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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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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5.18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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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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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9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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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어둠에 대처하는 자세

DUMMY

에든 남부의 대도시, 칼린트.


응접실의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은 담피에르 후작은 피곤함에 찌든 얼굴로,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데트르 마도연방국으로부터 왔다는 사자는 다짜고짜 담피에르 저택의 문을 두드려, 후작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저택은 타국의 사자를 맞이하는 공적인 업무를 보는 곳이 아닐뿐더러 사전에 외교 채널을 통한 연락도 전혀 없었지만, 먼저 그 사내의 모습을 보고 돌아온 자들은 입을 모아 그는 마족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마도연방국은 에든 왕국과 아직 아무런 왕래가 없었기에 동맹국인지 적국인지조차 애매한 나라다. 애초에 에든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조차 가늠이 가지 않았다.


관료들은 위험할 수 있다며 함부로 만나면 안 된다고 만류했지만, 그냥 거절하는 건 뭔가 꺼림칙해서 담피에르 후작은 순순히 그를 저택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무리 국경이 근처라고는 해도, 무려 후작 작위를 가진 담피에르 가의 저택까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도착했다는 것에서 일종의 불길함을 느낀 것이다.


지금은 대규모 군사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긴박한 상황.


한눈에 마족임을 알아볼 수 있는 차림의 외지인이 국경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기도 한다면 묻지도 않고 죽이거나 적어도 구속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마치 동네 빵집을 들르는 것처럼 국경을 뚫고 칼린트의 중심부까지 도달했다.


국경 보안에 엄청난 구멍이 난 일대사였지만, 마도연방국의 정예라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마도연방국의 공식적인 담보가 없는 상황에서도, 이 사실이 아이러니하게도 사내의 신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일단 이 사자가 누구든 간에 대단한 실력자인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 담피에르 후작은 호위를 일곱 명이나 늘리고 나서야 그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응접실을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건 개과의 꼬리가 달린 사내. 보통 타국에 사자를 보낼 때는 정중한 복장이 일반적이지만, 그는 금방 전쟁터에서 돌아오기라도 한 듯 검은 군복 차림이었다.


아직 인사도 하지 않았지만 사양도 않고 바로 소파에 털썩 앉은 훤칠한 키의 청년은 이렇게나 빨리 만남이 성사된 것에 대한 감사도, 후작에 대한 예의도 전혀 차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요구는 하나야, 담피에르 후작. 당장 에든군을 자이나스령에서 후퇴시키고 끼친 손해액 전액을 배상할 것.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엔 마도연방국은 에든 왕국을 멸해야 할 적으로 규정할 텐데, 우리가 군을 본격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자이나스에 쳐들어온 에든군 말고도 에든 왕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멸망하게 되겠지.”


그건 외교적 대화보다는 일방적인 통보에 훨씬 가까운 말이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당연하게도 담피에르 후작이 거세게 반발했지만,


“말해두지만 이건 협상의 여지가 없는 일이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거절해도 상관없어. 우리로서는 그냥 한꺼번에 전부 밀어버리는 것도 편하니까.”


후작이 호위로 둔 검사와 마법사들이 긴장된 태세로 무기에 손을 얹는 와중에도 남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 정도는 위협 축에도 들지 못한다는 듯이.


“내 이름은 가름. 데트르 마도연방군 군무부 총사령관 권한대행이니까 기억해둬. 오, 이 과자 맛있어 보이네. 어쨌든 내가 한 이야기, 잘 생각해보라고.”


응접실 테이블에 놓인 과자를 자연스럽게 집어 먹은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유유히 떠나간 것이었다.


그로부터 약 15분이 흐르고, 지금으로 넘어간다.


너무 이야기가 빨리 끝나서 사실 이건 농담이 아니었을까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던 담피에르 후작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예요, 후작님?”


응접실 벽에 기댄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던ㅡ에든 사람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금발 여자가 물었다.


왼눈에 안대를 찬 그녀는 언뜻 보면 드레스처럼 보이기도 하는 검은 망토 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바지의 앞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넣었다.


“그 맛도 없는 걸 잘도 먹는군, 하겐. 매운맛 사탕이라니,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취향이야.”


후작이 중얼거리고, 하겐이 꼬리를 살짝 올렸다.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지나가는 남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의 미인이었지만, 어딘가 확실히 설명할 수 없는 음침한 구석이 있었다.


“동방의 국가에선 스트레스받을 때 이런 거로 해소한다고 해요. 저는 꽤 여러모로 무뎌진 몸이라 이런 게 아니면 맛이 잘 안 느껴지기도 하고.”


담피에르 후작은 하겐이 매운맛 사탕을 하나 더 입에 넣는 걸 지켜보다, 다시 한숨을 길게 쉬었다.


“우리 군이 케이프 시 함락에 실패했다는 보고는 이미 받아보았다.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실패 원인이 마도연방국 측에서 보낸 병력 때문이라고 추정하는 것도 다 알고 있다.”


후작은 자신은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그렇기에 그 불손한 남자가 말한 것을 허풍으로 받아들이는 건 좋지 않았다.


그 아무리 불손하고 난데없는 위협이라고 해도, 상대가 그 마도연방국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네는 그가 남긴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렇기에 담피에르 후작은 하겐의 의견을 물었다. 그녀라면 자신의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보다 솔직하게 대답해줄 거라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분석해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 장군이 한 말이요?”


“장군? 가름이라는 남자 이야기가 아닌가?”


후작이 되묻자, 하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 사람 말이에요, 계급장이 준장이던데요. 아무리 미스드나 계급장이랑 달라도 그 정도는 알아둬야 하지 않겠어요, 후작님.”


그 마족 사내가 무려 준장이었다는 사실에 담피에르 후작의 이마가 지끈거렸다. 그렇다면 마왕의 최측근임이 분명할 텐데,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자가 말한 거라면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 그래서 그 준장이 한 말은 어떻게 생각하나?”


“어쨌든 저한테 물어봐도 곤란해요. 솔직히 에든이 어떻게 되든 제 알 바도 아니고.”


“부탁하네. 자네의 견해를 꼭 듣고 싶다.”


하겐이 전혀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후작은 재차 부탁했다. 어쩔 수 없다는 시선을 강하게 주고 나서야, 하겐은 입을 열었다.


“그러네요. 마도연방국과 그 수장인 마왕은 가공할만한 적이죠. 그런 놈들이 적에 포함되었다면 자이나스 침공작전은 즉시 중단하는 것이 옳겠네요. 홈그라운드도 아닌 곳에서 얼마나 버티겠어요.”


“즉, 지금의 에든군으로는 승산이 전혀 없는 상대라고?”


“물론이죠.”


쾌활하게 즉답하는 하겐과 다르게, 담피에르 후작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에든 국왕ㅡ칼리더스 2세는 절대 침공을 멈추지 않을 거라는 게 문제였다. 이번 자이나스 침공은 큰 성과를 내세워서 그의 권력을 더 공고히 하려는 의도도 들어가 있으니까.


선대보다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이 있는 칼리더스 2세는 이것을 장기집권할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다. 아무리 아군의 희생이 나더라도 마왕이든 마족이든 뭐든 에든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알려주라고 지껄일 것이 뻔하다.


“...놈들도 궁지에 몰렸는지 말도 안 되는 수를 뒀군. 신성국의 동맹국이 마족 놈들과 연합이라니.”


후작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이나스를 궁지에 몰아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이 에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대로면 바로 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자멸을 자초한 꼴이다. 애초에 자이나스의 침공을 고깝게 여기고 있었던 담피에르 후작 처지에선 내가 경고하지 않았냐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이딴 군사작전을 일으키지 말고 재정을 탄탄히 하는 게 좋았을 거라는 푸념은 지금 해봤자 아무 소용없겠지. 말해주게, 하겐. 자이나스 침공은 이대로 실패한다 치고, 마도연방국이 에든에 역으로 침공해온다면 그들을 막을 수 있겠나?”


“그것도 불가능해요. 마도연방국의 분노를 사는 순간 이 나라는 끝이에요.”


하겐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데트르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종합하면 에든은 일주일도 못 버틸 테지요. 있는 병력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무리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에든 최고의 마법사인 자네의 능력을 써서도 말인가?”


하겐은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동시에 절반은 족히 드러낸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흔들렸지만, 겉모습만 보고 그녀에게 막무가내로 들이대다가 목숨을 잃은 남자들의 수가 이미 두 자리를 넘는다는 걸 아는 후작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중급 마법ㅡ즉 4급 정도의 공격 마법을 쓸 수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것도 인간 기준으로는 꽤 높은 편에 속하고요.”


높은 편이 아니다. 4급의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는 미스드나 대륙을 전부 뒤져봐도 하겐 하나밖에 없다. 1급에서 3급에 속하는 상급마법은 거의 전설 속의 산물로 치부되고 있으니 말이다.


마법을 중시한다는 자이나스의 인간들조차 전 궁정 마법사가 노쇠하여 죽은 이후로는 6급에 그치는 수준이다.


그렇게 점점 기대치가 낮아진 끝에, 요즘은 8급 마법을 쓴다고 해도 고위마법사로 인정받을 정도로 마법은 나날이 쇠퇴해가고 있었다. 굳이 더 상급의 마법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충분히 풍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으니 현재에 만족하자는 풍조도 한몫했다.


그런 의미에서 무려 4급 마법을 쓸 수 있는 하겐의 소문을 듣고 수년 전 비밀리에 에든에 영입한 것은 담피에르 후작의 인생 업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하겐을 데트르에서 이곳으로 데려오기 위해 설득하는 데는 많은 금액이 들어갔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 혼자서도 도시를 궤멸시킬 수 있으니.


겉치레를 중시하는 에든 왕국에서 하겐의 언행은 여러모로 문제를 많이 일으켰지만, 후작은 고작 그런 이유로 그녀를 내칠 생각이 없었다.


“그래, 자네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겠나? 마법의 심연을 들여다본 자네라면.”


하겐의 마법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는 후작은 도저히 그녀보다 뛰어난 마법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정작 하겐 본인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제 평가를 좋게 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마왕과 그가 부리는 간부들의 힘은 제 능력을 아득히 초월할 테죠. 무엇보다 유디트 황국의 건은 후작님도 잘 알지 않습니까? 방금 다녀간 가름이라는 남자도 이기지 못할 가능성이 커요.”


“... 그런가.”


후작은 시선을 내렸다. 유디트 황국에서 일어난 일이 에든에서도 일어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말해주게.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겠나?”


“사면초가에 맞닥뜨린 후작님에겐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겠네요.”


담피에르 후작이 거액을 들여 데려온 하겐은 애초에 에든 시민이 아니다. 그녀가 담피에르 후작가에서 일하는 건 단지 금전적인 계약에 의해서일 뿐, 에든의 앞날을 위한 근심은 전혀 없었다.


이렇듯 애국심이라고는 전혀 없고 이익만을 따지는 하겐이기에, 그녀의 의견은 지금 무엇보다 귀중했다.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 그게 첫 번째 선택지예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하겐은 에든을 버리자는 이야기를 너무 쉽게 꺼냈다.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으면 어디에서든 다시 살아볼 수는 있을 테죠. 물론, 마도연방국이 무섭게 세력을 불리는 지금은 그 어디도 안전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요.”


후작은 시선으로 계속해서 다음을 말하라고 재촉했다. 그 시선을 받은 하겐이 훗, 하고 웃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ㅡ”


제2의 선택지를 들은 후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게... 가능하다고?”


“모든 걸 잃어버리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후작님이 에든에서 권력의 탑을 얼마나 공들여 쌓았는지 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죠.”


후작이 고뇌에 빠져들자, 하겐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후작님께서 그 결정을 내리신다면 저도 참여하도록 하죠. 저라면 그걸 택할 테고, 근 몇 년 사이 쌓인 정도 있으니 말이에요.”


“...”


후작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하겐, 최전선에 연락해서 침공작전을 전부 중지하도록 하라. 상황이 바뀌었다.”


◆ ◆ ◆ ◆ ◆ ◆ ◆


천사라는 것은 신의 명을 누구보다 충실히 수행하는 천계의 길잡이로, 신에 제일 가까운 자리에 선 4대 천사는 각자 신이 직접 하사한 무기를 갖고 있다고 한다.


미카엘의 창.

가브리엘의 지팡이.

라파엘의 서.

우리엘의 검.


이 무기들은 하나하나가 지상에 최대최악의 재해를 일으키는 힘을 가졌고, 4대 천사는 이를 사용해 천계의 적을 처단하여 낙원 밖으로 추방할 수 있었다.


천계의 적이 다시금 야망을 키울 것을 우려한 4대 천사는 그들의 사명인 천계의 수호를 위해, 유일하게 천계로 통하는 길목을 자처한 충실한 종ㅡ지상의 신도에게 그것을 빌려주었다.


지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천계의 무기가 한낱 인간의 손에 쥐어진 것이다.


한때 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라그나로크에서 싸운 인간들이 신의 대리인인 천사의 무기라는 강력한 힘을 휘두른다.


인간들이 모여 세운 성지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신의 뜻을 집행하는 나라가 되었으며, 지금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유일신 루미아의 의지를 온 세상에 관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인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어두운 통로를 지나, 나는 거대한 석상을 마주하고 섰다.


이것이 그 나라가 사전에 설치해둔 안전장치 중 하나로, 지금도 끊임없이 강력한 마나를 송출하고 있다. 추가 공급이 없어도 마나가 바닥나지 않는 것은 신의 기적이라는 것 덕분이겠지.


“듣던 대로군.”


얼마나 오랜 시간 전에 지어진 것일까, 그 석상의 주변에는 먼지가 가득 내려앉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석상 자체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가브리엘.”


내가 부르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그마한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시간 동안 깨끗이 서 있는 석상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걸친 얇은 백색 토가도 이 지저분한 통로를 지나왔음에도 흙 하나 묻지 않은 상태였다.


“틀림없다.”


그 대답을 들으며 나는 케이프 시의 외곽까지 직접 행차한 이유ㅡ지팡이의 모습을 본뜬 거대한 석상을 바라보았다.


“이게 가브리엘의 지팡이인가. 생각보다 화려한 모양이군.”


옆을 슬쩍 보았지만, 과묵한 대천사는 별 반응이 없었다. 원본이 아니라 모습을 베꼈을 뿐인 석상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


“신앙이라는 것이 원래 겉모습에 고집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군. 술식의 일부를 구성할 뿐인 부품에 이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나?”


원본을 베꼈다고는 하나 객관적으로 뛰어난 석상을 보고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 살짝 죄책감이 든 내가 말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이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예술을 멋없게 파괴하는 건 내 미학과 반하는 일이었다.


“겉모습 또한 술식의 완성도를 좌우한다. 4대 천사의 무기를 본뜬 것으로 신성력이 증가하니.”


가브리엘이 여전히 무미건조한 톤으로 답했다. 성마법이 위력에 비교해서 쓸데없이 화려한 구석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까.


“그런 법인가··· 적어도 큰 폭발을 일으킬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자이나스의 유서 깊은 유적이라고 하니 그만두지.”


나는 손을 내밀어, 지팡이 석상에 검지를 닿게 했다.


“네가 들어야 마땅할 원본도 곧 되찾게 해주겠다, 가브리엘. 이게 그 회수의 시작이니 말이지.”


내 검지가 석상에 닿자마자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미세한 진동이었다.


그것은 점점 커지더니, 석상의 윗부분부터 붕괴가 시작되었다. 요란한 소리 없이, 차분한 붕괴가 점차 석상 전체를 집어삼켰다.


조용히 영겁의 세월을 버텨온 석상이 산산이 부서져 가고,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는 데까지는 20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조각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석상이 어딘가로 보내고 있던 마나의 흐름이 끊어지는 게 느껴졌다.


추가작업이 필요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석상을 부수는 것으로 충분한 모양이었다.


고운 가루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잔해를 빤히 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몇 걸음 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안내인을 향했다.


“이걸로 이르지만, 첫 번째 대가는 먼저 받아갔다. 하지만 괜찮은 건가? 아직 완전히 발렌슈타인 왕가를 옹립하거나 귀족파벌을 몰아낸 것은 아닌데 말이야. 이렇게 대가만 먼저 지불하는 건 신경이 쓰일 것 같은데.”


시아 폰 발렌슈타인은 내 말에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제 뜻은 마왕 폐하와 함께하니까요.”


일국의 공주인 그녀가 내게 이렇게 심취하게 된 이유가 뭘까, 생각하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방법을 쓰지 않아도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이상, 이유는 크게 상관없었다. 중요인물이 자발적으로 내게 협력한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두 번째 장소는 분명 게트라일이었지. 그쪽도 귀족파벌이 점거하고 있으니, 퇴거 작업이 필요하겠군.”


나는 부서진 석상을 뒤로하고 유적의 출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브리엘과 시아가 내 뒤를 따랐다.


“앞으로 셋, 인가.”


작가의말

다음 표지는 가름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괜찮은 작가분 찾아서 의뢰 넣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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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공중 요새 +3 23.04.29 70 3 16쪽
253 마도 vs 고유스킬 +5 23.04.05 75 2 15쪽
252 인간 대 인간 +3 23.03.25 84 3 14쪽
251 이빨을 드러낸 어둠 +4 23.03.18 81 3 14쪽
250 예술은 폭발이다 +3 23.03.10 87 3 12쪽
249 전쟁 발발 +2 23.03.02 89 2 13쪽
248 겨울, 온천 +5 23.02.25 75 3 13쪽
247 성전의 전조 +2 23.02.19 86 4 13쪽
246 이스 바실루스 +1 23.02.15 87 3 14쪽
245 레벤 연합의 침공 +1 23.02.11 79 2 14쪽
244 약자의 운명 +1 23.01.28 94 3 16쪽
243 표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가름) +3 23.01.18 90 3 1쪽
242 또 다른 숙청의 시작 +1 23.01.14 95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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