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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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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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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22.07.22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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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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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새로운 만남은 운명의 방향을 바꾼다

DUMMY

“하지만ㅡ부족하군.”


별것 아니라는 어투로, 소년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인간을 절단하고도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코트는 방금의 일이 백일몽인지 의심케 했지만,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풍기는 진한 피 냄새가 이곳에서 벌어진 살육을 증명했다.


그는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흑발 사이, 두려움이 가득한 그 눈을 응시했다.


“뭐, 이 정도면 됐어.”


그가 손을 내젓자, 거의 식사를 마쳐가던 검은 늑대들이 연기로 터져 없어졌다. 그의 그림자로 되돌아간 것이다. 남은 건 살점이 무참히 뜯어먹힌 시체뿐이다.


시아는 이 함선에서 한바탕 벌어진 일을 되짚어보며,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이 소년은 분명 자신을 데트르 마도연방국의 뜻을 결정하는 자라고 칭했다. 그녀는 그렇게 똑똑히 들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정체는ㅡ마왕이다.


전쟁터에서 누구보다 저돌적이라는 평이 나 있는 시아는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럽게 소년의 모습을 살폈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저것이야말로 인류의 존망을 위협하는 적이자, 엄청난 강함을 지닌 초월자.


전에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뿔이 나 있고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괴물 따위, 즉 인간과는 매우 동떨어진 겉모습을 상상했지만, 마왕의 모습은 그녀와 별로 나이 차가 나지 않아 보이는 곱상한 소년이었다.


“린, 마무리됐다. 이제 귀환하지.”


소년은 혼잣말했지만, 아마 통신 마법을 쓰고 있을 거라고 시아는 짐작했다.


부하와 연락하는 것일까.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하늘을 가리켰으니 지금도 저 위에서 마수 같은 것이 비행하고 있을지 모른다.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하늘을 나는 드래곤 따위를 상상하던 시아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저기,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저는.”


그러고 보니 감사와 자기소개가 아직이었다고 떠올린 시아는 일어서며 몸을 추슬렀다.


방금의 전투로 인해 여기저기 뜯어진 옷 때문에 살갗ㅡ특히 싸울 때는 거추장스럽기만 한 큼지막한 가슴이 드러난 게 솔직히 여자로서는 부끄럽지만, 이런 중대사 앞에서 그런 것으로 창피해하고 있을 시아가 아니다.


자신은 분명 뒤에서 칼을 맞았을 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이 수월하게 움직여주어, 상처의 피가 멎은 것뿐만 아니라 아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시아는 입을 열기 전, 잠시 고민했다.


인간의 공주인 그녀는 마족의 왕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종족은 다를지언정, 상대는 왕.


게다가 인간의 공주가 아닌 기사로서의 시아는 방금 목격한 그의 강대한 힘에 경의마저 품고 있었다.


목숨의 은인에게 최대한 존중의 뜻을 보여야 한다고 판단한 그녀는 예절교육에서 배운 최고 예법으로 인사했다.


“저는 시아 폰 발렌슈타인. 자이나스 왕국의 제1왕녀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격렬한 전투 때문에 허벅지, 가슴 등의 일부가 드러난 낯부끄러운 모습이지만 시아의 예법에는 그 지위에 어울리는 고귀함이 느껴졌다.


아니, 오히려 그 아름다운 육체가 공주에게 어울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요 부위가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굳이 가리지 않음으로써 그 육체가 더 돋보인다고나 할까.


제1왕녀라 함은 왕위계승권을 첫 번째로 가진다는 고위 왕족.


그럼에도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소년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가끔 시아가 느끼는, 자신의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귀족이 보이는 음흉한 욕망의 편린도 없다.


그저 무언가를 관찰하듯, 시아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걸 바라보는 시아의 마음도 착잡했다.


한번은 구원받았다고는 하나, 지금도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해적의 시체가 자신의 미래가 아니라고는 결론 지을 수 없었다.


신성국에 선전포고한 나라의 수장이 자이나스 왕국이 자신의 적국과 동맹국이라는 걸 모를 수는 없다.


현 국왕까지도 이어져 오는 신성국과의 관계는 무척이나 오래되었고, 중요한 것이니까.


적국의 공주를 두고, 이 소년ㅡ아니, 마왕은 과연 무슨 처분을 내릴 것인가. 눈 깜짝하지 않고 이만한 인원을 죽인 그는 시아의 목숨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까.


시아는 어쩌면 이대로 살해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지위를 내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거짓으로 이름을 대는 것 따위 그녀의 명예가 용납하지 않을뿐더러, 그녀의 신분은 잿더미가 되어버린 해적이 이미 전부 까발린 덕분에 유효한 선택지도 아니다.


마왕의 입장에서는 그녀를 인질로 잡지 않으면 죽이는 게 정답이겠지.


아까 죽을 각오를 미리 해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소년이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섰다.


시아는 놀라서 헛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인간과 척을 진 마족. 그런 자들을 이끄는 왕이 인간인 데다 적국의 공주이기까지 한 자신을 고깝게 볼 리가 없다.


만약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면 무슨 대우를 받을까. 분명 마족 중에는 인간 여자를 억지로 범하는 것을 즐기는 자도ㅡ


시아는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기에, 소년이 한 얘기는 더욱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 그럼 가라, 이곳에 묶어둘 생각은 없으니.”


“ㅡ네?”


적어도 인질로 잡힐 것을 생각했지만 전혀 딴판의 대답에, 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부러 거짓을 말해 자신의 반응을 떠보는 게 아닐까 했지만 소년은 여전히 그녀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포격의 정확도를 알아보고 싶었을 뿐일 일이다. 그렇게 되었으니 네 나라에는 자력으로 귀환해라. 우리는 조금 서두르고 있어서 말이지.”


그리 말하더니, 소년은 몸을 돌렸다. 그 발밑에 잔잔하게 떠오른 것이 마법진인 것을 보고, 금방이라도 그가 사라질 것을 예감한 시아는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자, 잠시만요!”


“응? 뭔가 할말이라도 있나?”


너무나도 예상외의 반응이라 당황한 걸까, 시아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을 물었다.


“제 신분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가요? 그도 그럴게 자이나스 왕국은, 그...”


“신성국과 동맹국이지. 알고 있다.”


소년이 시원하게 답했다.


“그러면 왜ㅡ”


계속 질문하다 시아의 말문이 저절로 막혔다.


마왕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건 엄청나게 운이 좋은 일이다. 절대 그녀에게 있어서 불이익이 아니다.


시아는 이 자리에서 잠자코 가만히 있다가 구원요청을 하거나 직접 배를 몰아 본국으로 돌아가면 될 일인데, 이렇게 따져 묻는 건 목숨이 몇 개나 있어도 모자랐다.


스스로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어째서 이 마왕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걸까.


혼란에 빠진 시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소년은 흠, 하는 소리를 내고는 대뜸 손을 내밀었다.


“재미있는 여자군. 마음에 들었다.”


시아는 얼떨결에 악수하면서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본래라면 적국의 중요인물을 이렇게 방치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겠지.”


그녀의 의문을 해결해주겠다는 듯, 소년이 설명했다.


“하지만 우리 데트르 마도연방국의 방침상 지금 단계에서 손을 댈 생각은 없다. 아직 확실히 너희들이 신성국에 가담한다는 게 결정나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소년은 시아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극악무도한 마왕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 런가요.”


일단은 수긍하면서도, 시아는 그가 앞서 보여준 전투 실력을 떠올렸다.


그건 분명 마의 왕에 걸맞은 것이다.


무영창으로 쓴 마법으로 사람을 양단하고 터뜨리나 싶더니, 마법인지도 모를 무슨 암시 같은 것을 써서 강제로 해적들을 서로 죽이게 만들었다.


아무리 마족이라고 해도 그런 게 가능하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그는 이미 시아로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갓난아기가 하늘에 손을 뻗는다 한들 별을 잡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이나스 왕국기사단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그의 발끝에라도 닿을 수 있을지 없을지.


마왕의 군대가 조금이라도 그에 상응하는 힘을 가졌다고 하면, 지금의 자이나스로서는 절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신의 의지를 잇는 신성국이라 해도 최소한 난항을 겪을 것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이 소년은 그만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ㅡ그는 인간이 아닌 만큼 말에 어폐가 있을지 모르겠지만ㅡ인간성을 잃지 않은 것 같았다.


시아는 자신도 모르고 풍만한 가슴 앞에 오른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심장이 힘차게 두근대고 있었다.


시아가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강하게 매료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왕국기사단 토벌대의 단장 직책을 맡은 시아는 국민을 습격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마족 및 마물 토벌에도 몇 번이나 동원된 적이 있다.


그녀가 그렇게 왕가의 명예를 드높이며 마주했던 강대한 마족은 하나같이 인간에 대해 적대감을 보이고 죽이려 들었지만, 이 마왕은 확연히 달랐다.


자신을 장난감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먹이로 보고 있지도 않다. 그것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명실상부한 인류의 적일지언정 완전하게 인간을 혐오하는 것 같지 않은 것이다.


그 예로 그가 시아를 죽이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일 텐데, 그러려 하지 않는다. 마족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몇 죽든 상관없을 텐데도.


‘내가 생각했던 거랑 달라도 너무 달라.’


어린 나이지만 한평생 가져온 인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시아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있었다.


국가를ㅡ나아가 인류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상관없다는 강직한 심성을 가진 그녀였기에, 그 충격은 배가 되었다.


“그래서? 더 할 말은 없는 건가.”


마왕이 그녀를 응시한다. 시아는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와 동시에, 이 남자를 알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인간을 혐오하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 그를 마왕으로서 움직이게 하는지, 꼭 알고 싶었다.


시아는 여태껏 자신이 한 번도 가지지 못하고 추상적으로만 생각해왔던, 이성에 대한 관심도 그 마음에 포함되어있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한 채 일련의 생각을 마쳤다.


그녀는 흐트러져있었던 머리를 정돈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제 목숨을 구해주신 분입니다. 이대로 떠나보내면 발렌슈타인의 이름의 먹칠을 하게 됩니다. 적어도 왕성에서 정식으로 환대를 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아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바보처럼 들리는지 모르진 않았다. 신성국에게 선전포고를 한 마왕을 왕성에 초대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매국노도 그런 발상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저 소년의 신분이 어떻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건 사실이라, 이렇게 빚만 지고 넘어가는 건 시아의 자존심이 용납 못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흠, 예정이 조금 틀어지게 될 텐데. 생각해봐야겠는걸.”


잔뜩 긴장한 시아의 얼굴을 힐끗 본 소년은 문득 놀리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긴장 풀어라, 공주. 인질로라도 잡힐 거라고 생각했나? 우리에게 그럴 이유가 뭐가 있나. 딱히 이용가치도 없어 보이는데.”


완전하게 자이나스를 깔보는 듯한 심드렁한 태도.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 신성국의 유ㅡ”


마왕의 태도에 살짝 열이 올라 말하려던 시아는 황급히 말을 멈췄다.


마왕이 옅은 미소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반응을 떠보려고 했던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농담인가.


그의 의도가 어떻든 그건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 누구보다 왕국의 안위에 앞장서야 할 공주가 마왕에게 이렇게 자신의 가치를 어필하는 건 어떨까 싶었다.


“크흠. 죄송합니다. 은인에게 보일 태도가 아니라, 후우.”


헛기침을 한 시아는 크게 심호흡을 해서 긴장을 풀었다.


그래. 서로의 입장 차는 있을지언정, 이렇게 탐색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마왕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서 신성국에 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절대 그녀의 흥미본위로 일을 진행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신성국에 가담하기로 한 것이 결정이 난 건 아닙니다.”


시아의 말에 마왕이 호오, 하고 관심을 보였다.


“동맹국이라고는 하나, 우리 자이나스 왕국은 아직 데트르 마도연방국이 신성국에 선전포고한 경위에 대해 모릅니다. 종국에는 전쟁터에서 만날 수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런 것까지 포함해서 자이나스에서 이야기를 나눠보시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자이나스에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제안이다.


하지만 왜일까, 시아는 멀게만 느껴지는 신성국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마왕이 한없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군. 이미 말했듯 본대의 예정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마왕이 말끝을 흐렸다.


팔짱을 낀 채로 턱에 손을 가져다 대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인간적이었기에, 시아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 마왕이라는 사실을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했다.


“듣자 하니 나쁘지는 않은 이야기로군. 잠정적인 아군이 될 나라라면 나에게도 득이 되는 제안이다. 부하들도 불평은 없겠지. 적어도 범죄를 모른척해달라는 제안보다는 나아 보이는군.”


지금은 죽어 없어진 검은 수염을 비웃은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류셀 블레이크. 데트르 마도연방국의 국가원수이자, 세간에는 칠흑의 마왕이라 불리고 있다.”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마왕의 배려에 감사하며, 시아는 다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시아 폰 발렌슈타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왕 폐하.”


어쩌면 이 남자의 존재가, 두 갈래로 찢어져서 이미 최악을 향해 치닫는 자이나스를 구원할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 시기에 마왕을 국내로 들인다는 자신의 발상이 도저히 인간이 가질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시아는 그렇게 느꼈다.


◆ ◆ ◆ ◆ ◆ ◆ ◆


자이나스 왕국의 이골 항구에는 100여 명의 병사가 배치된 작은 요새가 있다.


이곳이 자이나스 왕국의 국경이나 다름없기에, 출입국사무소를 겸하는 국경수비대라고 해도 좋겠지.


요새의 병사에게 주어진 주임무는 지역의 치안 유지와 경계. 즉 항구의 정기 순찰과 자이나스의 땅에 발을 들이려는 자들을 선별해서 들여보내는 것이다.


나름 많은 상선들이 드나드는 이 항구에 고작 100여 명밖에 병사가 배치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이골 항구는 전략적 요충지가 아닌 데다, 이웃 나라는 전부 자이나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쳐들어온다고 한들 굳이 해상루트를 활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골 항구에서 왕도는 절대 멀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이나스에서도 규모가 2, 3위를 다투는 큰 도시를 두 개는 거쳐야 한다.


왕도에 견줄 정도로 거대한 그 도시들은 어쩌면 제일 뚫기 힘든 방어선이라 할 수 있다. 그곳을 통치하는 유력 귀족들이 부리는 군대는 국왕의 군대보다 몇 급은 위였으니까.


현재 귀족 파벌은 국왕 파벌보다 현저히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끌어다 쓸 수 있는 예산의 규모가 다른 탓에 군에 지급되는 무기와 방어구도, 병사의 처우도 귀족파벌이 우세했다. 그러니 그걸 잘 아는 왕실 입장에서도 굳이 이골 항구에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보통 국왕파벌과 귀족파벌은 반목했고, 어느 부문에서도 협력할 생각은 없이 끝까지 서로를 물어뜯고 늘어졌다.


이건 군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유력 귀족은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에 병사를 소집하여 지휘할 권리가 있었으니까.


둘로 나뉜 자이나스의 실태를 보여주듯 두 세력으로 갈린 군 사이의 관계는 유사시가 아니면 최소한의 교류로 끝나지만, 엄밀히 따지면 국왕 파벌에 속하는 이 국경수비대 요새의 병사들은 외적의 침입을 제일 먼저 근접도시에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외적에 맞서 싸울 준비를 위해서는 그 정보가 필수적인 만큼, 요새의 병사들은 인근의 주둔하는 귀족파벌의 군대와는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암ㅡ”


저녁 시간을 한참 넘긴 시각.


이 시각에 도착하는 배는 거의 없기에, 망루에 홀로 경계근무를 서던 병사는 크게 하품을 했다.


교대시각까지는 아직 10여 분이 남았기에 그는 아예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채 잔잔한 수평선을 관찰했다.


보나 마나 오늘도 이상 없음, 이라는 것이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차갑게 식었을 저녁 식사ㅡ보리로 만든 묽은 죽을 생각하며 우울해진 병사는 주위가 어두워진 것을 보고,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응? 뭐지?”


유심히 하늘을 관찰하던 병사는 충격으로 기절할 뻔했다.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 저건...”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진 건 달을 가리는 배가 하늘에 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늘을 나는 배라니, 어린이 동화 속에나 나오는 농담이다.


하지만 눈을 비벼봐도 그 광경은 바뀌지 않았다.


도대체 저 배가 어떻게 하늘에 떠 있는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혼란에 빠져있던 병사는 그 배에 걸린 깃발이 어쩐지 눈에 익는다고 생각하다, 이내 어디에서 그것을 보았는지 떠올렸다.


검붉은 배경에 검은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고 있다.


저건 분명 신성국을 향한 선전포고의 공문에 찍혀있었던 국가의 인장과 흡사했다.


“저ㅡ적스ㅡ”


신성국과 싸우겠다던 마도연방국이 어째서 이곳에 먼저 쳐들어온 것일까.


위기를 감지하고 종을 울리려던 병사의 눈이 뭔가를 발견하더니, 조금 전보다도 크게 뜨였다.


하늘이 아닌 바다를 통해 항구에 들어서는 함선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이고 있었다.


마족 놈들은 하늘을 나는 배뿐만 아니라 평범한 군함도 보낸 건가, 생각하고 있으려니 그 함선이 단 깃발도 곧 그의 인식 범위에 들어왔다.


그 깃발이 휘날리는 것은 자이나스 왕국의 국기. 함선의 형태도 절대 착각할 수 없는 왕실의 것이다.


“뭐지... 왜 멀쩡한 거지? 교전한 게 아닌 건가?”


아직 거리가 있어서 왕가의 함선이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저것만 보아서는 마치 왕실의 함선을 적함이 호위하는 모양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저 배가 여전히 모국의 깃발을 휘날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적습? 인건가...?”


이쯤에서 대포로 응전하는 게 원칙이긴 하지만 저건 적습치고는 규모가 적고, 배 한 척은 아예 모국의 깃발을 달고 있다.


고민하던 병사는 우선 중대장에게 보고를 올리기로 하고, 부리나케 성루에서 내려갔다.


작가의말

류셀 이 인싸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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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피의 무게는 죄의 무게만큼 +3 23.05.18 73 3 11쪽
256 신의 활, 그 시위가 품는 것은 +1 23.05.14 65 3 16쪽
255 매듭을 짓지 않으면 +2 23.05.09 70 3 14쪽
254 공중 요새 +3 23.04.29 73 3 16쪽
253 마도 vs 고유스킬 +5 23.04.05 77 2 15쪽
252 인간 대 인간 +3 23.03.25 86 3 14쪽
251 이빨을 드러낸 어둠 +4 23.03.18 82 3 14쪽
250 예술은 폭발이다 +3 23.03.10 89 3 12쪽
249 전쟁 발발 +2 23.03.02 92 2 13쪽
248 겨울, 온천 +5 23.02.25 79 3 13쪽
247 성전의 전조 +2 23.02.19 93 4 13쪽
246 이스 바실루스 +1 23.02.15 88 3 14쪽
245 레벤 연합의 침공 +1 23.02.11 82 2 14쪽
244 약자의 운명 +1 23.01.28 95 3 16쪽
243 표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가름) +3 23.01.18 92 3 1쪽
242 또 다른 숙청의 시작 +1 23.01.14 96 3 14쪽
241 찬탈의 하겐 +1 23.01.01 101 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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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개혁의 불씨 +1 22.12.10 109 4 15쪽
238 백색 죽음이 깔린 추도식 +1 22.11.20 107 3 14쪽
237 다크엘프와 여우의 진급 +1 22.11.13 101 4 10쪽
236 두 번째 보루의 소실 +1 22.11.13 99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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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마왕의 제안 +4 22.07.26 118 4 19쪽
221 인간의 도시에, 인외가 도착하다 +3 22.07.24 115 4 15쪽
220 분열된 왕국 +1 22.07.24 111 4 16쪽
» 새로운 만남은 운명의 방향을 바꾼다 +1 22.07.22 109 5 19쪽
218 칠흑에 맞선 자의 말로 +2 22.07.18 117 4 17쪽
217 어둠에 물들지 않은 빛 +2 22.07.16 110 3 13쪽
216 지나가던 어둠이 발견한 것은 +1 22.07.16 117 4 11쪽
215 다가오는 위기, 혹은 기회 +1 22.07.09 128 5 19쪽
214 칠흑의 선언 +1 22.07.04 115 4 17쪽
213 파멸의 그림 +3 22.06.26 116 3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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