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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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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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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9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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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구원의 손길

DUMMY

시아 폰 발렌슈타인은 이 순간, 자신은 마왕의 것이 되겠다고 말했다.


자이나스의 제1왕녀가 입에 담기엔 너무나도 무거운 발언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권력도, 재보도 없다. 대가로 내어줄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육신과 영혼뿐이었다.


시아는 무너지는 벼랑 끝에서 가느다란 밧줄 하나에 매달려 있었다.


이대로 마도연방국의 원조를 받지 못하게 되면 그녀가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렇기에 남이 보기에 아무리 보잘것없을지라도 쌓아온 모든 것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었다.


시아는 조심스레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여전히 옥좌에 앉은 마왕은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그 얼굴에는 시아의 돌발행동에 대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의 협력을 손에 넣고자 하는 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편, 조금 놀란 눈을 한 린이 무어라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여기서 최종 결정을 내리는 건 단 한 사람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두 쌍의 시선이 모인 것을 깨달은 마왕은 난처한 것처럼 미간을 좁히더니, 한숨을 쉬었다.


“ㅡ나는 분명 각오를 보이라고 했다, 공주.”


상정하고 있었던 것 중 최악의 시나리오. 결국 돌아온 건 원래 들었던 말뿐이었다.


시아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의 몸에 눈이 돌아갈 귀족이라면 얼마든지 있었지만, 이 마왕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시아의 영원한 종속 또한 그의 관심 분야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마왕은 여전히 시아의 각오를 물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그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이후의 미래는 없다.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시아는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도 잊은 채, 머리 한구석에 묻어두고 있었던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타인이 자신의 진심을 시험하는 거라면 이것보다 효과적인 게 없을 것이다.


그녀가 가지런하게 벗어놓은 옷가지에서 꺼낸 건 날이 시퍼렇게 든 단검.


어전에서 무기를 꺼낸 시점에서 제지당할 수도 있었지만, 마왕은 물론이고 린도 그녀가 꺼낸 단검에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 정도의 실력자라면 이 정도 단검을 든 자신이 위협 축에도 들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이다. 분하지만 피아의 전력 차는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시아는 단검을 들어 올리고, 그걸 그대로 자신의 목에 겨누었다.


목숨을 버려서 자신의 뜻을 보인다는 건 설화에나 등장하는 방법이다.


자신의 목숨과 신념.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언제나 후자를 택할 시아에게는 모든 선택을 소진한 끝에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이기도 했다.


조금 과격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걸로 자신의 각오를 마왕에게 증명할 수 있다면ㅡ조국을 구할 수 있다면 이 한목숨 아깝지 않다.


크게 심호흡을 한 시아는 마왕과 시선을 맞추었다. 자신의 뜻에 한점 거짓이 없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이게... 제 각오입니다...!”


정해졌으면 망설일 필요는 없다. 시아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꿰뚫을 생각으로 자신의 목에 단검을 있는 힘껏 찔렀다.


자신의 진심은 마지막에 그에게 닿았을까.


잠깐의 고통, 그리고 뜨거운 피와 차가운 죽음이 찾아올 것을 머릿속에 그리며, 시아는 영원한 어둠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살며시 눈을 뜬 시아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었던 단검이 어느새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 분명 힘껏 찔렀을 텐데ㅡ으와!”


자신의 바로 옆에 서 있는 마왕을 발견하고 시아는 놀라서 자빠질뻔했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했다.


도대체 언제 가져간 것인지, 마왕은 시아의 단검을 들고 있었다.


“그정도면 됐다. 네 승리다, 시아.”


그는 왜인지 모르게 평소보다 살갑게 느껴지는 눈으로 시아를 불렀다.


마왕이 자신의 각오를 인정한 것보다도 자신을 드디어 이름으로 불러준 것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 자신의 머리가 이상해진 탓이겠지.


“가ㅡ감사합니다, 마왕 폐하!”


시아는 곧바로 무릎을 꿇으려 했지만, 류셀이 손을 얹어 그녀를 제지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려는 그 모습ㅡ올곧게 나아가는 의지를 똑똑히 보았다. 의지라는 것은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제2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이지. 그렇기에 나는 너를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하겠다.”


알몸인 상태에서 연인도 아닌 남자의 손이 얹어진다는 건 기분이 나쁠 일이어야 할 테지만, 시아는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따스함을 느꼈다.

좀 더 이렇게 살을 맞대고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할 즈음, 류셀의 검지에서 피어나온 어두운 안개가 시아의 알몸을 감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아의 몸을 측정하듯 어루만지던 안개는 그대로 흩어져 없어지는 대신 무언가 다른 재질로 바뀌었고, 어느새 부드러운 천으로 이루어진 의복이 완성되었다.


“이건...”


자신이 새로운 옷을 입었다는 걸 깨달은 시아는 팔과 다리를 움직여보았다.


짧은 셔츠 위에 가벼워 보이는 재킷, 그리고 짧은 바지와 신발까지 한 세트인 모양이었다.


마왕이 만들어낸 마법의 옷은 그녀가 원래 입는 것보다도 훨씬 움직이기 편하고, 마감도 완벽했다.


왕국의 의류와는 조금 다른 디자인도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지만, 무엇보다 마왕이 즐겨 입는 옷과 같은 색이라는 게 좋았다.


한편, 류셀은 시아가 이리저리 의복을 살펴보는 걸 바라보았다.


“내가 너를 인정한 이상, 이대로 알몸으로 내버려 둘 수는 없겠지. 어떤가, 마음에 드나?”


“물론입니다, 마왕 폐하.”


“그건 일종의 갑옷제작 마법을 응용해서 만든 것인데, 3급 공격 마법까지는 내구도에 지장이 가지 않는 상태로 막을 수 있고 그 이상의 공격을 받아도 1회까지 데미지를 무효화할 수 있다. 사용자를 위한 이런저런 버프 마법이 있긴 하지만, 그리 대단한 건 아니니 원한다면 나중에 손봐주지.”


“그, 그 정도로 대단한 걸 제가 받아도 되는지...”


시아는 매우 황송해 고개를 숙였다.


미리 만들어둔 의복에 마법을 각인시키는 거라면 모를까, 마법 그 자체만으로 의복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정작 이걸 만든 장본인은 대단할 게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상급 공격 마법을 막을 수 있다는 그의 설명대로라면 오랜 역사 동안 전해 내려오는 자이나스의 국보보다 훨씬 귀중한 마법 아티팩트인 모양이니 자신 따위가 함부로 걸쳐도 되나 싶었다.


자이나스의 국보 중 하나인 황금갑옷조차 7급 마법을 하루에 세 번 막아내는 것이 한계인 물건이니까.


“죄송합니다. 지금 저희 왕가는 재정이 좋지 않아 이 정도의 아티팩트에 대한 사례금은 없는지라...”


당장 벗으라고 하면 벗을 각오로 조마조마하며 시아가 류셀을 바라보자,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례할 필요는 없다. 그 아름다운 몸을 또 보여주는 것에 불만은 없지만, 이미 네 치수로 만들었으니 잘 입어주면 고맙겠군.”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의 배려에, 아까 시아가 옷을 벗으며 억눌렀던 부끄러움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것에 마왕이 고작 여자의 육체에 동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창피가 합쳐져, 시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그가 자신의 몸을 아름답다고 해준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고나 할까, 부끄러운 것에 변함은 없지만 알몸을 보인 게 그라서 다행이었다.


그런 복잡한 시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류셀은 어깨를 으쓱였다.


“부하들, 그리고 나 자신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시험하는 짓을 해서 미안하군.”


코트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담배를 하나 꼬나물더니, 검지에서 팟ㅡ하고 나온 검은색의 불로 그 끝을 그을렸다.


류셀이 연기를 내뱉자, 신기하게도 진한 과일 향이 났다.


“부하가 개발한 건데 하나 피겠나? 어느 엘프의 나라에 잔뜩 나는 과일을 축출한 거라는데 내 나라에서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평이 아주 좋아.”


저것과 형태는 다르지만 시아도 담배 정도는 펴본 적 있다. 그 쓴맛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로 그만뒀었지만, 과일 맛 담배는 어떨지 궁금해진 시아는 그걸 감사하게 받아들었다.


“네 기분은 잘 알고 있다. 나라가 그 지경인 데다 네 신분을 감안하면 더는 의지할 곳도 없고 벼랑 끝에 몰려 있었겠지.”


시아의 담배에도 불을 붙여준 류셀이 낮게 말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부조리와 마주한 인간은 자신의 무능함에 화가 나고, 그건 곧 절망으로 바뀐다. 한번 그렇게 무너지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 부서져버린 끝에, 인간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리는 거지.”


이렇게나 강한 그가 시아와 같은 상황에 처했던 적이 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지만, 류셀이 말하는 건 마치 그가 직접 겪은 듯 생생했다.


“하지만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네 각오를 보여주었으니까. 그만큼의 의지를 가진 자가 이 세계의 부조리에 유린당하는 것을 잠자코 지켜볼 생각은 없다. 내가 끌어내리려는 것은 부조리의 시스템 그 자체니까.”


그는 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실 인간의 왕족 따위 내가 알 바 아니지만, 너는 자신의 각오를 훌륭하게 증명해주었다. 이제부터는 인간 나라의 공주가 아닌, 나의 친구로 환영하지.”


자신이 들은 말이 잠시 이해가 되지 않아 그 손을 바라보고만 있던 시아.


그녀는 곧 그가 의미하는 것을 깨닫고, 그의 손을 공손히 두 손으로 잡으려다 자신의 한 손에 방금 받은 담배가 있는 것을 깨닫고 우왕좌왕했다.


“아, 저기ㅡ”


“한 손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마왕과 한 손으로 악수를 하는 시아는 감격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칠흑의 마왕ㅡ류셀은 자신을 이해해주고, 더는 이해관계에 얽힌 나라 사이가 아닌, 그녀의 이해자로서 도와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타인의 의무를 진 적은 있어도, 타인이 이렇게 발 벗고 나서서 돕겠다는 건 자이나스 왕국의 제1왕녀로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국왕조차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버림패로 썼으니, 시아가 의지할 곳이 없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


앞길이 위태로운 왕가를 부흥시키고자 짧은 일생을 쉴 틈 없이 동분서주해온 시아 폰 발렌슈타인에게 이렇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은ㅡ아니, 마족은 류셀이 처음인 것이다.


시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저는... 뭐라고 해야 할지...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모든 걸 내려놓고 운 게 언제였던가. 등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진 것 같았다.


부드러운 손이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는 걸 느끼고, 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종속이니 뭐니 네가 꺼냈던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지. 도와주겠다고 한 이상 너를 강제로 묶어둘 생각은 없으니 말이다.”


이어지는 관대한 말에 시아가 숨을 삼켰다.


이만큼이나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공평한 대우를 약속하는 그는 인간이 아니면서도, 어느 인간이나 지향해야 할 모범이었다.


류셀 블레이크. 칠흑의 마왕이자 인류의 최대의 적이라던 그는 지금 이 순간, 시아에게 너무나도 환하게 보였다. 그녀가 따라가야만 하는 운명의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이리라.


시아는 나머지 눈물을 닦으며, 굳게 다짐하듯 말했다.


“허락해주신다면, 저는 제 의지로 마왕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음? 상관없겠지. 나도 네가 마음에 들었고 말이다. 정말로 자기 목숨을 내놓으려 하다니, 해적 때도 그랬지만 인간치고는 꽤 흥미롭군”


류셀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말에, 시아는 그것이 자신이 넘겨짚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의미일 것이라고, 요동치듯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럼 이제 본제로 들어가보는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떤가, 린. 이걸로 불만은 없겠지?”


류셀은 린에게 물었다.


“그럼요, 보스.”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각오는 훌륭했습니다. 보스가 인정한 자를 돕는다고 한다면 더이상 사소한 국익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지요.”


“그래. 우리는 원하는 것만 얻고 떠나가도 상관은 없었다만, 이것으로 이야기가 달라졌다.”


다시 자신의 왕좌에 앉은 류셀은 다리를 꼬며 말했다.


“우리 데트르 마도연방국은 자이나스 왕가가 권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그리고 또 에든 왕국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도록 철저하게 도와주지. 현상황이 일단락된다고 하더라도 향후 제대로 된 독립국으로서의 지위와 우리와의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약속하겠다.”


그 말을 듣는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원래 부탁한 것보다도 파격적인 대우였다. 무서운 것은 이 마왕이라면 앞서 열거한 것을 당장 해내도 놀랍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의 인재가 자이나스에 있었으면 이렇게 무너질 위기에는 처하지 않았을 거라고, 시아는 속으로 되뇌었다.


“조금 성가시지만 에든군의 처리와 도시의 탈취를 동시에 하게 되었군. 그렇게 됐으니 슬슬 귀족 파벌을 자이나스에서 퇴출한다는 선언을 준비해라, 시아. 왕가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 놈들은 전부 숙청시키면 되겠지.”


“왕도에서, 말인가요?”


왕도는 귀족 파벌 산하의 대도시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들이 자이나스의 일부조차 아니라는 선언을 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귀족 파벌들에게 침공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왕도 내부에는 재상도 적지 않은 병력을 갖고 있으니, 위험요소는 너무나도 많았다.


시아는 왕가와 그 관련자들의 신변을 염려해서 물어본 것이지만, 그녀의 불안은 이어진 류셀의 답으로 눈 녹듯 없어졌다.


“걱정할 것 없어. 왕도에는 내 부하를 보내겠다. 이런 종류의 숙청 작업은 전에도 해본 적이 있으니 말이다.”


류셀은 다가올 새로운 전쟁이 무척이나 기대된다는 듯, 즐겁게 말했다.


“귀족들이든, 에든 왕국이든 상관없다. 우리에게 저항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똑똑히 알려주지.”


◆ ◆ ◆ ◆ ◆ ◆ ◆


귀족 파벌의 서열 7위ㅡ자네트 백작의 소유인 케이프 도시는 단순히 크기로 따지자면 자이나스 왕국에서 세 번째로 크다.


국경지대 근처의 이 도시는 보통 이웃 나라에서 방문하는 상인들로 북적이기에 사시사철 소란스러운 것이 당연한 곳이지만, 오늘은 안타깝게도 그 이유가 달랐다.


백작이자 도시장인 자네트 백작이 업무를 보는 저택의 집무실에서는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백작님, 더는 시벽에서 적을 막을 수 없습니다! 위에 올라간 병사들을 대피시키고 내부에서 새롭게 방어선을 짜야 합니다!”


“그것보다 왕도에서 보내온 그 서신은 도대체 뭐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참모의 말을 듣지도 못한 것처럼, 더 큰 목소리로 자네트 백작이 외쳤다.


“귀족 파벌을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적대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썩어빠진 국왕 파벌 놈들은 제정신으로 왕가의 편을 든건가! 재상님께서 이런 폭거를 용납하실 리가 없어!”


“백작님, 지금은 그것보다 에든군을 막아야 합니다. 이대로면 시내까지 뚫립니다!”


“그 빌어먹을 국왕 놈을 끌어내려야해... 왕도 근처의 아군에게 지원군을 보낼 방법을 생각해봐라.”


“하지만 백작님ㅡ”


“시끄럽다!”


자네트 백작은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에든군 정도는 알아서 막아, 이 무능한 새끼야! 나는 큰그림을 보고 있단 말이다!”


시벽에서 병사들이 적의 화살에 맞아 하나둘씩 죽어 쓰러지는 상황에서도, 도시장은 도시를 지킬 궁리를 하기는커녕 파벌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걱정할 뿐이었다.


◆ ◆ ◆ ◆ ◆ ◆ ◆


케이프 도시의 북쪽 문.


평상시라면 상인의 출입을 위해 열려있다시피 한 이곳은 오늘따라 굳게 닫혀있었다.


에든의 병사들이 공성추로 성문을 부수려 하고, 그걸 시벽 위에서 제지하려는 자이나스 병사들이 벌이는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다.


자이나스군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아내려 하지만,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에든군의 물량은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마물들은 그들을 사역하는 에든군 마법사의 명령에 따라 밑으로 화살을 쏘는 자이나스군 궁수들을 물어뜯고, 투석기가 꾸준히 날려 보내는 돌덩이는 시벽을 꾸준히 파괴하고 그 위의 병사들을 짓뭉갰다.


이대로라면 성문이 부서지기 전에 시벽 자체가 무너질 정도의 공세다. 에든군에게 시벽이 함락될 것이라는 건 결국 시간문제였다.


한편, 그로부터 꽤 떨어진 상공에서 그 전투를 바라보는 자가 하나 있었다.


“인간 사이에도 다툼은 끊이지 않는군요.”


비행선의 열린 문 사이로 걸터앉은 여우가 까마득한 아래를 보며 중얼거렸다.


칠흑 같은 군복과 그 허리에 찬 일본도 두 자루로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 그녀는 전투원이다.


특히 이번의 그녀는 에든군 및 케이프 도시의 귀족 파벌을 소탕하기 위해 파견된 병력 중 하나ㅡ아니, 그 말에는 어폐가 있겠지.


그녀는 소탕 병력의 하나이자, 전부였기 때문이다.


고작 한 명의 병력이지만 이 도시를 제압하는 데 있어선 충분했다. 오히려 과잉병력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있을 정도로.


비행선이 그 아비규환의 전장ㅡ시벽 위를 지나갈 때쯤, 쿠도 하루네는 가뿐히 뛰어내렸다.


작가의말

나인데빌님이 지난번 퀴즈 정답을 맞추셨기 때문에 다음 표지 캐릭 선정은 그 분한테서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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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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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금속은 생각보다 무르다 +3 23.07.05 67 3 13쪽
260 천사와 대척점에 선 것은 +2 23.06.18 74 3 15쪽
259 기술의 진보는 곧 살육의 진보 +3 23.06.10 69 3 16쪽
258 포신이 품은 마법 +3 23.05.20 73 3 10쪽
257 피의 무게는 죄의 무게만큼 +3 23.05.18 73 3 11쪽
256 신의 활, 그 시위가 품는 것은 +1 23.05.14 65 3 16쪽
255 매듭을 짓지 않으면 +2 23.05.09 70 3 14쪽
254 공중 요새 +3 23.04.29 73 3 16쪽
253 마도 vs 고유스킬 +5 23.04.05 77 2 15쪽
252 인간 대 인간 +3 23.03.25 86 3 14쪽
251 이빨을 드러낸 어둠 +4 23.03.18 82 3 14쪽
250 예술은 폭발이다 +3 23.03.10 89 3 12쪽
249 전쟁 발발 +2 23.03.02 92 2 13쪽
248 겨울, 온천 +5 23.02.25 79 3 13쪽
247 성전의 전조 +2 23.02.19 93 4 13쪽
246 이스 바실루스 +1 23.02.15 88 3 14쪽
245 레벤 연합의 침공 +1 23.02.11 81 2 14쪽
244 약자의 운명 +1 23.01.28 95 3 16쪽
243 표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가름) +3 23.01.18 92 3 1쪽
242 또 다른 숙청의 시작 +1 23.01.14 96 3 14쪽
241 찬탈의 하겐 +1 23.01.01 101 4 14쪽
240 추악한 진실 +1 22.12.25 111 4 16쪽
239 개혁의 불씨 +1 22.12.10 108 4 15쪽
238 백색 죽음이 깔린 추도식 +1 22.11.20 107 3 14쪽
237 다크엘프와 여우의 진급 +1 22.11.13 101 4 10쪽
236 두 번째 보루의 소실 +1 22.11.13 99 4 10쪽
235 꺾인 십자가, 꺾이지 않는 신념 +1 22.10.31 106 4 12쪽
234 폭살의 르몽 +3 22.10.19 122 4 16쪽
233 의외의 첫인상 +1 22.10.14 113 5 13쪽
232 사절단의 방문 +1 22.10.12 155 3 13쪽
231 짙게 드리우는 전운 +1 22.10.07 121 4 18쪽
230 어둠에 대처하는 자세 +1 22.09.29 116 4 18쪽
229 어둠은 확실하게 무너뜨린다 +2 22.09.15 128 5 18쪽
228 치명적 착각 +1 22.08.27 106 3 17쪽
» 구원의 손길 +4 22.08.19 115 5 18쪽
226 공주의 각오 +1 22.08.15 121 6 17쪽
225 강요되는 선택 +1 22.08.08 108 4 17쪽
224 그 불꽃은 푸른 색을 띠고 있다 +5 22.08.04 109 5 19쪽
223 우펜 요새 +1 22.07.30 115 5 20쪽
222 마왕의 제안 +4 22.07.26 118 4 19쪽
221 인간의 도시에, 인외가 도착하다 +3 22.07.24 115 4 15쪽
220 분열된 왕국 +1 22.07.24 111 4 16쪽
219 새로운 만남은 운명의 방향을 바꾼다 +1 22.07.22 108 5 19쪽
218 칠흑에 맞선 자의 말로 +2 22.07.18 117 4 17쪽
217 어둠에 물들지 않은 빛 +2 22.07.16 110 3 13쪽
216 지나가던 어둠이 발견한 것은 +1 22.07.16 117 4 11쪽
215 다가오는 위기, 혹은 기회 +1 22.07.09 128 5 19쪽
214 칠흑의 선언 +1 22.07.04 115 4 17쪽
213 파멸의 그림 +3 22.06.26 116 3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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