 타고 있을 텐데···.'
그 와중에도 저 정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팀장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 우연은 아니구나 싶다.
몇억은 증발했을 텐데 돈 보다 바로 옆의 전무 심기를 더 걱정한 다라···. 저건 예상 밖인데?
"자네는 발표를 할 생각이 없는 건가?"
"아, 아닙니다! 그게···."
"됐네. 내가 시간이 넘쳐서 여기 온 것도 아니고."
사형선고.
조창훈 전무의 말을 듣고 이기석은 완전히 정신줄을 놓은 듯했다.
'그래, 사회생활 없는 신입사원이 여기서 멘탈 부여잡고 잘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조창훈 전무는 이기석이 애초에 왜 당황했는지 모를 테니까 더 어이없을 테고. 이기석을 그저 발표 하나 못하는 얼간이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이기석 고과는 공중분해!
여기까지가 내 계획이었다.
오전에 계획대로 KY운용쪽 자금 들어오면서 유진테크 상한가 간 것 확인해서 이미 알고 있었고, 세미나실에 주가 알림 전광판 있는 것도 알았으니까.
흠, 만약 이기석이 당황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에이 내 알 바야? 그건 솔직히 운이 좀 좋았다. 저놈 그릇이면 이 사단이 날 줄 알았지.
"최 팀장한테 하드 트레이닝 받았다길래 좀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실망스러운데?"
"죄송합니다."
심기가 불편한 것을 대놓고 드러내는 조 전무. 그리고 그 앞에서 어금니 꽉 깨물고 고개를 숙인 최 팀장.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단상에서 내려온 이기석.
여기까지가 미리 세워두었던 내 계획의 끝이다.
그런데··· 분명히 이 이상 내가 계획한 것은 없는데.
이 둘에게 엿 먹이는 와중에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일까? 아니면 내 능력이 주는 무한한 가능성 덕분에 생긴 자신감 때문일까?
머릿속에 즉흥 계획이 하나 떠올랐다.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 아마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엄두도 못 냈을 법한 과감함.
하지만 지금 나는 다르잖아?
'타이밍 좋게 새 정장도 입었고 말이야.'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바로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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