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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5.18 22:05
연재수 :
305 회
조회수 :
136,466
추천수 :
3,289
글자수 :
1,694,467

작성
22.10.1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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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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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6쪽

폭살의 르몽

DUMMY

클라이스트 백작가가 제공해준 식사를 마치고 나와, 인근의 한적한 해변을 걷는 시아의 발걸음이 평상시보다 훨씬 가벼웠다.


최근에는 이것저것 긴장해서 편하게 마음 놓고 식사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일까, 한시름 놓고 콧노래까지 부르며 걷는 시아는 잠시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일상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걷고 있자니, 시아의 뒤를 따라가던 동행인ㅡ류셀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식사가 마음에 들었나보군.”


“아, 신선한 해산물은 왕도에서는 구하기 힘드니까요...”


공식적인 자리에서 너무 많이 먹은 건가, 생각하며 시아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마물 토벌을 위해 기사단과 함께 전선에서 싸울 정도로 평소 자기관리가 확실한 그녀이지만, 게트라일의 요리를 앞에 두니 눈이 돌아가서 식단 따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겠지.


“조금 있으면 제2보루에 도착합니다.”


쑥스러운 표정을 지우며 시아가 손에 든 지도를 힐끗 보았다.


자이나스에는 4개의 보루ㅡ아주 오래전 신성국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유적이 존재한다.


그것은 자이나스 왕가와 신성국 사이의 흔들림 없는 맹약을 상징하는 것이다. 교역을 핑계 삼아 정기적으로 보루의 건재함을 알리러 신성국에 자이나스의 사절이 오갈 정도로 중요한 시설이라는 건 시아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마왕에게 심취된 시아는 그것들의 위치를 아무런 고민 없이 말해주었다.


그 선택이 신성국에게 어떤 불이익이 될지 몰랐지만, 시아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자이나스를 저버린 신성국과, 바닥까지 떨어진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준 마왕 중 하나를 택하라면 언제나 후자를 택할 것이다.


시아는 슬쩍 마왕의 고운 옆얼굴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젠 이 마왕이 그리는 세계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류셀 블레이크라는 남자는 그녀의 구세주였고, 자이나스를 붕괴의 위험으로부터 지켜낸 영웅이기도 했으니.


“아, 그러고 보니 이번 보루는 해상동굴에 있다고 하는데, 수영복을 챙겨오지 않아도 되었을까요?”


퍼뜩 생각난 시아가 물었다.


“글쎄다. 굳이 수영할 필요가 있을까?”


류셀이 턱에 손을 짚으며 되묻는다.


시아도 직접 가본 적이 없으니 알 길이 없지만, 지도상으로 제2보루는 해상동굴의 아주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동굴의 입구가 좁기 때문에 보트 따위를 가져오지는 못한다기에 그냥 맨몸으로 왔지만, 생각해보니 최심부로 들어가는 건 수영이 아니고선 답이 없다. 카누 같은 게 있었으면 사용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 또한 자이나스에서는 쓰이지 않는 물건이다.


수영이 특기인 시아도 역시 이대로 옷을 입고 헤엄치는 건 자신이 없다. 젖은 옷이 무거워서 자꾸 밑으로 가라앉을 테고, 그러면 제대로 자세를 유지할 수 없다.


물론 아예 옷을 벗어버리면 상관이 없겠지만, 역시 그렇게 쉽게 훌렁훌렁 알몸이 되어버리는 건 공주 실격일 것이다.


그녀와 함께 걷고 있는 이 마왕도 챙겨온 수영복이 없을 테니 그녀와 함께 알몸ㅡ최소한 속옷 바람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알몸의 두 사람이 사이좋게 헤엄치는 걸 상상한 시아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보니 어쩌면 이것도 좋은 기회가 될지도ㅡ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나? 기분이 무척 좋아보이는데.”


“아, 아닙니다!”


전류가 흐르기라도 한 것처럼 시아가 찌릿, 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는 서둘러 야릇한 뇌내망상을 지워버렸다.


“그,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현지 상인들에게 연락해서 수영복을 준비하겠습니다ㅡ”


자신의 본분을 자각한 시아가 말했지만, 마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류셀은 고개를 흔들며 빙그레 웃었다.


“걱정하는 게 뭔지는 알겠지만, 그런 종류의 대책도 마련해두었으니 말이지.”


그는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시아의 얼굴을 스윽 보더니, 별것 아니라는 어투로 말한 것이었다.


“가보면 알게 될거다.”


◆ ◆ ◆ ◆ ◆ ◆ ◆


시아가 예측한 대로, 둘은 15분 정도 게트라일의 해변을 걸어서 유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유적이 보이는 곳까지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걸을 수 있는 해변이 끊기고 절벽이 시작되는 곳에 동굴의 입구가 있었으니까.


역시 여기서부터는 수영을 해야 하지 않냐고 물어보려던 시아였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왕이 어째서 걸음을 멈췄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복장이 대단히 이질적인ㅡ마치 교회에서 일하는 것 같은 남녀가 누군가를 기다리듯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을 느끼고 시아가 허리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자이나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복장이 아니다. 특히나 게트라일에서 교회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터다.


“과연, 주교님의 말씀대로군.”


커다란 바위 옆에 서있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깨에 기대놓고 있던 대단히 큰 십자가에 박힌 문양을 보고 시아가 눈을 크게 떴다.


“이, 이놈들은 신성국의ㅡ”


“맞아...”


어린 나이로 보이는,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시아의 말을 끊었다.


“너희들...은 신성국의 적... 그러니 토벌할 거예요오···”


대단히 힘이 빠지는, 늘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소녀가 시아와 류셀을 가리켰다.


푹신한 토끼 인형을 안은 그녀의 행동은 일견 사랑스러워 보였지만, 시아는 그 목소리에서 지울 수 없는 서늘함을 느꼈다.


“폐하, 이 놈들은 천경입니다!”


시아가 다급히 말했다. 몇 번이나 왕래한 경험이 있기에 신성국에 대해 대략적이나마 사정을 알고 있는 그녀는 그 문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저들이 어디 소속인지 알고 있었다.


“신성국의 최정예 전력입니다. 당장 병력을 호출하며 후퇴를ㅡ”


퇴각을 진언하려던 시아는 류셀의 얼굴을 보고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매우 즐겁다는 듯 작은 미소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류셀은 왕이다. 그 정도의 위치에 있는 자가 보통 이런 상황과 맞닥트리면 당황하며 자신의 목숨을 보전할 방법을 궁리하겠지만, 류셀은 오히려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예상대로 도착한 모양이군. 나의 사랑스러운 적들이.”


남자가 천천히 일어나며 십자가를 등에 지고, 소녀도 위협적인 시선을 보내지만 류셀은 그저 즐거워 보이기만 했다.


그 순간, 시아의 귀는 평화로운 해변가에서는 절대 들리지 않아야 할 소리를 포착했다.


뭔가 팽팽히 당겨지는 소리를 들은 시아가 뭐라고 경고하기도 전에, 류셀에게 화살이 여럿 날아들었다.


흰빛을 품은 화살은 전지전능한 루미아의 힘을 빌려 마에 대한 속성을 강화한 것으로, 일반적인 마족이라면 스치는 것만으로 중상을 입는 위험한 물건이다. 신성국이 자랑하는 무구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 화살들이 어째서인지 힘없이 나가떨어지는 게 시아의 눈에 비쳤다.


류셀은 여전히 가만히 서 있을 뿐. 회피 동작이나 방어마법을 발동한 기척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화살은 그의 몸에 닿자마자 맥빠지게도 엉뚱한 모래사장에 박혀버린 것이다.


류셀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화살을 발사한 무리를 보았다.


신성국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이 약 200m 정도 거리를 두고 해상동굴이 위치한 절벽 위에 포진해 있었다.


무거운 갑옷 차림으로 저기까지 어떻게 올라간 것인지는 몰랐지만, 위치는 절묘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화살을 퍼부으면 이쪽은 당할 수밖에 없는 구도니까.


“하지만, 원거리 마법에 대한 대책이 허술하군.”


조용히 감상을 담으며 류셀이 허공을 검지로 그었다.


다음 순간, 시아의 머리로는 바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활을 든 성기사들이 있던 절벽의 끝자락이 깔끔하게 잘려나간 것이다. 시위에 다음 화살을 메기던 그들의 표정이 놀람에서 절망으로 바뀌었다.


“으악ㅡ”

“살려줘ㅡ”


류셀의 갑작스러운 반격에, 대단한 메시지는 남기지 못한 채 성기사들이 바다로 떨어져 간다.


절벽 자체의 일부를 잘라낸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당사자ㅡ류셀은 편안한 표정으로,


“물속에서 갑옷을 벗을 수도 없을 테니 익사 확정인가. 혹시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 조사를 위해 갑옷은 나중에 따로 회수해두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시아는 마왕의 힘에 전율하면서도, 검을 뽑아 자세를 잡았다.


류셀의 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자기 몸뚱이는 자기가 지켜야 하는 생각이 움츠러든 몸을 강제로 움직이게 했다.


“오오ㅡ”


풍덩, 하고 빠지는 암반과 성기사들을 본 소녀가 대단한 것을 보았다는 것처럼 입을 벌린 것과 달리, 남자 측은 분노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놈ㅡ!”


그가 들고 있던 거대한 철제 십자가가 류셀을 향해 날아왔다.


지금은 물고기밥 신세가 된 성기사들이 쏘았던 화살이 그랬듯, 그 십자가는 류셀의 몸에 닿자마자 방향이 매우 부자연스럽게 틀어졌다.


쿠과광ㅡ


십자가가 엉뚱한 곳으로 튕겨 나가며, 그와 동시에 해변 일부가 문자 그대로 깎여나갔다.


“우왓ㅡ”


십자가가 지나간 여파로 파편이 사납게 튀어, 시아는 손을 들어서 막는 자세를 취했다.


단지 던진 것뿐이라면 이쯤이면 멈춰야 할 텐데도 십자가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쏜살같이 회전하며 파괴를 거듭해서, 그것의 진로상에 있는 모든 것이 터져나가고 부서졌다.


천경의 일원의 손에 들려있는 걸 보았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저건 단지 크기만 큰 철제 무기가 아니었다.


류셀도 시아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들자 그것에 반응하듯, 애꿎은 해변을 무참하게 부수며 일직선으로 나아가던 십자가가 무서운 속도로 이쪽으로 돌아왔다.


부메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자의 손에 다시 들린 십자가. 그는 다시 이쪽으로 십자가를 날려 보내려 했지만, 그 전에 류셀이 먼저 검지를 들었다.


“버스트.”


시아도 본 적 있는 검은 광선이 발사되어, 남자가 들고 있던 십자가에 명중했다.


“으으윽ㅡ!”


육중한 무언가를 받아내는 것처럼, 남자가 신음하며 십자가를 가까스로 앞으로 쳐들었다. 류셀이 쏘아 보낸 검은 광선은 그칠 기미 없이 계속해서 남자가 든 십자가에 쏟아졌다.


“역시 정예야. 이 정도로 막아내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류셀이 마침내 손을 거두자, 만신창이가 된 남자가 아직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상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마왕의 마법을 직접 받아낸 것에 대한 대가는 톡톡히 치렀다. 그의 무기인 십자가의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매우 단단한 금속이야, 무슨 재질인지 궁금하군. 세례를 추가로 받은 건가? 하지만 그것도 출력을 높이면 끝일 것 같은데.”


류셀이 매우 긴장감 없이 중얼거리는 사이, 뒤에서도 누군가 접근하는 것을 알아차린 시아가 뒤로 돌았다.


“마왕 폐하, 뒤에도 적이!”


그리 말하며 더 접근하게 놔두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시아는 먼저 앞으로 달려가, 그녀에게 창을 찔러오는 성기사 하나의 목을 베었다.


아름다운 게트라일의 해변에 새빨간 피가 흩뿌려졌다. 하지만 계속해서 몰려오는 성기사들의 수는 대충 어림짐작해도 80.


“그런가. 신체 능력 상향 마법을 걸어줄 테니 뒤를 부탁하지. 꽤 흥미가 생긴 지라, 이 싸움을 방해받는 건 싫으니 말이다.”


역시 시아 혼자서 대응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수였지만, 마왕은 그녀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말투로 시아의 머리에 대뜸 손을 얹었다.


“어빌리티 부스트ㅡ콰드루플.”


마왕이 주문을 끝내기가 무섭게, 시아의 온몸에서 힘이 넘쳐나는 게 느껴졌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다.


“뭐, 뭔가요...?”


“그것보다, 적이 당장 코앞까지 왔다만.”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 손을 펴보던 시아는 무심한 마왕의 말에 놀라, 달려드는 성기사들에게 무심코 검을 휘둘렀다.


한번 휘두른 검에 네댓 명의 성기사들이 나가떨어지는 걸 보며, 시아는 뭐가 일어난 것인지 드디어 깨달았다.


갑자기 비약한 신체 능력을 몸이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시아는 아무리 훈련해도 도달하지 못했던 ‘다음 단계’를 몸소 맛보고 있었다.


“이것도 사실 사용자의 베이스가 있어야 진가를 발휘하는 마법인데 말이야, 시아 너는 소질이 있나보군.”


시아는 평소에는 자신을 공주로 부를 뿐인 마왕이 이름으로 불러준 것에 얼굴을 붉혔다.


“그럼 나머지는 부탁하지.”


“네!”


시아가 신이 나서 달려나가며 외쳤다.


평생 몸을 옥죄던 족쇄로부터 해방된 기분.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다.


몸에 힘이 넘치고 있었다. 자신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몇 배는 민첩했으며, 자신에게 무기를 치켜드는 성기사들이 느리게 보이기까지 했다.


이것이 강함, 이라고 시아는 느끼고 있었다. 강자들은 언제나 이런 시선으로 세상을 보아왔다고 생각하니 치사하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


그녀도 이 정도까지 강해지지 않으면 마왕과 함께 설 수 없었다.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높이를 풀쩍 뛰어 바로 자신들의 후방에 서는 시아를, 성기사들이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면ㅡ!”


시아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검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세밀한 마나의 조작이 필요하기에 빈번히 실패했던 기술이지만, 지금의 자신이라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합ㅡ!”


밝게 빛나기 시작한 시아의 검이 명랑한 기합과 함께 공기를 가르고, 성기사단 중대의 절반은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 ◆ ◆ ◆ ◆ ◆ ◆


상급 버프 마법을 받은 시아가 신나게 적을 도륙하고 있을 때, 나는 천경의 두 명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를 듣지 못했군. 나에 대한 건 알고 있을 테니 생략하고, 너희는 천경의 몇 석차지?”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남자는 분명 만신창이가 되긴 했어도 강인한 자세로 서 있고, 소녀 쪽은 자신의 동료의 부상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다.


“데리고 온 성기사단은 고작 1중대 규모인 것 같은데, 너희들도 버림패인가?”


휘리릭ㅡ


내 말에 대답할 마음은 없다는 듯, 십자가가 공기를 가르며 재차 내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세계를 단절하는 고유스킬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이상 무의미한 공격이다.


“학습능력이 없군, 너는.”


역시 이번에도 십자가가 튕겨 나가고, 나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통하지 않는다는 걸 그렇게 시도해보고도 모르는 건가?”


“... 윽.”


남자가 자세를 낮추더니, 근접전이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지 십자가를 방패처럼 든 채로 내게 달려들었다.


칭! 깡! 창!


어느새 내 오른손에 들린 흑색의 검과 십자가가 몇 차례 맞부딪혔다. 나는 기회를 봐서, 그의 어깨 부근을 갈라버렸다.


“아쉽군 그래.”


철저하게 단련한 육신인 것 같지만, 아까 버스트를 버텨낸 몸으로는 빈틈이 많이 생기는 법이다. 일단 내 18번 마법을 한 번이나마 버텼다는 것에 찬사를 보내야겠지.


깔끔하게 잘려나간 남자의 왼팔이 해변 위를 구르며 피를 흩뿌렸다.


어깨의 단면을 누르며 뒤로 물러난 남자는 많이 피곤해진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분명히 무서운 힘이다, 마왕... 하지만 이 정도로 내가 굴할 일은ㅡ”


“잠깐, 마하트.”


남의 일이라는 듯 구경만 하고 있던 소녀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다니는 학교의 것이기라도 하듯 교복을 입은 그녀는 도저히 전장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두 눈에 깃든 무언가가 절대 그녀가 순진무구한 소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젠 내가아... 할래.”


소녀의 선언을 들은 남자가 힘이 다 빠졌다는 듯 무릎을 꿇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오, 선수교체인가.”


내가 중얼거리자,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제8석차, 르몽.”


그건 자신의 소개이자,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소녀가 자기소개를 끝낸 순간ㅡ내 옆의 공간이 쪼그라드는 것 같더니, 굉음과 함께 크게 터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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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까먹었을까봐 이전에 올린 르몽 컨셉화, 그리고 마하트 느낌 이미지(?) 올립니다.


우리 십자가군은 다른 작품에 나왔더라면 쉽게 주인공을 압도할 실력인데 마왕물에 나와서 썰리네요. 근데 르몽 전투씬 쓰다보니까 뭔가 메구밍이 생각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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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포신이 품은 마법 +3 23.05.20 70 3 10쪽
257 피의 무게는 죄의 무게만큼 +3 23.05.18 72 3 11쪽
256 신의 활, 그 시위가 품는 것은 +1 23.05.14 65 3 16쪽
255 매듭을 짓지 않으면 +2 23.05.09 69 3 14쪽
254 공중 요새 +3 23.04.29 70 3 16쪽
253 마도 vs 고유스킬 +5 23.04.05 75 2 15쪽
252 인간 대 인간 +3 23.03.25 84 3 14쪽
251 이빨을 드러낸 어둠 +4 23.03.18 81 3 14쪽
250 예술은 폭발이다 +3 23.03.10 87 3 12쪽
249 전쟁 발발 +2 23.03.02 90 2 13쪽
248 겨울, 온천 +5 23.02.25 75 3 13쪽
247 성전의 전조 +2 23.02.19 87 4 13쪽
246 이스 바실루스 +1 23.02.15 87 3 14쪽
245 레벤 연합의 침공 +1 23.02.11 79 2 14쪽
244 약자의 운명 +1 23.01.28 94 3 16쪽
243 표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가름) +3 23.01.18 91 3 1쪽
242 또 다른 숙청의 시작 +1 23.01.14 95 3 14쪽
241 찬탈의 하겐 +1 23.01.01 101 4 14쪽
240 추악한 진실 +1 22.12.25 109 4 16쪽
239 개혁의 불씨 +1 22.12.10 106 4 15쪽
238 백색 죽음이 깔린 추도식 +1 22.11.20 105 3 14쪽
237 다크엘프와 여우의 진급 +1 22.11.13 100 4 10쪽
236 두 번째 보루의 소실 +1 22.11.13 97 4 10쪽
235 꺾인 십자가, 꺾이지 않는 신념 +1 22.10.31 106 4 12쪽
» 폭살의 르몽 +3 22.10.19 120 4 16쪽
233 의외의 첫인상 +1 22.10.14 111 5 13쪽
232 사절단의 방문 +1 22.10.12 154 3 13쪽
231 짙게 드리우는 전운 +1 22.10.07 119 4 18쪽
230 어둠에 대처하는 자세 +1 22.09.29 116 4 18쪽
229 어둠은 확실하게 무너뜨린다 +2 22.09.15 128 5 18쪽
228 치명적 착각 +1 22.08.27 106 3 17쪽
227 구원의 손길 +4 22.08.19 113 5 18쪽
226 공주의 각오 +1 22.08.15 120 6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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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파멸의 그림 +3 22.06.26 116 3 19쪽
212 그리고, 새로운 국면 +2 22.06.25 115 5 17쪽
211 황혼의 다짐 +2 22.06.14 111 5 19쪽
210 쿠데타 +4 22.06.04 123 5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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