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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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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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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464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22.06.14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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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황혼의 다짐

DUMMY

마왕군 주요 간부들이 모인 사후 대책 회의.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회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린은 자신에게 모인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멸망시켜야 합니다.”


그녀의 얼굴은 주체할 수 없는 짜증과 분노로 그늘이 져 있었고,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우드득, 하고 무서운 소리를 내는 린의 손은 인간의 것에서 늑대의 것으로 바뀌었다 돌아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의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의 상태란 것이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까지 고민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만한 짓을 저지른 나라는 영원히 사라져야합니다.”


그녀의 너무나도 단호한 태도에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용감하게도 이의를 제기한 건 아틀리치니와의 밀약 제안을 제일 처음 가져온 피아넬 비 코르니아스 원장이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린 중장님.”


“뭔가요.”


노기를 띤 린이 서슬 퍼런 기색으로 노려보는 와중에도, 엘드리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해야 할 말을 골랐다.


생물의 감정과 동떨어져있어서 그런 것인지, 그는 회의실에 무겁게 깔린 살기에도 말을 더듬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린이 얼마나 격노하는 중인지를. 그게 얼마나 중대사인지를.


“우리 군이 아틀리치니와 체결한 협정은 전쟁을 일찍 종결시킨다는 것이지, 연방을 멸망시키는게 아닙니다. 그건 중장님께서도 알고 계실터.”


“그럼 코르니아스, 당신은 그놈들을 이대로 그냥 두겠다는 소리인가요?”


린이 빠드득, 하며 이를 갈았다. 그녀가 홧김에 움켜쥔 컵이 푸른 불꽃으로 불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보스의 어머님을 천년이 넘게 제 안위를 위해 부려먹은 나라입니다. 근본부터가 잘못되어 있어, 당장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런 나라가 아직도 서 있다는 게 제 수치입니다.”


정적이 흘렀다.


펜리르가 뿜어내는 살기는 이곳에 모인 마왕군 간부 전원을ㅡ내로라하는 괴물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한 편인 그녀가 이렇게까지 화난 모습을 보이는 건 거의 처음이었기에.


린은 회의실을 둘러보고 자신의 의견에 바로 동의를 표하는 자가 없는 것을 보고는, 혀를 찼다.


“그러면 저 혼자서라도 가겠습니다. 그 땅에 있는 생명은 그 어떤 예외도 없이 몰살할테니, 길어야 닷새정도면 전부 끝내고 돌아올 수 있겠네요.”


린의 그 섬뜩한 말을 허풍이라 생각하는 자는 이 회의실에ㅡ아니, 마왕군 전체를 통틀어 아무도 없다.


펜리르가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연방은 죽음의 땅으로 변할 게 분명했다.


지금이야 인간으로 의태 하였기에 푸른 머리칼의 미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라그나로크를 일으킨 지상 최악의 마수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린이 본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녀의 의사와 관계없이 광활한 대지가 푸른 불꽃에 뒤덮일 것이며, 내딛는 걸음마다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이 타버릴 것이다.


마왕군의 넘버투인 린은 그만큼의 개인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연방에게서 최대한 많은 기술과 물자를 빼앗는다는 방침이 세워질 때까지는, 그녀가 홀로 나서서 최전선을 싹쓸이하는 전략도 고려하고 있었을 정도다.


실제로, 연방군이 단지 짓밟아야 할 적에 불과했다면 린이라는 전력을 보유한 마왕군이 이렇게까지 전쟁을 질질 끌지도 않았다.


린이 연방 전체를 닷새 안에 불태울 수 있다면, 데트르 전역의 연방군을 일망타진하는 건 이틀이면 충분했겠지.


“저도 마왕 각하의 충직한 수족되는 자로서, 정보부장님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왕 각하의 재가가 필요한 안건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분이 직접 승인하신 일이잖습니까.”


피아넬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반대의 소리를 내었다.


파흐 평야에서의 전투가 끝난 후 다른 주요 간부들과 함께 스비엣의 정체를 전해 들은 그가 린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한 것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하지만 피아넬은 어디까지나 절차적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었다. 확실한 군사조직으로 자리매김한 신ㆍ마왕군은 과거의 조잡한 마왕군과는 달리 체계와 절차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린에게, 절차를 운운하는 피아넬은 자신을 가로막는 눈엣가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라는 작자는 끝까지ㅡ”


“린 중장 각하.”


린이 날카로운 어금니를 드러내며 으르렁대려 할 때, 잠자코 침묵을 지키던 스키잔이 손을 올려 이성의 끈을 놓으려던 그녀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부디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저희라고 해서 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주인의 명예를 그 정도로 실추시킨 인간의 나라쯤은 언제라도 불태워도 저는 동의하겠지요. 무려 그 정도의 짓을 한 것이니까요. 만일 공식 토벌대가 형성된다면 누구나 앞다투어 가겠다고 자원할 겁니다.”


스키잔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코르니아스 원장이 말했듯 이건 절차상의 문제입니다.”


바람의 정령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 말을 이어갔다.


“그 인간들과의 밀약은 마왕 각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파기하는 것 또한 각하께서 결정을 내리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희들끼리 그 분의 의사도 묻지도 않고 일을 진행시키는 것은, 아무래도 사료에 맞지 앉다고나 할까요. 월권행위입니다. 군법상 그런 일이 가능한 건 마왕 각하께서 행동불능에 빠졌을때 뿐이고요.”


“···”


린은 분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스키잔이 한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기에, 차마 화를 내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마왕을 제하면 마왕군에서 제일 지위가 높다. 만일 마왕이 직접 관여한 일이 아니라면, 아무도 감히 그녀의 연방행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알고 있지만.”


아틀리치니와의 밀약을 깨버리고 싶은 린이 당장 마왕 본인의 의사를 묻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생각할 게 있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분개한 마왕군이 연방에 무차별 공격을 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마왕군은 잘 훈련된 조직으로, 절대 조금이라도 주인의 뜻을 거스르는 짓을 하지 않았다.


이 압도적인 군사력ㆍ경제력을 가진 조직은 끝까지 주인의 말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는 맹견인 것이다.


“누님···”


“외람되지만, 제 소견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가름이 뭐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레야가 곰방대를 내려놓고 조용히 손을 들었다.


“마왕님께서 아직 결정을 내리시지 않았다고 해도, 저희들의 입장을 확실히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편이 마왕님께서 최종 결론을 내리는데 수월하시겠지요.”


하이엘프의 장로이자, 대사의 자격으로 마왕군에 머무르고 있는 그녀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냈다.


“우선 나라 전체를 멸하지는 않더라도,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스비엣 님은 연방의 탄생부터 현 시점까지 국가기밀로 관리되었다고 들었으니, 분명 그 오랜 기간동안 그녀를 속박해온 관리직이 존재하겠지요.”


“밀약을 깨지 않는 선에서, 죄인을 벌하겠다는 거네요.”


카니앗이 더하자, 레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그ㆍ시피아 소령. 린 중장님께서 강조하신 대로 이건 차마 없던 일로 넘길 수 없을 정도의 큰 원죄입니다. 우리 전원이 마왕님을 따르는 이상, 그분에 대한 모욕은 우리에 대한 모욕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음, 관련된 인간놈들을 추려내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겠나?”


마왕군 제2사단장ㅡ류라이스 엘로이가 레야와 카니앗의 제안에 의문을 제기했다. 자신에게 모두의 이목이 모이자, 그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최종 허가만 떨어진다면, 에 한해서지만 사실 저는 린 중장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듣자하니 연방은 레윤케와 별다를 것 없는, 전략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들었으니 말입니다.”


거구의 하이오크는 콧김을 뿜었다.


연방처럼 거대한 나라의 운명이 이 회의실 하나에서 결정되려 하는 사실을 알면, 연방의 인간들은 졸도해버릴지도 모르겠지.


실제로, 그만한 대국을 꺾는 데는 주위 나라들의 연합으로도 부족할 정도니까.


하지만 이 회의실은 마왕군의 것. 나라 하나쯤이 이곳에서 미래를 잃어버리는 일은 흔했다.


“나도 그 의견에는 찬성합니다, 엘로이 사단장님. 걱정 없이 밀어버리는 편이 후환을 남기지 않아 좋겠지요...”


류드라이 군수부장이 쉬익거리며 류라이스 엘로이의 말에 동조했다.


“피아넬, 네놈은 단지 살아있는 실험체를 더 얻으려는 수작 아닌가?”


고개를 살짝 돌린 바실리스크는 평소 사이가 안 좋은 피아넬에 냉소적으로 일갈했다.


“흥, 당신다운 상상력입니다. 그런 당신에게는 아쉬운 일이겠지만, 피험체는 이미 충분히 넘쳐납니다.”


피아넬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끝없는 혼돈만이 존재하는 두건 아래에서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한데 섞인 것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결국엔 마왕 각하께서 결정하셔야할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인간들의 나라가 어떻게 돼든 상관 없습니다. 그들의 기술에는 조금 흥미가 동하지만, 기술만 빼온다면야 문제는 없겠죠.”


피아넬이 말하곤, 린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중장님께 노여움을 사 면목이 없습니다. 허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과, 쌓인 빚을 청산하는 건 별개의 일입니다. 저는 어떤 결과가 되었든, 마왕 각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 그래요.”


완전히 분노가 사그라지지는 않았지만, 린도 이들이 생각하는 게 자신과 별다르지 않다는 걸 직시할 정도로는 차분함을 되찾았다.


한때는 긴장된 얼굴들을 하고 있던 다른 간부들도 린이 절차를 무시한 행동에 나서려고 했던 것을 질책하지는 않았다.


린이 화를 내는 건 그만큼 마왕을 생각해서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늑대가 마침내 수긍하는 걸 본 스키잔은 서둘러 화제를 넘겼다.


“그러면 그 안건은 마왕 각하가 돌아오시는대로 결정하도록 하고, 바로 이어서 연방군의 쿠테타 소식입니다. 쿠테타 세력은 데트르에 체류중인 군 상층부을 순조롭게 제거했다고 합니다. 연방군은 의외로 순순히 순응하고 있어서 통솔에 대한 문제점은 별로 없을 것ㅡ”



◆ ◆ ◆ ◆ ◆ ◆ ◆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푸른 들판.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점차 저물어가는, 황혼에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언덕 위 커다란 고목 밑에 누워있던 나는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에 눈을 떴다.


검은 머리칼. 한 쌍의 늑대 귀. 비스듬하게 짊어진 대검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이쪽을 바라보는 건 시이나 렌.


지금은 아득하게 느껴지는 이세계 첫날에 우연히 만나, 지금은 어느덧 내 곁에 있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웨어울프 소녀다.


나의 시작과, 어쩌면 마지막을 함께할지도 모르는 또 한 마리의 늑대.


“잠시, 옛 생각을 하고 있었어.”


시이나가 뭔가 물어보고 싶은 눈치인 것을 본 내가 먼저 설명했다.


여긴 제국의 남부에 있는,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언덕.


제국정벌 후 시찰하던 중 발견한 이곳은 내가 기억하는 그 풍경과 제일 흡사했기에, 언젠가 비슷한 집을 지어야지 하고 눈여겨보았던 장소다.


“그때도ㅡ저번 세계에서도 이렇게 무덤을 만들어드렸지. 어머니는 언제나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을 제일 좋아하셨으니까.”


“... 그렇구나.”


시이나는 내 옆에 털썩 앉아, 밑으로 내려가는 능선을, 그 푸른 자연의 포근함을 눈에 담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포근해지는 장소야. 이런 곳에 집이 있었던 류셀이 부러운걸.”


“원본은 이미 다 타버리고 잿더미가 되었지만 말이지.”


시이나의 얼굴이 금방 어두워진 걸 본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일부러 우울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내 과거사는 암울하다는 걸 깜박한 모양이다.


“... 있지, 다들 너를 엄청 걱정하고 있어. 린 씨는 몇번이고 물어보더라고.”


시이나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제부터 어떡할 거야?”


언제나 자신 있게 무어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나는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시이나의 그건 지당한 질문이다. 단지 류셀 블레이크가 아닌 칠흑의 마왕은 모두의 위에 군림하고 명령하는 자로서, 그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있다.


나는 어쩌면 그런 의무에서 도망치듯 이런 곳까지 흘러온 걸지도 몰랐다.


아마 두려운 것이리라. 내가 이제부터 마주해야 할 적이 나의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몇 개의 나라를 멸망시켜도, 아무리 군의 세력을 늘려도, 신까지 위협하는 강대한 힘을 얻어도 결국 내 기원은 하나임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작은 몸집에는 어울리지 않는 권총을 쥐고 그 불타는 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연약한 아이인 것이다.


“그 운명의 밤으로부터, 나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거야, 시이나.”


나는 가슴에 품고 있던 말을 토해냈다.


“그러고보니 네가 이런 질문을 한적이 있었지. 왜 이렇게까지 충실하게 마왕을 연기하느냐고. 내 목적이 뭐냐고.”


그 질문을 받고,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파멸'을 바라고 있다고.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아마 그 답은 정답에 근접해있을 것이다.


“불합리성의 굴레는 다른 세계라고 해도 벗어나지 못해. 나에게 있었던 불행은 나 하나로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피해자를 만들어내지. 너도 잘 알고 있는 일이야.”


처음에는 단지 내가 운이 나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불행을 위에서 관람하듯 내려다보는 놈들이 있다는 걸 안 후에는, 내가 어렸을 적 내린 답이 놀라울 정도로 진실에 근접해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만 것이다.


“내가 잘못된게 아니야. 세계가 잘못된 거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는 종지부를 찍어야, 나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아.”


나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알고 있을 터였지만, 이번 일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세계를 움직이는 놈들은 오로지 악의에 차 있는 거라고. 그딴 놈들이 아니라, 세계의 주민이 알아서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그런 세계가 내가 그리는 이상향인 거겠지.”


뜯어고치지 않으면 이따위로 돌아갈수밖에 없는 세계를 고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며, 나는손에 잡히는 풀을 꽉 움켜쥐었다.


“파멸만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어. 그러기엔 그 놈들까지 닿을 힘이 필요한 거야. 아마 천계 놈들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 이 수많은 세계들을 관장하는, 그보다 위에 있는 것에 대해서.”


“류셀의 어머님을 일찍이 이 세계로 보낸 놈들 말이네.”


시이나가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전생자라는 사실은 린을 포함한 주요 마왕군 간부들만 알고 있었지만, 이번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 시이나에게는 해당 배경이 전해졌다.


원래 내가 비밀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어선지 시이나는 별로 놀라지도 않는 얼굴이라 굳이 숨겨야 했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


다른 세계가ㅡ아니, 무수히 많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말을 들으면 의심할 법도 한데, 이 순수한 웨어울프는 내가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이유로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전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류셀이 하는 이야기에 동의할 수 있어. 우리의 삶을 그런 식으로 조종하는 놈들은 한 대 날려주지 않으면 화나니까.”


시이나가 자신의 가슴에 왼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묻고 싶어, 류셀.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파멸은... 류셀 본인도 포함인거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는 내 속내를 들킨 기분이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이나가 얼굴을 들어 나를 똑바로 보았다. 온갖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흘러넘치는 그 모습은 마치 내가 잃어버린 것들의 거울상을 보는 것 같았다.


“류셀. 항상 느낀 건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줬으면 좋겠어.”


시이나는 또박또박, 자신의 뜻이 곡해되지 않게 주의하며 고했다.


“류셀은 망설임이 없는 것처럼 달리면서도, 동시에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멈춰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 확실하게 짚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에 모순이 있어.”


나는 차마 그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시이나의 눈에 비친 내 눈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 실망했나. 나라는 남자가 겨우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놈이라.”


“아니, 전혀. 류셀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한다니까.”


내가 자책하자, 시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네 모습 중 하나니까 싫지 않아. 오히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뻐. 내가 네게 의지한 만큼, 나도 그대로 돌려주고 싶으니까.”


시이나는 살짝 홍조를 띤 채, 자세를 바르게 하고 말을 이어갔다.


“류셀이 마음을 오래전에 잃어버렸다면, 내가 류셀의 마음이 되어줄게. 그리고 지금은 내가 아무런 위로도 되어주지 못하지만,”


그녀는 내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이렇게 같이 있어주는거라면 할 수 있어. 류셀이 용기를 찾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 이제는 네가 바라보는 곳이 무엇인지 나도 볼 수 있으니까.”


진지하게 빛나는 시이나의 눈을 바라보던 나는 겸연쩍게 웃었다.


“시이나, 너는... 꽤 이런 일에 익숙한 것 같군.”


“이런일?”


“실의에 빠진 한심한 놈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이런 일 말이다.”


“그러네...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으려나.”


맞잡은 손으로 내 손등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며 그렇게 말하는 시이나의 얼굴은 좀 쓸쓸해 보였다.


“시이나, 내가 할 수 있는 건가.”


언덕을 붉은 빛으로 밝히는 노을을 보며,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에도 내가 해야할 일이 뭔지를 똑똑히 알면서도, 직접 마무리를 짓지 못했어. 내가 두려워하는 그런 최악의 상황이 또 온다면ㅡ과거를 다시 마주해야한다면, 나는 제대로 행동할 수 있을까.”


내가 암시하는 바를 깨닫고, 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류셀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분명 해낼 수 있을 거야.”


“말은 쉽지, 무슨 근거로 그런ㅡ”


반론하려던 나는 말문이 막혔다.


시이나가 고개를 가까이 가져다 대, 자신의 입술로 나의 입술을 막은 것이다.


입술은 상상 이상으로 부드럽고, 내 가슴에 밀착한 한 쌍의 가슴은 포근했다.


이 녀석, 이렇게 여자다운 몸을 가지고 있었구나ㅡ생각해버릴 정도였다.


매일매일 옥신각신하며 친구같이 지냈기에 여태 알아채지 못했던 것인가, 나를 꼭 안고 있는 두 손이 기특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입술을 뗀 시이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이었다.


“이걸로 답이 됐으려나?”


“... 멋진 답이군.”


시이나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입술을 닦으며, 내가 멋쩍게 말했다.


“그럼 됐어. 류셀이 껴안은 문제는 류셀만의 것이 아니니까, 그걸 전하고 싶었어. 모두들 네가 좋아서 이만큼이나 모인거라구.”


“솔직히 내게는 과분한 존경과 사랑이라 생각하고 있다만.”


“아니, 전혀 과분하지 않은걸.”


겸연쩍게 말하는 내게, 시이나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아는 류셀은 무슨 일에도 기죽지 않고, 꼭 답을 찾아내는 믿음직한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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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천사와 대척점에 선 것은 +2 23.06.18 75 3 15쪽
259 기술의 진보는 곧 살육의 진보 +3 23.06.10 70 3 16쪽
258 포신이 품은 마법 +3 23.05.20 73 3 10쪽
257 피의 무게는 죄의 무게만큼 +3 23.05.18 74 3 11쪽
256 신의 활, 그 시위가 품는 것은 +1 23.05.14 67 3 16쪽
255 매듭을 짓지 않으면 +2 23.05.09 71 3 14쪽
254 공중 요새 +3 23.04.29 74 3 16쪽
253 마도 vs 고유스킬 +5 23.04.05 78 2 15쪽
252 인간 대 인간 +3 23.03.25 88 3 14쪽
251 이빨을 드러낸 어둠 +4 23.03.18 82 3 14쪽
250 예술은 폭발이다 +3 23.03.10 89 3 12쪽
249 전쟁 발발 +2 23.03.02 92 2 13쪽
248 겨울, 온천 +5 23.02.25 79 3 13쪽
247 성전의 전조 +2 23.02.19 93 4 13쪽
246 이스 바실루스 +1 23.02.15 92 3 14쪽
245 레벤 연합의 침공 +1 23.02.11 82 2 14쪽
244 약자의 운명 +1 23.01.28 96 3 16쪽
243 표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가름) +3 23.01.18 92 3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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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공주의 각오 +1 22.08.15 121 6 17쪽
225 강요되는 선택 +1 22.08.08 108 4 17쪽
224 그 불꽃은 푸른 색을 띠고 있다 +5 22.08.04 109 5 19쪽
223 우펜 요새 +1 22.07.30 115 5 20쪽
222 마왕의 제안 +4 22.07.26 118 4 19쪽
221 인간의 도시에, 인외가 도착하다 +3 22.07.24 116 4 15쪽
220 분열된 왕국 +1 22.07.24 111 4 16쪽
219 새로운 만남은 운명의 방향을 바꾼다 +1 22.07.22 110 5 19쪽
218 칠흑에 맞선 자의 말로 +2 22.07.18 117 4 17쪽
217 어둠에 물들지 않은 빛 +2 22.07.16 111 3 13쪽
216 지나가던 어둠이 발견한 것은 +1 22.07.16 117 4 11쪽
215 다가오는 위기, 혹은 기회 +1 22.07.09 129 5 19쪽
214 칠흑의 선언 +1 22.07.04 116 4 17쪽
213 파멸의 그림 +3 22.06.26 116 3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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