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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윤의 서재입니다.

투시透視, Second Sight

웹소설 > 자유연재 > 공포·미스테리, 추리

최승윤
작품등록일 :
2014.08.03 00:37
최근연재일 :
2014.12.18 17:34
연재수 :
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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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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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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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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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20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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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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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Episode 02 웃는 인형 (4)

DUMMY

3. 그들 가족에게 일어난 일




분명히 두 번째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이 프로젝트의 종결 또한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세준이 받은 것은 인형과 몇 가지 소품이 전부였다. 비는 어제부터 또 내리기 시작해서 밖에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세준은 소품들을 챙겨놓고 집 근처의 술집으로 향했다. 퇴근한 지 1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계영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


「당신 집 앞에 ‘달과 6펜스’라는 술집이 있지? 맥주 한 잔 하러 와. 진희 씨랑 있어.」


직장 상사를 퇴근 후에도 만나는 일은 곤혹스럽고 부담스러웠다. 금연 이후로 술집은 기피하는 습관 때문에라도 피곤함은 더 심했다. 그러나 세준은 겉옷을 챙겨 입고 ‘달과 6펜스’로 향했다. 아무리 어릴 때부터 익숙한 현상이라고 해도, 으스스한 인형과 단 둘만 있고 싶진 않았다.


“여어, 우리의 검은 말!”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계영이 손을 들었다. 하얀 얼굴이 조명 아래에서 더 하얗게 빛을 냈다. 유진희와 함께 있다는 말과는 달리, 계영은 혼자였다.


“뭐예요, 진희 씨도 있다더니. 그리고 검은 말이라니, 그게 뭡니까?”


“응? 다크호스라고. 뭐야, 칭찬이야, 검은 말. 나의 때수건 같은 어휘력으로는, 몇 안 되는 좋은 의미라고.”


‘달과 6펜스’는 알아서 맥주를 가지고 오고, 안주만 따로 주문받는 가게였다. 유진희는 세준이 맥주를 고르고 있을 때 들어섰다. 회사에서와는 달리, 편한 운동복 차림이었지만 운동화는 역시 호피 무늬다.


“대리님, 이 시각에 뭐예요, 내일은 지각 안 하려고 더 일찍 자려는데.”


“미안. 진희 씨가 원래 보험회사에 다녔었잖아. 송회장 자서전 담당이기도 하고.”


“그렇긴 하죠. 아, 세준 선배, 나도 코로나 한 병만.”


세준은 끼어들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원래 그렇게까지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니지만, 어쩐지 지하 B02팀의 두 여자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한 명만 있어도 버거운데, 둘이 있으니 그 피곤함이 배가됐다.


세준은 그저 얌전히 맥주를 건네는 것으로 평화 전략을 유지했다. 유진희는 탁자에 올려놓은 태블릿 PC를 켰고, 권계영이 맥주를 마시며 그 모습을 관찰했다. 시원하게 한 모금을 들이키고, 입술을 닦는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다.


“그래, 진희 씨, 좀 알아봤어? 송기철 회장 사건에 대해서?”


“네, 정리해 왔어요.”


유진희가 PC를 테이블 가운데로 밀며 확인했다.


“근데 정말 이 건으로 보너스 타시면 나누는 거죠? 그것 때문에 일과日課 외 근무까지 하는 거란 말이죠.”


그의 타박에 계영이 천사처럼 웃었다. 상냥한 미소였지만, 세준은 들키지 않게 중얼댔다. 저런 사악한 영혼……!


“당연하지. 8:2로 나누자.”


사악한 영혼이 소곤거렸다. 유진희는 Nope 하고 거절했다. 호피무늬 운동화는 배분에 있어서 더 없이 단호했다.


“7:3”


“진희 씨…….”


“쉬고 있었단 말이죠, 정말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생각과는 달리, 계영은 좋아, 하고 곧장 동의했다. 세준은 맥주병에 키스하며 생각했다.


이미 저번 프로젝트 때도 가방까지 투척하고는 보너스까지. 권계영은 내가 모르는 갑부 집 딸인가.


이름 모를 갑부의 비밀스러운 딸과 호피무늬성애자의 거래는 급박하고 극적으로 타결됐다. 그 사이를 ‘달과 6펜스’의 아리따운 점원이 파고들었다. 테이블에는 방금 막 해동한 감자튀김의 향이 풍겼다. 유진희는 들고 온 태블릿 PC를 켜서, 송기철 회장에 대한 기사를 띄웠다.


헤드라인은 송기철 회장보다는 그 딸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다. 「작고한 송기철 회장의 딸, 송가연, 출판사를 이어 받다」라든지,「미모의 젊은 별, 송가연」같은 표현이 주主였다.


“좋아요, 그럼 시작할까요?”


유진희는 대답을 듣지 않고 바로 이어갔다. 손질이 잘 된 손톱이 송기철 회장의 얼굴을 꾹 눌렀다.


“이런 기사들을 참고하면 내용이 더 나오는 것 같아요. 간단히 설명 드리면, 송기철 전 회장은 원래 지방에 있는 자기 고향에서 본인의 아버지가 물려주신 농지로 규모가 기업 형태의 농사를 지었어요. 그러다가 18년 전 쯤에 있었던 국가토지개발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어요.”


세준 역시 같은 내용을 가십으로 들었다. 그러나 계영은 그런 가십들에서 완전히 사각지대에 존재했다. 그는 감자튀김의 가루를 담배처럼 털며 관심을 보였다.


“그럼 그쯤에 첫 번째 부인을 잃었다는 건가?”


그렇죠, 유진희가 끄덕였다.


“맞아요. 그때쯤에 송기철 회장은 송가연 씨의 친모……, 그러니까 첫 번째 부인과 사별했어요. 화재사고였어요. 그 사고 때문에 송 회장은 외동딸인 가연 씨를 데리고 얼른 고향을 떠났어요. 그리고 몇 개월 후에 지금 출판사의 이사로 지내던 분의 딸과 재혼을 했고요. 기존의 땅과 사업을 팔아서 큰돈을 벌었고, 부인의 영향이 합쳐져서 출판사까지 이어받아 지금의 사업을 이룬 거죠.”


태블릿 위의 하얀 손가락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송회장의 집안은 문인들을 수집하는 길로 들어섰지만 유독 세간의 관심을 받아왔다. 재혼한 부인의 미모와 송가연의 미모가 합쳐진 결과였고, 또 김태민이 밝힌 것처럼 유독 사건 사고가 많았다.


“송회장의 비극이라는 이 제목 보이시죠? 송기철 회장의 불운은 첫 번째 부인을 잃은 화재 사고로 끝나지 않았어요. 지금의 미망인이신 사모님과의 사이에 아드님이 한 분 계셨는데, 이분도 화재 사고로 돌아가셨죠.”


그때 계영이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야릇하게 겹쳤다. 외국에서는 주로 거짓말을 표현할 때 취하는 행동이다. 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유난히 길고 예쁜 손가락 때문에 눈에 띄었다. 계영은 세준이 그 동작을 유심히 지켜볼 때야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그는 스스로의 손가락을 색다른 동물처럼 내려다보더니 곧 놀란 듯 거두었다. 확실히 알고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유진희의 경우, 태블릿 화면을 바꾸느라 그런 행동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보세요, 여기 이 기사를 보면, 송회장이 아들을 이은 사건에 대해 언론이 많은 호들갑을 떤 게 보여요.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에 이어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럴 만도 했죠.”


기사 헤드라인인 역시 앞서의 것과 유사했다.


「K출판사 S회장을 둘러 싼 일가족의 비극」,「송회장, 연이은 사고로 인한 그의 보험금 액수는?」


두 번의 화재 사건과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


어딘가 냄새가 폴폴 풍기는 가문이다. 계영 역시 같은 생각인 듯 앉은 자세를 바로 했다.


“……두 번의 사고, 그리고 송회장 자신도 사고로 사망했지. 모든 건에 대해서 보험회사는 어떤 결론을 내렸지?”


세준은 그때서야 계영이 왜 보험회사에서 근무한 유진희를 불렀는지 이해가 갔다. 어떤 경우에는 경찰의 행정력보다 보험 회사가 의혹을 더 잘 파헤칠 때가 있다. 시크릿 세이버가 돈을 버는 방식도 사후 보험이었으므로, 세준도 이해가 가는 방식이다.


게다가 이런 문제들을 서류상의 문장 그대로만 해석하는 게 아니라, 고객의 숨겨진 비밀을 알아서 접근해서 풀어내야 하는 방식도 슬슬 납득하는 중이다. X팀의 사건들의 경우는 그런 점이 더 심했다. 권계영이 언젠가 말했듯, X팀은 사건의 스토리를 푸는 것이, 일을 제대로 종료하는 것과 맞먹었다.


“보험 회사에서는 약간의 의혹을 제시했지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제가 전의 인맥들을 동원해서 다 알아봤는데, 최근의 송 회장 사건까지 모두 기간은 오래 걸렸지만, 어쨌든 물리적인 근거를 찾진 못했다고 하더군요.”


설명은 계속됐다.


“다만, 이번 송기철 회장의 자동차 사고의 경우는 같이 사망한 운전사에게서 약물이 검출되어서 좀 문제가 되긴 했대요. 보험 회사의 지급팀과 심사팀이 엄청난 공방을 벌였다지만……, 어쨌든 운전사의 운전 과실은 아니기 때문에 보험금의 지급에는 문제가 없었죠. 사고로 인한 거니까요.”


“운전사가 먹었다는 약물 말이지, 낮에 태민이도 그 말을 했는데, 도대체 그 약물이 뭐야?”


계영의 말투는 그 부분에서 학술적으로 돌변했다. 개나 잡으러 다니라는 말을 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유진희 역시 상급자의 필요조건에 충분히 익숙한 듯 보였다. 그는 주섬주섬 메모를 꺼내더니, 약물에 대해 스스럼없이 밝혔다.


“네, 저도 약물에 대해서도 알아 봤죠. 대리님이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확실히 억대의 보험이라서……, 보험 회사에서 꽤 많이 조사를 한 모양이더라고요. 보세요. 이렇게 쓰여 있어요. 아미, 아미……, 뭔 성분의 약, 이라고.”


“Amitriptyline.”


계영이 같은 단어를 유연하게 발음했다.


뭐라?


세준은 영어 성적이 아이큐 점수와 비슷했지만, 전공과 관련된 단어였으므로 알아들었다. 계영이 우리나라 말로 또박또박 재차 말했다.


“아미트리프탈린.”


좋아요, 세준은 셔츠의 섶을 젖히며 확인했다.


“그러니까, 아미트리프탈린은 신경정신 계통의 처방전에 쓰이는 거잖아요?”


계영이 끄덕였다.


“야뇨증이나 우울증 치료나 통증 치료에도 쓰이는 약물이지. 달리 말하자면 삼환계 항우울제TCAs 성분이야.”


“맞아요, 대리님, 제가 듣기에도 그런 성분이었어요.”


유진희가 맞장구를 쳤다. 세준은 계영이 왜 약 성분을 아는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계영은 진희의 메모를 뚫어져라 보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이 성분의 작용 기전에는 잠을 유발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텐데. 이런 약들은 쉽게 처방하기도 쉽지 않고. 뭐, 질병 분류에 있어서는 정신작용을 하는 약들 중에서 SSRI 계열의 약들과 함께 가장 많이 쓰이기는 하지.”


유진희의 표정은 조금 묘했다. 맞아요, 그는 연이어 동의했다.


“맞아요, 대리님. 반드시는 아니지만 그 약의 부작용 중에 하나가 졸음을 유발하는 게 있는 건 맞는 거 같아요. 그 뭐라더라……, 비슷한 약제가 있던데…….”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실제로 잠이 온다고 전해지는 트라조돈 같은 항우울제나 진정 효과가 있는 항불안성 약제와는 달리, 이 성분 자체가 잠을 유발한다고 보기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는 거야. 우울증을 감소시키기 위해, 아미트리프탈린이 처방됐다면, 잠이 온다, 라는 건 약 자체의 효과보다는 우울증이 개선됐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거든. 우울증의 주요 부가적 증상 자체가 세로토닌 부족으로 오는 불면증이라든지 이런 게 많으니까 말이지. 아미트리프탈린 계열은, 그냥 비슷한 경우의 불면증을 유발하는 통증성 우울 경향에도 먹히기 때문에 통증 증상에도 자주 처방되지. 분명 신경정신과 계통의 약물이지만, 사실 가정의학과나 내과에서도 향정신성 의약품은 종종 처방되는 경우가 있어. 물리적인 이유가 없는 위통이나 근육통…… 아니면 반대로 통증으로 인한 정신적인 증상인 불안증이나 불면증에 모두 작용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우울 증상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이 약을 먹으면 잠이 오는 부작용을 겪을 수도 있기도 하지. 이런 건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서 평상시 복용하는 사람의 약물 이력을 봐야 알 수 있어. 암튼…… 이건 그렇고, 운전을 주 업무로 하는 회장의 주요한 운전기사에게는 확실히 처방할 때 주의를 주는 약이야. 운전기사가 이런 약물을 복용했고, 사고 당시에 이 약물이 문제가 됐다면 보험 회사에서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지?”


“일단 사고가 일어나게 된 순서를 말씀드릴게요.”


화면에 다른 자료들이 열렸다. 유진희가 알아낸 송 회장의 사고 관련 정보들이다.


“자료들에 의하면 송회장의 자동차 사고는 새벽에 일어났대요. 대략 몇 주 전, 강원도에서 스키를 타던 송가연 씨의 비서가 송 회장에게 새벽에 전화를 해서 송가연 씨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고 했답니다. 아버지 송 회장은 놀라서 자신의 집에 머무는 운전사를 깨워서 새벽에 출발을 했고요. 약은……, 검시 결과 아무래도 운전사가 새벽에 출발할 시점 전에 먹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경찰의 보고로는 거실에 운전사의 이름이 적힌 약통이 뒹굴고 있었다고 하고요.”


긴 손가락이 다음 화면을 부드럽게 넘겼다. 세준도 맥주를 부드럽게 들이켰다. 야무진 설명이 계속됐다.


“경찰은 사고가 운전사의 실수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의 병력과 처방 사항 등을 조사했죠. 여기서 이야기가 약간 이상해지는데……,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운전사 김 모씨는 아미트리프탈린 성분의 약을 처방받은 사실이 없고, 주기적으로 심장 관련 약을 먹었답니다.”


화면의 마지막은, 뒹구는 약통 사진이다. 계영이 용의주도한 형사처럼 약통을 가리켰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걸? 어떻게 자기가 장기적으로 복용하는 심장에 관한 약과 신경정신과 약을 착각할 수가 있지? 아니, 그것보다……, 그 집안 누구라도 아미트리프탈린을 처방받은 사람이 없다는 건가?”


“있어요.”


유진희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내가 그럴 줄 알고 다 알아왔지!’하는 표정이다. 그런 유진희는 귀여웠지만, 세준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나도 보너스의 1%라도 받으리라.


세준은 병을 내려놓으며 잽싸게 끼어들었다. 정황상, 두 번째 부인인 현 미망인이 항우울제를 복용할 가능성이 컸다.


“사모님이겠죠.”


세준의 말에 유진희가 아차, 하고 몸을 뒤로 뺐다. 보너스 지분의 경쟁자를 그때서야 알아차린 눈치였다.


세준은 “그렇죠?”하고 웃으며 부연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했습니다. 부인은 송 회장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을 사고로 잃었고……, 그 이후로는 자신의 아이가 없으니까요. 아무리 오래 전에 일어난 사고라도,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을 거예요.”


순서를 빼앗긴 진희는 입술을 삐죽댔지만 곧 미소와 함께 야유했다.


“제가 직접 말씀드리려 했는데, 아쉽네요, 하지만 맞아요, 선배. 현 사모님이 같은 계열의 약물을 복용하고 계세요. 그리고 이 집은 약통을 뒤섞어서 한곳에 보관하는 습관이 있긴 했어요. 운전사의 경우는 굉장히 오랫동안 송 회장의 자택에 거주하고 있어서 거의 한 가족과 다름이 없고요.”


계영은 말없이 두 사람의 투덕거림을 경청했다. 정확히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초연한 상태였다. 테이블에 놓인 병맥주의 거품 역시 차분한 상태로 가라앉았다.


얼마 후, 계영은 극도의 평정심을 유지한 채 다른 화제로 옮겨갔다.


“자서전 말이야……, 완성이 안 됐으니, 아직 태민이나 다른 팀이 폐기하지 못했지?”


유진희가 마시던 맥주병에서 입술을 천천히 뗐다.


“네? 아, 네…….”


“그럼 읽어봐야겠네.”


시크릿 세이버와 송기철 회장의 계약서에는 ‘자서전의 완성을 확인 후 폐기’라는 말이 있었지만, 내용의 함구령은 없었다. 다만 송기철 회장과 따로 계약을 맺고 있던 안지율은 내용의 기밀성을 강조했다. 그는 송기철 회장과 내용을 전혀 유출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놓은 상태였다. 결국, 안지율 씨에게 완성 원고를 인계받아야 하는 시크릿 세이버 직원들도 그 기밀성을 유지해야 할 의무를 건네받은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계영은 세준이 같은 기밀성을 지적했을 때도 개의치 않았다.


“뭐, 어때.”


그는 병의 목을 가볍게 쥐며 웃었다.


“회사 밖으로 새어나가지만 않으면 되지.”


유진희가 흐흥, 하고 턱을 괬다.


“꽂히셨군요, 대리님. 이 사건에 꽂히셨어.”


계영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병을 들어올렸다. 맥주 병 위의 눈이 샐쭉하게 휘고 있었다.


세준은 선임의 도덕적 기준을 다소 불만스럽게 여기며 태블릿 PC를 응시했다. PC 안에는 송가연이 웃고 있었다. 키가 크고 늘씬하고, 긴 생머리에 고운 피부를 지은 미인.


사실, 그런 미인을 보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뿐이다. 변명 같지만, 남자라면 다 그렇다. 세준은 뇌까렸다.


“근데, 송가연 씨가 팀에 한 번 방문하지는 않는데?”


유진희가 뭐야, 하고 찡그렸다.


“한세준 선배, 은근 짜증나네요, 그런 말.”


“……아니, 왜?”


세준은 양손을 번쩍 들었다. 불공정한 판정을 받은 축구 선수에 빙의됐다.


“그냥 생각한 거야, 그냥. 어쨌든 송가연 씨의 실물을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거지.”


“하지만 비열해요. 꼭 아버지의 죽음을 이용하는 것 같잖아요.”


“하! 하! 무슨 말! 송 회장의 죽음은 나도 안타깝다고. 그야말로 아임 쏘리한 일이지. 하지만 솔직히 내가 정말 친하거나 인사를 나누거나 아는 분도 아니잖아. 좋은 책을 많이 내는 출판사의 회장이었던 거지, 나랑은 크게 상관이 없다고. 전후 관계를 이상하게 해석하지 마, 유진희 씨. 나는 송회장의 부고 때문에 송가연 씨를 볼 수 있다고 설레는 미친놈이 아니야. 그렇게 연관시켜서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그런 거 절대 아니야. 그냥 송가연 씨가 미인이니까 계약이 끝나기 전에 한 번 직접 보고 싶다는 순수한 생각을 말한 것뿐이지.”


“그러니까 실망이라고요, 선배. 한세준 선배는 매너 좋은 줄 알았는데, 그냥 생각은 생각으로 끝내세요. 이미지 무너져. 미인이라서 일을 핑계로 직접 보고 싶다니……, 좀 속물적인 느낌이잖아요.”


“……진희 씨, 남자는 원래 속물적이야. 좀 더 본능적이라고.”


“그렇든 말든! 숨기라고요, 그런 본능적인 기분을!”


계영이 한숨을 쉬더니, “둘 다 그만해.”하고 달랬다. 그는 웬일로 진희 씨, 하고 상급자답게 나무랐다.


“그만해. 뭐, 송회장 돌아가신 지 거의 한 달이 넘었어. 그리고 정말 가족이나 지인이나 친구도 아닌 사이인데, 그 정도 생각쯤은 할 수도 있지. 송회장이 죽었을 때도 송회장의 죽음보다는 송가연 씨와 미망인의 미모를 찍으려는 기자들이 판을 쳤다잖아.”


“그렇긴 하죠.”


유진희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동의했다. 그는 조금 더 삐죽댔지만, 귀여운 아가씨답게 이내 풀어진 기분으로 이죽댔다.


“그리고 뭐…… 한세준 선배는 만날 살아있는 사람들만큼 귀신을 볼 테니까 한 번은 봐줄게요. 그런 거 보다보면, 나라도 이런 미인이 보고 싶을 것 같아요. 나야 송가연 씨가 나보다 예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귀여운 투정이다.


세준은 유진희 병에 자신의 병을 가져다 대며 건배를 제안했다. 짠, 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울렸고, 그 사이 음악도 감미로운 테마로 옮겨갔다.


그러나 그 몇 분 동안, 유진희를 잘 달랜 장본인은 정작 굳은 듯 정지했다. 대리님? 세준이 불러도 그는 테이블 위의 한 점을 쏘아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상황이었다.


계영은 중요한 판단을 앞둔 것처럼 자신의 맥주병을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나 농도가 진한 눈길인지, 초록색으로 둘러싸인 유명한 독일 맥주병이 그 보색으로 변할 것 같은 분위기다.


앉은 채로 잠이라도 자는 건가.


세준이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대리님?”


계영이 부채 같은 손짓에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맥주병은 수치심에서 해방됐지만, 계영의 정신세계는 여전히 모호했다. 그는 세준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다짜고짜 확인했다.


“물건들, 안지율 씨 집에서 가지고 온 물건들, 당신 집에 있지, 한세준?”


이번에는 세준이 맥주병과 같은 기분이었다. 갈색 눈동자의 메커니즘은 미스터리하면서도 강력했다. 그 시선은 무생물을 생물로, 생물을 무생물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네. 우리 집에 있어요.”


전구에서 시작한 빛이 그가 든 초록색 유리병의 입자에 부딪혀 산란했다. 계영은 부드럽고도 복잡한 빛에 물든 채로 미소 지었다. 하얀 피부와 대조적인 붉은 입술이 매끈한 호를 그렸다. 경우에 따라서는 색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아니었다.


“그럼 오늘 나랑 자자.”


켁, 유진희의 기도가 물방울을 뱉어내며 간신히 숨을 토했다. 세준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이데아의 붕괴가 왔다. 일단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고, 묵직한 숨이 식도에 걸린 기분이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세준은 생각지도 못한 여자에게 그런 제안을 받았을 때 할 수 있는 몇 가지 일을 시작했다. 첫째 팔짱을 낀다, 둘째, 숨을 조용히 뱉는다, 셋째, 지금 모두가 제정신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넷째 좀 더 논리적으로 분석해 본다.


분석 결과, 두 가지 정답이 나왔다.

하나는 직관적인 답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였다.


두 번째 답은 보다 자기성찰에 가까우면서도 논리적이다. 바로, 내가 성실히 개를 잡아준다고 해서 당신과 자고 싶다는 건 아니지, 였다.


작가의말

P.S 빨래가 하루 종일!!!!

이건 뭐..ㅠㅠ 다음편 올린다고 급급하군요. 좋지 않아요, 이런 거..ㅠㅠ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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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기록 _ 14.11.10 수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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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36 온연두콩
    작성일
    14.09.21 01:13
    No. 1

    다음편 올라오는거 저는 좋아요^^
    근데 계영씨가 한 말의 의미가 그게 맞아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더마냐
    작성일
    14.09.21 08:03
    No. 2

    하 하 하
    같이 자자 니......
    그게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라 짐작을 하면서도 참.. 묘한 기대를 하게 되는 사람의 심리가 이상하네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마니
    작성일
    14.09.21 17:31
    No. 3

    저런 말을 들으면 아닌 줄 알아도 심장이 덜컥 하긴 하겠네요. ㅎㅎ
    그런데 계영씨, 세준이 몇 분동안 멘탈 붕괴되어서 팔짱 끼고 있는 걸 해명도 안 하고 내버려 뒀단 말이지. 사악해요. >_<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젤라
    작성일
    14.12.10 18:36
    No. 4

    또다시 계영이 뭔가 깨달았군요 ㅎㅎ 하지만 그걸 저런식으로 표현하는건...ㅋ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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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6) +5 14.12.18 592 13 14쪽
33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5) +10 14.12.15 730 12 23쪽
32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4) +11 14.12.09 675 11 32쪽
31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3) +7 14.12.03 638 11 13쪽
30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2) +7 14.11.30 702 9 19쪽
29 Episode 03 그때 당신이 통화했던 사람(The Phone) (1) +7 14.11.30 616 9 7쪽
28 Episode 02 웃는 인형 (완결) +10 14.11.10 904 11 27쪽
27 Episode 02 웃는 인형 (13) +6 14.10.18 557 15 19쪽
26 Episode 02 웃는 인형 (12) +15 14.09.30 787 16 26쪽
25 Episode 02 웃는 인형 (11) +9 14.09.29 765 13 26쪽
24 Episode 02 웃는 인형 (10) +7 14.09.27 804 21 10쪽
23 Episode 02 웃는 인형 (9) +6 14.09.26 624 12 9쪽
22 Episode 02 웃는 인형 (8) +9 14.09.25 754 12 26쪽
21 Episode 02 웃는 인형 (7) +4 14.09.24 616 17 25쪽
20 Episode 02 웃는 인형 (6) +4 14.09.23 690 15 18쪽
19 Episode 02 웃는 인형 (5) +4 14.09.22 683 16 10쪽
» Episode 02 웃는 인형 (4) +4 14.09.20 818 15 21쪽
17 Episode 02 웃는 인형 (3) +6 14.09.19 649 17 18쪽
16 Episode 02 웃는 인형 (2) +4 14.09.18 667 14 19쪽
15 Episode 02 웃는 인형 (1) +7 14.09.17 1,265 23 11쪽
14 Episode 01 빨간 드레스 (완결) +6 14.09.17 591 16 3쪽
13 Episode 01 빨간 드레스 (13) +7 14.09.16 637 17 25쪽
12 Episode 01 빨간 드레스 (12) +8 14.09.15 575 15 20쪽
11 Episode 01 빨간 드레스 (11) +9 14.09.13 561 17 22쪽
10 Episode 01 빨간 드레스 (10) +5 14.09.12 545 17 18쪽
9 Episode 01 빨간 드레스 (9) +8 14.09.11 515 14 17쪽
8 Episode 01 빨간 드레스 (8) +9 14.09.10 718 14 10쪽
7 Episode 01 빨간 드레스 (7) +5 14.08.03 818 15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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