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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긴 토끼님의 서재입니다.

잊혀진 파편, 외로운 용사의 송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귀가긴토끼
작품등록일 :
2023.11.21 17:15
최근연재일 :
2024.01.01 17:24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114
추천수 :
43
글자수 :
257,831

작성
23.12.2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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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라올렛

DUMMY

브란딜라 영지의 영주성.

주베르는 언제나처럼 갓 뽑아낸 신선한 처녀의 피를 천천히 음미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짜증 섞인 목소리로 프리시스에게 물었다.


“보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못 찾은 것인가?”


프리시스는 자신의 실책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답했다.


“영지에서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흥! 어차피 네놈에게는 기대도 안했다. 그나저나 암펠리우스의 종적도 사라졌다던데. 어떻게 된 일이지?”


주베르가 암펠리우스를 언급하자 프리시스는 더 위축되었다.

암펠리우스와 함께 보냈던 마족기사와 듀라한이 모두 죽은 채 발견된 것을 그동안 숨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숨길 수만은 없는 일.


“저, 그, 그게. 암펠리우스와 함께 보냈던 기사들이 모두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어쩌면 암펠리우스도 당한 것이 아닐는지 추측됩니다.”


콰당!


주베르가 프리시스의 복부를 발로 가격하자, 프리시스는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이런 멍청한! 네놈이 무능한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곁에 두고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라. 그까짓 거를 내게 숨겨왔단 말인가!”


주베르는 프리시스의 태도에 격분하며 마시고 있던 피의 잔을 집어던졌다.

벽에 부딪혀 쓰러진 채 피를 흠뻑 뒤집어쓴 프리시스는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주베르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일단 농장에 대한 경계는 계속 강화하거라. 그리고 라올렛을 불러와.”


프리시스는 흠칫 놀라며 명령을 확인했다.


“저, 정녕, 라올렛을 불러오란 말씀이십니까?”


“내게 두 번 말하게 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무능을 뛰어넘어 귀까지 먹어버린 것이냐?”


“아닙니다. 라올렛에게 즉시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프리시스는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프리시스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킬수가 없었다.


“라올렛이라...... 라올렛. 허. 영주님께서 진정 라올렛에게 기대시려는 건가. 조만간 다른곳을 찾아봐야 하는건 아닌지 모르겠어.”


라올렛.

그녀에 대한 소문은 그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라올렛에 대하여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과거 주베르의 여자가 되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생긴데다가 마족의 권능까지 지니고 있던 귀족.

주베르의 주변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았다.

물론 라올렛 역시 미모에서는 그리 빠지는 편은 아니었지만, 경쟁이 너무나도 치열했고, 귀족사회의 장벽이 그녀를 가로막기도 했었다.

이로 인해 내세울 것이 몸뚱이밖에 없던 라올렛으로서는 주베르의 첩 조차도 될 수 없었다.

결국 라올렛은 주베르가 더 이상 여인을 들이지 않겠다고 선언 한 이후, 이를 바득바득 갈며 떠났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프리시스가 알고 있는 라올렛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라올렛이 떠났다는 소문이 들린지 얼마 후, 주베르의 첩들이 하나 둘 큰 사고를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여인은 눈알이 빠져 죽은채 발견되었고, 또 다른 여인은 사지가 잘린채 마을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건의 내막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던 프리시스는 라올렛을 떠올리자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주베르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프리시스는 연락을 위한 의식을 준비했다.

그는 방안에 있던 가장 커다란 초에 불을 붙이고,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가운데 주석잔을 놓은 뒤,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 피를 채웠다.


그러자 주석잔의 핏물에 파문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거 누구신가요? 반쪽이님께서 저를 부르시다니요. 아직도 주베르님의 개로 지내시나요? 호호.”


프리시스의 얼굴에 살짝 분노가 일었으나, 이내 공포가 다시 자리잡았다.


“프리시스입니다. 주베르님의 명을 전합니다. 조만간 한번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라올렛의 목소리가 들떴다.


“정말요? 혹시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영지 내 불순분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쳇! 그럼 그렇지. 알겠어요. 가겠다고 전하세요. 그럼.”


주석잔 피의 파문이 사라졌다.

주베르는 큰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아. 정말이지. 내 명에 못 살겠구만. 나도 뭔가 준비를 해야겠어.”


프리시스는 주석잔의 피를 버렸다.

그리고는 반대편 손바닥을 한 번 더 칼로 그어서 새로운 피를 담았다.


*


브란딜라 영지의 주점 문이 벌컥 열리더니 헤르만이 뛰쳐 들어왔다.


“대장이 왔어요!”


“뭐? 대장이?”


주점에서 낮부터 술을 먹던 용병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데커는 현수보다 다른 이를 먼저 찾았다.


“이봐! 헤르만! 서, 성녀님은? 함께 안 오신건가?”


“아니요? 같이 오셨어요.”


데커는 헤르만을 밀치고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성녀님!”


주점은 둘을 반기려는 사람들로 인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현수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모두 반갑습니다. 그동안 별일 없었죠?”


데커가 대답했다.


“영지에서 마족들이 수상한 사람을 조사하더라고. 그래서 모두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었지. 다행히 모두 잘 있었고.”


“다행이네요. 그러면 이제 영지 인간농장 정화를 시작해봅시다. 이번에도 역시 저와 성녀님, 단 둘만 움직일 거예요. 모두 계속 쥐 죽은 듯이 계셔야 할 겁니다.”


타이렐의 표정이 구겨졌다.


“쳇! 뭐야. 이제껏 숨어있었는데, 대체 언제까지 숨어있으라는 거야? 그럴 거면 해방전선 해체하고 우린 그냥 모두 집에 가도 되는거 아니야?”


현수는 잠시 생각을 하다 답했다.


“여러분은 제 소중한 동료입니다. 여러분이 필요한 시기가 반드시 올 거라 생각해요. 그 전까지 함께 하면서 힘을 키워주신다면...... 언젠가는 정말 큰 도움이 될 날이 분명 생기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수의 말에 많은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마족들의 세상이 되자 용병들의 벌이는 크게 줄었기에, 별다른 할 일도 없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많은 용병들이 그들의 동료, 친구, 연인을 마족에게 잃었기에 복수심이 불타고 있기도 했다.


타이렐은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지만, 별다른 대구를 하지는 않았다.

발라니가 타이렐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대장. 한 보름정도 어딜 다녀온 거야?”


현수가 웃으며 짧게 답했다.


“사피아 산맥 미궁.”


그 소리에 모두가 놀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타이렐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지며 물었다.


“거, 거기. 혹시 마왕이 나왔던 곳. 맞지?”


“응. 맞아. 거기야.”


“거길 왜 간 거야? 미쳤어?”


“솔직히 지금생각해보면 조금 미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땐 정말 암담했거든.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든 방법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방법?”


“성녀님이 뜻하지 않게 축복의 권능이 더 강해졌단 말이지. 그러니 인간농장의 우물과 주변 땅에 축복을 걸어주면? 과연 축복의 여인들로부터 뽑아간 생명력을 어떻게 할지, 마족들의 반응이 너무 기대된단 말이야.”


현수는 미궁에서 석상을 상대했던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성녀에게로 이미 충분했다.

타이렐이 다시 물었다.


“대체 어떻게 미궁에서 성녀님의 축복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거지?”


“뭐,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어쨌든 기연을 만났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게 성녀님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현수는 아무나 강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듯, 성녀였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설명했다.

타이렐을 비롯한 나머지 용병들은 의외로 현수의 말을 순순히 믿는 눈치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줄어들 무렵 현수가 말했다.


“자. 그러니까 나랑 성녀님은 내일 농장으로 갑니다. 그때까지 다들 조용히, 그리고 쥐 죽은 듯이. 알겠죠?”


용병들의 대답을 뒤로하며 현수는 성녀와 주점을 나섰다.


“아이오네님. 내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해요. 위험할지도 모를 일에 덜컥 끌어들여서.”


아이오네가 웃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이렇게라도 신의 말씀을 전할 수 있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현수는 이제 시간만 지나면 마족들의 인간농장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없앨 수 있다는 생각에 연신 웃으며 숙소로 돌아갔다.


<크크크. 너무 자만하는거 아니야? 성녀 하나로 마왕과의 전쟁에서 벌써 이긴 것 같은 마음인 것 같은데 말이야.>


현수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에 발끈했다.


‘그럼! 마왕에게 지금 당장 이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인간농장이라는 것을 통해 그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게 되었는데. 너 같으면 안 기쁘겠냐?’


<두고 볼 일이지. 크크크.>


현수는 천성이 마왕인 벨페고르와 이런 문제로 언쟁하는 것이 피곤한 듯 대꾸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동쪽 산 너머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

푸르스름한 미명에 온 세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간.


헤르만은 언제나 가장 늦게 잠들고, 이른 새벽 가장 먼저 일어났다.

무력이나 기타 재주가 없던 그였기에, 오로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부지런함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부지런함 때문에 마을과 동료들의 경계임무를 자연스레 떠 맏게 되자, 헤르만의 부지런함은 이전보다 더 커졌다.

오늘도 헤르만은 졸린 눈을 비비며 동료들의 숙소를 한번씩 점검했다.

가끔 술을 진탕 먹은채 여기저기 누워 있는 동료들을 챙겨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동료들을 챙기던 헤르만은 갑자기 깜짝 놀라며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그러다 문득 현수를 떠올리고는 재빨리 현수의 방으로 달렸다.


쾅! 쾅! 쾅!


“대장! 대장!”


오랜만에 찾아온 자기 방에서 한껏 달콤한 새벽잠을 즐기던 현수는 살짝 짜증섞인 목소리를 냈다.


“우웅...... 누구야. 새벽부터.”


“크, 큰일이야!”


“아! 헤르만? 무슨 큰일인데? 벨제붑이라도 쳐들어온 거야?”


“그, 그런가봐!”


“뭐!”


현수의 졸린눈이 번쩍 뜨였다.

침대에서 일어난 현수는 재빨리 옷을 챙겨 입으며 물었다.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해봐.”


“서, 성녀님이 사라졌어!”


진짜 마족이라도 쳐들어 온 것이라 생각했던 현수는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에이. 뭐야. 겨우 그거였어? 아이오네는 언제나 새벽기도를 위해 일찍 일어나서 나간다고.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태양신께 기도드리기 위해서 말이야.”


하지만 헤르만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 새벽 정찰을 위해 방을 나서는데 성녀님의 방문이 열려있었어. 그래서 들여다봤는데. 글쎄. 온통 난장판에 핏자국까지 있었어. 난 그걸 발견하고 바로 여기로 뛰어 온거고.”


현수는 온몸의 털이 솟구쳤다.


“진짜 마족인가?”


헤르만은 현수에게 찢어진 아이오네의 옷자락과 마족들이 주로 사영하는 독침을 건넸다.


“이거. 성녀님의 방에서 찾은 거야.”


현수는 하필 오늘 인간농장을 정화하려는 찰나에, 성녀가 사라진 것에 대해 마족의 짓임을 확신하며 말했다.


“헤르만. 일단 다들 준비시켜.”


현수는 조용히 검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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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검은 그림자들 23.12.30 7 0 12쪽
46 칼레스 제국 23.12.29 8 0 11쪽
45 소식을 듣다 23.12.28 7 0 12쪽
44 마법의 배낭 23.12.28 7 0 11쪽
43 새로운 목표 23.12.27 5 0 11쪽
42 반복된 상실 23.12.27 7 1 11쪽
41 주베르의 권능 23.12.26 6 1 11쪽
40 기사단장 일리예프 23.12.26 7 1 11쪽
39 정예기사 슈르딘 23.12.25 8 1 11쪽
38 출정 23.12.25 8 1 11쪽
» 라올렛 23.12.23 10 1 11쪽
36 수확 23.12.22 10 1 12쪽
35 수련 23.12.22 11 1 11쪽
34 니가 왜 거기서 또 나와? 23.12.21 10 1 12쪽
33 불덩이들 23.12.20 9 1 12쪽
32 재회 23.12.20 10 1 11쪽
31 내 촉은 정확하단 말이야! 23.12.19 14 1 12쪽
30 황금빛 승리 23.12.19 11 1 11쪽
29 괜찮은건가? 23.12.18 12 1 11쪽
28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할 뿐! 23.12.18 11 1 11쪽
27 지옥의 사냥개 23.12.16 11 1 11쪽
26 가긴 어딜가려고! 23.12.16 11 1 11쪽
25 거기 누구 있어요? 23.12.16 9 1 11쪽
24 그놈들 때문이었네 23.12.16 9 1 11쪽
23 가늘고 길게 먹기 23.12.15 16 1 11쪽
22 천지개벽 23.12.14 15 1 11쪽
21 사술 23.12.14 17 1 11쪽
20 모두 모였다! 23.12.14 17 1 11쪽
19 의문의 기사들 23.12.13 18 1 11쪽
18 미궁 23.12.12 19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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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올리비아. 고멘네(ごめんね) 23.12.09 21 1 12쪽
15 거기가 어디야? 23.12.08 22 1 14쪽
14 천마의 빛나는 눈 23.12.08 24 1 12쪽
13 승천하는 광대 23.12.08 25 1 12쪽
12 뭐, 그래도 나쁘진 않네. 23.12.08 22 0 13쪽
11 용사에게 가장 친절한 존재 23.12.08 25 1 12쪽
10 용사! 광대 등극! 23.12.07 27 1 13쪽
9 용사님! 대체 어디에 계신가요! 23.12.06 34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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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쿠만! 진행시켜! 23.11.21 66 1 13쪽
2 여전히 남아있는 이세계의 로망? 23.11.21 98 2 12쪽
1 비록 특전은 없지만, 나쁘지 않을지도? 23.11.21 206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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