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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조회수 :
137,339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22.08.15 23:05
조회
120
추천
6
글자
17쪽

공주의 각오

DUMMY

“각오를 보여라.”


마왕은 그 말만을 남긴 채, 더할 말은 없다는 것처럼 유유히 비행선으로 돌아갔다.


시아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베이런 남작이 흔쾌히 준비해준 침실은 좁지만 아늑하고, 무엇보다 시골의 냄새가 나서 좋았다.


“각오라...”


시아가 중얼거렸다.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린 아름다운 흑발이 지난 반나절 동안 그녀를 괴롭힌 고뇌를 증명하고 있었다.


자신이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는 잘 알고 있다.


자이나스의 정치에 타국을 끌어들이다니, 귀족들이 크게 반발하여 내전이 발발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도연방국도 그 정도까지 손해를 감수하면서 국왕 파벌을 도와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에든 왕국이라는 외적을 몰아낼 뿐만이 아니라 자이나스의 왕가가 귀족 파벌의 권력을 그대로 흡수하게끔 유도하여 곧 벌어질 자이나스 내전을 종결시킨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저 타국의 호의에 기대기 어려운 부탁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이나스라는 나라를 억지로 유지함으로써 마도연방국이 얻는 이점이 없다. 앞서 에든을 몰아내는 것으로 현 왕가에게 요구할 대가도 사실 지금에 이르러서는 힘으로 빼앗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들이 무력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왕가는 의미있는 저항을 하지 못할 것이다. 자이나스 왕국과 마도연방국 사이에는 그만한 국력의 차이가 있었다.


자이나스가 데트르 마도연방국에게 추가 원조의 대가로서 제공할 수 있는 건 국내산업의 주축인 마법 스크롤이나 아티팩트 따위지만, 마왕이 구사하는 마법을 보고 나서는 과연 이만한 강국이 그런 초보적인 것들을 필요로 할 것이냐는 당연한 의문이 들었다.


에든을 몰아내기 위해서 마도연방국의 힘을 빌릴 준비는 되어있다.


하지만 마왕 본인이 지적했듯, 둘로 나뉜 나라를 하나로 합치려면 그 이상의 대가와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아는 오늘 들어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마왕이 말한 대로 현재 마도연방국은 신성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 상황에 신성국의 동맹국인 자이나스 왕국을 구하는 것으로 마도연방국이 가지는 이익이 무엇일까.


아무리 노력해봐도 자이나스의 매력이 부족하다면, 마왕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건 또 무엇일까.


“... 역시 그것밖에 없어.”


시아는 자정이 넘도록 골똘히 생각한 결과,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 ◆ ◆ ◆ ◆ ◆ ◆


“휴우.”


나는 코트를 벗으며 의자에 앉았다.


비행선에 마련된 내 전용 숙소는 간소하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소량의 물을 끌어다 쓰는 식으로 샤워도 할 수 있는 화장실도 딸려있고, 침실과 업무공간이 따로 나뉘어 있을 정도다.


따라서 베이런 남작이 하룻밤 묵겠냐고 제안했을 때도 호의만 받겠다며 거절할 수 있었다.


일단 데트르 마도연방국의 국가원수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엄연히 왕의 일종인 내가 요새에 머무르게 되면 저들은 이것저것 눈치가 보일 게 분명했다. 이곳은 왕이 머무를만한 곳은 아니었으니까,


원래부터 대단할 것이 없었던 우펜 요새는 앞서 있었던 공성전으로 인해 더 난장판이다.


요새를 보수하는데 소음을 신경 쓰거나 먼지로 내 코트 자락이 더럽혀지지 않게 조심하다 보면 일하는 병사들 처지에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자이나스에서 벌인 일 때문에 처리해야 할 업무도 많아졌으니, 여러모로 비행선에 돌아오는 게 옳았다.


“미안하게 됐군, 린.”


한차례 앞머리를 쓸어넘긴 나는 책상 너머의 린에게 미안한 얼굴을 했다.


“잠깐 들리는 것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겠어. 침공 계획을 대대로 수정해야되니 밑에서 불만이 나와도 할말은 없겠지.”


“아닙니다, 보스. 그 누가 감히 보스의 명령에 불만을 품겠습니까.”


린은 여러 종류의 술이 들어찬 술장을 보고 있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내 집무실엔 항상 술을 일정량 가져다 놓으니 둘이 마실 술을 고르던 참이었다.


“게다가 이건 신성국과의 싸움 전에 꼭 필요한 절차니까요. 그걸 미리 예상하고 빠른 판단을 내리신 보스의 통찰력에는 정말 감탄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 그거 말이지···”


린이 나를 이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이 전부가 사실 내가 별생각 없이 공주를 구해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뒤늦게 가름이 발견하고 린이 전해준 정보를 고려해 알현실에서 공주와 잘 이야기를 이끌어가기는 했지만, 나는 자이나스 왕국에 그만한 것이 숨겨져 있다고는 전혀 생각 못 하고 있었다.


결국 우연의 일치가 맞아떨어진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대로 말해버리기에는 저 초롱초롱한 눈에 너무나 큰 존경심이 담겨있었다.


“음, 뭐.”


조금 죄책감을 느끼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저 일이 잘 풀린 것 뿐이지. 딱히 내가 한 건 없다. 덕이라고 한다면 명령대로 움직여준 너희들 덕이겠지.”


은근슬쩍 공을 넘기려 하지만, 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겸손이십니다. 보스는 언제나 모든 걸 뚫어보는 혜안이 있으시니까요. 루벨 왕국 건도 전부 미래의 전선을 위한 포석이지요?”


“아, 그놈들 말인가.”


“슬슬 사절단이 알트레아국에 도착했을 무렵입니다. 일단 저는 이곳을 우선시해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그녀 만으로 괜찮을까요.”


“시이나 말이군.”


주제가 다른 것으로 넘어간 것에 조금 안심하며, 나는 프랑 공화국 이후로는 최초로 마왕과의 우호적인 관계 구축 의사를 피력한 놈들과 그들을 맞아주기 위해 데트르에 남은 시이나를 떠올렸다.


현재 데트르 마도연방국 알트레아국ㅡ전부 마도연방국으로 합병되며 왕국의 칭호가 사라졌다ㅡ에는 루벨 왕국의 사절단이 방문 중이다.


어떻게 보면 국가와 국가가 가지는 첫 만남이라고 할 수 있으니, 연회도 열어 베푸는 식으로 환대하라고 일러두었다.


나는 린이 공손하게 건넨 잔을 받아들고, 그녀가 술을 따르는 걸 보았다.


“그 녀석이 복잡한 정치 같은 걸 알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스가 함께 있으니 괜찮겠지. 적어도 마도연방국이 하나의 나라로서 기능한다는 건 보여줄 수 있을 거다. 게다가 스키잔도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것도 그렇네요.”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적인 감정을 제외하면 그녀도 이스의 출신을 알고 있으니 한 국가의 대표로 타국의 사절에게 얕보이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보스의 인선은 확실하니까요. 그렇게 다양한 자들이 자신을 따르게 하는 것도 보스의 능력이라면 능력입니다.”


“칭찬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루벨 왕국 건이 잘 풀리기만 한다면 이 싸움을 마족과 인간의 싸움이 아닌, 국가연합 간의 전쟁으로 만들 수 있겠지.”


나는 술잔을 흔들어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단지 인간이라고 적대한다면 그건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의 목표는 천계, 그리고 그를 넘어선 것이니까. 수단은 아무리 많이 있어도 부족하다. 내가 쓸 수 있는 말은 전부 사용할 생각이야.”


“... 아마도.”


“린?”


잠시 말을 흐린 그녀는 먼 곳을 보는 것 같은 눈을 했다.


“아마도 저는 그런 식견이 부족했기에 패배했던 것이겠지요. 저를 믿고 따라준 모두에게 실망만을 안기고.”


그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린의 눈이 어두워지며, 마나의 흐름이 불길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실내가 얼어붙을 듯 차가워져 간다.


펜리르 정도 되면 현실개변을 일으키고자 하지 않아도, 이 정도의 것은 자연스레 발생한다. 주인의 감정 변화에 육체가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린...”


동요하지 않고, 나는 그녀가 보고 있는 것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이 순간, 린은 영겁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마지막 전장에 있었다.


매 순간 자신의 동료와 부하가 무참히 죽어 나가고, 영원한 어둠에 떨어지던 눈에 비통함과 후회가 스쳐 지나가는 바로 그 어두컴컴한 전장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언제까지고 보이고 들리는 그 끔찍한 기억에.


내가 그렇듯, 그녀도 바꿀 수 없는 과거에 언제까지나 사로잡혀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아 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과거의 자신을 탓하지 말아라, 린. 넌 이제 혼자가 아니야.”


나는 테이블 위의 린의 손에 내 손을 포개었다.


현재를 지나 태초의 시간을 보고 있던 그녀의 눈이 점점 생기를 되찾고, 언제 그랬냐는 듯 요동치던 마나가 잠잠해지며 실내 온도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네가 지금의 나를 인정해주었듯, 내가 아는 너는 지금의 너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아는 린이라는 이름의 늑대는 가끔은 나보다 우수한 부하에다, 이쁜 짓밖에 않는 녀석이니 말이지. 지나간 실수에 언제까지 사로잡혀있을 필요는 없는 거야.”


그건 린에게 하는 충고이자, 나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했다.


“... 감사합니다. 역시 보스와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나는 슬며시 올라온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그녀가 부러웠다. 나와 함께하는 린은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기에.


“어라,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린을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자 그런 질문이 날아들었기에, 나는 아니라고 답하고 술잔을 들었다.


린의 그것ㅡ감정에 솔직해지고 그걸로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는 건 내게는 없는 것이기에 더 가지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 또한 자신에게 없는 것을 내게 보았기에 이토록 호의를 보이는 걸까.


잡생각을 떨치고 다시 술의 진득한 향을 맡은 나는 하이엘프의 나라에서 직접 조달해온 액체를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좋군, 좋아. 이게 낭만이라는 것이겠지. 린도 꽤 좋은 취향을 가지게 되었지 않나.”


나는 린의 선택을 칭찬했다.


나무통에서 오래 숙성되어 아주 진한 향을 가지게 된 이 술은 왠지 모르게 오늘 같은, 열심히 일하고 난 하루에 어울렸다.


술이라는 것은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마시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딱히 현 상황에 불평할 게 크게 없는ㅡ아니, 불평할 생각 자체가 결여된 내게는 하루를 마치는 의식 같은 것이다.


“정말 그 말씀대로입니다, 보스.”


린이 어느새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펜리르는 기본으로 알코올과 같은 독에 대한 내성이 있으므로 취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패시브 특성도 어느 정도는 자력으로 제어할 수 있는 모양인지, 린은 내 앞에서 가끔 이렇게 취하곤 했다.


모두가 감탄하는 미모와 경외하는 힘을 가진 고대의 마수가 이렇게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아마 나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복 받은 놈이라고 할 수 있겠지.


살짝 고개를 드는 우월감에 젖어있던 나는 테이블 한쪽에 놓인 서류를 발견하고는, 슬슬 다가오는 행사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쿠도 대위가 슬슬 진급할 때가 되었지. 이그ㆍ시피아 소령과 같은 날에 진급식을 하면 좋을 거 같은데.”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 둘은 열심히 일해주었지요.”


자신보다는 한참 아래의 야전 장교들이지만, 린은 달가운 얼굴을 만들었다.


이렇게 가끔 비치는 린의 끈끈한 동료 의식은 강대한 마수는 항상 오만할 것이라는 인간의 생각이 착각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보스께서 무기를 하사한 그 둘이라면 이번 침공에도 아주 든든한 전력이 될 겁니다.”


“그래, 아무리 에인헤랴르라고 해도... 특히 쿠도 대위를 이기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없지 않나.”


“그것도 그렇네요, 후훗.”


린이 기분 좋게 웃었다. 가름을 열심히 보좌하는 여우가 한 번의 발도로 엄청난 숫자의 인간을 썰어버리는 걸 떠올린 것이겠지.


그만한 인재가 마왕군에 들어가기를 자처했을 때는 어딘가에 쿠라마사의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지만, 그녀는 놀라운 무훈으로 모든 간부들의 믿음을 얻어냈다.


“자이나스에서 그것을 분석하고 나면 훨씬 유리한 싸움을 할 수 있겠죠. 그렇게 승리를 쟁취하고 나면 천계로 통하는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린이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천계도, 신성국도 그걸 알고 있을 테니 뭔가 수작을 부려올지도 모릅니다, 보스.”


내가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의문을 긍정했다.


“격렬한 전투가 되겠지. 하지만 이것 또한 한 단계에 불과하다.”


나는 낮게 말했다.


“우린 멈출 수 없어,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그곳에 도달하기 전까지는ㅡ”


나는 말을 끊었다. 비행선 근처에 깔아두었던 탐지마법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린도 내가 느낀 기척을 알아차린 것이겠지. 어떻게 하겠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린의 질문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옮기지. 아무래도 예상보다 일찍 손님이 온 모양이다.”


◆ ◆ ◆ ◆ ◆ ◆ ◆


이것도 벌써 세 번째이지만, 비행선에 오르는 건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무슨 원리로 하늘에 떠 있는지 모르는 거대한 배.


요새를 전부 덮고도 남을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 선박은 데트르 마도연방국이 가지는 미지의 이미지를 한층 더 증폭시켜 주었다.


그들이 가진 기술은 그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자이나스 왕국의 기술보다 한없이 뛰어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린의 전투를 본 이후에는 시아가 연방국에 막연하게 가지고 있었던 이런저런 기대에 살이 붙었다고나 할까, 자이나스를 위기에서 구해줄 곳이라고 하면 이 자들 이외에 생각나지 않았다.


“저, 마왕 폐하를 만나 뵈러 왔는데요.”


시아가 용기를 내어 말하자 굳게 닫혀있던 배의 육중한 문이 열렸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마족 병사들은 미리 언질을 받은 것인지 순순히 다리를 내려주고, 별다른 소지품 검사도 없이 시아를 통과시켜주었다.


늦은 시각이라도 상관없다는 마왕의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아마... 여기였지?”


기억을 더듬으며 걷던 시아는 좁고 길게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 널찍한 홀 같은 장소에 도달했다.


그 크기와 모양새를 생각하면 일반 배의 갑판 같은 곳이지만 바깥에 노출되어 있지는 않은, 신기한 장소였다. 전에 듣기로는 비행선에서 유일한 훈련장이라고 했었다.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마왕 폐하.”


복도와 마찬가지로 밝은 조명이 비추고 있었기에 여기까지 와서 헤맬 일은 없었다.


시아는 소년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린과 함께 있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문제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너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일찍 대답을 찾은 모양이로군, 공주.”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마왕ㅡ류셀의 얼굴에는 한치의 피곤함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인간이 아니기에 수면 부족으로 오는 피로는 느끼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류셀과 눈을 맞췄다.


“네, 혼자서 계속 생각해본 끝에 답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지금부터는 할 이야기는 소수의 인원이 듣는 편이 좋겠군.”


마왕이 고갯짓하자 그와 린을 제외한 병사들이 전부 자리를 비웠다.


일견 민감한 대화 주제가 나오기에 앞서 사람을 물리는 태도 같기도 했지만, 그건 시아가 내린 답에 확신을 주는 행동이었다. 아마 그는 시아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배려해준 것이리라.


그랬다. 시아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답을 내렸다.


자이나스의 명운을 위해 자신이 보일 수 있는 각오는 무엇이 있을까.


자신이 피의 길을 걸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증명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그녀가 바칠 수 있는 건 과연 무엇일까.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옛 전설이 말해주듯, 정답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마왕은 분명 시아가 모든 걸 바칠 각오가 있는지 시험한 것이리라. 그녀의 재산, 그녀의 몸, 그녀의 마음. 시아가 바칠 수 있을 것이라면 뭐든지.


“... 실례합니다.”


마왕이 자신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다는 거라고 깨달은 시아는 치밀어 오르는 부끄러움을 억누르고,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왕성에 드나드는 귀족이라면 누구나 탐내봤을 탐스러운 몸이 조명 아래에 그대로 드러났다.

브래지어를 벗자 드디어 숨통이 트인다는 듯 커다란 가슴이 고개를 내밀었지만, 시아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아래 속옷까지 전부 벗었다.


여자로서의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신 하나의 영혼과 육체 정도로 끝낼 수 있다면 하나의 국가를 살리는 대가로는 싼 편이다.


게다가 왜인지 모르게 저 소년의 시선이 그녀의 알몸에 닿는 건 큰 거부감이 없기도 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되고 나서, 시아는 다시 무릎을 꿇으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로써 그녀는 자신의 바칠 수 있는 대가를 보였다.


“시아 폰 발렌슈타인ㅡ이번의 원조를 위해서라면 제 몸도, 영혼도 마왕 폐하에게 바치겠습니다.”


작가의말

국가의 존망과 개인의 이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시아가 인간다움의 표본인 것 같아서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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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금속은 생각보다 무르다 +3 23.07.05 66 3 13쪽
260 천사와 대척점에 선 것은 +2 23.06.18 74 3 15쪽
259 기술의 진보는 곧 살육의 진보 +3 23.06.10 69 3 16쪽
258 포신이 품은 마법 +3 23.05.20 73 3 10쪽
257 피의 무게는 죄의 무게만큼 +3 23.05.18 72 3 11쪽
256 신의 활, 그 시위가 품는 것은 +1 23.05.14 65 3 16쪽
255 매듭을 짓지 않으면 +2 23.05.09 70 3 14쪽
254 공중 요새 +3 23.04.29 73 3 16쪽
253 마도 vs 고유스킬 +5 23.04.05 77 2 15쪽
252 인간 대 인간 +3 23.03.25 86 3 14쪽
251 이빨을 드러낸 어둠 +4 23.03.18 82 3 14쪽
250 예술은 폭발이다 +3 23.03.10 88 3 12쪽
249 전쟁 발발 +2 23.03.02 92 2 13쪽
248 겨울, 온천 +5 23.02.25 79 3 13쪽
247 성전의 전조 +2 23.02.19 93 4 13쪽
246 이스 바실루스 +1 23.02.15 88 3 14쪽
245 레벤 연합의 침공 +1 23.02.11 81 2 14쪽
244 약자의 운명 +1 23.01.28 95 3 16쪽
243 표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가름) +3 23.01.18 92 3 1쪽
242 또 다른 숙청의 시작 +1 23.01.14 96 3 14쪽
241 찬탈의 하겐 +1 23.01.01 101 4 14쪽
240 추악한 진실 +1 22.12.25 111 4 16쪽
239 개혁의 불씨 +1 22.12.10 108 4 15쪽
238 백색 죽음이 깔린 추도식 +1 22.11.20 107 3 14쪽
237 다크엘프와 여우의 진급 +1 22.11.13 101 4 10쪽
236 두 번째 보루의 소실 +1 22.11.13 99 4 10쪽
235 꺾인 십자가, 꺾이지 않는 신념 +1 22.10.31 106 4 12쪽
234 폭살의 르몽 +3 22.10.19 122 4 16쪽
233 의외의 첫인상 +1 22.10.14 113 5 13쪽
232 사절단의 방문 +1 22.10.12 155 3 13쪽
231 짙게 드리우는 전운 +1 22.10.07 121 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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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구원의 손길 +4 22.08.19 114 5 18쪽
» 공주의 각오 +1 22.08.15 121 6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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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새로운 만남은 운명의 방향을 바꾼다 +1 22.07.22 108 5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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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어둠에 물들지 않은 빛 +2 22.07.16 110 3 13쪽
216 지나가던 어둠이 발견한 것은 +1 22.07.16 117 4 11쪽
215 다가오는 위기, 혹은 기회 +1 22.07.09 128 5 19쪽
214 칠흑의 선언 +1 22.07.04 115 4 17쪽
213 파멸의 그림 +3 22.06.26 116 3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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