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02 웃는 인형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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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몇 가지만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계영이 자서전 원고를 꺼내며 일러뒀다. 가연이 네, 하고 대답했다. 계영은 자서전 원고를 몇 장 뒤지더니 물었다.
“이런 확인 절차가 별스럽게 들리실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서전을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에 안지율 씨도 뒷부분을 유추해서 적는 수밖에 없거든요. 저희는 그 일을 대신 해 드리기 위해 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일단 앞의 내용 몇 가지를 확인할게요. 아버님의 자서전 내용에 따르면, 따님이 주변의 불행들에도 불구하고 말을 잘 듣는 착한 사람으로 성장해서 좋았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런 천사 같은 딸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한 게 가장 큰 후회로 남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
“그게 결혼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상대는 원래 살던 시골 동네의 동창이었던 남자······, 맞습니까?”
송가연은 살짝 흠칫하더니 밝혔다.
“동창은 아니고요, 동네 오빠였죠. 저보다 5살이 많습니다.”
계영은 사사로운 관심을 표출하듯 입 꼬리를 조금 올렸다.
“어떤 분이었습니까.”
송가연이 여전히 당황스러운 듯 차로 목을 축였다.
“그냥 평범한 남자였어요. 지금도 연락은 해요. 우리는 몇 개월 전에 다시 만나서……, 얼마 전에는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죠.”
세준은 자서전의 내용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송가연은 상대 남자와 어린 시절 과외 선생과 학생으로 만나고, 어머니를 화재로 잃는 사고를 겪었다. 두 사람은 당시에 서로의 행적에 대해 증언을 했다고 되어 있다. 부인을 잃은 송 회장이 외동딸을 데리고 상경, 억세게 좋은 운으로 지금의 부인을 만나 거대 출판사를 건립했다. 그런데 그 딸이 다시 몇 년 전에 불운의 사고를 같이 겪었던-혹은 방화 용의자일지도 모를- 남자를 만나서 결혼까지 추진한다?
상식적으로 모든 부분에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인 송기철 회장이 왜 그 남자 강지한을 유학까지 보내줄 정도로 빼돌렸느냐도 의아했고, 송가연이 그런 남자를 다시 만나 결혼까지 생각한 것도 의아했다.
그러나 송가연은 상대 남자, 강지한에 대해 매우 관대했다.
“몇 년 전에 끔찍한 화재 사건이 있었어요. 15, 17년? 그 정도 됐네요. 그때 지한 씨가 경찰의 조사를 여러 차례 받았지만, 모두 무혐의였어요. 동네 사람들이 떠드는 것과는 달라요. 아빠 역시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여기셨을 거예요. 그러니까 유학도 보내줬겠죠. 제가 다 커서 지한 씨를 다시 만나건……, 아빠의 사무실에서였어요. 그게 1년 전의 일이에요. 하지만 아빠는······, 우리의 어린 시절을 잊고, 가난한 그이를 반대하셨어요.”
가연이 초조한 듯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약지에 낀 반지는 오래되고 조잡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그 반지를 시종일관 만지며 계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계영은 대수롭지 않아하는 얼굴로 서류를 들추더니 벽난로 위의 사진과 약통으로 시선을 옮겼다.
벽난로 위의 사진들과 약통, 그리고 향초는 확실히 시선을 끄는 뭔가가 있었다.
사진, 약통, 향초. 이 세 가지는 송 회장과 미스터리한 사건에 얽힌 소재가 아닌가.
“저 벽난로 위의 사진 확인 좀 해도 될까요? 자서전에 들어가는 이 사진들과 다른 것 같아서요.”
계영이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서류 안의 사진 몇 장을 꺼냈다. 그 안에는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것처럼, 사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진도 섞여 있었다. 아마도 전 프로젝트인 「희즈 웨딩샵」에 관련된 사진으로 짐작되는 것들이다. 끔찍하게 난도질당한 동물의 사체 사진들이 송 회장의 사진 중간에 끼어 있었다. 개중에는 어느 사건과도 연관이 없는 사진들-, 이를 테면 내전으로 뒤통수에 총을 맞고 쭉 누워 있는 시신의 사진과 그것을 보며 통곡하는 가족들의 모습도 있었다.
계영은 그 사진들을 테이블에 실수인 양 떨어뜨리고는 놀란 듯 수습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다른 사진하고 착각하고 들고 왔네요.”
가연은 얼어붙은 것처럼 그 사진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며 네, 하고 대답했다. 계영이 그런 가연을 다소 무례할 정도로 빤히 보더니 일어섰다.
“대신 저기 벽난로 위에 있는 사진들 좀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네? 저건 그냥 가족사진인데······.”
“아, 그런 것 같아요. 네, 그런데…….”
세준은 계영의 눈짓에 일어섰다. 뭔지는 몰라도, 이런 상황에서 계영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잘 알았다. 하이드니 지킬이니 그런 것은 나중에 싸워도 될 일이다. 송기철 회장의 프로젝트 완료일이 만 48시간도 남지 않았다.
계영은 웃옷을 벗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혹시나 자서전 콘셉트에서 빠진 사진이 있는지, 알맞은 게 있는지, 따로 체크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아, 근데 초를 켜 놓으셨네요?”
네, 가연이 대답했다.
“비 오는 날을 싫어하거든요. 안정을 위해서 종종 켜 놓아요.”
“어머, 그러세요? 저도 비 오는 날이 이상하게 싫더라고요.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요새는……”
도란도란, 쑥덕쑥덕.
역시 권계영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일반인 코스프레, 그것도 사랑스러운 여자의 코스프레를 할 수 있었다.
세준은 등 뒤에서 도란거리는 여고생 같은 잡담을 무시하며 액자를 들었다. 세 개의 향초 중에 가장 왼쪽에 있는 초는 무지개 색이었다. 액자는 무지개 향초 옆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액자를 들 때 그 초의 불이 약간 이상했다. 세준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바로 사진에 집중했다.
중년의 남자와 어린 아이가 웃고 있는 사진.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는 동안, 갑자기 주변의 목소리가 모두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이미 이상한 환상, 투시는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 새, 사방은 유동체처럼 부드러운 습기에 막혀 있다. 검푸른 김이 에워싸, 마치 공동空洞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느 때보다 훨씬 더 짙은 안개와 김이었다.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연기와 재로 이뤄지는 환영이다. 검은 재 같은 것이 몰캉몰캉한 습기의 벽 사이를 파고들었다. 쉬익, 하고 바닥으로부터 뱀이 기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바닥으로부터 연기가 피어오르며, 재가 별빛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뭐야……?!”
세준은 저도 모르게 물러섰다. 연기가 스며들며 나오던 뱀의 소리가 사라지고, 철을 긁는 소리가 계속 울렸다. 찌걱찌걱-, 날카로운 소리가 몇 번이고 겹쳐 울려, 소름이 돋았다. 살려주세요! 비명도 연이어 들렸다. 그때 시야를 가로막던 정면의 검은 막이 꿈틀거리며 한 사람의 뒷모습이 그 벽에 비쳤다.
마치 야외 영화관 같은 장면이었다. 느닷없이 등장한 사람의 그림자가 안개의 벽을 투영하며 천천히 나타났다. 짙은 색의 후드 티를 푹 눌러 써, 얼굴을 알 수 없지만 체구는 작고 약간 마른 편이다.
후드 차림이 멈춘 곳을 시작으로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곧 어두운 밤거리의 풍경이 펼쳐졌다. 어둡고, 으슥하며, 인적이 거의 없는 골목길의 모습이었다.
후드를 뒤집어 쓴 사람은 골목의 어귀로 다가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길에는 사람이 잠들어 있었다. 잠든 사람이 인기척을 느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낡은 옷차림과 더러운 얼굴이었다. 노숙인은 술을 마시기라도 했는지, 풀린 동공으로 후드 티를 보며 말했다.
‘어……? 천사다…….’
후드를 눌러쓴 존재가 대답했다.
‘그래.’
낮고, 조용하지만 가는 음성.
그 음성의 존재는 후드의 그림자 안에 자신을 온연히 감춘 채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가 꺼낸 것은 성냥과 500ml 병이다. 그는 병의 뚜껑을 열어, 노숙인에게 건네듯 하다가 그것을 그에게 뿌려댔다.
노숙인이 얼굴을 팔로 가리며 읏, 하고 소리쳤다. 후드 티는 그 순간을 노리듯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달칵-.
금속제 라이터의 부싯돌이 돌아갔다. 불이 훅, 하고 노숙인의 몸에서 한 번에 타올랐다. 으악악악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이 계속 들렸지만, 후드 티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시 사방이 꿈틀거리며 후드를 둘러싸듯 감싸기 시작했다.
세준은 뒤로 물러섰다. 살면서 별의별 장면을 보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장면은 처음이다. 인간이 인간을 마치 쓰레기 태우듯 아무런 동요 없이 태워 버렸다. 그러나 환상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던 청연靑烟이 걷히고 나자, 이번에는 바닥에 여기저기 누워 있는 인영人影이 보였다.
모두 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다. 어린 남자 아이 하나와 여자 아이 둘, 성인 남녀 일곱 명, 총 열 명의 사람들이 불타는 거리에서 눈을 뜬 채 누워 있다. 모두가 붉어진 눈에, 작아진 동공과 검게 그을린 피부를 갖고 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피부에서 검은 재 같은 것이 떨어지며 사방으로 날리기 시작했다. 후드를 눌러쓴 사람은 그들 가운데 서 있었다. 고립무원의 병장처럼, 죽은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유일하게 산 사람이다.
타닥타닥-.
아직 남은 불씨가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휑한 달빛만이 비추는 어두운 거리.
후드 옷의 인물이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점점 강해졌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 작가의말
업데이트 기록 _ 14.11.10 수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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