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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조회수 :
137,338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22.10.0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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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8쪽

짙게 드리우는 전운

DUMMY

첫번째 보루가 깨졌다.


절대 받아보고 싶지 않던 이 소식에 신성국 수뇌부는 당장 비상에 걸려, 보루의 소실이 확인된 시점으로부터 주교회의를 여는 데까진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자이나스 놈들... 배신한 건가!”


신성국의 주교회에서 법, 경제, 신앙, 그리고 교육의 네 부문 중 교육을 담당하는 레온하르트 주교가 탄식했다.


“우리 신성국의 4대 보루의 위치는 미스드나 대륙에서도 자이나스 왕가만이 대대로 알고 있을 터다... 첫번째가 무너졌다는 것은 자이나스 왕가가 마족 놈들과 손을 잡았다는 거나 마찬가지아닌가.”


자이나스가 인류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줄 것을 믿었기에 아주 오래전 네 개의 보루를 세우고 비밀유지를 약속받은 신성국이다.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 당연히 내던져야 한다는 인식이 파다한 이 나라의 주교로서는 차마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겠지.


“궁지에 몰린 것이겠지요, 그들도. 듣자 하니 에든 왕국에 침공당하던 중이라고 하더군요. 마왕의 군세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그대로 멸망해버릴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니겠습니까.”


인상을 찡그린 레온하르트 주교와는 달리, 페르트 주교는 자이나스의 결정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경제를 담당하고 있기에 주교회 멤버 중에서는 제일 바깥 세계에 해박했다. 에인헤랴르가 아닌 인간은 결국 자신의 이익을 신앙보다 우선해서 추구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허나 이유가 어찌되었든 우리가 해야할 일이 바뀌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피데스 주교?”


발언의 배턴을 넘겨받은 피데스 주교ㅡ신앙을 담당하는 노인에게 나머지 셋의 시선이 쏠렸다. 신성국의 전군을 움직일 권한을 가진 피데스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 그렇군.”


피데스 주교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며 지도에 손을 가져갔다. 신성국을 떠나 미스드나 대륙 위를 지나던 그의 검지는 이윽고 자이나스 왕국에서 멈췄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시피 자이나스에는 4대 보루 전부가 숨겨져 있다. 왕가가 마왕에 협력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머지 3곳이 금방 발견되어 파괴되어버리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그것은 절대로 피해야 할 시나리오다. 당장 대응할 필요가 있어.”


“그렇다면, 외부로 병력을 파견하시는 겁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베른 주교가 물었다.


“그래. 이번 목표는 보루의 파괴를 막는 것. 지금은 천경의 제5석과 8석을 보내는 것으로 충분하겠지.”


“네? 5석과 8석 뿐입니까? 마도연방군의 전력은 피데스 주교도 잘 알고 계실텐데요.”


베른 주교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지금 자이나스에는 마도연방국의 주요 간부가 모여있습니다. 정말 이안이 가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그는 거듭해서 물었다. 그 의문에는 과연 3석과 8석 정도로 마왕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냐는 비관적 사고가 깔려있었다.


“성전을 미스드나 대륙에서 열 생각은 없네, 베른. 이곳 신성국이야말로 천계로 통하는 최종 보루.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주요 전력은 국내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현명하겠지. 게다가 5석부터는 성유물도 없으니 잃는다 해도 큰 손해는 없으니 말이야.”


아직 자이나스로 보내지도 않은 아군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미 어느 정도 납득하고 있는 대답이다.


그래서는 그 두 명을 사지로 몰고 가는 거나 다름없지 않냐고 반박하려던 베른 주교는 입을 다물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피데스 주교가 하는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부에 머무르고 있던 제3석, 6석, 7석도 임무를 중단하고 신성국에 복귀하도록 명령하겠네. 파흐 평야의 전투에서 스비엣의 소멸이 확인되었으니 굳이 스파세니예를 계속해서 감시할 필요는 없다.”


만일 스비엣이 살아있었다면 불가피하게 신성국의 전력을 분산시켰어야 했을 거라고 중얼거린 피데스 주교는 정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대기하던 천경의 제1석을 불렀다.


“이안, 그렇게 됐으니 둘을 불러와주겠나?”


“예, 주교님.”


분홍색 머리의 소년은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이고,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이 아름다운 거울상의 이공간에는 따로 출입문이 없으므로 들어가고 싶다, 나가고 싶다고 바라는 것만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는 매우 민감한 이야기들이 오가기 때문에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자는 아주 극소수의 자들로 한정되어, 출입 허가증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증표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정자 근처에 새로운 인영이 둘 나타날 때까지 주교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이 이공간에 새롭게 등장한 건 등에 커다란 철제 십자가를 짊어진 건장한 사내와, 토끼 인형을 끌어안은 소녀.


그 둘은 주교들을 보더니 바로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제5석차 마하트와 제8석차 르몽, 주교회의 부름을 받들어 대령했습니다.”


사제복을 입은 사내가 씩씩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 갑작스럽지만 자네들은 지금부로 자이나스에 파견되어줘야겠네. 자네 둘과 성기사단 1중대 정도의 소규모 인원으로 말이야.”


피데스 주교는 심부름이라도 시키는 것처럼 명령했지만, 베른 주교는 더 많은 지원병력을 약속해주지 못하는 죄책감에 고개를 돌렸다.


“임무 내용은 자네들도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 천경의 일원인 자네들이라면 첫째 보루가 무너진 것의 여파를 느꼈을 테니 말이다. 자네들은 자이나스의 나머지 보루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줘야겠어.”


“주교님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받들겠습니다.”


갑작스럽게 적지에 파견되는 임무를 받았지만, 사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충직히 답했다. 하지만 소녀 쪽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꼼지락대고 있었다.


“응, 르몽? 질문이라도 있나?”


“저어, 이번에는... 그러니까아, 얼마나, 음···”


소녀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그녀가 뭘 궁금해하고 있는지 금세 알아챈 피데스 주교가 빙그레 웃었다.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번 임무는 보루의 사수와 이교도들의 소탕일세, 르몽. 아무 제한 없이 마음대로 날뛰어도 괜찮다.”


그 말을 들은 소녀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그 얼굴에 나타난 감정은 지금부터 적지에 향한다는 두려움도, 불안도 아니었다.


“그런가요... 저, 저엉말... 기대돼요...”


앞으로 벌어질 살육이 너무나도 기대되어 참을 수 없다는 듯, 르몽은 홍조를 띄운 것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앞장서서 루미아 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자네들이야말로 신성국의 영웅이야.”


레온하르트 주교가 칭찬하고,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겠네.”


페르트 주교가 북돋아 줬지만, 베른 주교는 아무래도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도연방군이 신성국 침공에 앞서 자이나스에 머무르고 있다면, 이 둘이 마주해야 할 적은 신성국의 근간을 위협하는 세력의 총집합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은 마도연방군은 태초의 신들을 살해하고 옛 세계를 한차례 멸망으로 인도했던 라그나로크 마수 세력의 재림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대로 이들을 보내도 괜찮은 것일까.


자신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다른 인간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도구로 취급하고 사지로 내모는 자신들이 저 극악무도한 마왕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굳건했던 신앙 속에 서서히 싹트는 의심.


천경의 제5석과 제8석을 배웅해주는 다른 주교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 순간을 기점으로 베른 주교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 ◆ ◆ ◆ ◆ ◆ ◆



케이프 시가 온갖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상업 도시였다면, 최북단의 게트라일 시는 그에 비하면 비교적 한적한 항구도시다.


자이나스 왕국의 북부 국경이나 마찬가지인 이골 항구를 중심으로 발전한 게트라일이 미스드나 대륙 밖의 나라들과의 해상교역으로 꽤 짭짤한 수입을 거둬들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이나스는 보통 에든 왕국을 지나서 미스드나 대륙의 여러 나라로 통하는 육상 루트로 물품을 거래했기에 북부가 한산해진 것이다.


하지만 정세가 변동하는 현재는 그것도 옛말이나 마찬가지.


에든 왕국의 침공으로 인해 미스드나의 나머지 나라들로 통하는 육상교역로가 완전히 차단된 지금, 게트라일은 유일하게 외부와 거래할 수 있는 창구가 되어 있었다.


무기도, 식량도, 자원도 외부에서 들여오려면 게트라일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


좋은 이유로든, 나쁜 이유로든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게트라일의 지배자ㅡ클라이스트 백작가는 자신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에 향후 행보를 정해야 했다.


마도연방국이 게트라일을 방문할 이유도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중요시설의 파괴. 그리고 둘째는 국왕 파벌에 약속한 보상 중 하나인 귀족 파벌의 퇴거.


“그래서 내가 몸소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나는 반대편에 앉아 차를 홀짝이는 백작 영애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직접 초대할 줄은 몰랐군.”


잘 꾸며진 응접실 한쪽에 장식된 꽃의 향기가 내 코를 간지럽혔다. 클라이스트 백작가는 내 예상을 뒤엎고 성문을 활짝 열고 마도연방군을 게트라일으로 초대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저항이 있으면 케이프 시처럼 강제점거할 생각이었지만, 눈앞의 당돌한 소녀는 게트라일을 국왕 파벌에 넘겨주는 계획의 세부 단계를 정하자는 밀서를 품은 사절을 보내면서까지 나를 불러들였다.


“크흠.”


내 옆에 앉은 시아가 조금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녀 앞에도 찻잔이 놓여 있었지만, 아직 손을 대지 않고 있다.


직접적인 반목은 없었다고는 하나, 왕녀인 시아는 클라이스트가가 속한 귀족파벌과는 좋은 기억이 없기에 이 자리가 어색한 것이겠지.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렇게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두렵지 않은 건가? 이미 케이프 시가 불탄 소문은 이곳까지 도달했을 텐데.”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지 않겠어요. 제 아버지는 특히나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쉽게 믿기는 힘들었지만, 아무래도 클라이스트 백작가의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건 시아보다 서너 살 어려 보이는 이 소녀ㅡ샬롯테 클라이스트라는 모양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샬롯테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그야말로 귀족 가문의 수장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손가락 하나로 클라이스트 가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릴 수 있는 나를 앞에 두고도 떨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저, 일단 다시 묻겠습니다만... 클라이스트 백작가는 게트라일 시에 관련된 전권을 국왕 파벌에 넘겨주는 데 동의했다는 것이 틀림없나요?”


“물론입니다, 공주님.”


금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샬롯테는 시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클라이스트 가문은 모든 요구에 순순히 응하겠습니다. 귀족 파벌에서도 손을 뗄 거고요.”


“음, 그러면 일이 편해지니 나쁠 것은 없는데요...”


그리 말하며 시아가 샬롯테의 표정을 살폈다. 클라이스트 백작이 전권을 맡길 정도면 머리가 나쁜 것 같지는 않으니, 무슨 생각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의심하는 것이겠지.


게트라일은 이미 마도연방국의 깃발을 건 비행선이 머리 위를 지나는 걸 한차례 묵인한 적이 있기에 어느 정도는 협력적일 거라고 예상은 했으나, 이 정도로 저자세로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공주님, 그리고 마왕 폐하. 이골 항구를 포함한 게트라일을 넘겨준다고 해도 국왕 파벌에서 당장 모든 걸 떠안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샬롯테가 지적하는 건 타당했다. 국왕 파벌은 아무래도 사람이 부족해서, 기존의 통치세력이 전부 떠난 뒤 이 정도 크기의 땅을 원활하게 다스리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러네요. 케이프 시 정도라면 우선도가 높아서 사람을 파견할 수 있겠지만, 게트라일까지 보낼 여력은 지금 없어요.”


시아가 솔직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서 힘을 얻었는지, 샬롯테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들어갔다.


“그러면 저희 클라이스트 가문을 그 부분에서 고용하시는 건 어떻겠어요? 관리자가 없어서 해상교역이 오래 끊기기라도 하면 큰 손해가 날 테니 말이에요. 특히 지금은 육상교역이 끊긴 상황이니, 그 손해는 더욱 극심할 거예요.”


“그, 그것도 그렇네요...”


시아가 샬롯테의 말을 반박하지 못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역시 그렇게 접근해온 건가, 하고 생각한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합리적인 제안이군. 우리로서도 협력적인 지역 세력을 이유 없이 쳐낼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자신이 소유하던 회사의 지분을 전부 잃고 직원 신세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나름 귀족이 그래도 괜찮은 건가?”


귀족이라는 것은 최소한의 영지ㅡ즉 권력이 없으면 귀족이라고 부를 수 없다. 모든 걸 잃은 클라이스트 가문에 과연 무엇이 남느냐는 내 질문에, 샬롯테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감히 부탁드리지만, 허락해주신다면ㅡ”


샬롯테가 심호흡을 한번 했다.


“게트라일의 영토를 데트르 마도연방국에 일부 할양해서, 마도연방국의 자치령을 이곳에 세우는 것은 어떻습니까?”


뜬금없는 제안으로 들릴 수도 있었지만, 마도연방국의 자치령과 클라이스트 백작가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군. 자치령이니 현지에 통치할 세력이 필요할 테고, 클라이스트 가문이 그 손발을 자처하겠다는 건가.”


“바로 그렇습니다.”


“즉, 너희들은 마도연방국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


“...네.”


아무리 당찬 영애라고는 해도 이 대목에서는 역시 긴장되는지, 찻잔을 집어 든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시아?”


“으음...”


잠시 고민하던 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치령 이야기는 사전에 없었지만, 사실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그,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마도연방국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냐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에든 왕국의 침공도 막고 귀족 파벌도 몰아내는 걸 전부 타국이 해주는 건 엄청난 일인데, 이 정도로 자이나스를 도와주는 것에 비해 대가를 크게 요구 안 하니 괜히 불안한 것이겠죠.”


흑발을 쓸어올린 시아가 매우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놓고 얘기는 하지 않지만, 결국 마도연방국이 본색을 드러내서 자이나스 왕국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겁니다. 폐하의 군세는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게트라일의 일부가 마도연방국에 할양된다면 그런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과연. 너무 대가 없이 도와주는 것도 그런 불안을 만들어내는 건가.”


“네, 게트라일이 자발적으로 할양한다는 형식을 취한다면 왕가도 인정할 겁니다. 이 정도로 끝내는 것에 오히려 반기겠죠.”


길을 지나다 낯선 사람이 갑자기 큰 액수의 돈을 건네면 의심부터 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걸까. 역시 왕가에 더 많은 종속을 요구해야 했나, 살짝 후회가 들었다.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게트라일을 오랜 시간 다스려온 클라이스트 백작가는 여전히 그 위치를 고수할 수 있으며, 비록 자신의 영지는 없어진다고 해도 마도연방국의 비호를 받을 수 있다.


분명 백작가를 물어뜯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왕국 파벌도 마도연방국이 직접 이 관계에 개입한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철저히 생존을 위해 현실적인 방안을 짜낸 것이다.


“왕가ㅡ아니, 시아와 손을 잡은 이상 자이나스는 앞으로도 왕래할 일이 있을 테니 소통의 창구를 위해 자치령을 세운다는 생각은 나쁘지 않아. 금방이라도 에든에 먹히려는 것을 구해줬으니 그 정도는 요구할 수 있겠고, 시아가 얘기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효과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굳이 자치령을 이곳에 세울 필요가 있나. 왕가와 가까운 곳에 세운다면 왕도가 적당한데.”


“왕도는 다른 도시들과 달리 왕가가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땅. 왕도의 영토를 일부 할양하는 건 아무래도 국왕 파벌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하겠죠.”


영애는 긴장된 얼굴이었지만, 또박또박 답했다.


“이골 항구가 있는 게트라일은 각종 물자를 실어나르기에 최적인 환경입니다. 그리고 현지 사정에 밝은 저희 가문이라면 자이나스와 데트르 마도연방국 사이의 소통을 잘 중재할 수 있어요. 자치령의 총독으로는 마도연방국 분을 쓰시고, 저희는 통치 작업을 돕는 현지 인원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되지 않겠어요?”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의 제안을 해왔다.


참으로 당돌한 제안이었지만, 내가 입을 손해는 없었다. 샬롯테의 말대로 클라이스트 가가 협력한다면 이들의 최소한의 생존전략쯤은 눈감아주지.


“나쁘지 않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샬롯테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 그럼 제 제안을 받아들여 준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렇다.”


금방이라도 방방 뛸 것처럼 좋아하는 영애를 보며, 나는 조금 전의 어색함은 잊고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 시아를 슬쩍 보았다.


“아마 시아는 그녀와 자신을 겹쳐보고 있는 거겠지.”


“이걸로 게트라일 건은 온건하게 해결하게 되었군. 그렇게 됐으니 밥이나 먹자, 시아.”


나는 짐짓 모른 척하고 시아를 불렀다.


“에, 유적으로 먼저 가는 게 아닌가요?”


시아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귀족파벌을 몰아내는 것보다도 우선하여 처리해야 하는 내 용무를 걱정하는 것이다.


“원래 그럴 생각이었는데, 계획에 없었던 손님 둘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어서 말이지.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식사부터 먼저 해두는 게 어떤가.”


“아, 그런 거라면 저희 클라이스트 가에서 식사를 하시고 가시지요.”


눈치가 빠른 샬롯테가 제안했다.


“게트라일은 신선한 해산물로 만든 요리가 일품이에요. 두 분 앞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식사를 준비해드릴게요.”


샬롯테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게트라일의 요리라도 즐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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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국어국립원에서는 가문을 뜻하는 가를 얘기할 때 붙여쓰는 게 맞다고 하던데, 저는 개인적으로 알아보기 불편해서, 그리고 이전에 쿠도 가라고 썼던 전례를 판단해서 그냥 띄어쓰겠습니다.


그리고 사족이지만 AI로 그림을 몇 개 그려보았습니다. 첫짤은 쿠도, 두번째는 이안, 그리고 마지막이 이번에 새로 등장한 천경의 제8석인 르몽입니다. 


가름의 표지 아트는 남캐 잘그리는 사람 작가분이 의뢰를 받아 열심히 그리고 있어서 좀 기다려주시고, 심심해서 AI로 린 비키니 짤을 많이 그렸는데 되게 고퀄로 나오네요. 여러 의미로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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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금속은 생각보다 무르다 +3 23.07.05 66 3 13쪽
260 천사와 대척점에 선 것은 +2 23.06.18 74 3 15쪽
259 기술의 진보는 곧 살육의 진보 +3 23.06.10 69 3 16쪽
258 포신이 품은 마법 +3 23.05.20 73 3 10쪽
257 피의 무게는 죄의 무게만큼 +3 23.05.18 72 3 11쪽
256 신의 활, 그 시위가 품는 것은 +1 23.05.14 65 3 16쪽
255 매듭을 짓지 않으면 +2 23.05.09 70 3 14쪽
254 공중 요새 +3 23.04.29 73 3 16쪽
253 마도 vs 고유스킬 +5 23.04.05 77 2 15쪽
252 인간 대 인간 +3 23.03.25 86 3 14쪽
251 이빨을 드러낸 어둠 +4 23.03.18 82 3 14쪽
250 예술은 폭발이다 +3 23.03.10 88 3 12쪽
249 전쟁 발발 +2 23.03.02 92 2 13쪽
248 겨울, 온천 +5 23.02.25 79 3 13쪽
247 성전의 전조 +2 23.02.19 93 4 13쪽
246 이스 바실루스 +1 23.02.15 88 3 14쪽
245 레벤 연합의 침공 +1 23.02.11 81 2 14쪽
244 약자의 운명 +1 23.01.28 95 3 16쪽
243 표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가름) +3 23.01.18 92 3 1쪽
242 또 다른 숙청의 시작 +1 23.01.14 96 3 14쪽
241 찬탈의 하겐 +1 23.01.01 101 4 14쪽
240 추악한 진실 +1 22.12.25 111 4 16쪽
239 개혁의 불씨 +1 22.12.10 108 4 15쪽
238 백색 죽음이 깔린 추도식 +1 22.11.20 107 3 14쪽
237 다크엘프와 여우의 진급 +1 22.11.13 101 4 10쪽
236 두 번째 보루의 소실 +1 22.11.13 99 4 10쪽
235 꺾인 십자가, 꺾이지 않는 신념 +1 22.10.31 106 4 12쪽
234 폭살의 르몽 +3 22.10.19 122 4 16쪽
233 의외의 첫인상 +1 22.10.14 113 5 13쪽
232 사절단의 방문 +1 22.10.12 155 3 13쪽
» 짙게 드리우는 전운 +1 22.10.07 121 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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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어둠은 확실하게 무너뜨린다 +2 22.09.15 128 5 18쪽
228 치명적 착각 +1 22.08.27 106 3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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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강요되는 선택 +1 22.08.08 108 4 17쪽
224 그 불꽃은 푸른 색을 띠고 있다 +5 22.08.04 109 5 19쪽
223 우펜 요새 +1 22.07.30 115 5 20쪽
222 마왕의 제안 +4 22.07.26 118 4 19쪽
221 인간의 도시에, 인외가 도착하다 +3 22.07.24 115 4 15쪽
220 분열된 왕국 +1 22.07.24 111 4 16쪽
219 새로운 만남은 운명의 방향을 바꾼다 +1 22.07.22 108 5 19쪽
218 칠흑에 맞선 자의 말로 +2 22.07.18 117 4 17쪽
217 어둠에 물들지 않은 빛 +2 22.07.16 110 3 13쪽
216 지나가던 어둠이 발견한 것은 +1 22.07.16 117 4 11쪽
215 다가오는 위기, 혹은 기회 +1 22.07.09 128 5 19쪽
214 칠흑의 선언 +1 22.07.04 115 4 17쪽
213 파멸의 그림 +3 22.06.26 116 3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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