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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윤의 서재입니다.

투시透視, Second Sight

웹소설 > 자유연재 > 공포·미스테리, 추리

최승윤
작품등록일 :
2014.08.03 00:37
최근연재일 :
2014.12.18 17:34
연재수 :
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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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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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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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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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19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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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Episode 02 웃는 인형 (3)

DUMMY

“들어가게 해달라고요! 그 사람, 권계영 대리인가 뭔가······, 만나게 해달라고요!”


비명과 함께 도착한 방문객은 안지율이었다. 팀 사람들이 모두 계영을 쳐다봤다. 계영은 무심하게 중얼댔다.


“역시, 이 섬세한 인기란!”


김태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 “권 대리님?”하고 불렀다. 계영이 아휴, 하고 일어났다. 그는 애완동물을 부르듯 세준을 불렀다.


“가자.”


전후 설명은 역시 없었다. 이런 일에 익숙해지는 게 업무였다. 세준은 계약서를 챙겨들고 계영과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안지율은 지난 새벽에 보았을 때보다 더 엉망인 모습으로 손톱을 뜯고 있었다.


권계영이 안쓰러운 듯 웃으며 권했다.


“공원을 좀 갈까요? 안지율 씨는 햇볕을 좀 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회사 건물 앞에 있는 공원은 소담스럽다. 세준도 예전에 위층에 근무할 때, 점심시간 등을 이용해서 자주 산책했던 곳이다. 지하팀으로 옮긴 며칠간은 그런 일이 도통 없었지만-.


공원 입구에는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는 미니 카 카페가 있다. 세준은 그곳에서 커피 세 잔을 사서 벤치로 옮겼다. 계영과 지율이 먼저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지율은 그 잠깐 동안 계영의 격려를 받았는지 조금 진정한 표정이었다. 여전히 창백한 낯빛에 손톱을 물어뜯었지만, 눈동자의 핏줄은 어느 정도 사라졌다.


계영이 그에게 커피를 내밀며 격려했다.


“자, 이제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그럼, 저 권, 계, 영에게 무슨 일인지 이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율은 혼란스러운 듯 둘을 쳐다보았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어제……”하고 확인했다.


“아니, 오늘 새벽에…… 저랑 통화하신 그 권계영 씨가 정말 맞으세요?”


계영의 둔갑술을 의심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지율에게는 그저 아직 가시지 않는 특유의 불안이 남아 있었고, 사람이란 불안할수록 확실한 것을 원하기 마련이다.


“네, 그 권계영 맞아요. 오늘 새벽까지 노트북에서 계속 이상한 자판 소리 같은 게 들린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리고 인형이 웃었다고…….”


계영이 차근차근 정리했다. 역시 상대를 안심시키는 태도로, 그가 의도를 했든 안 했든 모든 장치가 그 안심에 알맞았다.


나뭇가지를 움직이는 미풍도, 공기 속을 유동하는 빛의 분말도 부드러웠다. 게다가 믿기지 않게도, 계영의 목소리는 차우현을 달랠 때처럼 초연한 헤르츠로 진동했다.


세준조차도 이유 없이 이완됐다. 그 목소리는 마치 지친 고양이나 다친 개를 달래듯이 다정했다.


“자, 어제 제가 알려드렸죠? 심호흡을 해보세요. 숨을 들이쉴 때 배가 나오고, 숨을 내쉴 때 배가 들어가게. 네, 맞아요. 그렇게 하시면 돼요. 아기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호흡을 하죠. 그게 아기들이 세상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증거이기도 해요. 동물들도 그런 호흡을 하고요. 가슴을 움직이는 흉식 호흡을 하면 원하지 않아도 교감 신경이 들끓거든요. 투쟁 도피 반응을 일으키는 게 교감 신경이니까, 이제 스트레스를 물릴 수 있게 좀 더 부드럽게 숨을 쉬어 보세요. 눈을 감고, 들이쉴 때 이제 막 태어나서 처음 들이쉬는 숨이라고 여기고, 내쉴 때 죽는 순간에 마지막 뱉는 숨이라고 여기면서 집중해 보세요.”


그는 확실히 임상심리학에 가까운 방법을 알고 있다. 그가 취한 방식은, 사람을 트랜스trance시키는 흔한 방법 중 하나였다. 세준은 직접 실행해 본 적이 없지만, 같은 방식은 최면hypnosis을 유도하는 호흡법이기도 했다.


몇 분 뒤, 지율은 한결 편해진 눈빛으로 천천히 눈을 떴다. 경련하듯 지하 복도를 울리던 목소리도 한층 진정이 됐다.


“네……, 그 권계영 씨가 맞네요. 새벽에 고마웠어요. 지금도…….”


“별 말씀을. 안심하세요.”


계영이 씽긋 웃었다. 꽤 청순한 느낌이었다.


“안심하셔도 돼요, 안지율 씨. 과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걸 미스터리라고 부르지만, 논리로는 뭐든지 설명할 수 있어요. 어떤 미스터리도, 그 현상이 생기게 한 전후 맥락을 이해할 수는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고, 이상한 현상이 생기는 전후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하는 한, 안지율 씨는 미치지 않았어요.”


안지율이 모범적인 학생처럼 끄덕였다. 권계영은 손을 비비며, “자, 그럼-.”하고 운을 뗐다.


“이제 차근차근 설명해주실 수 있으시죠? 새벽에 저는 들었지만, 이 친구는 제 파트너인데 확실히 듣지 못했으니까요.”


지율의 사연은 긴 호흡과 함께 시작됐다.


“저는 송기철 회장님의 출판사에서 프리랜서로 계약한 작가예요. 원래 회장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이 자서전은 인터뷰가 되고, 제가 간간이 단락들을 정리하고 대필하면서 회장님의 자서전 출판을 맡게 됐죠. 일을 맡은 건 대략 6개월 쯤 전부터였어요. 그 이후로 4, 5개월 동안……, 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초고가 그런 식으로 완성이 됐거든요. 문제는 제가 참여하지 않은 뒷부분이에요. 이 부분은 제가 초고의 앞부분을 정리하는 동안 회장님이 직접 기술述하기로 되어 있었고, 저는 회장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 뒷부분의 원고를 받았거든요.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지율은 다시 숨을 짧게 들이켰다. 그는 끔찍한 것을 떠올리듯 잠깐 긴장했다.


“그런데 회장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이제 고작 보름쯤 됐는데, 제가 작업을 하기 위해 컴퓨터상에서 뒷부분의 파일을 연 것은 열흘 전이었거든요? 처음에는 파일을 열어서 뒷부분을 제가 작업하던 초고 파일에 옮겨 담았어요. 거기까지는 기억해요. 원고 일이라는 게, 뒷부분의 내용이 오면 파일에 붙이고, 원래 제가 작업하던 부분으로 돌아와 글을 뜯고, 교정을 보면서 이어붙인 뒷부분까지 탈고를 하는 순서대로 진행돼요. 그래서 미처 발견을 못했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처음에는 뒷부분을 이어붙이고 작업을 하는 것에 문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 일주일 쯤 전부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작업하던 파일의 스크롤을 내렸더니……, 제가 이어붙인 그 부분, 그러니까 회장님이 작성하신 뒤의 내용이 모두 삭제된 거예요. 심지어 저는 원본 파일도 복사 파일을 믿고 완전히 삭제해 버린 거죠.”


지율은, 여느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 황망히 문제점을 찾으려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처음에는 단순한 실수거나 착각이라고도 여겼다. 이미 삭제해 버린 회장의 원고 말미 파일을 복구하려 해본다든지,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프로그램 회사에 의뢰도 해보았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피가 말라붙은 손가락이 꼼지락댔다. 지율은 자신의 손끝을 응시한 채 이어갔다.


“전혀 소용이 없었어요. 어디에도 그 내용은 없었어요. 원래의 내용이 담겨 있던 파일은 제가 삭제해서 복구가 안 되고, 복구 전문 회사의 직원도 불렀지만, 그 사람도 실패했고요. 저는 미칠 지경이었어요. 회장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경황이 없어서, 아직 뭐라고 적으셨는지 보지도 못했으니, 제가 기억을 떠올려 다시 쓰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고요. 그런 식으로 며칠이 지나니까 피가 바짝 마르더라고요. 그래서 노트북을 켜놓고 쪽잠을 자기 시작했어요. 일단 쓰고 있던 앞부분이라도 제대로 정리하려고요. 그리고 뒷부분은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려서 훑어봤던 내용이라도 떠올리려 해봤죠. 회장님은 원래 출판기획서를 꼼꼼히 남겨놓으셔서, 안 되면 주신 자료들을 사진으로 찍어 넣고 내용을 연결시키고 가족 분들을 만나서 검증을 받아야겠다고 여겼어요.

근데…… 그런 초조함 때문에 노트북을 켜놓고 잤더니…… 며칠 전부터 밤에 키워드 소리 같은 게 들리는 거예요. 처음에는 역시 피곤해서 겪는 현상이라고 여겼지만…… 나중이 되니까…… 미치겠더라고요. 자서전 마무리는 여전히 안 되고, 시간은 가고…… 시크릿 세이버에서 파일의 완성을 확인한 후 삭제해야 제 잔금도 입금되는데 그것조차도 할 수 없는 상황인 거죠. 혹시나 하고 컴퓨터를 끄고 잤지만, 새벽만 되면 여지없이 켜져 있고 자판 소리 같은 타닥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게 되고요.”


혹시 안지율이 무의식적으로 그 뒷부분을 지운 건 아닐까.


그의 말에 희박하지만 가능한 상상력이 동원됐다. 그러나 세준이 혹시나 하고 물었을 때, 지율은 거세게 부정했다.


“아니에요, 저도 혹시 파일을 지운 게 제가 한 게 아닌가 해서······, 정신과도 가고, 수면 다원화 검사도 받고······, 별짓을 다 했지만 아무것도 아니래요. 심지어 몽유병이 아닌가 걱정도 했지만 그것도 아니라고 했어요. 저는 어떤 수면 장애도 일으키지 않았어요. 제 문제가 아니에요. 어제만 해도 그렇죠. 어제도 멀쩡하던 제 컴퓨터가 복사한 자서전 파일을 열어놓고 제가 조는 순간부터 다시 그 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지율은 ‘소리’라고 말할 때마다 어깨를 떨었다. 경쾌하고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닌 게 분명했다.


세준은 안타까운 기분으로 미간을 좁혔다. 안지율이 느끼는 기분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귀신도 혼령도 미스터리한 현상도 아니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하나, 바로 광기였다. 며칠 전 계영이 말했듯, 무작위의 타인이 가진 광기를 느끼는 순간, 혹은 스스로가 가진 광기를 깨닫는 순간이 가장 두렵다.


인간에게 인지 능력은 스스로의 존재감을 느끼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인지감의 상실은 존재감의 무용을 상징하기도 한다. 지율이 느끼는 두려움은 바로 그런 측면이었다.


세상이 아니라 ‘내’가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


세준의 경험상, 이런 식의 두려움을 없애는 길은 딱 하나였다. 바로 다른 ‘사람’이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작업을 하는 건 어떨까요?”


세준이 상냥하게 제의했다. 안지율은 당황한 듯 얼굴을 훔쳤다. 곤란한 제안인 게 분명했다.


“그건 불가능해요. 정말 이상하지만, 회장님과 제가 맺은 이 자서전에 대한 계약에 그 상황이 명시되어 있거든요. 반드시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저 혼자 작업을 마무리하겠다는 약속이 첫 번째예요. 그리고 두 번째는 완성된 원고를 시크릿 세이버에 넘겨서 파기시킨다는 것이고요. 마지막은 그 원고의 내용에서 무엇을 알게 되더라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거죠.”


첩첩산중이다.


계영은 지율이 입을 연 이래, 내도록 끼어들지 않고 공원의 잔디밭을 응시했다. 한낮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개와 놀고 있었다. 크고 털이 많으며 아름다운 개들이 뛰어다니다가 계영에게 달려왔다. 계영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놈들은 왈왈거리며 계영에게 큰 앞발을 올려 경의를 표했다. 계영 역시 별로 마다하지 않는 얼굴로 개들과 놀아주기 시작했다. 지율이 이야기 하는 동안, 진지하게 듣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흘려듣는 태도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개와 공놀이를 시작했다.


지율은 어안이 벙벙한 듯 세준에게 물었다.


“권계영 씨라는 저분……, 원래 저런 사람인가요?”


네, 세준은 경건한 마음으로 위로했다.


“원래 저기까지가 한계인 분입니다. 짧은 시간 지내봤지만, 저 이상은 안 되는 분 같습니다만?”


계영은 자신을 향한 험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개와 몇 분을 신나게 놀더니 기지개를 켜며 돌아왔다.


“아, 어디까지 하셨죠?”


난데없는 개와의 놀이었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지율은 그때서야 완전히 회복됐는지 굳은 어깨를 매만졌다.


“그러니까, 파일을 댁들에게 넘긴 어제도 이상한 현상을 겪었다고요. 자판 소리도……, 또 웃는 인형도…….”


그놈의 인형.


계영이 몸서리를 치더니 되물었다.


“그 인형이 혹시 송 회장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어제 제게 그 인형이나 소품들은 송회장님 자서전에 넣을 사진이 필요해서 가지고 온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네, 관련이 있어서 촬영차 가지고 온 거예요. 음, 그 인형과 장난감들, 그리고 송회장님의 옛날 사진들 모두…….”


좋아요, 계영이 손을 비비며 반색했다. 마치 창백하고 가녀리며 눈동자가 맑은…… 사채업자처럼 보였다.


“좋습니다, 안지율 씨. 이제 이성을 되찾았으니까, 모든 미스터리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거 어때요?”


가녀린 사채업자가 말했다.


“음, 아까 제가 모든 미스터리는 과학이 아니지만, 맥락이 닿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죠? 그러니까……, 우리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해 보자는 거죠. 예를 들면, 계속해서 안지율 씨를 괴롭히는 자판을 두드리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는 그렇다 쳐도, 그 인형……, 송 회장의 자서전을 정리하시고 부분적으로 대필도 하셨다면 그 내용도 다 알고 계시죠? 혹시 내용 중에 그런 인형이나 소품과 관련된 부분이 있었나요?”


지율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자서전 내용 중에요? 아, 그래요, 있었네요. 해야 할 일이 많고 그 사라진 뒤의 내용 때문에 당황해서 깊이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맞아요, 관계있는 소품이니까 사진을 찍으라고 하신 거였죠. 그 장난감들은 회장님의 따님, 송가연 씨의 것이지만……, 아무래도 그 집안은 사고로 죽은 사람이 많으니…….”


세준과 계영은 시선을 교환했다. 사고로 죽은 사람이 많다, 라는 말은 어딘가 오묘했다.


세준이 먼저 물었다.


“사고로……, 죽은 사람이 또 있단 말입니까? 송회장 말고도?”


지율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네, 있어요.”


짧게 대답한 그는 곧 덧붙였다.


“자서전 내용에는 송회장님의 첫 번째 부인, 송가연 씨의 친모가 화재로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어요. 17년 전에요.”


계영이 그렇다면, 하고 입을 열었다. 좀 더 힘이 실린 음성이었다.


“그렇다면 송회장이 실어달라고 말한 그 사진들과 소품들은 송회장의 전前부인과 관련이 있고요?”


“송회장님이 원고를 완성 후 폐기해달라고 말한 건 원고가 한창 작성 중일 때였어요. 처음부터 그러신 건 아니고요.”


지율은 시간 순서를 바로 잡은 후 부연했다.


“그리고 질문하신 부분은……, 네······, 음, 돌아가신 전前 사모님, 그러니까 송가연 씨의 어머님과 관련이 있는 소품들이기도 하죠. 그 소품들은 회장님이 첫 번째 부인에 대해 적는 부분에 사진을 실을 자료가 필요해서 받은 거니까요. 그러니까, 회장님께서 직접 원고의 폐기를 결정하시기 전에, 책 중간에 넣을 사진이라든지······, 따로 촬영이 필요한 소품들을 넘기신 거예요. 송가연 씨의 소품이니까, 전前부인을 언급할 때 나오기도 하죠.”


의미심장한 힌트가 담긴 말이었다. 세준은 다시 계영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빛이 반짝, 하고 반응했다. 그렇군요, 세준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했다.


“그럼, 대리님, 정리해 보자면, 결국 자서전에 관련된 모든 ‘원본 데이터’를 폐기하라는 말은, 그 인형이나 사진들도 포함한 것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인형이나 사진도 자서전에 관련된 데이터니까요.”


안지율이 아, 하고 탄식했다. 그는 단박에 초조해졌다.


“그,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하죠? 원고 완성도 안 됐는데?”


계영이 미간을 문질렀다. 갈색 눈동자가 지율의 발끝을 쏘아보고 있었다. 뭔가를 깊이 생각하던 그는, 한참 후에야 “한세준!”하고 불렀다. 신음과 함께하는 호명呼名이다.


“네?”


개가 짖기 시작했다. 계영과 놀던 시베리안 허스키가 잔디밭을 마구 달리며 스스로를 과시했다. 개의 주인이 개를 잡기 위해 공원을 가로질러 바삐 뛰어다녔다. 계영은 그 개를 부르듯 “신입!”하고 다시 일렀다.


“가서 개 잡아 와.”


어이가 없는 지시에 웃음부터 나왔다. 세준은 힘껏 저항했다.


“아니, 제가 왜……!”


일단 팀을 이전한 거지 신입은 아니거니와, 한가하게 개를 잡으러 다닐 상황도 아니다. 그러나 계영은 역시 완고했다.


“어서!”


그는 시베리안 허스키를 교육할 때와 같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것은 ‘내’가! 움직이는 것은 ‘네’가!”


“하지만 선배님, 그건 업무로 움직이는 거고 개를 잡는 건 아무 관계가…….”


“나중에 다 관계가 있을 거야.”


계영의 포스는 슬슬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는 부타의 눈길, 즉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너는 내 말을 들으라.’와 같은 식으로 사람을 쳐다봤다.


하는 수 없지. 세준은 체념하며 웃옷을 벗었다. 자, 개나 잡으러 가 볼까.


회색이 섞인 크고 흰 털 뭉치가 잔디밭을 미친 듯이 싸돌아 다녔다. 세준도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계영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일단, 그 사진과 소품들 전부 저희에게 넘기세요.”


그가 조곤조곤, 안지율에게 권유했다.


“그 물건들을 저 인간 집……, 네, 개 잡는 저 인간 집에 하루만 보관해 봅시다. 그리고 나서 회사에서 인계하든지, 다시 안지율 씨 댁으로 보내드리죠.”


지율의 아연한 반응이 예상됐지만 들리진 않았다. 다만 계영의 으스대는 목소리만 낮게 울렸다.


“……그럼요.”


갈색 눈이 예쁜 사채업자는 명랑하게 응답했다.


“제가 저 인간 있는 데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 후배는 겁을 먹을 테니까, 개 잡으라고 보낸 겁니다. 그럼요, 제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출중하죠. 자, 그럼 뭔가 다른 게 떠오를 수도 있으니까 아까 그 호흡, 다시 해 볼까요?”


회색이 섞인 크고 흰 털 뭉치가 왈왈왈, 짖으며 달려들었다. 혀를 내고 학학거리는 폼이, 꼭 웃는 것처럼 보이는 개였다.


세준은 그 개를 잡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살면서 운전면허 다음으로 뭘 그렇게 열심히 하기는 처음이다.


작가의말

P.S 뭘 이렇게 열심히 하기는 저도 처음이네요. ^^a

아버지는 가족들을 걱정시킨 것과는 다르게, 오늘 바로 괜찮아지셨습니다. 검사도 쉽게 끝났고요. 그래도 100% 낫는 증상은 아니라서, 역시 언제 연재가 잠깐 중단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미리 양해 드립니다.  저도 아버지의 차도를 좀 더 보고 결정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일단 지금은 괜찮아지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연로하신 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몇 분 안 계시지만....읽어주시는 분들 사, 사, 사.....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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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기록 _ 14.11.10 수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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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22 더마냐
    작성일
    14.09.19 23:59
    No. 1

    괜찮아지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권계영씨가 저의 상사가 아니라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감상이 들었습니다....
    참으로 무서우신 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그린데이
    작성일
    14.09.20 00:34
    No. 2

    그래도 천만다행입니다.
    그리고...
    사랑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에로스는 안 되고 아가페적으로...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6 온연두콩
    작성일
    14.09.20 00:53
    No. 3

    바로 앞전 작가의 말에선 사랑한다 해 놓고~ 지금은 또 좋아한다고 그러시고~ ㅎㅎㅎ

    이번 사건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요.
    상황을 상상해보자면, 내가 지율씨라면, 정말 무서울 것 같아요.;ㅁ;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마니
    작성일
    14.09.20 02:13
    No. 4

    금방 괜찮아지셔서 다행이어요. ^^
    그나저나 계영씨, 세준을 훈련시키고 있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1 [탈퇴계정]
    작성일
    14.09.20 15:47
    No. 5

    매번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젤라
    작성일
    14.12.10 15:32
    No. 6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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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5) +10 14.12.15 731 12 23쪽
32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4) +11 14.12.09 675 11 32쪽
31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3) +7 14.12.03 638 11 13쪽
30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2) +7 14.11.30 703 9 19쪽
29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1) +7 14.11.30 616 9 7쪽
28 Episode 02 웃는 인형 (완결) +10 14.11.10 906 11 27쪽
27 Episode 02 웃는 인형 (13) +6 14.10.18 559 15 19쪽
26 Episode 02 웃는 인형 (12) +15 14.09.30 787 16 26쪽
25 Episode 02 웃는 인형 (11) +9 14.09.29 765 13 26쪽
24 Episode 02 웃는 인형 (10) +7 14.09.27 806 21 10쪽
23 Episode 02 웃는 인형 (9) +6 14.09.26 626 12 9쪽
22 Episode 02 웃는 인형 (8) +9 14.09.25 755 12 26쪽
21 Episode 02 웃는 인형 (7) +4 14.09.24 616 17 25쪽
20 Episode 02 웃는 인형 (6) +4 14.09.23 692 15 18쪽
19 Episode 02 웃는 인형 (5) +4 14.09.22 684 16 10쪽
18 Episode 02 웃는 인형 (4) +4 14.09.20 818 15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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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pisode 02 웃는 인형 (2) +4 14.09.18 667 14 19쪽
15 Episode 02 웃는 인형 (1) +7 14.09.17 1,266 23 11쪽
14 Episode 01 빨간 드레스 (완결) +6 14.09.17 592 16 3쪽
13 Episode 01 빨간 드레스 (13) +7 14.09.16 638 17 25쪽
12 Episode 01 빨간 드레스 (12) +8 14.09.15 575 15 20쪽
11 Episode 01 빨간 드레스 (11) +9 14.09.13 561 17 22쪽
10 Episode 01 빨간 드레스 (10) +5 14.09.12 545 17 18쪽
9 Episode 01 빨간 드레스 (9) +8 14.09.11 515 14 17쪽
8 Episode 01 빨간 드레스 (8) +9 14.09.10 718 14 10쪽
7 Episode 01 빨간 드레스 (7) +5 14.08.03 818 15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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