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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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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5.18 22:05
연재수 :
30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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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3,289
글자수 :
1,694,467

작성
22.07.0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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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다가오는 위기, 혹은 기회

DUMMY

지상에 잔잔하게 고인 맑은 물과, 그것이 그대로 비쳐서 거울상을 만드는 하늘.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절경의 한가운데 놓인 그 정자는 오로지 허락받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일종의 이공간으로, 신성국의 국정을 맡은 주교들이 곧잘 모여 회의를 하는 곳이다.


신성국을 통치하는 네 명의 주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관습에 따라 각자 법, 경제, 신앙, 그리고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신앙을 담당하는 주교의 권력은 다른 셋에 비할 게 아니다.


신앙이 곧 신성국의 군대ㅡ즉 성기사단의 주요 신념으로 이어지기에, 군사적 판단에 있어서는 그가 최종결정을 내린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렇습니까. 칠흑의 마왕이 드디어.”


베른 주교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베일 너머로도 그가 눈썹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성국 수뇌부는 새롭게 등장한 마왕이 고작 데트르 대륙 하나로는 만족하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마족의 욕심은 끝을 모르는 건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었으니까.


이들에게 의외였던 것은 열강이라고 할 수 있는 스파세니예 연방이 그렇게 쉽게, 이렇게나 빨리 꺾여버린 점이다.


“연방이 방심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마왕군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것인가...”


또 하나의 나라가 패배했다는 것에 그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가치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의 나라는 이 세계에서의 인간의 영향력을 그대로 나타내는 지표. 인간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주교 회의에 좋지 않은 소식을 전달한 성기사는 이대로 연달아 악재를 전하는 것이 면목 없는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마왕군은 이쪽으로 2만 가까이 되는 병력을 보내오고 있다고 합니다, 주교님. 길어야 나흘이면 이곳에 도착하겠지요.”


그 소식에, 원탁 맞은 편에 앉은 페르트 주교가 굵은 목소리를 내었다.


“배로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나요? 마법을 쓰기라도 하는 것인지.”


경제를 담당하는 그가 일반적인 상선의 속도를 알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아무리 군용 함선이라고 해도, 나흘 안에 그 드넓은 바다를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왕의 군세는 스파세니예로부터 빼앗은 비행선을 활용한다는 보고입니다.”


페르트 주교는 기사의 설명을 듣고는 금방 수긍했다.


“그러면 말은 되는군요. 희소식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이안이 잘 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떤가요, 마왕군ㅡ아니, 마도연방국의 힘은 어느 정도로 보아야 좋겠습니까?”


“그게···”


잘 훈련받은 신성국의 성기사답지 않게 그가 말끝을 흐렸다.


“놈들은 연방의 무기와 비슷하지만, 훨씬 높은 살상력을 가진 무기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신경 쓰이지만 더 심상치 않은 것은 놈들이 하이엘프, 다크엘프, 드래곤을 비롯한 상급 마족이 모인 군세라는 점입니다.”


“뭣, 그게 사실인가요?!”


뜻밖의 소식에 주교들 사이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신성국은 마왕군이 데트르를 장악했다는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 이외의 것은 잘 알지 못했다.


데트르에서 벌어지는 일이 이곳 신성국까지 닿을 정도면 세부적인 사항들이 소실되기 마련이었으니까.


위기감이 부족했다고 할까, 고작 마왕의 출현 정도로 매번 신성국이 나설 필요는 없다는 안이함이 자아낸 결과였다.


신성국에서 제일 전투력이 뛰어난 자를 모아 만든 조직ㅡ천경의 1석인 이안을 보낸 것도 적에 대해 부족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지만,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잠시, 이리 줘보게.”


기사가 우물쭈물하자, 그걸 답답해했는지 교육을 담당하는 레온하르트 주교가 그가 손에 든 보고서를 빼앗아 직접 읽어내려갔다.


그 역시 베일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동요는 점차 확연해졌다.


“이보게, 이 보고의 내용은 사실인가? 이대로 작성된 것이 정말 확실한가?”


“확인된 것으로는, 그렇습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무슨 일이죠? 얘기를 해보세요.”


다른 주교들의 다그침에, 레온하르트 주교가 그 내용을 떨리는 목소리로 읽었다.


“확인된 마왕의 부하로는 바실리스크와 엘드리치. 여기부터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로, 지옥사냥개, 그리고... 펜리르.”


정자에는 정적이 흘렀다.


평범한 인간 따위보다 오랜 시간을 살아와 어느 일에도 평정을 잃지 않는 에인헤랴르의 후예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잘못 본 게 아닌가요?”


당연한 질문이 나왔지만, 성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본체를 목격한 것은 아니고, 파흐 평야의 전투를 관측한 이안의 추측입니다. 놀라울 정도로 상기 언급한 신화의 마수와 흡사한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무슨... 농담도 정도가 있다. 진짜 펜리르가 마왕군에 있다면 전쟁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베른 주교의 말에는 지울 수 없는 두려움이 섞여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게 가능이라도 한 건가요?”


주교들이 웅성대자, 신앙을 담당하는 피데스 주교가 손을 들어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진정들 하시게. 이안이 관측했다고 해서, 정보의 진위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 않나 않았나. 게다가 일부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더라도 우리에게 승산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예를 들어볼까, 이안ㅡ천경의 제1석이라면 지옥사냥개 정도는 상대할 수 있어. 천경의 나머지가 힘을 합친다면 바실리스크와 엘드리치도 묶어둘 수 있겠지. 문제는 펜리르다.”


펜리르.


신과 마수의 싸움에서 마수의 대장급이라고 할 수 있는 늑대. 태양과 달을 집어삼키고 신까지 살해한 그 끔찍한 마수의 대응은 어떻게 할지가 문제였다.


“그렇다면 글레이프니르를 쓰는 것은 어떻습니까.”


베른 주교는 라그나로크가 끝나고 나서 그들이 신에게서 직접 받은, 유일하게 펜리르에게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언급했다.


“하지만 그것은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놓으라는 신탁이다.”


“여기에서 쓰지 않고 언제 쓰겠다는 것입니까?”


긴장감이 부족한 반응에 베른 주교의 목소리가 살짝 격앙되었지만, 피데스 주교는 그를 살살 달래듯이 말했다.


“잘 생각해보게. 그것이 진정 지옥사냥개와 펜리르일리가 없다. 그 둘은 라그나로크에서 죽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으니. 라그나로크가 어떻게 종전되었는지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렇게 생각하자 잔뜩 고조되었던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제아무리 마왕이라 해도 라그나로크의 마수를 되살리고 종속시키기까지 할 수는 없겠지. 그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도 삼가야 할 일이다.”


자신의 말에 다른 세 주교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는 것을 보고, 피데스 주교가 명령했다.


“우선 마왕군의 진입 예정 경로에 최우선으로 병력을 배치해두게. 이 땅에 발을 붙이기도 전에 격추하면 될 일이야. 그리고 그것보다 이 내용 말인데...”


그는 보고서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마왕군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들에서 인간이 멀쩡히 생활하고 있다는 것은 어딘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 이안이 실수를 했을 리는 없을터인데.”


“그 내용대로입니다, 주교님.”


성기사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유디트 황국과 레윤케 지방을 제외한 나라들ㅡ예를 들어 알트레아 왕국에서는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인구가 마족보다 많기에 지금도 거리를 활보하는 건 대부분 인간이지만, 특별히 억압받는 것은 없고 질서도 유지되어 마왕군 침공 이전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성기사는 자신도 긴가민가한 것처럼 이안의 보고서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마왕군 점령 이후 오히려 삶의 질이 나아졌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이건 일부 귀족들이 독점하던 상공업 따위가 모든 시민에게 열려서 그런 것 같습니다. 데트르는 전부 마왕령으로 통합되었으니 나라마다 달라지는 수출입 관련 규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상회들의 수익이 크게 증가하여, 관련 종사자들의 숫자도 크게 늘었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비명이 울리고 죽음이 활개치는 나라를 상상했던 주교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침공에 따라 많은 병력의 사망이 있었지만,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전적으로 마왕군이 복구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장거리 교역의 경우 마차를 사용해서 물건을 옮기는 대신 일정 요금을 받고 전이문을 빌려준다는 내용이 있긴 합니다만.”


“흥, 믿을 수 없군.”


마왕의 지배를 받는 땅이 살기 좋다. 그 말도 안되는 내용에 피데스 주교가 입을 벌리는 가운데, 레온하르트 주교가 코웃음을 쳤다.


“인간을 혐오하는 마족 놈들이 그런 것을 용납할 것 같나? 보나 마나 인간을 노예로 종속시켜서 짓밟고 희롱하고 있을 것이 뻔하다. 이안이 무슨 실수를 한 건지는 모르지만 마족이 평화로운 통치라니, 절대 있을 수 없는ㅡ”


“레온, 그쯤 해두게.”


피데스 주교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자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안이 이렇게 보고를 올린 이상 그 가능성ㅡ마왕이 공포정치 대신 유화정책을 쓴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염두에 둬야겠지. 어찌 되었든, 우리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그를 포함한 모든 주교가 결의에 찬 눈을 하고 있었다.


마족과 인간은 공존할 수 없다.


마족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ㅡ설령 그것이 무해하게 보이는 갓난아기라 할지라도 악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를 그들의 신은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루미아 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 우리 신성국은 마도연방국을 필히 멸해야 할 인류의 적으로 규정한다. 다른 나라들에게도 공문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도록.”


◆ ◆ ◆ ◆ ◆ ◆ ◆



짙은 동양풍의 옷을 입은 남자가 기나긴 복도를 걸었다.


호위무사 앞에 멈춰선 그는 배알의 허가가 떨어지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미닫이문을 열었다.


검술 연습을 위해 마련된 고풍스러운 방이었다. 그야말로 일국을 통치하는 자의 전용 시설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벽에 걸린 두 자루의 검은 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어도 범인은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훈련시설에는 성인 남자 정도 되는 길이의 짚단이 잔뜩 세워져 있었다.


그 수많은 짚단의 한가운데서 눈을 감은 노인 하나가 검에 손을 얹고 자세를 잡고 있었다.


그는 그 자체가 잘 벼려낸 칼날 같았다. 극한까지 검술을 수련한 자만이 지니는 날카로움이다.


“흡.”


절제된 기합 소리.


그가 검을 뽑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검을 살짝 빼내려다 집어넣은 것이 아닌가, 아예 뽑지 않은 것인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찰캉ㅡ


하지만 검이 명랑한 소리를 내며 완전히 닫히는 순간, 어지럽게 널려있던 짚단이 전부 양단되었다.


한 번의 검격으로 여러 번의 베기를 모방하여 전방향의 적을 베어버리는, 마사무네 가의 고유 검술이다.


“후우우ㅡ.”


방의 주인은 깊게 숨을 내쉬고는, 방문자에게 가까이 와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몸을 잔뜩 덮었던 살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사람이 쓰기에는 너무 널찍한 다다미 위를 걸은 사내는 두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일각을 다투는 일이기에 수련 중 이곳으로 찾아뵙게 된 점, 대단히 실례합니다.”


“... 하루네는 잘해주고 있던가?”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뜨며, 노인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대영주님.”


이 노인이야말로 쿠라마사의 땅 일대를 지배하는 대영주ㅡ마사무네 케이고.


그만한 지위를 얻고도 하루라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그는 쿠라마사 주민에게 모범이 되는 지도자였다.


마사무네는 남자가 공손히 내민 보고서를 받았다.


그 종이에 담겨있는 내용은 영주에게 올리는 보고서라기보다는, 특정 기간 동안 있었던 일을 상세히 적은 편지에 가까웠다.


발신인은 쿠도 가의 차기 당주로, 지금은 쿠라마사를 떠나 바다 건너 있는 데트르 대륙에 머물고 있는 소녀다.


“격퇴한 스파세니예 연방군을 몰살시키지도, 대륙에서 몰아내지도 않고 그대로 흡수해서 자기 것으로 삼았다라. 참, 그도 터무니없는 일을 하는군.”


마치 손녀가 보낸 편지를 읽은 할아버지처럼 마사무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하루네가 그렇게까지 말한 자라 높이 사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평가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되겠군. 지(知)에도, 무(武)에도 치우치지 않고 이 정도의 판단을 내리다니.”


“참으로 유능한 마왕입니다. 저도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만나 뵙고 싶군요.”


편지를 전달한 남자ㅡ나카지마 유헤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쿠도 하루네와 마찬가지로 나카지마 가의 차기 당주로 기대를 한몸에 받는 그는 쿠도가 처음 데트르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 꽤 강경하게 반대했던 경력이 있다.


지금에야 대부분의 영주들이 마왕을 호의적으로 대하지만, 처음부터 그들이 마왕과 그의 군세에 가세할 생각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쿠라마사는 데트르의 마족과는 달리, 끝까지 신의 축복을 받은 인간으로부터 마족의 나라를 사수한 경우다.


인간 나라의 침공을 받은 적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그때마다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은 쿠라마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고유 검술과, 타 대륙의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동방의 주술 덕분이다.


이 세계에 마왕은 몇 번이나 생겨났고, 그때마다 혜성처럼 나타난 용사에 의해 살해당했다.


아주 먼 옛날이야 마왕이 약속한 마족의 부흥이란 것에 흥미를 품은 쿠라마사의 지도자가 있었겠지만, 그렇게 패배가 계속되다 보면 신뢰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마왕이 나타나든, 용사가 그것을 쓰러뜨리든 쿠라마사의 굳건함에 변함은 없다. 즉 그들이 그런 분쟁에 개입할 이유는 없었다.


인마전쟁에서 무엇이 일어나든 쿠라마사와는 별개의 일이라는 태도가 이번에 180도로 바뀌게 된 건 누가 봐도 쿠도 하루네의 영향이 크다.


데트르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해 듣고, 직접 마왕의 됨됨이를 알아보겠다며 무턱대고 그곳으로 떠난 쿠도가 보내온 편지는 이것 하나만이 아닌 것이다.


제대로 정보를 전달하면서도 마왕군 내부의 기밀을 드러내지는 않도록 주의한 쿠도의 편지는 그녀가 데트르에 도착한 후부터 계속 주술로 전해 받았다.


쿠도가 꼬박꼬박 쓴 편지는 어느 것이나 칭찬일색으로, 칠흑의 마왕이야말로 마족의 구세주에 어울린다는 내용이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말 그 정도의 남자일까요, 라고 내부에서 의문을 품은 적이 없지는 않지만, 마왕이 지금까지 세운 공은 마족 전체를 드높이는 것이다.


연이어 전해져오는 승전 소식은 내부의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쿠도 하루네ㅡ쿠도 가의 차기 당주인 소녀가 가진 정직함을 알기에,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렇기에 마왕군이 데트르 마도연방국의 건립을 선언하고 선전포고했을 때도 쿠라마사는 아무 망설임 없이 동참했다.


그 결정에 표면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걱정을 숨기려 하지 않는 일부 영주가 있는 건 선전포고를 받은 상대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번 상대가 신성국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들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곧 인간 모두와 천계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나 다를까, 유헤이는 당연한 우려를 품었다.


“다른 인간 나라를 침공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마왕이 요청했듯, 쿠라마사의 입장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신성국은 용사에 필적하는 괴물이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지상으로 통하는 천계의 창구나 마찬가지인 나라다.


이 세계의 질서 구조를 확립한 것이 천계. 그리고 세계가 그에 따라 움직이는지 감시하며 조정하는 신성국은 과거 몇 번이나 그 방침에 따라 나라를 멸망시킨 전력이 있다.


지금까지 쿠라마사가 신성국에게 침공당하지 않는 것은 인간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기에 일단은 내버려 두는 성격이 크다.


쿠라마사의 입장에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것이지만, 쿠라마사만의 힘으로 꼭 이길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현 상황을 유지해왔다.


“흠, 그렇군.”


마사무네는 자신의 답변을 기다리는 수족을 바라보았다.


편지의 내용 중에는 쿠라마사가 어떤 식으로 신성국 침공에 가세할지에 대해 묻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마도연방국과 쿠라마사의 관계 전반을 담당하는 쿠도에게 답장을 보내면, 그걸 쿠라마사의 총의라고 생각하고 마왕군이 움직이겠지.


이 대영주의 말 한마디가 쿠라마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만이천의 무사를 보내라.”


“존명.”


마사무네는 전혀 뜸 들이지 않고, 호쾌하게 명했다.


유헤이는 고개를 숙여 그 뜻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보였다.


쿠라마사의 병력은 아무리 말단이라도 인간 병사보다는 아득히 강하다. 그걸 그만큼이나 보낸다는 것은 마도연방국의 뜻에 강한 찬동을 표한다는 저의가 있었다.


“자네 말대로 신성국은 과거 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 인간 전사ㅡ에인헤랴르의 후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전력으로 부딪혔을 때 피해를 입는 건 당연하겠지. 국외로 병력을 보내는 것도 절대 싼 일이 아니야. 올해 예산도 다시 짜야 할 것이다.”


쿠라마사에게는 어려운 전쟁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시원스레 인정한 마사무네는 날카로운 안광을 빛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것이 상관없다. 적대세력이 에인헤랴르가 아니라 신이라고 해도 전처럼 뒷짐 지고 지켜볼 수는 없겠지. 더는 돌이키지 못할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쿠라마사의 대영주는 확신에 찬 목소리를 냈다.


수많은 마왕의 출현과 몰락을 봐온 그가 지금 이 길 말고는 쿠라마사가 택할 것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고 있다.


“유헤이여, 마도연방국이 걷는 길에 우리 쿠라마사가 있음을 모두에게 똑똑히 알려라. 영주회의를 소집해서 말이지.”


마사무네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것은 더 이상 대륙의 분쟁이 아니다. 종족 자체의 생사여탈이 걸린ㅡ우리 마족의 긍지가 걸린 싸움이다. 그 최전선에 쿠라마사의 무사가 없다면 그야말로 통탄할 일이다. 조상님의 얼굴을 봐서도, 그분들이 미처 끝내지 못한 위업을 우리 대에서 이루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유헤이의 얼굴에도 이해의 빛이 번졌다.


마사무네가 마도연방국과 협력해 이 세계의 질서 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라그나로크에서 그들의 선조가 끝끝내 이루지 못하고 잠들어야 했던 목표를 후손의 손으로 이뤄주자는 뜻은 유헤이의 심금을 울리게 했다.


지금까지 갈고 닦은 검을 드디어 뽑아야 할 순간이 왔다고 이해한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럼 명하신 대로, 지체 없이 각 영주들에게 그리 전하겠습니다.”


공손하게 고개를 재차 숙인 유헤이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갔다.


“신성국인가. 포부도 큰 남자야. 지체하는 법이 없군 그래.”


마사무네가 기분 좋게 끌끌 웃었다.


“뛰어난 부하를 빼앗긴 것에는 분하지만, 나도 그 남자가 보고 있는 미래가 어떤 것일지 궁금해지는군. 종착지가 지옥이라 하더라도 따라가 보도록 할까.”


작가의말

비행선이 등장하니까 판타지인데도 스팀펑크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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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겨울, 온천 +5 23.02.25 75 3 13쪽
247 성전의 전조 +2 23.02.19 87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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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표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가름) +3 23.01.18 91 3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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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우펜 요새 +1 22.07.30 115 5 20쪽
222 마왕의 제안 +4 22.07.26 117 4 19쪽
221 인간의 도시에, 인외가 도착하다 +3 22.07.24 113 4 15쪽
220 분열된 왕국 +1 22.07.24 111 4 16쪽
219 새로운 만남은 운명의 방향을 바꾼다 +1 22.07.22 107 5 19쪽
218 칠흑에 맞선 자의 말로 +2 22.07.18 116 4 17쪽
217 어둠에 물들지 않은 빛 +2 22.07.16 109 3 13쪽
216 지나가던 어둠이 발견한 것은 +1 22.07.16 116 4 11쪽
» 다가오는 위기, 혹은 기회 +1 22.07.09 127 5 19쪽
214 칠흑의 선언 +1 22.07.04 114 4 17쪽
213 파멸의 그림 +3 22.06.26 116 3 19쪽
212 그리고, 새로운 국면 +2 22.06.25 115 5 17쪽
211 황혼의 다짐 +2 22.06.14 111 5 19쪽
210 쿠데타 +4 22.06.04 123 5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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