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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조회수 :
137,357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22.09.15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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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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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8쪽

어둠은 확실하게 무너뜨린다

DUMMY

자이나스를 상징하는 사자가 거대한 석상의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널찍한 시청 로비.


여느 때보다 사람이 많이 들어찬 로비에 소녀 하나가 들어섰다.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는 수많은 인파를 보고도 아무런 동요 없는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살랑이는 탐스러운 꼬리와 머리 위로 크게 난 귀는 누가 봐도 여우의 것.


자이나스에서 제일 교역이 활발하기에 많은 이들이 오가는 이 도시에서 아인을 보는 것이 크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소녀가 두른 날카로운 분위기는 공기를 한층 더 무겁게 했다.


소녀의 도착을 지켜본 이들은 이 소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


그녀가 북문에서 보인 행적은 영웅으로 칭송해야 마땅한 것이긴 하나, 한번 그들을 도와줬다 해서 마냥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저 두 자루의 검의 끝이 향하는 것이 이번엔 그들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이방인이 걸친 칠흑의 군복이 상징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기에.


소녀가 로비의 정중앙에 마련된 리셉션ㅡ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사자상 바로 아래에 도달할 때까지, 누구 하나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로비를 울리는 건 소녀의 군화소리뿐이었고, 그마저도 곧 멈추었다.


침묵을 깨는 건 불편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자신이 먼저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 걸 깨달았는지, 리셉션 앞에 서있던 자네트 백작이 먼저 헛기침을 했다.


“우선 환영하네. 데트르 마도연방국의 자여. 나는 퍼시벨 자네트 백작. 이 케이프 시의 도시장이네. 자네의 이름을 들려주겠나?”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백작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얼굴에는 아주 작은 호의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첨꾼에 익숙해진 자네트 백작에게는 그 시선ㅡ별 볼 일 없는 것을 보는 것 같은 눈이 불쾌했다.


백작은 소녀가 이대로 대화에 응하지 않으면 어찌할까 생각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소녀는 입을 열었다.


“본관은 대위 쿠도 하루네. 마도연방군 군무부 총괄 대행 보좌다.”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에 잠깐 사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자네트 백작은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렇군. 우선 케이프 시에 온 걸 환영하네, 대위.”


자연스럽게 상대를 계급으로 낮춰 불렀음에도 반응이 없자, 백작은 속으로 옳다구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그녀보다 더 윗사람인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끌어갈 수 있다면, 자신과 귀족 파벌에 좀 더 유리한 조건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서 이야기하는 것도 뭐하지. 어떤가, 차와 다과를 준비했으니 장소를 옮기겠나?”


그의 말마따나 원래대로라면 나머지 이야기는 회의실에서 나눠야 하겠지만, 소녀는 로비에서 걸음을 멈춘 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거절의 의향을 담고 있다는 걸 눈치챈 자네트 백작은 곤란한 상황에 이마에 주름을 만들면서도, 미소를 유지하는 걸 잊지 않았다.


“성미가 급한 분이로군. 그럼 본론도 여기에서 하도록 할까.”


시청 직원들이 서둘러 의자와 테이블을 준비하려 했지만, 백작은 눈짓으로 그걸 그만두게 했다. 저 소녀의 태도를 생각하면 곧이곧대로 그들이 제공하는 걸 받아들이지는 않겠지.


그는 굳이 캐묻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마족은 그들을 절대 동급의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쿠도의 시선에 담긴 건 전형적인 마족이 가진, 인간을 깔보는 태도와는 조금 달랐다. 마치 아무래도 상관없는 무기물을 보는 듯한ㅡ치워야 할 장애물을 보는 시선이다.


자신이 꾸미고 있는 간계를 생각하면 상대가 경계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백작은 소녀 앞으로 다가갔다.


“먼저 감사 인사부터 해야겠지. 북문을 탈환해줘서 고맙네, 대위. 자네가 아니었더라면 최악의 경우 이 도시는 이미 함락되었을 수도 있겠지.”


북문이 그대로 뚫렸더라면 최악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확실하게 도시가 함락되었겠지만, 자네트 백작은 그들만으로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거라는 여지를 구태여 남겨두었다.


“바로는 믿기 힘들지만 자네는 홀로 북문을 탈환했다지? 정말로 훌륭한 무훈이 아닐 수 없군. 그 건에 대해서는 내 개인적으로도 충분한 사례를 하겠네.”


그리 말하며 백작은 주위 인파ㅡ각계의 관료들의 반응을 살폈다. 타국의 군인을 이렇게까지 칭찬하는 것에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자들도 있으나, 그건 소수에 불과하다.


도움을 받았다는 건 기정사실이니 반발이 나올 구석도 없는 것이겠지.


하지만 민감한 주제는 지금부터 꺼내야 했다. 백작은 사뭇 곤란한 얼굴을 만들었다.


“문제는 다름 아닌, 자이나스 왕가와 마도연방국이 나누었다는 계약에 대한 것인데... 그대들은 왕가와의 계약에 따라 이곳에 지원을 온 것이 틀림없겠지?”


쿠도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였다. 중요한 건 이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자네트 백작은 눈썹을 모았다.


“국왕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으나, 마도연방국이 이대로 계속해서 국왕 파벌과 협력하는 건 곤란하네. 가능하다면 부디 그 계약을 파기하고 우리ㅡ귀족 파벌과 손을 잡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리 말하며 백작은 소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표정으로는 그녀가 자신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백작님!”


그가 재차 묻기도 전에 인파 중에서 한 관료가 성난 얼굴로 손을 들었다.


“설마 왕가의 결정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겁니까? 아직 대화의 장이 열리지도 않은 지금 극단적 행동을 일으키는 건 반역ㅡ”


백작이 손가락을 튕기자, 하던 말을 차마 다 하지도 못하고 관료가 끌려갔다.


귀족 파벌인 자네트 백작이 통치하는 이곳 케이프 시에도 국왕 파벌에 소속해있거나 동조하는 관료가 꽤 있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입을 막아버리는 건 도시장으로서 최대권력을 쥔 그에게 있어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왕가로부터 워낙 갑작스레 통보를 받은 터라 아직 국왕 파벌을 색출해내어 배제하는 작업을 시작하지 못하던 중이었다.


“이미 우리를 완전히 자이나스로부터 퇴출하겠다는 왕가 놈들과 대화의 장? 저놈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잠시 표정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던 자네트 백작은 금방 가식적인 미소로 돌아왔다.


“생각해보게. 이건 자네가 충성하는 마도연방국에게도 좋은 이야기야.”


백작은 아무런 변화 없는 소녀의 표정을 뜯어보았다. 여전히 소녀의 속내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설득이 어느 정도는 통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지금의 왕가가 약속할 수 있는 보수라고 해봤자 별 거 아닐테지. 그에 비해 우리 귀족 파벌이 제공해줄 수 있는 건 재보, 자원등 규모가 크다. 훨씬 자네들에게 유리한 조건이라도 괜찮으니 어떤가?”


지금이 소녀의 마음을 돌릴 대목이라고 생각한 백작의 말이 빨라졌다.


“무사히 에든군을 막아낼 수만 있다면 우선교역권을 보장해줄 수도 있다네. 교역루트의 대부분은 우리 귀족 파벌이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문에서 왕가가 해줄 수 있는 약속은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지. 자이나스에서 생산하는 마법 아티팩트들이 자네의 나라에 흘러들어간다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겠나?”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마도연방국으로서는 충분히 혹할 법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자이나스를 단순히 거래대상으로밖에 보고 있지 않을 테니, 기존보다 더 좋은 조건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귀족 파벌이 자이나스의 권력 대부분을 장악한 이상, 더 크고 많은 것을 보장할 수 있는 세력과 계약을 새로 갱신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자네트 백작은 금방이라도 상대가 자신의 제안에 응할 것을ㅡ적어도 윗선에 전달해보겠다는 대답을 낼 것을 기다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 받아들일 수는 없다.”


쿠도는 아무런 고민도 보이지 않고 백작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것이다.


예상 밖의 사태에 인파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져나가기 시작하고, 소녀가 경고하듯 검에 손을 가볍게 얹었다.


“그대들은 자이나스령을 무단점거하고 있다. 즉시 퇴거하라.”


설득 끝에 들려오는 건 잠자코 왕가의 결정을 받아들이라는 통보뿐.


마치 자신의 이야기 따위는 듣지 않은 것 같은 쿠도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백작은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즉, 무슨 일이 있어도 발렌슈타인 왕가와의 계약을 파기하지 않겠다고? 그것이 마도연방국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다.”


덤덤하게 고하는 소녀는 주변의 험악해지는 분위기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자신은 생각을 바꿀 생각은 없다고 말한 이상 혼자서 적진에 쳐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다. 두려워하기는커녕 일말의 긴장도 없다.


그것은 분명 자만과 허영에서 비롯된 것일게 분명하다고 백작은 생각했다.


“이 도시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네트 가문이 다스려온 것이다. 그 유구한 역사가 국왕의 말 한마디로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나?”


자네트 백작은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자이나스의 권력 대부분은 우리 귀족파벌이 가지고 있다. 왕가가 그런 공표를 한 이상, 왕도도 더이상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야. 계약 상대가 없어지는 건 자네들도 곤란하겠지?”


백작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왕도방위군에는 이미 재상님의 입김이 닿아있지. 그분이 손가락만 까딱해도 병력이 움직일 테고 발렌슈타인 왕가는 그걸로 끝이다. 어때, 계약 상대인 자이나스 왕가를 살려둔다는 의미에서도 우리를 적으로 돌리는 건 좋지 않을 테니 한번 잘 고려해보지 않겠나?”


체스판에서 아주 치명적인 한 수를 두기라도 한 것처럼 기세등등하게 백작이 말했지만, 쿠도는 그저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쿠도의 눈빛을 받은 백작은 순간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그 차가운 시선은 그가 한평생 쌓아온 명예와 자신감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했다.


“네 동료와 같은 운명을 맞고 싶지 않다면 즉시 퇴거하라. 마왕 각하께서는 어리석음에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니.”


“자, 잠깐... 지금 뭐라고 했나. 동료라고?”


백작이 더듬거렸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일의 가능성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마도연방군은 설마 벌써 왕도에까지 손을 댔나?”


쿠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아마 그가 우려하는 게 사실일 거라는 긍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 하, 하지만 자이나스의 마도연방군은 소규모일텐데...!”


만일 재상이 리타이어하기라도 했다면 귀족 파벌의 근간이 흔들린다. 정말 이 소녀의 명에 따라 모든 걸 내던지고 퇴거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던 백작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확실히 마도연방국은 강력하다. 데트르를 떠나 미스드나 대륙에까지 마수를 뻗으려는 그놈들은 에든 왕국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자이나스가 도저히 얕잡아볼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그가 우위에 있었다.


상대는 고작 소녀 하나, 그리고 이쪽은 최소한 수백의 병사들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 이곳은 그의 도시였고, 승산은 그에게 있었다.


성공적으로 설득하지 못해서 일이 이렇게 된 건 아쉽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는 건 그 뒤ㅡ위협을 배제한 뒤라도 상관없다.


어찌 되었든 간에, 협상이 결렬된 이상 이 소녀를 살려 보낸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앞으로 그 마족 놈들을 적대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전력을 깎는 게 좋지 않겠는가.


“여봐라!”


자네트 백작의 호통에, 밖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백작은 여전히 가만히 서 있는 쿠도를 가리켰다.


“저년을 당장 죽여라! 명실상부한 자이나스의 적이다!”


적은 고작 소녀 한 명.


원래 같았으면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라도 구속을 명령했겠지만, 쿠도는 홀로 북문을 탈환했다는 뛰어난 실력자다. 혹시 모르니 죽여두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되었다.


관료들이 재빨리 자리를 피하고, 병사들이 소녀에게 달려드는 시점에서 백작은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선 제일 가까운 도시에 파발을 보내 왕도에서 무엇이 벌어졌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쿠도가 암시한 것처럼 왕도의 동료들ㅡ특히 재상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면 지금 알아두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뒤이어 찾아올 전개ㅡ귀족 파벌이 힘을 모아 마도연방국과 에든을 동시에 막아내는 구상을 찬찬히 그려보던 백작은 자기도 모르고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어?”


어안이 벙벙한 백작의 얼굴 옆으로, 누군가의 팔 한쪽이 날아갔다.


생각을 멈추고 현실로 돌아온 그의 눈에 비친 건 순식간에 도륙이 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


쿠도는 천천히 걸어갈 뿐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백작에게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가 준비해둔 병사들이 철퍼덕 소리를 내며 고깃덩이로 변해버렸다. 눈부신 섬광이 일때마다 어림잡아 수십에 달하는 인간이 일제히 내장과 뇌수를 쏟으며 쓰러졌다.


도대체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자신은 악몽을 꾸고 있기라도 한 것인가.


백작이 무어라 할 말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그가 시청 바깥에 대기시켜두었던 병력 전원이 사망했다.


피가 웅덩이를 이루어, 백작의 발치에까지 도달했다. 그 붉은 웅덩이에 닿자마자 백작은 새된 소리를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 정도로 강력할 리가 없다. 인간이 마치 벌레처럼 죽어 나갔지 않은가. 아무리 마족이라도, 이 정도로 강력할 수는.


자네트 백작은 새하얘진 머리로 자신이 살길을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사실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을 무렵에는, 쿠도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ㅡ잠ㄲㅡ”


그 더듬거림을 끝으로, 모든 걸 집어삼키는 섬광이 그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몇 차례의 섬광이 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청 건물에서 그림자가 하나 나왔다.


쿠도는 뒤를 돌아보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왼손을 들어 올려 활짝 폈다.


그녀의 손 위로 푸른 불꽃이 일고, 그녀는 그것을 시청으로 날려 보냈다.


화르륵ㅡ


여우불이 닿자마자 시청 건물 전체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유구한 역사 동안 제자리를 지켜온 케이프 시의 상징이 겁화에 휩싸인다.


푸른 불꽃 속에서 우지끈 무너져가는 시청을 잠깐 바라본 쿠도는 통신석을 꺼내들었다.


◆ ◆ ◆ ◆ ◆ ◆ ◆


“그런가. 결국 퇴거 요구엔 응하지 않았군.”


집무실 의자에 몸을 파묻다시피 한 나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주었다, 쿠도 대위.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려면 어느 정도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보나?”


“최소 3할입니다. 케이프 시는 귀족 파벌에 속한 자가 대부분이기에, 바로는 항복을 얻어내기 힘듭니다. 전력의 차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도시방위병력도 물러서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집무실 벽에 비치는 반투명한 스크린 너머의, 불타는 시청 건물을 뒤로한 여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각하, 작전은 이대로 진행하시겠습니까?”


“물론이다, 대위. 섬멸전을 예상한다면 리우 에스타와 2개 보병중대를 보내지. 합류 장소에 관한 내용은 그녀에게서 직접 듣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쿠도가 경례를 올리는 것으로 통신이 끊어졌다. 케이프 시가 아닌 다른 곳의 영상을 실시간으로 재생 중인 스크린 한쪽엔 대기 중인 카니앗이 비치고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이그ㆍ시피아 소령.”


“아닙니다, 마왕 각하.”


내가 지난번 하사한 총을 메고 있는 다크엘프의 뒤로 바닥을 굴러다니는 시체들이 힐끗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은 자이나스 왕도의 왕성이다. '1차 청소'를 마친 참이겠지.


“왕가의 일원 모두와 국왕 파벌에 속한 관료들은 전원 무사히 보호하고 있습니다. 귀족 파벌의 손이 닿은 자는 전원 처분했고요.”


왕도엔 카니앗과 3개 중대 규모의 병력을 보내두었다.


아무래도 자이나스의 재상은 왕가의 이번 결정ㅡ특히 귀족 파벌을 퇴출하는 것에 크게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모양으로, 우리가 늦었다면 시아의 가족이 위험했을 거라고 했다.


“아직 제대로 집계하진 못했지만, 저희를 막으려던 왕도방위군은 과반수가 사망했습니다. 적의를 보이는 자들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전투를 진행했기에.”


“그건 참 장관이었겠군.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쉬워. 소령의 무기는 성능이 확실하니 분명 인간들로 붉은 꽃을 피웠겠지.”


“예, 각하. 하사해주신 무기가 부끄럽지 않은 전과를 세웠습니다. 왕성 자체에는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으려 했으나, 어느 정도는 보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성이 터져나갔다는 건 인간들 역시 터져나갔다는 것이다.


분수를 모르고 나의 부하에게 덤벼드는 병사들이 벌레처럼 죽어 나자빠지는 광경을 상상하던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계약 상대가 살아있다는 건 다행이군. 다른 특별사항은 없나?”


“예, 각하. 재상은 일단 생포했습니다. 귀족 파벌과의 협상 재료로 남겨둘까요?”


“좋은 생각이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즉답했다.


“놈들은 국가를 내부에서부터 갉아먹는 암덩어리다. 조금이라도 남겨봤자 미래의 안정적인 통치에 위협이 될 뿐이야.”


“알겠습니다. 즉시 처분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기왕이니 처형은 공개로 하도록 해라, 이그ㆍ시피아 소령. 재상 놈의 권력에 핍박받던 놈들에겐 좋은 구경거리가 되겠지.”


군화를 맞부딪치며 카니앗이 경례를 올리고, 그녀와의 통신도 끊어졌다.


“그래, 썩어빠진 시스템은 모조리 갈아엎는 것이 답이다.”


나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혼잣말을 했다.


슬슬 가름도 작전지에 도착했을 무렵이다. 앞으로의 전개는 신성국과의 전쟁에 앞서 좋은 여흥이 되어주겠지.


내가 든 잔에서 찰랑거리는 위스키에 비친 내 얼굴은 기대로 차 있었다.


“자, 허망한 꿈속에 갇혀 살던 놈들은 과연 자신의 몰락에 어떻게 반응할까.”


작가의말

스마일라식하고 아직 눈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늦어졌네요. 슬슬 다음 표지도 주문 넣을 생각이니 해당되시는 분께서는 표지로 원하는 캐릭을 선정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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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어둠을 처단하는 창 +3 23.07.15 57 3 15쪽
261 금속은 생각보다 무르다 +3 23.07.05 67 3 13쪽
260 천사와 대척점에 선 것은 +2 23.06.18 75 3 15쪽
259 기술의 진보는 곧 살육의 진보 +3 23.06.10 70 3 16쪽
258 포신이 품은 마법 +3 23.05.20 73 3 10쪽
257 피의 무게는 죄의 무게만큼 +3 23.05.18 73 3 11쪽
256 신의 활, 그 시위가 품는 것은 +1 23.05.14 66 3 16쪽
255 매듭을 짓지 않으면 +2 23.05.09 70 3 14쪽
254 공중 요새 +3 23.04.29 74 3 16쪽
253 마도 vs 고유스킬 +5 23.04.05 78 2 15쪽
252 인간 대 인간 +3 23.03.25 86 3 14쪽
251 이빨을 드러낸 어둠 +4 23.03.18 82 3 14쪽
250 예술은 폭발이다 +3 23.03.10 89 3 12쪽
249 전쟁 발발 +2 23.03.02 92 2 13쪽
248 겨울, 온천 +5 23.02.25 79 3 13쪽
247 성전의 전조 +2 23.02.19 93 4 13쪽
246 이스 바실루스 +1 23.02.15 89 3 14쪽
245 레벤 연합의 침공 +1 23.02.11 82 2 14쪽
244 약자의 운명 +1 23.01.28 96 3 16쪽
243 표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가름) +3 23.01.18 92 3 1쪽
242 또 다른 숙청의 시작 +1 23.01.14 96 3 14쪽
241 찬탈의 하겐 +1 23.01.01 101 4 14쪽
240 추악한 진실 +1 22.12.25 111 4 16쪽
239 개혁의 불씨 +1 22.12.10 109 4 15쪽
238 백색 죽음이 깔린 추도식 +1 22.11.20 107 3 14쪽
237 다크엘프와 여우의 진급 +1 22.11.13 101 4 10쪽
236 두 번째 보루의 소실 +1 22.11.13 99 4 10쪽
235 꺾인 십자가, 꺾이지 않는 신념 +1 22.10.31 106 4 12쪽
234 폭살의 르몽 +3 22.10.19 122 4 16쪽
233 의외의 첫인상 +1 22.10.14 113 5 13쪽
232 사절단의 방문 +1 22.10.12 155 3 13쪽
231 짙게 드리우는 전운 +1 22.10.07 121 4 18쪽
230 어둠에 대처하는 자세 +1 22.09.29 116 4 18쪽
» 어둠은 확실하게 무너뜨린다 +2 22.09.15 129 5 18쪽
228 치명적 착각 +1 22.08.27 107 3 17쪽
227 구원의 손길 +4 22.08.19 115 5 18쪽
226 공주의 각오 +1 22.08.15 121 6 17쪽
225 강요되는 선택 +1 22.08.08 108 4 17쪽
224 그 불꽃은 푸른 색을 띠고 있다 +5 22.08.04 109 5 19쪽
223 우펜 요새 +1 22.07.30 115 5 20쪽
222 마왕의 제안 +4 22.07.26 118 4 19쪽
221 인간의 도시에, 인외가 도착하다 +3 22.07.24 115 4 15쪽
220 분열된 왕국 +1 22.07.24 111 4 16쪽
219 새로운 만남은 운명의 방향을 바꾼다 +1 22.07.22 109 5 19쪽
218 칠흑에 맞선 자의 말로 +2 22.07.18 117 4 17쪽
217 어둠에 물들지 않은 빛 +2 22.07.16 111 3 13쪽
216 지나가던 어둠이 발견한 것은 +1 22.07.16 117 4 11쪽
215 다가오는 위기, 혹은 기회 +1 22.07.09 128 5 19쪽
214 칠흑의 선언 +1 22.07.04 116 4 17쪽
213 파멸의 그림 +3 22.06.26 116 3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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