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생명 (7)
내 시선이 향한 곳은 책상 위.
그곳에는 내가 한입 베어 물고 남겨둔 샌드위치가 있었다.
'아까 바스락 소리···.'
최민호 팀장은 분명 회의실을 확인하고 우리 데스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멈췄었지.
아마 지나치다가 그곳에서 샌드위치가 눈에 들어왔을 거다. 바스락 소리는 최민호 팀장이 이걸 들어 올리는 소리였겠고.
먹다 만 샌드위치. 누가 봐도 여기에 조금 전까지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이다.
'아 씨···. 숨으면서 가방 들고 간 것까진 좋았는데.'
머리가 멍해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현장을 들키지 않았다는 정도? 현행범이 아니니 아마 심증은 있고 물증은 없는 상태겠지.
멍해졌던 머리를 두통이 채웠다.
이런 사소한 걸 놓친 나에 대한 자책 때문에.
그리고 백 대리 책상 밑에서 놓인 구두 때문에.
백 대리 발 냄새는 정말 어마무시했다. 숨어 있는 내내 냄새 때문에 힘들었다. 그 고생까지 하면서 내 자취를 숨기려고 노력했는데, 이런 멍청한 실수를 했다니.
'후···. 어쩔 수 없네.'
망연자실해서 얻을 건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
내 장점은 확실하다. 실패를 하도 많이 겪어 봤다는 것. 그래서 그만큼 회복도 빠르다.
정신을 추스르고, 바로 머리를 굴렸다.
최민호 팀장은 내가 그의 계획을 알고 있다는 걸 얼마나 확신할까?
'아마 확신은 없겠지.'
아까도 든 생각이지만 현장에서 잡히지 않았다. 아마 석연찮은 건 있지만 섣부르게 확신은 못 할 거다.
아마 계획을 취소한다거나 하진 않을 거다. 만약에 취소한다고 치면 우리 팀이 제일 먼저 알게 될 거다. 한진 쪽에서 연락이 올 거니까 말이다.
대신 그가 배로 조심할 가능성은 다분하다. 마치 고슴도치를 건드린 형국. 가시를 바짝 세우고 주변을 경계할 것이 뻔하다.
한진의 최종 투자 결정이 있는 다다음 주 수요일. 그 시간 전까지 아마 만전에 만전을 기하겠지.
복잡해지는 마음. 어두운 사무실을 뒤로하고 퇴근길에 올랐다.
**
간밤의 긴장이 무색하게도 지극히 일상적인 하루가 시작되었다.
"민성 씨. 방금 보낸 건 처리했어?"
"네 대리님. 지금 한창 하는 중입니다."
"조건식 매매로 걸어 놔야 하는데."
"알겠습니다. 종목명만 알려주시겠어요?"
"그라함 로지스틱스. 스펠링 불러줄까? G-r-a···."
"아 찾았어요. 감사합니다!"
하 대리의 부탁을 처리하기 위해 시스템 내 종목 검색을 했다.
G를 입력하자 나오는 수많은 종목. 그중 하 대리가 부탁한 '그라함 로지스틱스'보다 먼저 눈에 띄는 종목이 있었다.
[고팡 GoPang]
최근 얼마나 많이 검색되었는지 'G'를 입력하자마자 제일 상단에 나타났다.
'이젠 알파벳 'G'만 봐도 신경이 쓰이네.'
다시 생각해 봐도 고팡은 요상한 종목이다.
엄밀히 말하면 해외자산이지만, 국내에 모회사를 둔 한국 기업. 그래서 우리 팀과 최민호 팀장의 국내주식운용팀이 둘 다 발을 걸친 상태다.
아마 최근 며칠간 양쪽 팀에서 종목 검색을 엄청나게 한 모양이다.
'이게 다가 아니지···.'
[고팡 5.5% 2027 전환사채]
논란의 중심. 원래대로라면 전환사채 팀에서 전담해야 할 고팡의 전환사채.
원칙대로라면 전환사채 팀이 전담해야겠지만, 증권사의 수익우선주의에 입각해 우리 팀과 최민호 팀장의 팀까지 숟가락을 얹은 상황이다. 삼국지가 따로 없다.
고팡을 쳐다보고 있으니 머리가 다시 복잡해졌다. 애써 무시하고 하 대리가 부탁한 종목을 찾아 업무에 집중했다.
"와, 벌써 다 했어? 빠르네."
"확인해 보시겠어요?"
"그래 한번 보자. 어차피 잘했겠지만 그래도 한번 봅시다-"
"네 이 주문은 뭐길래 조건식이 네 개나 달리는 거죠?"
"아, 이거 잘못하면 공매도 처리될 수 있어서 우리가 보유한 수량 이상 팔면 안 되니까."
가격 지정에 거래량 지정, 시간제한, 그리고 연속 주문 방지 조항까지.
쉽지 않은 요구였다. 하지만 이미 시스템을 통달하다시피 한 나에게는 문제가 될 리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미리 승인된 알고리즘으로 처리해야 하는 거야. 종목들 꼭 잊지 말고 다 집어넣어 놓고. 알았지?"
"넵 대리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비슷한 업무를 다섯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잠깐의 짬이 생겼다.
"대리님."
"응?"
"잠깐 커피라도 한잔하실래요?"
"음···. 그럴까?"
"바로 가시죠. 또 언제 바빠질지 모르는데요."
"그래, 그러자. 오늘 아침 왜 이렇게 바쁘냐?"
"스트레칭할 겸 나갔다 오죠."
어제 밤새 고민했다.
'최민호 팀장을 막을 방법이 없을까?'
유진테크놀로지 때처럼 빅엿을 먹일 방법이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번엔 그때와 비교해서 훨씬 더 조심해야 한다. 신서투자증권의 실세 조창훈 전무. 조 전무가 최 팀장을 지지하고 있다.
딱히 조 전무가 최 팀장의 편을 드는 것은 아닐 거다.
단지 그의 입장에서도 최 팀장의 수가 회사에 제일 이익을 가져올 거라 판단한 거겠지. 증권사에서는 누구나 다 욕심에 의해 움직이니까 말이다.
"대리님. 최 팀장이 고팡 물량 못 가져가게 하려면 어떡해야 할까요?"
"어휴, 또 그 얘기야? 주 과장님 말씀 못 들었어?"
카페로 내려가는 길 하 대리에게 슬쩍 물어보니 반응이 격하다.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하, 사실 나도 궁금하긴 해. 일이 어떻게 될지."
"저쪽에서 전환사채 넘기기로 한 가격이 시장가보다 낮아서 문제가 되는 거잖아요."
"그렇지.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현재가 대비 가치 산출이 되는 거니까."
"만약 시장가가 엄청나게 높아지면 어떻게 될까요?"
하 대리는 카페 문을 열며 곰곰이 생각한다.
"글쎄다. 흠···. 당연한 말이지만 일단 손해가 50억보다는 커지겠지? 우리가 팔 수 있는 가격보다 더욱더 싸게 파는 거니까."
"그럼 최 팀장이 떠안아야 할 문제도 더 커지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근데 일단 구두로라도 고객사랑 약속이 된 상태니까 번복하긴 쉽지 않을걸?"
"만약에 시장가가 엄청나게 많이 올라가면요?"
"엄청나게?"
"네. 문제가 너무 커져서 무시 못 할 정도로요."
어젯밤 생각했던 방법 중 하나. 고팡의 전환사채 가격을 올려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투 입장에서는 순식간에 엄청난 수익이 난다. 그리고 최 팀장이 한진에게 넘기기로 한 가격대는 더 이상 가능한 범주가 아닐 것이다.
시장가는 오르는데 최 팀장이 약속한 가격은 변하지 않으니까. 50억 손해가 아니라 100억, 혹은 가격대에 따라 그 이상의 손해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흠 그러면 뭐 당장에 한진으로 넘어갈 물량은 막을 수 있겠네."
"그렇죠?"
"그런데 그게 불가능한 이유가 있어."
"네?"
'불가능한 이유?'
바로 이런 걸 듣고 싶어서 하 대리를 불러낸 거다. 내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하 대리의 꼼꼼한 성격이면, 내가 시나리오를 던져주자마자 이것저것 머리로 재 봤을 테고.
"지금 고팡 공모 경쟁률 봤지?"
"네. 아직 확정도 아닌데 엄청 높죠···."
"맞아. 아마 지금 저 앞에 걸어가는 스님 잡고 물어봐도 고팡 사고 싶다고 할걸?"
하 대리는 앞에서 승복을 입고 걸어가는 스님을 가리키며 말했다.
"현재 전환사채 가격을 결정짓는 제일 중요한 요소는 고팡의 주가란 말이야?"
"네, 그렇죠.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전환사채만 가격이 올라가 버리면 어떻게 되겠어?"
아··· 이거였구나.
"전환사채를 팔고 주식을 사겠네요."
"맞아. 결국 전환사채는 주가를 따라가게 되거든. 그리고 지금 진짜 투자자들이 하나같이 다 고팡 주시하고 있잖아?"
"네."
"그만큼 가격 조정도 빠르다는 거야. 고팡 전환사채 가격 올라가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빠져 버릴걸?"
"그렇군요···."
"급등 뒤에 급락 있다는 말조차도 사치야. 아마 조정 오는데 몇 초도 안 걸릴 거야."
"그렇게나 빨리요?"
"응. 그때 노려서 팔면 딱인데, 뭐 하도 빨라서 우리가 기계가 아닌 이상에야 반응 못 할 거다."
하 대리가 말을 끝내자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우리가 인간 알파고도 아니고."
하 대리는 커피를 받아 먼저 문밖으로 나섰다.
'생각보다 복잡하네···.'
단순히 가격 하나 바꿔서 될 일도 아니다?
나도 하 대리를 따라 카페를 나갔다.
남은 시간은 일주일 반.
**
"야 이거 확실한 거 맞아?"
"대리님은 스시집 예약한 거 확실해요?"
"아 그렇대도!"
하 대리와 고팡에 대해 대화를 나눈 뒤 4일. 그동안 팀 내에서 고팡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 이틀은 혹시나 하고 능력의 사용을 아껴두었다. 그렇지만 계속 능력을 쓰지 않고 묵혀둘 수도 없는 노릇.
때마침 외환 팀 백 대리가 나를 찾길래 오랜만에 바이너리 옵션에 능력을 쓰기로 했다.
"그럼 이거 여기 372불에 배팅하세요."
"진짜? 이 종목을?"
"못 믿으시겠으면 그만두시던가요."
"아, 아냐···. 내가 민성 씨를 못 믿을 리가. 만료 시간은?"
"우리 둘 다 바쁜 사람들인데 시간 없잖아요. 10분짜리로 가죠."
챠르륵-
머릿속에서 지폐 더미를 넘기며 세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건 그야말로···
"야, 돈 넣고 돈 먹기네!"
백 대리 말대로 '돈 넣고 돈 먹기'. 이쯤 되면 마이다스가 부럽지 않다.
"민성 씨는 얼마나 벌었어? 설마 배팅 안 하는 건 아니지?"
"벌 만큼 벌고 있습니다."
[잔액 : 256,270,400원]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내 잔액이다. 개인 계좌에 능력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며 돌린 것이 이 정도.
하지만 백 대리는 모르겠지. 그저 내 도움으로 여태까지 벌어들인 자신의 3천만 원이 대단해 보일 뿐일 거다.
"햐 재주도 좋다니까. 이런 것도 잘 알고."
"백 대리님만 하겠어요?"
"어휴, 그런 소리 말아. 민성 씨는 너무 겸손한 것도 문제야."
백 대리가 친한 척 팔꿈치로 나를 툭 쳤다.
"민성 씨는 돈 벌어서 뭐하고 싶어?"
"글쎄요?"
생각해 본 적 없는 점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최근 들어 머리가 너무 복잡해져서 돈을 쓸 생각도 못 했다.
왠지 능력을 얻고 난 이후 돈 자체에는 오히려 흥미가 떨어진 것 같다. 얼마든지 벌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대리님은 뭐 하실 건데요?"
"아, 이번에 이태리 수제 구두 하나 봐둔 거 있는데 그거나 살까 생각 중이야."
"좋은 생각이네요!"
'제발 이번에는 통풍 잘 되는 거로 사세요 대리님.'
내 공감이 너무 격했는지, 백 대리가 흠칫 놀랐다.
"나도 민성 씨처럼 이런 엄청난 선구안이 있으면 좋겠다."
"선구안은 무슨요. 매번 운이 좋은 거죠."
"그런 소리 말래도? 민성 씨가 단순히 운이 좋은 거면 나는 뭐, 불행의 아이콘이게?"
"하하 그런 뜻은 아니구요."
"나에 비하면 민성 씨는 아예 돈 복사하는 기계야 기계. 그건 운이 아니라고."
후··· 기계라.
문득 며칠 전 하 대리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고팡 전환사채 가격. 어떤 일이 있어 급등하더라도 그 순간을 포착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원가격대로 회귀할 것이 뻔하다.
나도 기계였으면 좋겠다.
···잠깐.
'기계?'
"자 그러면 나는 이만 퇴근 한다."
백 대리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머릿속에 스쳐간 생각.
"대리님."
"응? 왜?"
"내일 점심 스시 먹으러 가죠."
"아, 나 내일 예약 못 했는데?"
"제가 살게요. 예약만 해 주세요."
"으, 응? 민성 씨가? 왜?"
"싫으세요?"
"아니, 아니. 나야 좋지. 친구한테 말해서 예약 잡아 볼게. 갑자기 웬 바람이 들어서?"
"있어요."
'왜냐구요? 내가 고민하던 거 답을 알려줘서 고마워서 그렇죠.'
- 작가의말
오늘도 글 찾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최근 댓글과 추천, 선작해주시는 분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어서 큰 힘이 됩니다.
첫 연재라 더 많은 분들께 보여드리고 싶은 욕심이 계속 생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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