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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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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5.18 22:05
연재수 :
305 회
조회수 :
136,424
추천수 :
3,288
글자수 :
1,694,467

작성
22.08.04 21:15
조회
108
추천
5
글자
19쪽

그 불꽃은 푸른 색을 띠고 있다

DUMMY

전투였던 것이 일방적인 학살로 변모해버렸을 무렵, 새로운 세력이 자이나스 국경지대의 전투에 발을 들였다.


푸른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검은색 군복에 달린 계급장이 저물어가는 노을의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최소한 사슬갑옷으로라도 몸을 감싸고 있던 자이나스나, 값비싼 갑옷을 보급받은 에든의 병사와는 겉모습부터 달랐다.


남자라면 누구나 눈이 크게 떠질 만한 아름다움을 가진 그녀는 군복을 입었을 뿐, 방어구는커녕 아무런 무기조차 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정신이 잠시 팔릴지언정, 그녀가 두르고 있는 살기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모두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늑대귀를 가진 이 소녀가 절대 대화 따위를 하러온 것이 아니라는 건 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받는 이라면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기에.


이윽고 작은 요새를 포위한 자들은 이 외부자가 적대 세력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전투를 알리는 나팔이 크게 울려 퍼졌다.


자신을 향하는 수많은 창에도, 그녀는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앞으로 전진할 뿐이었다.


한편, 그걸 성벽 위에서 바라보는 시아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아무리 봐도 전투와는 연이 없어 보이는 린을 정녕 저 전장에 홀로 보내도 되는 거냐고 마왕에게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그녀라면 문제없다는 대답뿐이었다.


에든의 중갑기병단은 자이나스의 왕국기사단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들었다. 도저히 아무런 무기도 없이 상대할만한 놈들이 아니었다.


시아가 긴장으로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스무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기병들이 대열을 갖추어 린에게 달려든다.


말에 탄 기병들이 빠른 속도로 창을 내찔러오면 그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병사는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운명하기 마련이다. 어떻게든 한쪽으로 피하려고 해도, 놈들은 그것까지 전부 예상하고 좌우로 찔러오니까.


“윽...!”


시아에게는 그 아름다운 신체가 금방이라도 꿰뚫리는 것이 상상되어,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시아가 걱정하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창을 겨누고 말을 몰던, 린의 코앞까지 돌진해오던 적의 병사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뭐, 뭐지...?”


자신과 나란히 서 있는 마왕이 어딜 보고 있는지 재빨리 곁눈질한 시아는 곧 공중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적병을 발견했다.


“어?”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뭔가에 휩쓸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과 함께 내팽개쳐진 중갑기병들은 그대로 지면에 곤두박질쳤다.


병사를 지켜주는 무거운 갑옷은 저럴 때는 오히려 독이 되어, 착용자의 살을 짓뭉개고 뼈를 박살낸다. 갑옷 안이 마치 인간 젤리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시아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린은 바람 계통의 공격 마법을 쓰기라도 한 것인가, 생각했지만 시아가 아는 마법 중에 저렇게 중갑을 입은 기병들을ㅡ그것도 말과 함께 날려버리는 건 없었다.


있다고 하면 아득히 옛날에 존재했다고 하는 고대 마법 정도일 것이다


파앗ㅡ


아무런 미동도 없이 지면에 널브러져 있던 기병들의 시체가 갑자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불꽃의 색은 진한 파란색으로, 순식간에 솟아올랐다.


푸른 불꽃이 멎자, 그곳에 남은 건 한 줌의 잿더미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 짧은 순간에 갑옷째로 저들을 완전히 태워버린 것이다.


“린 님은 마법사...?”


시아가 중얼거렸다. 보통 마법사는 마법을 쓰기 위해 크고 작은 지팡이 따위를 들고 다니지만 린이 그런 걸 꺼내 드는 장면은 없었다.


마법을 쓰려면 땅에 미리 마법진을 그리거나 스크롤을 준비하는 등 꽤 복잡한 사전작업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는데, 저건 아무리 보아도 그녀가 아는 마법과는 거리가 있었다.


보통 미지의 것ㅡ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것과 조우한 인간이 가지는 건 공포다.


무엇이 일어났는지, 어째서 정예 중의 정예인 중갑기병단이 저리 쉽게 참살당한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적병들이 동요를 보였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숫자의 차이에도 방금처럼 섣불리 접근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대기 중이던 적의 궁병단이 조금 앞으로 나오더니 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적 지휘관의 사격 신호가 떨어지고, 에든의 궁병들이 일제히 쏘아 보낸 화살이 비가 되어 린을 덮친다.


잠시 하늘을 가릴 정도의 양으로, 고작 한 사람에게 쏘는 것 치고는 과도한 양의 화살이라고 시아가 생각해버릴 정도였다.


에든은 린이 보인 미지의 힘을 경계하는 게 분명했다.


엄청난 화살 세례가 지나가고 난 후, 시아는 자신이 린에 대해 대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놀랍게도 린은 상처 하나 없었던 것이다.


땅에 잔뜩 꽂힌 화살은 마치 그녀를 비껴가기라도 한 모습이었다. 린이 서 있는 자리만 아무런 화살 없이 깔끔했다.


“잘 봐두어라 공주. 슬슬 하이라이트다.”


마치 연극이라도 관람하듯, 마왕이 그리 말했다.


폭발과도 같은 굉음이 들리며 먼지구름이 일기 직전, 시아는 거대한 늑대의 앞발이 적을 내려치는 환상을 보았다.


◆ ◆ ◆ ◆ ◆ ◆ ◆ ◆ ◆ ◆


간부 하나가 옷매무새를 고치더니, 다른 텐트보다 화려한 텐트에 들어갔다.


그의 손에는 상관을 위해 전속 요리사가 준비한 큼지막한 스테이크와 감자 따위가 올라간 접시가 있었다.


“장군님,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오, 그러냐. 어쩐지 좋은 냄새가 나더라니.”


군인치고는 좀 살이 심하게 찐 드모레 장군은 접시를 받자마자 입에 고기를 우겨넣었다.


엄밀히 따지면 우펜 요새 공성전은 아직 진행 중이었지만, 보고를 대충 들어보니 적어도 반나절 안에 함락될 것이 뻔했기에 그는 벌써 긴장이 풀린 상태였다.


얼마 전에 뭔가 큰 소리가 난 것 같지만, 아직 그에 대한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자이나스 놈들이 최후의 발악으로 대포라도 쏜 거겠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저항을, 쩝쩝, 하고 그래. 어차피 놈들 수준으로는 우리를 못 막을 게 뻔한데.”


처음에는 그도 회의적이었지만, 마물을 앞세운 공격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내부 정쟁이 치열한 자이나스가 국경에 기사단이나 고위 마법사를 배치해놓았을 리가 없다는 예상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들은 인간과의 전투에만 익숙했지, 마물은 대처법조차 몰랐다.


가진 병력을 사용하기 이전에 마물을 보내서 요새를 혼란에 빠뜨리자는 의견을 낸 참모의 이름은 기억해두었다. 물론 그것도 자신의 공으로 돌릴 예정이지만, 자이나스를 집어삼키고 나서 두 계급 특진시켜주면 불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3인분은 되는 스테이크는 1분도 채 안 되어 전부 드모레 장군의 뱃속에 들어갔다.


아군 병력이 요새 놈들을 죽이는 동안 잠시 잠이라도 잘까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고 있으려니, 척후로 보이는 아군 병사가 급하게 텐트로 들어왔다.


“장군님! 긴급상황입니다!”


“무슨 일이냐, 시끄럽게.”


장군의 막사에 들어온 뒤에도 척후가 목소리를 낮추지 않자, 드모레 장군이 눈을 찌푸리며 그를 힐난하는 눈을 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척후가 계속해서 보고했다.


“우펜 요새에서 적으로 보이는 자가 나왔습니다. 그걸 정리할 때까지 요새에 재진입하는 건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척후의 눈은 이상하게도 공포로 질려있었다.


그걸 의아하게 여긴 드모레 장군은 힐난하는 눈길을 거두고 물었다.


“그래, 몇 명 정도인데? 20명? 50명?”


“그, 그게... 한 명입니다.”


척후가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자, 드모레 장군은 점점 화가 났다.


“그러면 죽이면 될 일 아니냐! 그게 내 식사시간을 방해할 정도의 소식이냐? 이쪽 병력은 2천이라고!”


우펜은 기껏 해봐야 수백의 병력이 주둔하는 요새다.


공성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요새가 함락 직전이라고 들은 드모레 장군은 고작 적병 하나에 작전이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미 다른 부대는 국경지대를 뚫고 근처의 도시 앞에 진을 치고 있다고 들었다. 그가 지휘하는 부대만 지지부진해서는 나중에 다른 장군들 앞에서 놀림감이 될 것이다.


“아, 아니 그게... 힘든 상황입니다.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사소한 일로 병사를 베어 죽인다고 정평이 난 드모레가 노려보는 와중에도 척후는 절대 굽히지 않았다.


“...이미 아군의 피해가 상당합니다. 재고해주십시오.”


“에이, 쓸모없는 것. 알았으니 출진 준비를 해라.”


자신의 몸집에 비해 너무 작은 의자에 앉아있던 드모레 장군은 뒤뚱거리며 겨우 일어섰다.


◆ ◆ ◆ ◆ ◆ ◆ ◆ ◆ ◆ ◆


펜리르라는 건 기본적으로 지상 최악의 마수라는 이명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매우 거대한 마수다.


인간쯤은 벌레로 보일 정도로 큰 이 전설의 늑대는 태초의 시대에 로키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세계를 한번 멸망시킨 마수와 신의 대전쟁ㅡ라그나로크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무서울 게 없다는 그 강대한 신들마저 펜리르의 탄생부터 그녀의 힘을 두려워해, 일찌감치 구속구를 채워두는 등 예방 대책을 세웠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해방한 펜리르를 막을 자는 없었다.


그 늑대야말로 세계를 멸하는 화신이다. 에인헤랴르를 포함해 모든 것을 동원한 신들조차 세계의 멸망은 막을 수 없었으니.


그런 펜리르가 다시금 지상에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답은 간단하다. 그 늑대가 지나는 곳에 죽음이 있을 뿐이다.


콰앙ㅡ!


린이 내리친 주먹 하나에, 진을 치고 있던 약 반절의 인간들이 즉시 사망했다.


타죽든, 압사하든 조금의 차이는 있었지만 전부 공평한 죽음이 내려진 건 확실하다.


그녀가 주먹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한참 앞의 반투명하고 거대한 늑대의 앞발이 그 동작을 따라했다.


그건 기이하게도 커다란 앞발만이 떠 있는 형태로, 린의 머리칼과 닮은 차가운 색의 불꽃을 두르고 있었다.


희푸른 털과 끔찍한 발톱을 가진 거대한 앞발과 평상시의 모습으로 서 있는 린. 어느 쪽이 린이냐고 물으면 둘 다, 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일이다.


펜리르가 앞발을 내디뎠다. 단지 그것 하나로 천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나왔다.


너무나 강대한 힘 탓에 능력 대부분을 봉인하고 있는 마수에게 있어 본체를 움직이는 건 원래의 신체를 움직이는 것. 뻐근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는 것과 같다.


린은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해방감을 만끽했지만, 완전히 본모습으로 돌아가지는 않도록 경계한 상태로 능력을 해방했다.


평상시엔 인간의 모습으로 의태하고 있는 그녀가 본체의 형태를 완전히 개방해버리면 앞에 있는 에든의 진지 말고도 뒤의 우펜 요새까지 말려들 것이 뻔한 것이다.


앞발 하나만 소환하는 정도로도 재해에 가까운 일이 발생하니, 괜한 피해는 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는 너무 큰 소리를 내지 않도록 살며시 앞발을 옮기는 정도의 행동이었지만, 펜리르는 단지 걷는 것만으로 평범한 인간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펜리르에게 밟히거나 그 불꽃에 닿아 사망한 인간들은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재가 되어 사라진다.


상급 방어마법을 익힌 자라면 차갑고도 뜨겁게 타오르는 그 연옥의 불길에 저항할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에든 전역을 뒤져도 그런 인재는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7급 중급마법을 쓰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며 고위 마법사로 칭송받는 이 시대ㅡ마법이 퇴화한 시대에서는 린이 패시브로 몸에 두른 푸른 불꽃만으로도 인간이 죽는다.


그것만으로 인간이 라그나로크의 마수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알 수 있겠지.


“조금 시시하네요.”


혼자 중얼거린 린이 왼손을 들어 올렸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전장에 그녀를 상대할만한 인간은 없다. 그렇다면 적을 탐색할 필요는 없고, 이대로 빨리 끝내버리는 게 현명한 판단이다.


린의 손에 깃든 푸른 불꽃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나 싶더니, 성대하게 폭발하며 사방을 푸르게 물들였다.


어두워져 가던 국경지대의 하늘을 밝히는 건 푸른 바다를 닮은 불꽃.


그건 마치 대형 폭죽축제가 일어나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장관이었다.


모든 것을 화려하게 비추는 푸른 불꽃들이 일제히 비처럼 내리는 것과 함께, 아무도 도망칠 수 없는 그녀만의 세계가 펼쳐진다.


천천히 공중에서 맴도는 무수히 많은 불꽃의 편린이 춤춘다. 그것들이 감싸는 공간이 생겨나며, 현계와의 경계선이 그어졌다.


이곳은 펜리르가 지배하는 연옥의 세계. 심판의 늑대의 허락 없이는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이공간이다.


고작 이 정도의 적에게 쓰기엔 과도하다고도 생각될 수 있는 이 능력이야말로 펜리르가 행할 수 있는 기적 중 하나.


그녀의 주인은 한 명도 놓치지 말라 명했으니, 나머지ㅡ약 천 명의 인간들을 확실하게 심판할 수 있도록 공간을 단절한 것이다.


반대쪽에 아직 생존한 인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을 본 린은 전이로 단숨에 그들 앞으로 이동했다.


에든의 병사들이 그녀를 보고 뭐라 외치며 무기를 겨누지만, 그 외침을 전부 입에 담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화려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 감히 펜리르를 막아선 죄에 대한 심판은 죽음 말고는 없다. 푸른 연옥에 삼켜진 순간, 그들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다.


“남은 건 대략 600 정도... 인가요.”


린의 기준으로는 투박하지만 그래도 인간들이 나름 세운 텐트가 보였다. 여기서부터 막사를 쳐놓았으니 이곳이 진지 입구 부근일 것이다.


린이 이들을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고 있자니, 막사 쪽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다가왔다.


지체 없이 그들을 불태우려고 손을 든 린은 그중에 화려한 갑옷을 입은 뚱뚱한 남자를 보고 멈췄다.


“오오, 저것은 천사인가! 천사여!”


“자, 장군님, 위험합니다!”


위기감이라고는 전혀 없이, 자신의 부하가 필사적으로 만류하는데도 두 팔을 벌리고 이쪽으로 오려고 하고 있다. 그녀의 이공간은 인간에게 익숙한 것이 아닐 텐데.


문득 궁금해진 린은 마지막 말이라도 들어둘까 싶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오, 천사여! 압도적인 힘의 화신이여!”


입에 거품을 물던 그 살덩어리가 린을 보더니 과장스럽게 절을 해 보였다. 자신이 죽을 위기라고는 아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태도에, 린은 떨떠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보았네! 그야말로 내게 어울리는 천사라고 칭송해야 마땅하다!”


린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농담이나 허세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죽기 직전이 되면 미쳐버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뚱뚱한 남자는 린의 침묵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한껏 어깨를 펴며 자기소개를 했다.


“어딜 감출쏘냐! 내가 바로 에든 왕국의 드모레 장군이다! 자네는 자이나스에게 고용된 용병인가 뭔가 하는 것이겠지? 자이나스에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가 한 자기소개를 듣고, 린은 대충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 자는 자신의 군으로는 린에게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교섭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인간은 아닐지언정, 나는 그 자태에 한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네! 그러니 어떤가?”


아니나 다를까, 뚱뚱한 남자가 태연하게 물었다. 뒤룩뒤룩 살이 찐 그의 얼굴이 추악한 욕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네가 내 것이 되겠다고 선언하면 이번 자이나스 침공은 중지하고 왕가와 협상해보도록 해보겠네. 난 칼리더스 폐하와도 안면을 튼 사이니까 말이야.”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린은 가까스로 참았다.


이 인간은 린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자이나스의 운명을 담보로 린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심산인 걸 보면, 평상시에도 자신의 권력으로 욕망을 채우는 것에 익숙한 것이겠지.


어찌 보면 불쌍했다. 당연하게 남 위에 서서 살아왔으니, 자신의 생명이 타인의 손에 놓여있다는 것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건 어떻게 해서라도 손에 넣어야 성에 차는 부류다. 에든 왕국의 기조를 생각해보면, 분명 마족 노예도 다수 부리고 있겠지.


“어떤가! 자네에게도 영광일 테지! 그렇게 한다면 내 군을 죽인 것도 눈감아주겠네!”


“장군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옆에서 얼굴이 사색이 된 부하가 그의 망언을 말리려고 하는데도, 그걸 뿌리친 뚱뚱한 남자는 끝까지 지껄였다.


이렇게 자신만만하면서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


“착각을 하고 있군요, 인간.”


린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저는 자이나스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습니다. 단지 위대하신 주인의 명을 따를 뿐. 주인께서 이곳의 에든군을 전멸시키라 하셨으니, 그렇게 해야겠지요.”


절대 린이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뚱뚱한 장군의 얼굴이 굳었다.


린의 반응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다.


“전멸...? 그, 그건... 나까지 죽이겠다는 소리인가?”


린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뚱뚱한 남자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하, 하지만 나는 에든 왕국의 장군이라고? 아무리 자네가 강하다고 해도, 고작 자이나스의 원군 주제에 내 제안을ㅡ”


“조용히.”


린의 한마디에 소름이 끼치는 살의를 느낀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죽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명은 없었으니 사실 전부 태워버리는 것으로 상관없었습니다만, 저를 성욕의 대상으로 본 건 역시 기분 나쁘네요. 제게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건 세상에 단 한 명뿐입니다.”


린이 사근사근하게, 하지만 무시무시하게 말했다.


“그러니 당신은 좀 특별히 죽여드리겠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후회할 수 있도록.”


“우, 우아악ㅡ”


린의 기세에 밀려 뒤로 나자빠진 뚱뚱한 남자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외쳤다.


“다들 뭐하나! 날 지키지 않고!”


린의 몸을 맴돌던 푸른 불꽃이 날고, 병사 몇 명이 그걸 막으려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복장으로 미루어보아 꽤 정예병으로 짐작되는 그들의 몸은 불꽃과 닿는 것과 동시에 터져, 끔찍한 살점과 움찔거리는 장기들로 변했다.


린은 바닥을 잔뜩 물들인 붉은색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도 한평생 실력을 쌓아왔겠지만, 결국엔 보잘것없는 말로다. 펜리르와 인간은 그만큼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었다.


“인간 주제에, 분수를 모르다니.”


린이 다가서자, 일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기어서라도 도망가려던 뚱뚱한 남자의 두 다리에 불이 붙었다.


그녀는 자신은 에든의 장군이라고 호소하며 돼지처럼 비명을 꽥꽥 질러대는 남자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대로 온몸이 천천히 타들어 가는 아픔을 느껴라.”


린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조금 뒤 그 비명이 멎을 때까지 그걸 감상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작가의말

생각해보니까 인간이 만나기에 제일 위험한 캐릭은 린 같아요. 기본적으로 인간혐오가 깔려있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버릴 것 같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5

  • 작성자
    Lv.61 Ninedevi..
    작성일
    22.08.04 22:20
    No. 1

    린 앞발이 천명이면 생각보다 작네
    펜리르라서 그런거 너무 이미지카 큰걸로 생각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Testable
    작성일
    22.08.04 22:34
    No. 2

    이것도 살살한 거니까 풀 본체 소환하면 움직일 때마다 만 명 단위로 죽어나가지 않을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Testable
    작성일
    22.08.04 22:51
    No. 3

    1000명 밀집한 걸 밟는다는 걸 기준으로 앞발 사이즈가 20m 가량 되고, 그러면 일반 늑대에 비해서 225배 크다는 단순 계산이 나오는데요. 이걸 기준으로 생각하면 본체의 키는 191m이고 좌우의 몸체 길이는 약 383m입니다. 키는 남산타워보다 조금 작은 정도겠네요. 저도 세세한 치수까지 생각한 건 아니라(북유럽 신화에도 크다~ 정도의 묘사) 위의 계산은 그냥 참고로만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1 Ninedevi..
    작성일
    22.08.05 10:03
    No. 4

    아 살살한 거였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변진섭
    작성일
    22.11.10 20:34
    No. 5

    잘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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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겨울, 온천 +5 23.02.25 75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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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이스 바실루스 +1 23.02.15 87 3 14쪽
245 레벤 연합의 침공 +1 23.02.11 79 2 14쪽
244 약자의 운명 +1 23.01.28 94 3 16쪽
243 표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가름) +3 23.01.18 90 3 1쪽
242 또 다른 숙청의 시작 +1 23.01.14 95 3 14쪽
241 찬탈의 하겐 +1 23.01.01 101 4 14쪽
240 추악한 진실 +1 22.12.25 109 4 16쪽
239 개혁의 불씨 +1 22.12.10 105 4 15쪽
238 백색 죽음이 깔린 추도식 +1 22.11.20 105 3 14쪽
237 다크엘프와 여우의 진급 +1 22.11.13 100 4 10쪽
236 두 번째 보루의 소실 +1 22.11.13 97 4 10쪽
235 꺾인 십자가, 꺾이지 않는 신념 +1 22.10.31 106 4 12쪽
234 폭살의 르몽 +3 22.10.19 119 4 16쪽
233 의외의 첫인상 +1 22.10.14 111 5 13쪽
232 사절단의 방문 +1 22.10.12 154 3 13쪽
231 짙게 드리우는 전운 +1 22.10.07 118 4 18쪽
230 어둠에 대처하는 자세 +1 22.09.29 115 4 18쪽
229 어둠은 확실하게 무너뜨린다 +2 22.09.15 128 5 18쪽
228 치명적 착각 +1 22.08.27 106 3 17쪽
227 구원의 손길 +4 22.08.19 113 5 18쪽
226 공주의 각오 +1 22.08.15 120 6 17쪽
225 강요되는 선택 +1 22.08.08 104 4 17쪽
» 그 불꽃은 푸른 색을 띠고 있다 +5 22.08.04 109 5 19쪽
223 우펜 요새 +1 22.07.30 115 5 20쪽
222 마왕의 제안 +4 22.07.26 117 4 19쪽
221 인간의 도시에, 인외가 도착하다 +3 22.07.24 112 4 15쪽
220 분열된 왕국 +1 22.07.24 110 4 16쪽
219 새로운 만남은 운명의 방향을 바꾼다 +1 22.07.22 107 5 19쪽
218 칠흑에 맞선 자의 말로 +2 22.07.18 116 4 17쪽
217 어둠에 물들지 않은 빛 +2 22.07.16 109 3 13쪽
216 지나가던 어둠이 발견한 것은 +1 22.07.16 115 4 11쪽
215 다가오는 위기, 혹은 기회 +1 22.07.09 126 5 19쪽
214 칠흑의 선언 +1 22.07.04 113 4 17쪽
213 파멸의 그림 +3 22.06.26 116 3 19쪽
212 그리고, 새로운 국면 +2 22.06.25 114 5 17쪽
211 황혼의 다짐 +2 22.06.14 111 5 19쪽
210 쿠데타 +4 22.06.04 123 5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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