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새글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5.18 22:05
연재수 :
305 회
조회수 :
136,421
추천수 :
3,288
글자수 :
1,694,467

작성
22.07.30 23:56
조회
114
추천
5
글자
20쪽

우펜 요새

DUMMY

“3중대가 전멸했습니다!”

“리히트 요새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적의 공작이 아니라면 아마도···”

“적의 공성탑이 접근 중입니다. 어떻게든 무너뜨리지 않으면 성루의 병사들이 위험합니다!”


쉴 새도 없이 절망적인 보고가 쏟아져 들어오는 이곳은 자이나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우펜 요새다.


여느 때라면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을 터인 이 요새는 고성이 오가는 지옥으로 바뀌어 있었다.


베이런 남작은 의자에 걸터앉아, 이 모든 것이 악몽에 불과하기를 바랐다. 불을 붙여두었던 시가가 그에 검지와 중지 사이에 걸린 채 타들어 가고 있었다.


자이나스와 에든 사이의 국경지대에는 우펜 요새를 포함한 방위병력이 포진되어 있지만, 그것도 이미 옛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갑작스러운 에든 왕국의 기습에, 제대로 된 방어전도 펼쳐보지 못하고 벌써 국경의 6할 이상이 뚫려버렸다.


국경지대의 병력이 무능한 것이 아니다. 에든 왕국이 대륙전쟁법 조항상 꼭 사전에 이루어져야 하는 선전포고 절차를 무시하고 쳐들어왔는데 이만큼이나 버텨낸 것도 기적이었다.


에든은 압도적인 물량으로ㅡ특히 그들이 자랑하는 중갑기병단으로 단번에 몰아쳤다.


단단한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말을 탄 채 빠르게 창을 찔러오는 중갑기병단은 자이나스의 일반 보병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는 전력이다. 국경지대의 자이나스군에게 보급되는 건 기껏해야 찌르기 공격에 취약한 사슬갑옷이었으니 말이다.


허나 단지 그것만이라면 시간은 어떻게든 벌어볼 수 있다. 그 수는 적지만 요새마다 비치된 대포라면 손쉽게 기병단의 대열을 무너뜨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번에 자이나스가 싸워야 하는 건 에든의 병사만이 아니었다.


“전쟁에 마물 따위를 쓰다니, 비겁한 놈들···!”


베이런 남작이 이를 빠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그랬다. 에든 왕국은 놀랍게도 마물을 앞세워서 요새를 공략하고 있었다.


마물을 사역할 수 있는 마법사가 그쪽에 있다고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전부 이 침공작전을 위해 준비한 것이겠지. 놈들은 그만큼 자이나스를 먹어치울 작정을 하고 쳐들어온 것이다.


자이나스가 자랑하는 대포도 움직임이 민첩한 마물 앞에서는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현재까지 우펜 요새 측에서 확인한 마물은 무려 다섯 종으로, 제일 위협이 되는 것이라 하면 오우거와 플레임 스네이크다.


평균적으로 인간의 서너 배는 되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오우거는 무거운 공성추를 가볍게 들고 성문을 부숴버렸고, 플레임 스네이크는 일부 개체가 9급 공격 마법인 파이어샷을 쓸 수 있어 자이나스의 병사들이 고전 중이다.


인간을 먹이로 생각하는 마물을 어떻게 길들였는지는 몰라도, 그 효과는 확실했다.


마물의 퇴치는 주로 왕국기사단이 담당하기에, 마물과의 싸움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요새의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베이런 남작은 착잡한 마음으로 그가 방금 본 전투를 떠올렸다.


오우거가 거대한 방망이를 휘두르기만 해도 소대 단위가 나가떨어지고, 그 틈으로 케이나인 울프들이 뛰어들어 송곳니를 병사들의 목에 박았다.


플레임 스네이크가 쓴 파이어샷에 망루에서 활을 쏘던 궁수가 불에 타오르는 채 추락하고, 반인반조의 모습을 한 버드맨들이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 성벽에 오른 병사들을 공격했다.


점점 쌓이는 아군 시체의 산이 증명하듯, 이 마물들은 통상적인 병력으로 퇴치하기 어려웠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건 공격 마법에 뛰어난 마법사였다.


자이나스 왕국이 마법을 중시하기는 하나, 고위 마법사는 죄다 왕도 근처에 있다.


왕립마법학교에서 매해 수백 명의 마법사를 배출해내긴 하지만, 마법에 재능이 있는 자라면 아무도 이런 급여도 낮고 출셋길도 막힌 변방의 국경지대에 오지 않으려 하니 말이다.


따라서 참으로 개탄스럽게도 제대로 마법을 쓸 수 있는 병사는 이 요새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것도 왕가에서 내린 명령에 억지로 따르는 형태로 파견된 것으로, 10급 통신 마법을 겨우 쓰는 마법사 견습생에 불과하다.


그 견습생은 지금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왕도에 계속 통신을 시도하고 있을 테지만, 애초에 10급 통신 마법은 근거리에서만 쓰이고 장거리에서는 성공률이 극악으로 떨어지는 초급 마법이라 남작은 최소한의 기대도 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베이런 남작은 이것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경이 뚫리는 순간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니, 적어도 8급 마법을 쓸 수 있는 고위 마법사를 배치해서 방어를 견고히 해야 한다고 거듭 부탁했다.


허나 지난 20여 년간 이어져 온 평화에 안일해진 높으신 분들ㅡ특히 귀족 파벌은 국왕 파벌에 속하는 그가 힘을 키우는 것을 경계했는지, 그의 요청을 매번 거절해버렸다.


마법이라는 것은 그 급에 따라서 때로는 병사 천명보다 든든한 힘이니 절대 남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았겠지.


마법 아티팩트로 먹고 사는 자이나스의 국경을 지키는 요새에 제대로 된 마법사가 없다니, 희극이 따로 없다는 생각에 베이런 남작은 헛웃음을 지었다.


결국 그를 비롯한 일부의 공직자들은 자이나스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이 자리에 버티는 것이다.


국왕이 점점 힘을 잃어감에 따라 재상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이 나라에선 자신의 충성이 보답받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꼭 필요한 일임을 알기에.


“남작님, 적의 움직임이 멈췄습니다. 내부에 침입했던 버드맨들도 일단 철수했습니다.”


때마침 성루에서 돌아온 병사가 남작의 주의를 환기했다.


“에든의 사자로 보이는 자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 모양인데,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바로 승낙한 베이런 남작은 터덜터덜 걸어 성루에 올랐다. 방금까지 치열했던 전투를 증명하듯, 끔찍한 얼굴로 죽어간 아군의 시체가 발치에 널려있었다.


절로 이가 악물어지는 광경에서 억지로 눈을 돌린 남작이 적 병력이 주둔한 곳을 보자, 그가 들은 대로 적병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홀로 나와 있다.


“요새의 지휘관은 들어라!”


적병이 쩌렁쩌렁 외쳤다.


“이 영토는 원래부터 에든 왕국의 것! 귀관은 정당성 없는 무력으로 에든의 재산을 강제 점거하고 있다! 쓸모없는 저항은 그만하고 할양한다면 위대하신 칼리더스 폐하의 자비가 있음을 알라!”


저건 분명 거짓말이다.


약해지려고 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남작은 단언했다.


저들은 마치 평화로운 길을 찾기 위해 항복을 권유하러 온 모양새지만, 이쪽이 백기를 든다고 해도 에든이 자비를 보일 리가 없다.


놈들의 창과 칼이 군인에서 민간인까지 가리지 않는다는 건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 증오스러운 에든의 왕, 칼리더스의 이름과 자비라는 단어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놈들은 단지 빨리 요새를 뚫고 싶은 것이겠지. 얌전히 목을 내어주면 기꺼이 베어주겠다는 소리다.”


저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베이런 남작은 다시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남작님, 문이 완전히 뚫리기 전에 탈출해 주십시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병사장이 진지하게 간언했다.


“남작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요새는 이미 글렀습니다. 다른 방어선도 깨져버렸습니다. 여기 남아있어봤자 개죽음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미 십수 년이나 그와 함께한 병사장은 이것이 이길 수 없는 전투임을 강조했다. 지난 전쟁에도 참전한 베테랑인 그는 패배를 목전에 둔 전황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남작님이라도 사셔야 합니다. 뒷문에도 적병이 있는 것같지만 다행히 숫자가 적습니다. 지금이라면ㅡ”


“아니, 자네의 충언은 고맙지만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베이런 남작은 다가오는 죽음에 조금 떨면서도, 굳게 말했다.


“아직 나의 요새는 함락되지 않았네. 내게 주어진 임무는 국경의 사수다. 이 길을 내주면 에든 놈들은 왕성에 이르기까지 절대 멈추지 않겠지. 그러니 이곳을 함부로 내팽개칠 수는 없어.”


도망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건 베이런 가의 수치.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국왕을 욕보일 수 있다.


이곳에서 오히려 자신이 도망쳐 살아남기라도 한다면 임무 태만이라는 둥 귀족 파벌 놈들이 트집을 잡아 왕가를 깎아내릴 테고, 그러면 왕가의 입지가 더욱더 좁아질 것은 뻔했다.


“기다리는 게 죽음이라고 한다면 의연하게 받아들이겠네, 병사장.”


베이런 남작은 한쪽에 준비되어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20년 전의 자신에 비한다면 많이 녹슬었을 실력이지만, 적어도 적병 여럿은 저세상으로 보내줄 수 있을 것이다.


“출진하겠다.”


그는 낮게 말했다. 공성추가 마지막 남은 성문을 부수며 내는 소리가 이곳까지 울리고 있었다.


“어차피 문이 곧 부서지겠지. 끓는 기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성벽에서 가져와 그 주위에 뿌려두어라. 때가 되면 내가 직접 불을 붙여 놈들의 퇴로를 막겠다.”


남작이 결의한 모습을 본 참모는 안타까움과 존경이 느껴지는 시선을 보냈다.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남작님.”


“아니, 병사장. 나 혼자로 충분하네.”


적은 강력한 마물과 에든의 정예 중갑기병단. 사실은 전혀 충분하지 않았지만, 남작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듯 완곡하게 말했다.


“내 고집에 자네들까지 말려들 필요는 없네. 내가 전사했다는 소식은 평화에 겨운 놈들에게도 전해져,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겠지. 이 사태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썩어빠진 귀족놈들도 조금은 정신을 차릴거다.”


물러날 곳은 없으니 이 우펜 요새가 배수진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왕의 검이었음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으리라.


병사장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착용한 베이런 남작이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나가려는 찰나, 아직 무너지지 않은 성루에 올라가 있던 병사가 허겁지겁 보고를 가지고 돌아왔다.


“남작님, 도시 쪽에서 이쪽으로 오는 병력을 확인했습니다.”


이미 모든 걸 각오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보고 내용은 남작의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뭐지, 도시측이 보낸 원군인가?”


그 이기적인 백작이 이쪽으로 지원을 보낼 리 없다고 생각하며 베이런 남작이 물었다.


“그게··· 하늘을 나는 배입니다. 척후가 확인한 바로는 데트르 마도연방국의 국기를 걸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보셔야할 것 같습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


본인도 믿어지지 않는듯한 태도로 병사가 보고를 마치고, 베이런 남작은 충격에 빠졌다.


데트르 마도연방국은 강력한 군대와 마왕의 통솔력을 바탕으로 데트르 대륙을 통일한 뒤, 최근에는 신성국에 선전포고를 했다고 들었다.


이 우펜 요새의 모두가 목숨을 걸고 국경지대에서 에든 왕국을 막아내는 동안 자이나스의 나머지는 이미 마족들에게 점령당했다는 말인가.


암울한 생각에 남작이 입술을 깨물었다.


마도연방국이 에든 왕국과 손을 잡아 동시에 침공해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요새를 공격하는 마물들의 존재를 납득할 수 있지만, 마족을 대놓고 노예로 부리는 에든 왕국이 마도연방국과 동맹을 맺었다는 건 잘 설명이 되지 않았다.


“어떡할까요, 요격하려고 해도 궁수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 내가 직접 나가보겠다.”


상황을 알지 못하는 지금, 허투루 타국과 외교적 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는 베이런 남작은 병사장에게 병사들을 물리게 했다.


앞선 전투로 잔뜩 피폐해져 있는 병사가 마도연방국의 사람ㅡ아니, 마족을 적으로 오인해 공격할 가능성도 있었으니 말이다.


허겁지겁 밖으로 나간 베이런 남작은 상공에 큰 배 한 척이 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생각하는 배와 모양은 달랐지만 어디에 갑판이 있을지 짐작이 되는 구조였다.


저 배에서 내걸고 있는 건 검붉은 배경의 검은 독수리. 틀림없는 마도연방국의 국기다.


마족은 인간보다 마법에 뛰어나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마법으로 저 거대한 배를 띄우고 있는 것일까. 단순한 부유 마법으로는 효율이 좋지 않을 텐데.


남작이 여러 생각을 하며 식은땀을 닦는 사이에 배는 점점 고도를 낮추더니, 요새의 성루에 살짝 닿을 정도에서 멈췄다.


그가 반응도 하기 전에 배의 문이 서서히 올라가며 열리더니 한 소녀가 폴짝, 하고 뛰어내렸다.


배에서 내린 소녀의 얼굴을 본 베이런 남작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마족이 이쪽에 달려들면 금방이라도 검을 겨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 밟힌 건 친숙한 얼굴이었다.


“남작! 살아있어 주었군요!”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는 조금 성장한 소녀가 반갑게 달려왔다.


“시아 공주님···?”


베이런은 떨떠름하게 공주의 포옹을 받았다. 그건 틀림없는 시아 폰 발렌슈타인. 그가 충성을 맹세한 국왕의 따님이었다.


“공주님께서 어떻게 여기에... 그것보다 저 국기는, 하늘을 나는 배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당신을 구하러 온 게 당연하잖아요, 남작.”


시아는 그 말 하나로 모든 설명이 된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베이런 남작이 미간을 좁히고 있자니, 이번에는 소년 하나가 성루에 뛰어내려 가뿐히 착지했다.


밤하늘의 어둠을 담은 듯 검은 옷을 입은 소년이었다.


누가 봐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 소년을 본 시아가 깜박했다는 듯 설명했다.


“아, 이 자는 베이런 남작. 제가 어렸을 때 검술 훈련을 자주 봐주던 분입니다. 남작, 이쪽은 데트르 마도연방국의 류셀 블레이크 폐하이십니다.”


폐하라는 말에 베이런은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소년을 대하는 시아의 태도로 마도연방국이 자이나스와 적대관계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으니, 당연히 우방국의 왕으로 그를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옆에서 병사장이 한 박자 늦게 무릎을 꿇는 것이 느껴졌지만, 남작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이렇게나 어려 보이는 소년이다, 왕이라는 것에 의문을 품는 것도 당연하겠지.


그 자신도 공주가 직접 이 소년을 왕으로 지칭하지 않았다면 어느 귀족 집안의 아들 정도로 생각했었을 것이다.


한편, 시아는 존경밖에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그녀와 마왕이 함께 행동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블레이크 폐하께서는 일전에 저를 구해주셨어요. 아, 그건 나중에 따로 설명할게요. 어쨌든 그에 따른 왕가의 초대로 자이나스를 방문 중이셨는데, 이번 사태에 기꺼이 힘을 빌려주시겠다고 합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시아를 구했다는 말에 베이런이 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마족의 왕이라고 한들 자이나스 왕가의 일원을 구했다면 그 또한 경애해야 마땅했다.


조금 남아있던 의심은 눈 녹듯 사라지고, 그 또한 왕가에 충성을 다짐했으니 은혜를 입은 몸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번에 공주님을 구해주신 것,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남작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표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이미 발렌슈타인 6세에게 감사를 받았다. 일단 고개를 들어라, 남작.”


베이런이 고개를 들자, 소년ㅡ류셀 블레이크라는 이름의 마왕은 요새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해 들은 대로 상황은 좋지 않은 모양이로군.”


그가 국경지대의 전황을 말하는 것을 깨닫고, 베이런 남작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타국의 왕에게 자이나스의 처참한 실태를 보이긴 부끄러웠지만, 이곳에서 허세를 부려봤자 의미는 없다.


“에든 왕국이 갑자기 군을 움직였습니다. 최대한 막아보고는 있었습니다만, 여기가 한계인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든 놈들은 마물 따위를 앞세워서ㅡ아, 죄송합니다.”


마족과 마물은 지능의 유무라는 차이가 있지만, 넓게 생각해보면 먼 친척 같은 것이다. 베이런은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타국의 위기에 직접 도우러 찾아온 왕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지원을 놓치는 건 지휘관으로서 0점이었다. 어떻게든 실수를 만회해야 했다.


“마물에 대해서는 인간의 기준으로 말씀드린 것이기에, 그, 폐하의 기분을 해치려는 의도는ㅡ”


황급하게 설명하는 남작을 손으로 제지한 마왕은 왜 그가 허둥지둥하는지 깨달았는지 피식 웃었다.


“마족과 마물은 근원은 같다고 해도 전혀 다른 부류지. 내가 불쾌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아도 좋다.”


너무나도 인간 같은 모습에, 사실 이 마왕은 마족이 아니라 인간이 아닐까 착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마왕 폐하.”


정말 그런 것일까, 아니면 관대하게 넘어가 준 것뿐일까. 한숨 돌린 베이런은 다시금 이 왕이 이곳에 와있는 이유를 떠올렸다.


아마 저 배에 병력을 데리고 온 것이겠지. 타국의 군사적 지원을 이리 쉽게 받는다는 건 뭔가 찜찜하지만, 왕가와는 이미 이야기가 된 것 같으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시아, 어떤가. 내가 도와줄 필요가 있겠나?”


“... 저는 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왕이 묻고, 시아가 답했다. 그녀는 남작을 보더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베이런 남작. 저는 자이나스가 마도연방국의 군사적 도움이 필요한지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 필요성이 정당하다는 건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자이나스는 아마도 스스로의 힘으로 에든을 몰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베이런 남작은 시아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타국의 손을 빌려야 한다는 건 그만큼 자국에 부족함이 있다는 것. 왕가의 일원으로서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에든에 먹혀버리느니 도움을 받아서라도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백배는 나았다.


신성국과 동맹국인 자이나스가 마도연방국의 도움을 받는 게 과연 합당할까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단지 왕가의 결정을 따를 뿐인 가신인 베이런 남작이 참견할 부분은 아니었다.


“그러면 금방 정리하지. 이 정도면 나 하나로 충분하다.”


마왕은 놀랍게도 그리 말했다. 남작에게 더 놀라운 건 수긍하듯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시아의 모습이었다.


“자,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일국의 왕께서 직접 전투에 참여하시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마왕이 당장이라도 요새를 내려가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베이런 남작이 대단히 난처한 얼굴을 만들었다.


혹시 마왕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기면 자이나스 왕가가 은인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에든 뿐만이 아니라 마도연방국의 침공까지 감당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째서 공주가 마왕을 말리지 않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이 정도의 지위에 있는 자가 단독으로 전투에 참여한다니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위기에 빠진 자이나스를 도와주신다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허나 병력을 먼저 보내서 상황을 지켜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물 외에도 에든의 중갑기병단은 정면으로 부딪치기엔 너무 위험합니다.”


마왕은 조심스럽게 걱정을 말하는 베이런 남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가.”


고개를 살짝 끄덕인 그는 즐겁게 말했다.


“자네의 걱정은 기우지만,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다. 그렇다면 우선 우리의 힘을 보일 필요가 있겠군. 린, 부탁해도 되겠어?”


마왕이 그렇게 부르자, 베이런 남작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예, 보스.”


남작이 놀라며 돌아보자, 방금까지만 해도 없었던 군복 차림의 소녀가 서 있었다.


푸른 머리칼에 늑대 귀와 꼬리를 가진, 아마도 아인으로 짐작되는 마족이다. 어떻게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것인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베이런 남작의 상식을 배반하는 말이 이어졌다.


“적의 숫자는 대략 2천. 지휘관을 남길 필요도 없다, 전부 쓸어버려라.”


마왕은 대수롭지 않다는 어투로 그리 명령한 것이었다.

New map (1).jpg


작가의말

7천자 정도가 1편 분량으로 적당한 거 같은데 자꾸 넘어가네요


눈갱 실력으로 대충 세계관 지도를 그려보았습니다. 좌측 하단 연두색이 자이나스고, 좌측 상단이 데트르 대륙이에요. 왼쪽부터 아일란즈 공국, 알트레아 왕국, 레윤케와 제국, 프랑 공화국이고 밑에 검게 칠해진 부분이 유디트 황국, 그리고 초록 부분이 라드레이드입니다. 수도는 나라마다 별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우측 상단에 보이는 게 루벨 왕국, 그 밑에 있는 게 쿠라마사, 그리고 흰 부분이 스파세니예 연방이에요. 그 이외에는 아직 언급되지 않은 미스드나 대륙의 나라들을 제외하고 최남단에 신성국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59 기술의 진보는 곧 살육의 진보 +3 23.06.10 68 3 16쪽
258 포신이 품은 마법 +3 23.05.20 70 3 10쪽
257 피의 무게는 죄의 무게만큼 +3 23.05.18 72 3 11쪽
256 신의 활, 그 시위가 품는 것은 +1 23.05.14 65 3 16쪽
255 매듭을 짓지 않으면 +2 23.05.09 69 3 14쪽
254 공중 요새 +3 23.04.29 70 3 16쪽
253 마도 vs 고유스킬 +5 23.04.05 75 2 15쪽
252 인간 대 인간 +3 23.03.25 84 3 14쪽
251 이빨을 드러낸 어둠 +4 23.03.18 81 3 14쪽
250 예술은 폭발이다 +3 23.03.10 87 3 12쪽
249 전쟁 발발 +2 23.03.02 89 2 13쪽
248 겨울, 온천 +5 23.02.25 75 3 13쪽
247 성전의 전조 +2 23.02.19 86 4 13쪽
246 이스 바실루스 +1 23.02.15 87 3 14쪽
245 레벤 연합의 침공 +1 23.02.11 79 2 14쪽
244 약자의 운명 +1 23.01.28 94 3 16쪽
243 표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가름) +3 23.01.18 90 3 1쪽
242 또 다른 숙청의 시작 +1 23.01.14 95 3 14쪽
241 찬탈의 하겐 +1 23.01.01 101 4 14쪽
240 추악한 진실 +1 22.12.25 109 4 16쪽
239 개혁의 불씨 +1 22.12.10 105 4 15쪽
238 백색 죽음이 깔린 추도식 +1 22.11.20 105 3 14쪽
237 다크엘프와 여우의 진급 +1 22.11.13 100 4 10쪽
236 두 번째 보루의 소실 +1 22.11.13 97 4 10쪽
235 꺾인 십자가, 꺾이지 않는 신념 +1 22.10.31 106 4 12쪽
234 폭살의 르몽 +3 22.10.19 119 4 16쪽
233 의외의 첫인상 +1 22.10.14 111 5 13쪽
232 사절단의 방문 +1 22.10.12 154 3 13쪽
231 짙게 드리우는 전운 +1 22.10.07 118 4 18쪽
230 어둠에 대처하는 자세 +1 22.09.29 115 4 18쪽
229 어둠은 확실하게 무너뜨린다 +2 22.09.15 128 5 18쪽
228 치명적 착각 +1 22.08.27 106 3 17쪽
227 구원의 손길 +4 22.08.19 113 5 18쪽
226 공주의 각오 +1 22.08.15 120 6 17쪽
225 강요되는 선택 +1 22.08.08 104 4 17쪽
224 그 불꽃은 푸른 색을 띠고 있다 +5 22.08.04 108 5 19쪽
» 우펜 요새 +1 22.07.30 115 5 20쪽
222 마왕의 제안 +4 22.07.26 117 4 19쪽
221 인간의 도시에, 인외가 도착하다 +3 22.07.24 112 4 15쪽
220 분열된 왕국 +1 22.07.24 110 4 16쪽
219 새로운 만남은 운명의 방향을 바꾼다 +1 22.07.22 107 5 19쪽
218 칠흑에 맞선 자의 말로 +2 22.07.18 116 4 17쪽
217 어둠에 물들지 않은 빛 +2 22.07.16 109 3 13쪽
216 지나가던 어둠이 발견한 것은 +1 22.07.16 115 4 11쪽
215 다가오는 위기, 혹은 기회 +1 22.07.09 126 5 19쪽
214 칠흑의 선언 +1 22.07.04 113 4 17쪽
213 파멸의 그림 +3 22.06.26 115 3 19쪽
212 그리고, 새로운 국면 +2 22.06.25 114 5 17쪽
211 황혼의 다짐 +2 22.06.14 111 5 19쪽
210 쿠데타 +4 22.06.04 123 5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