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을 듣다
파라몬트 제국의 한적한 해안가.
오늘도 빌레트 공작은 먼 바다를 보며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저 멀리에서 파나트 남작이 다가왔다.
“형님. 오늘은 수업이 없으신가 봅니다? 마법학교 교장님이 이렇게 한적하게 계셔도 되는 겁니까? 하하하.”
빌레트 공작은 비록 마법을 직접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과거 대륙 최고 마법사로서의 지식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파라몬트 제국의 마법학교 교장직 제안을 받았고, 결국 수락하게 된 것이다.
“교장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뭐 하는게 있나? 그저 가끔 물어오는 교수들의 질문에 답해주는 것 말고는 말일세.”
파나트 남작은 새로 가져온 와인을 꺼내어 들었다.
“오늘도 그 싸구려 와인을 또 드십니까? 그러다 몸 상합니다. 여기 좋은 걸 가져왔으니 이걸로.”
파나트 남작은 와인을 한잔 더 따라주었다.
빌레트 공작은 와인잔을 받으며 물었다.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겐가?”
“제 얼굴에 써 있습니까? 하하하.”
파나트 남작은 웃으며 자신도 와인을 한잔 따라 마셨다.
“사실은 이번에 큰 사업을 하나 벌여보려고 합니다. 대량 무역이죠. 북쪽으로 신성제국이 들어서면서 농사가 어려워지지 않았습니까? 마족놈들이 농사에 관심이 없으니. 그래서 자연히 우리 제국에도 식량이 점차 부족해졌다고 합니다.”
“그런가? 그건 몰랐네만.”
“매일 이렇게 바다만 바라보고 계시니..... 아무튼 말입니다. 북쪽에는 바알신성제국만이 아니죠. 동쪽 대수림을 넘으면 칼레스 제국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번에 칼레스 제국에서 밀을 대량으로 수입해보려고 합니다.”
“그렇군. 그런데 내가 그 무역에 무슨 힘이 되어 줄 수 있겠나?”
“뭐, 형님이 직접 하실건 없지만. 학교에서 교수나 학생들 가운데 빠릿빠릿한 마법사들을 추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역을 위한 상단을 조직해야 하거든요.”
“그거라면 용병들을 쓰면 되는거 아닌가? 상단이 보유한 호위들도 있을테고.”
“물론 용병이나 상단의 호위들도 함께 가죠. 하지만 규모가 규모이니 만큼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도 함께 해준다면 더 안전할거라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족들 때문에 식량이 부족해지자 여기저기 도적떼들이 극성이거든요.”
빌레트 공작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 웃으며 말했다.
“알겠네. 자네 부탁인데 내가 뭔들 못해주겠나. 상단 호위를 하는 것은 학생은 힘들 것 같네만. 아마 교수가운데 지원하는 사람이 있을걸세. 학교에 가는대로 상단 호위가 가능한 인재를 추천해보겠네.”
“형님. 감사합니다. 하하하. 오늘따라 와인 맛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파나트 남작은 고민이 해결된 듯 웃으며 연신 와인을 들이켰다.
빌레트 공작 역시 와인잔을 기울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야기가 끝나자 곧바로 마법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마법학교 교장실에 도착한 빌레트 공작은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이봐. 조엘 교수를 불러주게나.”
“알겠습니다. 그런데 교장님. 새로운 교수 지원자가 있습니다. 면담을 기다리는 중인데 한번 만나보시겠습니까?”
“교수 지워자? 그거 잘 되었군. 모두 데려오게나. 조엘 교수와 교수 지원자 모두 말일세.”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교수 지원자에 대한 이력서, 그리고 이건 정보기관으로부터 건네받은 신상조사서입니다.”
빌레트 공작은 정보기관의 인장으로 밀봉되어 있는 서류를 건네 받았다.
하인이 나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빌레트 공작을 찾았다.
조엘이 먼저 인사했다.
“교장님. 부르셨나요?”
“그래! 조엘 교수. 오랜만이군. 그러면 이쪽이?”
빌레트 공작은 함께 온 사내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 사내는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마법학교 교수로 지원하게 된 프리시스입니다.”
빌레트 공작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 반갑네. 오늘 이렇게 두 사람을 같이 부르게 된 이유가 있네. 먼저 프리리스? 자네는 무슨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가?”
“저는 화염 마법에 익숙합니다.”
“그거 잘 되었군. 조엘 교수? 자네도 화염계 마법사이지 않은가?”
조엘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다른 마법들도 할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화염 마법이 익숙하고, 그래서 수업도 화염마법에 대해 진행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거 잘 되었군. 우선 조엘 교수. 자네에게 임무가 있네.”
조엘은 놀라며 물었다.
“임무라고요?”
“그렇지. 임무. 교수의 여러 의무 가운데 수업을 제외하고도 특수 임무가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조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제국에서 대규모 무역을 계획중이라고 하네. 그래서 말인데 무역에 대한 호위 요청이 들어왔다네.”
“하, 하지만. 저는 이번학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 수업! 그건 여기 프리시스 교수가 새로 담당할 수 있을 것 같네만.”
교장의 말에 프리시스 역시 놀라며 물었다.
“저, 그러면 교수직은 합격한 겁니까?”
빌레트 공작은 웃으며 답했다.
“그렇다네. 뭐 문제라고 있나?”
프리시스는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아, 아니, 그렇다고 해도 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실텐데......”
“그게 중요한가? 자네에 대해서는 모두 알고 있다네. 파라몬트 제국의 정보력을 무시하지 말게나. 모든 것을 말일세. 허허허.”
넉살좋게 웃고 있는 빌레트 공작과는 달리, 프리시스는 순간 사색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다니!
“그런데도 교수직을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왜. 그러면 안되나?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충분하다고 보네만.”
그때 프리시스는 조엘을 향해 윙크를 하며 말했다.
“저도 이제 교수란 말씀이시죠? 그렇다면 제가 무역 상단의 호위를 나가도 문제없는 것 아닙니까?”
“그건 맞네만. 학교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임무를 나가겠다는 말인가? 힘들 텐데?”
“저야 원래 야전에서 구르던 사람이니. 그 정도는 그리 힘든 일은 아닙니다.”
“뭐, 자네가 그렇게만 해준다면야. 조엘교수는 여기 새로온 프리시스 교수에게 잘 해줘야겠구만. 껄껄껄. 그럼 조엘교수는 돌아가도 좋네. 나는 프리시스 교수와 조금 더 할 이야기가 있으니.”
조엘은 인사를 한 후 교장실을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빌레트 공작은 와인을 따라주며 프리시스에게 말했다.
“이제 둘만 남았으니 이야기 해 보게나. 자네에게 궁금한 점이 많네.”
“뭐가 궁금하신가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그 가운데 왜 하필 우리 제국이고, 그 가운데서도 왜 우리 학교로 왔느냐가 가장 궁금하다네.”
프리시스는 소파에 눕듯이 기대며 와인을 마셨다.
“교장님께서 저에 대해 아시듯, 저 역시 이 학교, 아니 더 정확이 말하자면 교장님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이 정도라면 대답이 될는지요.”
“나에 대해 알고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예전 미리스 제국의 최고 마법사. 천마제국 이후 천마에게 팔을 잃고 파라몬트 제국으로 망명. 이후 학교장으로 취임. 이런 사소한 것을 제외하고도. 교장님께서 마족에게 복수를 꿈꾸시고 계시다는 것도 말이죠.”
빌레트 공작은 만족한 얼굴로 남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크하하하. 좋아! 마음에 들어! 그래. 그래서 마족의 피가 흐르는 자네가 나를 찾아왔다는 건가? 마족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말씀드리자면 그런 거죠.”
“그래. 그건 그렇고. 이번 호위 임무를 왜 가겠다고 한건가? 처음이고 하니 그냥 수업 교수로 소소하게 시작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텐데.”
“사실 호위 임무는 계획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교장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재밌는 녀석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만 같아서 말이죠.”
“재밌는 녀석들이라고?”
“저에 대해 아신다고 하셨으니, 혹시 제가 왜 마족을 배신했는지에 대해서도 들으셨나요?”
“거기까지는 알지 못하네. 단지 자네가 예전에 어디서 근무했고, 모종의 이유로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것. 그리고 그 이유가 마족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상황 정도까지만 알고 있다네. 그래. 한번 물어보겠네. 왜 마족을 배신한 건가?”
“제 피의 절반은 마족,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인간입니다.”
프리시스는 와인을 한잔 더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인간들도 물론 타 종족을 배척하지만, 마족들은 순혈 마족이 아닌 이상 배척의 정도가 심하더군요. 처음엔 그저 죽기 싫기도 했고, 마법을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장점에 눈이 멀어 마족의 편에 섰는데. 지내다 보니 저는 그저 마족들이 부리는 개 정도로만 여겨지는 것이 몹시도 힘들더군요.”
프리시스는 인간농장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혜택을 빼앗긴데 대한 울분을 느끼며 말했다.
“그러던 와중에 어떤 녀석이 저희 영지를 습격하더군요. 인류해방전선이라던가? 아무튼 거기서 이현수라는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프리시스의 입에서 이현수라는 이름이 나오자 빌레트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 다시 말해보게. 이현수라고?”
“예. 이현수. 혹시 그를 알고 계십니까?”
“그,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혹시 알고 있는가?”
빌레트 공작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느껴졌다.
“브란딜라 영지의 마족 영주인 주베르에게 크게 당하고 쫓기던 것을 제가 구해주었습니다. 이후 힘을 더 키워 마족에게 복수하라고 작은 선물도 주었고 말이죠. 뭐, 사실 크게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부터 살아가면서 마족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씨앗을 뿌린다는 마음으로 그들을 조금이라도 도우며 살아가고 싶어서. 그 첫 번째 씨앗이 바로 이현수였습니다. 이후 어디론가 떠났는데 어디로 갔는지 까지는 알 수 없네요. 저는 그 이후 곧바로 교장님의 흔적을 찾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군. 이제야 만나는가 했더만. 혹시 자네 이현수라는 사내에 대해 알고 있는가?”
“인류해방전선을 이끄는 자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알지 못합니다.”
빌레트 공작의 눈빛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듯 했다.
“그는 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소환된 용사라네. 신탁의 부름을 받고, 마왕을 없애기 위해 소환된 용사. 바로 그자가 이현수라네. 자네의 씨앗은 틀리지 않았어!”
프리시스는 용사라는 말이 나오자 놀라며 물었다.
“용사라면 과거 벨페고르를 소멸시킨 천마라는 사내가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마왕을 소멸시킨건 천마라는 사내였지. 그런데 그를 소환하기 이전에 먼저 소환된 자가 바로 이현수라는 사내였네. 하지만 그는 너무 연약했지. 그래서 수련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가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도 궁금하구만.”
“아직 그리 성장하지는 못한 듯합니다. 고작 변방을 다스리는 마족, 주베르에게 쫓겨나듯 도망쳤으니 말입니다.”
빌레트 공작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허허. 아직도 그렇단 말인가? 신탁에서는 분명 10년의 고행을 통해 마왕을 물리칠 용사로 거듭날 수 있다고 했었는데. 이제 그 10년이 거의 다 되었는데. 아직도 마족 귀족하나에 그렇게 힘들어하더란 말인가.”
“그러니 저희도 또 다른 씨앗을 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아무튼 자네를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네. 나와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자가 하나 더 생겼으니 말일세. 이번 임무 잘 끝내고 또 이야기 해 보세나.”
빌레트 공작은 프리시스와 악수를 한번 한 후 그를 보냈다.
홀로 남게 된 빌레트 공작은 현수에 대한 여러 가지 감정에 연신 와인잔만 기울일 뿐이었다.
연참대전 하드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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