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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윤의 서재입니다.

투시透視, Second Sight

웹소설 > 자유연재 > 공포·미스테리, 추리

최승윤
작품등록일 :
2014.08.03 00:37
최근연재일 :
2014.12.18 17:34
연재수 :
34 회
조회수 :
22,833
추천수 :
518
글자수 :
272,824

작성
14.10.18 01:09
조회
556
추천
15
글자
19쪽

Episode 02 웃는 인형 (13)

DUMMY

설명을 겸한 설득이 이어졌다.


“상식적으로 정말 납득이 안 되는 모순이죠. 친어머니가 화재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기록에는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도 송가연 씨라고 되어 있었고요. 단지 화재가 일어날 즈음의 알리바이를 강지한 씨가 증언했죠. 어머니는 다르지만 어린 남동생도 화재로 죽었고요. 그 첫 발견자도 송가연 씨였죠. 그런 사건을 겪은 사람이 단순히 비가 오는 게 싫어서 집안에 초를 켜놓는 경우를, 저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반드시 그런 것들이 심리적인 개연성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지만, 대체로 다른 사람들이 보이는 심리적인 반응에 비해, 송가연 씨의 행동들은 지나치게 비정한 느낌을 주지 않습니까?”


정현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며 응했다.


“그럼, 만약 송가연 씨가 두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반사회적 인격이라면 그런 행동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가네요. 그래서 저에게 처음부터 ‘하이힐을 신은 뱀’이라고 하셨군요. 대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정장을 입은 뱀’이라고 말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심리적인 정황만으로는 아무래도…….”


정현은 납득하면서도 망설였다. 세준은 앉아 있는 정현에게 한 발 다가서서 말했다.


“선배, 이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만약 송가연 씨가 방화의 범인이라면, 그 사람이 잡히지 않는 한, 살인을 멈추지 않을 거예요. 정현 선배도 아시겠지만,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내면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있으면 한동안 살인을 멈췄다가도 다시 시작할 수 있죠. 어떤 화재이든 불길에는 촉매제가 있기 마련인데,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에게도 그런 계기가 있습니다, 그렇죠? 이번 종로 일대의 화재 사건에서, 송가연 씨의 발화 촉매제는 강지한 씨라는 걸 시기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소방서의 뒷문이 열렸다. 사복을 입은 몇몇 소방공무원들이 인사를 나누며 갈라졌다. 정현은 관자놀이를 살며시 누른 채로 뇌까렸다.


“정리하자면…… 송기철 회장의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화재 사건은 송가연이 연루된 것이다? 최근에 여기서 빈번한 방화 사건도 송가연이 강지한이 일하는 걸 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걸 알아차린 송 회장이 자서전에 그 일을 누설하고 강지한을 못 보게 만들 것 같아서, 송가연이 송 회장을 죽였다?”


그렇죠, 계영이 입매를 단단히 하며 부연했다.


“그 모든 사건들의 경우에, 행적상 인위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송가연 씨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강지한 씨가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 거예요.”


강지한이 세 사람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는, 희대의 반항아라 불리던 배우처럼 잘생기고 또 외로워 보였다.


정현이 그를 일별하며 고심했다.


“그렇다고 강지한 씨가 송가연에 대해 발언을 해줄까요? 사건에 유력한 단서가 될 만한 발언을? 말씀드린 것처럼 소명자료만 제대로 갖추면, 증인은 증언을 거부할 수도 있잖아요. 게다가 이렇게 증거가 미비한 거리 방화 사건이라면 합법적이고 정당한 증거 없이는 기소 자체가 안 될 거고요.”


계영이 강지한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네, 해줄 겁니다.”


그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생각해 보세요, 형사님. 송가연의 아버지도 송가연이 위험한 인물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렇다면 강지한 씨도 송가연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았을 겁니다. 송기철 회장은 강지한 씨가 괜찮은 청년이라고 말했죠. 강지한 씨가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 있다면 그게 송가연 씨일 거예요.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무너뜨릴 만한 사람이니까요.”


세준은 송기철 회장의 계약서를 정현에게 건넸다. 문제의 이상한 유지가 들어간 종이였다.


“정현 선배, ‘약속’이라는 부분을 건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정황상, 우리의 접근방식이 괜찮다면, 송 회장도 강지한도 송가연 씨에 대해서 뭔가를 느꼈던 것은 분명합니다. 송 회장은 강지한 씨를 유학까지 보내줬죠.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약속’이 있었다면, 이제 그걸 지키라고 전해주기만 해도, 강지한 씨는 흔들릴 수 있다고 봐요. 두 사람 다 송가연 씨를 사랑하는 남자들이죠. 송가연 씨가 위험한 존재라고 여기면서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갈등할 겁니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 중에 하나가 죽었고, 이제 남은 하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강지한 씨가 유학을 가 있는 동안 송 회장의 집안에서 일어난 일들도 모조리 알려주셔야 해요. 그러면 지한 씨도 사건의 위중함을 더 알게 될 테니까요.”


지한이 다가왔다. 김정현이 그의 어깨를 잡고 벤치 뒤쪽으로 안내했다. 둘이서 소곤거리는 소리 사이로 가끔 ‘약속’이라든지, 혹은 ‘방화’와 같은 단어가 격렬하게 오고갔다. 정현과 지한의 대화는 계영의 새 커피가 바닥이 날 때까지도 계속됐다. 결국 강지한은 노을빛을 물들인 채로 돌아섰다. 온몸이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시크릿 세이버 분들이라고요? 어제 오신 분과는 다른 분들이군요.”


지한이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정현과 나눈 대화를 상기하듯 눈을 마주쳤다. 김정현이 격려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한은 그랬군요, 하고 탄식하듯 중얼댔다.


“그랬군요······. 어쩐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방화 사건의 현장에는 늘 불에 탄 인형과 술병이 발견되어서······.”


계영이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송회장님은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거였습니까.”


“거의 전부……?”


지한이 괴로워하며 대답했다.


“역시 그때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습니다.”


“부탁?”


정현이 미간을 좁히며 단어를 되풀이했다. ‘부탁’이나 ‘약속’과 같은 단어들은 사건과 얽히면 심오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네, 17년 전 사건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때 저는 갓 스무 살이었고, 가연이는 18살이었습니다. 저와……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죠. 가연이의 어머니가 우리의 사이를 눈치 채고 이사를 서두르고 계셨거든요.”


계영이 빈 컵을 근처 쓰레기통에 버리며 그와 마주섰다.


“그럼 역시······, 송가연 씨가 어머니를 살해한 겁니까.”


“모릅니다…….”


지한은 불확실한 어투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것은……, 당신들처럼 확고한 심증뿐입니다.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건 당일 알리바이를 증언했다는 당시 조사는 어떻게 된 건가.


지한의 표정은 회환과 후회와 체념 등이 복합적으로 어려 있었다.


“그날의 알리바이······, 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두 분께는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형사님이 주의를 주셨지만 이건 자백이 아니라 제 고백입니다. 솔직히 알리바이는 모두 제 탓입니다. 제가 어리석었어요. 가연이는 그때 미성년자였는데······, 너무 예뻤습니다. 제가 바보같이 걔를 꼬드기고, 손을 대는 바람에······.


가연이는 어머니와 나에게 임신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송 회장님은 어느 정도 수긍하셨죠. 그래서 가연이가 말한 장난감 자동차도 사주시고, 인형도 사주시고······.


지역에 소문이 날까 봐 서울로 올라와 살 계획도 세우셨습니다. 그 당시 고향 땅이 팔려 돈이 들어왔기 때문에 더 그렇게 하실 수 있었죠. 하지만 어머니는 길길이 날뛰시다가 술을 드시고 주무셨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겁니다.”


결국 미성년자 애인을 임신시키고, 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거짓으로 상대의 부재 증명不在證明을 해줬다는 뜻이다. 정현이 머리야, 하고 자신의 이마를 감쌌다. 지한은 모든 것을 각오한 듯, 조용한 표정이었다.


세준은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왜 사고 이후로 강지한 씨가 가연 씨를 왜 피하신 건가요? 가연 씨의 부재 증명을 해 주고……, 또 그 이유가 송가연 씨가 지한 씨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면, 아이 때문이라도 더 옆에서……”


강지한의 표정은 침착했지만, 허벅지 위를 손으로 닦는 모습은 꽤 초조해 보였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지한은 가연이가, 하고 옛 연인의 이름을 되뇌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 된 겁니다. 가연이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저는 분명 가연이와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가연이가 좀 늦었습니다. 탄 냄새가 나기에, 왜냐고 물었더니 고기를 해 먹었다고 했죠.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집 근처의 이웃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놀라서 달려갔을 때는 이미 불이 꺼진 직후였습니다. 어머님의 시신이 발견됐을 때, 조사관이 와서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혼란스럽고 엄청나게 고통스러웠지만, 가연이의 말을 믿었습니다. 누구라도…… 그 당시 가연이를 보면, 그 아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아름답고 선량하며 청순한 얼굴을 한 송가연.


세준은 주머니 안의 손을 몇 번이나 쥐고 폈다. 강지한의 목소리는 비탄으로 점점 갈라졌다.


“그 당시의 저는 이미 소방관이나 화재조사원을 목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불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날의 현장에서는 경황이 없었죠. 제게 조사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막 대학을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어렴풋이 뭔가 이상하다고 여기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날의 화재 현장에서 미스터리하다고 여긴 것은 현장의 모습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가라앉았다.


“……가연이의 표정이었습니다. 경찰관에게 버젓이 저와 있었다고 말하며 눈물이 맺힌 채로 저를 보고 있을 때의 표정……, 조사관과 경찰이 몇 번이나 묻는데도 그들이 보는 곳에서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다가, 이내 그들이 보고 있지 않을 때에 짓던 표정……. 그 표정 때문에 굉장히 선뜩했습니다. 그때 그 여자의 표정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겁니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사각형을 그렸다. 마치 무형의 공기 속에 그날의 사고 현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직육면체의 방. 그래서 나중에 현장을 되풀이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사방으로 활짝 열려 있는 창문, 그리고…… 그 창문에 뒤늦게 형성된 그을음을 알아챈 겁니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가연이의 어머니는…… 문이 열려 있었는데도 도망가지 않았다는 걸 말입니다.”


“문이 열려 있었다고요?”


계영이 놀란 듯 되물었다. 17년 전의 사고 현장 당시, 모두가 문에 대한 부분은 잠겨 있었다고 판단했다. 시크릿 세이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한은 네, 하고 확고한 얼굴로 대답했다.


“확실히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화재 조사를 하던 경찰관이나 담당관도 결정적으로 그 화재는 어머님의 실수라고 받아들인 겁니다. 불이 났는데, 화재를 피해 문을 열고 달아나지 않은 것은 어머님의 판단……, 그러니까, 술에 취해 담배에 불이 붙은 채로 잠들었던 어머님의 판단 실수였다고요.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날 소방관들이 현장을 정리할 때…… 창가에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소화 작업으로 인해 원래 현장의 모든 부분이 어지럽혀져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도 발자국은 보였습니다. 그 집에 불이 나기 전에 비가 조금 내렸는데, 창가 쪽 아래 바닥은 차양 때문에 마른 상태였죠. 그래서 알게 됐습니다. 불이 났을 때, 가연이는 그곳에 서서 집 안을 보고 있었던 겁니다. 어머니는……”


다시 그 환상이 떠올랐다. 불에 탄 인형이 히죽, 하고 웃기 직전에 드러나던 환상이었다. 창문을 여는 하얀 손, 그리고 연기와 재…….


계영이 고개를 세게 저었다. 화재 현장의 문이 열려 있었다는 말을 들을 때부터 그는 혼란스러워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왜 송가연 씨의 어머니는 몸에 불이 붙을 걸 알면서도…… 문으로 달려가지 않고 왜, 창문 쪽으로……?”


다소 차분했던 강지한도 그 부분에서는 격렬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몇 번이나 얼굴을 훔치며 괴로워했다.


“알고 계셨던 겁니다, 그 어머니도…….”


처음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곧 그 자리의 모두가 천천히 그의 말을 해석했다. 그는 어머니도, 라고 두세 번 강조해서 말했다.


“어머니도 알고 계셨던 겁니다. 송 회장님처럼……, 그 어머니도…….”


계영이 숨을 들이키며 휘파람 같은 소리를 냈다.


“그렇다는 말은, 강지한 씨……, 그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두 송가연 씨의 기질을……”


“네.”


강지한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둠을 등에 진 소방관은 굳은 결심을 한 것처럼 설토했다.


“부모님은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 당시, 17년 전…… 화재 감식 이후, 제가 어찌할 바를 몰라서 고민하고 있을 때, 송 회장님이 직접 저를 찾아와서 말씀하셨습니다.”


‘부탁하네.’


송 회장이 말했다고 한다.


‘제발 부탁하네, 자네와 자네의 자식을 위해서야…….’


바로 그 말에서 ‘부탁’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송 회장은 미친 듯이 괴로워하면서도 지한에게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그래, 나도 알아. 막을 수도 있었겠지, 다들 그랬겠지, 그렇지만 그거 아나, 자네? 저 아이의 엄마······, 내 마누라가 걱정한 건 딸아이가 미혼모가 되는 게 아니었어. 딸아이가 임신했다는 말에 내 와이프가 화를 낸 것은…… 그 이유는……’


지한은 스스로도 송 회장의 그 말에 ‘오싹할 정도로 놀랬다.’라고 밝혔다. 송 회장은 밝혔다.


‘알겠나? 우린 자네를 걱정한 거야! 딸아이가 낳을 손자를 걱정한 거야! 그래서 저 아이가 자기를 죽이는 데도 그 사람은…… 그걸 알면서도 딸아이에게 다가선 거라네. 자기가 죽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가연이가…… 태어났을 때의 천사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네는 몰라도, 우리는 알았지. 저 아이는······, 저 아이는······, 사람이 아니야, 우린 알아······. 저 아이가 개를 잡을 때, 고양이의 배를 가를 때 얼마나 반짝이면서 웃는지······. 고양이의 목을 들고 오면서 천사처럼 웃는다네. 자네는 우리가 매번 그걸 어떤 기분으로 보는지 모를 거야. 그러니까······, 부탁이야, 제발. 그래도 딸이라고 이제 하나 남았어. 저 괴물을······, 내가 어떻게든 막아 보겠네. 자네 아들, 내 손자를 위해서라고 경찰에 말하지 말아주게. 사랑을 더 받으면 괜찮아질 거야. 고칠 수 있을 거야. 약속할게. 자네는 내가 지켜주겠네. 그러니, 제발, 제발, 제발······, 지금은······!’


강지한은 손으로 얼굴을 묻고 그날의 대화를 털어놓았다. 그래서인지, 때로 어떤 말은 격렬함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말미에 그는 어깨를 떨며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가로등 아래에 드러난 눈은 충혈 된 상태였다.


“회장님은······, 저에게 약속을 하셨죠. 자기가 막아보겠다, 자기가 천사를 돌려놓겠다······, 애 엄마가 그렇게 죽은 걸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그러니 떠나 있어 달라, 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학을 다녀온 겁니다. 송 회장님은……, 제게 시간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저의 아들, 그리고 회장님의 손자를 위해서요……. 그리고 그게 실패하면 그때는 제게 막아 달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우리의 ‘약속’입니다.”


천사를 돌려놓을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는 아버지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하이힐 신은 뱀을 위한 그 아버지와 옛 연인의 약속이 드러났다.


어둑어둑한 거리로 바람이 스쳐갔다. 소방서의 문이 열리며 지한의 동료 몇 사람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지한 역시 고개를 조금 숙이며 그들에게 답례했다. 세준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그에게 다가섰다.


가까이 서 들여다 본 강지한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턱이 굳어있고, 눈은 잔뜩 충혈 된 상태였다. 송가연의 아버지 송 회장도, 그리고 강지한도 모두 ‘자식’을 위해 괴로운 거짓을 품고 살아야 했다.


이제 남은 의문은 하나였다. 세준은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모두 감추고 있던 이 사실을 갑자기 우리에게 털어놓으신 이유가 뭡니까. ‘약속’이라고 하지만, 약속만 이행하셔도 되는 건데요. 여기 김정현 형사님도 이미 밝히셨겠지만, 공식적인 요청이 있거나 영장이 발부되면 그때 조서를 작성하셔도 될 것을…… 이렇게 17년 전의 일을 굳이 털어놓으신 이유가……. 사실은 저희는 강지한 씨가 이렇게 밝혀주시길 정말 원했습니다만. 그래도 공무직을 내려놓으실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건의 전말을 다 밝히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강지한의 턱이 더 굳어졌다. 마치 그의 뼛속 가득히 싸한 바람이 통과한 것처럼 보였다.


“저는 지금까지 송 회장님과 가연이가 어디에 숨겼을지 모를……, 제 아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가연이가 다시 만났을 때도 그렇게 말했죠. 자기와 만나주면 아들을 보여주겠다고요.”


사내의 목울대가 뜨겁고 진한 물기로 꿈틀거렸다.


그는 말했다.


“하지만 조금 전에 김정현 형사님께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송 회장님이…… 재혼을 급하게 하시면서……, 아들을 하나 낳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그때서야 재혼한 두 번째 부인의 아들이 떠올랐다. 그 부인과의 송 회장의 사이에 분명 아들이 하나 있었고, 오래전 역시 화재로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 원체 훑듯이 지나간 사건이라 잊을 뻔했던 사실이다.


그러나 절묘한 순간에 매치되는 그 아들의 존재와 지한의 말.


세준은 오한이 솟았다. 지한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하이힐을 신은 뱀’은 자신의 아들까지도 죽였다는 의미였다!


“저는 그 아이를 위해서…… 양심을 저버린 이 괴로움을 버티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못 참겠습니다. 제게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아서…… 모든 분께 털어놓은 겁니다. 저는 방금 김 형사님께 그 집안에…… 혹시 어린아이가 있냐고 여쭤 봤고, 제가 유학을 가 있던 당시, 가연이의…… 배다른 남동생이 역시 사고로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옛날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가연이를 가르칠 때, 동물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왔는데…… 가연이가 제게 물었죠. 맹수의 수컷들이 왜 자기 새끼를 죽이는 일이 있냐고요. 그래서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암놈은 새끼가 없어야 발정이 나고, 그러니 수컷은 암놈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자기 새끼라도 죽인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떨리는 입 꼬리를 조금 올렸다. 스스로가 한 대답으로 인해 비탄에 잠긴 눈이었다.


“……아시겠습니까, 이제?”


웃는 듯 마는 듯 올라간 입 꼬리 끝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작가의말

정말 오랜만에 올립니다. ㅠㅠ 

혹시나 기다리신 분들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_ _)

이제 연참만큼은 안 되어도 자주 올릴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역시 오타나 소소한 수정은 틈틈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이놈의 오타는 계속 나오네요. (핀셋으로 오타 벌레 잡는 놀이~ 중입니다~^^)



* 바보같이 이어지는 부분을 또 연결 안 시키고 올렸네요..^^a 빠진 부분 추가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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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기록 _ 14.11.10 수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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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36 온연두콩
    작성일
    14.10.18 01:22
    No. 1

    아, 아름다운 여인이 엄청난 냉혈한이었네요.
    그걸 감당하는 그녀를 사랑하는 주변인들의 고통이 끔찍하게 느껴져요.
    -
    그나저나 기다렸어요오오오오오오오 ;ㅁ;
    이제 바쁜 일은 다 마무리 하셨나요?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좋아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마니
    작성일
    14.10.18 02:33
    No. 2

    자식까지....하연은 정말 무서운 여자였네요. 오싹오싹. 사랑하는 가족이 사이코패스인 건 정말 상상하기 싫음. ;ㅁ;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4 cry크라이
    작성일
    14.10.18 08:30
    No. 3

    인간은 다양하고 겉만 보고 모른다더니...

    잘보고 갑니다 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더마냐
    작성일
    14.10.18 12:01
    No. 4

    좋은 글.. 고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1 판단력
    작성일
    14.10.27 05:33
    No. 5

    오마이갓!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젤라
    작성일
    14.12.11 19:47
    No. 6

    정말 무서운 진실이군요... 그 무서운 진실을 품고 남들에게 차마 얘기할 수 없었던 지한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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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시透視, Second Sight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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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5) +10 14.12.15 729 12 23쪽
32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4) +11 14.12.09 675 11 32쪽
31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3) +7 14.12.03 637 11 13쪽
30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2) +7 14.11.30 702 9 19쪽
29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1) +7 14.11.30 615 9 7쪽
28 Episode 02 웃는 인형 (완결) +10 14.11.10 904 11 27쪽
» Episode 02 웃는 인형 (13) +6 14.10.18 557 15 19쪽
26 Episode 02 웃는 인형 (12) +15 14.09.30 786 16 26쪽
25 Episode 02 웃는 인형 (11) +9 14.09.29 765 13 26쪽
24 Episode 02 웃는 인형 (10) +7 14.09.27 804 21 10쪽
23 Episode 02 웃는 인형 (9) +6 14.09.26 623 12 9쪽
22 Episode 02 웃는 인형 (8) +9 14.09.25 753 12 26쪽
21 Episode 02 웃는 인형 (7) +4 14.09.24 616 17 25쪽
20 Episode 02 웃는 인형 (6) +4 14.09.23 690 15 18쪽
19 Episode 02 웃는 인형 (5) +4 14.09.22 683 16 10쪽
18 Episode 02 웃는 인형 (4) +4 14.09.20 817 15 21쪽
17 Episode 02 웃는 인형 (3) +6 14.09.19 649 17 18쪽
16 Episode 02 웃는 인형 (2) +4 14.09.18 666 14 19쪽
15 Episode 02 웃는 인형 (1) +7 14.09.17 1,265 23 11쪽
14 Episode 01 빨간 드레스 (완결) +6 14.09.17 591 16 3쪽
13 Episode 01 빨간 드레스 (13) +7 14.09.16 636 17 25쪽
12 Episode 01 빨간 드레스 (12) +8 14.09.15 574 15 20쪽
11 Episode 01 빨간 드레스 (11) +9 14.09.13 561 17 22쪽
10 Episode 01 빨간 드레스 (10) +5 14.09.12 545 17 18쪽
9 Episode 01 빨간 드레스 (9) +8 14.09.11 514 14 17쪽
8 Episode 01 빨간 드레스 (8) +9 14.09.10 717 14 10쪽
7 Episode 01 빨간 드레스 (7) +5 14.08.03 818 15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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